숙종실록 59권, 숙종 43년 2월 29일 갑인 1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문원공 김장생을 문묘에 배향토록 명하다
숙종 | 43 | 1717 | 정유 | 康熙 | 56 | - | 5월, 文廟에 從祀되다. |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라고 명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조겸빈(趙謙彬)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군(人君)이 일에 임하여 청단(聽斷)하는 도리는 그 말이 따를 만하면 곧 청종(聽從)하고 망설이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일이 결단할 만하다면 곧 단행하여 오래 버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국론이 귀일(歸一)되었는지를 살피고, 또 향례(享禮)가 마땅한지를 살피고 나서 흔쾌하게 따르고 빨리 결단하는 것이 천둥이 격렬하고 바람이 나는 듯이 한다면 어찌 성주(聖主)의 명정(明政)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문원공 김장생은 동방의 대현(大賢)이고 아조(我朝)의 유종(儒宗)으로서, 성혼(成渾)·이이(李珥)를 이어서 집대성하고 정자(程子)·주자를 이어서 도통을 전하였으므로, 여러 조정의 예우(禮遇)를 받고 한 세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현신(賢臣)과 함께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고 사전(祀典)을 나란히 벌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팔도에서 합사(合辭)하고 관학(館學)에서 소리를 같이하여 전후의 선비들이 해마다 부지런히 청한 지 이제 40년이 되어 갑니다. 우리 성명(聖明)께서 이미 선정의 도덕이 종사(從祀)하는 은전(恩典)에 합당함을 환히 아시나, 다만 신중히 하는 것이 지나치기 때문에 유음(兪音)을 아직 내리지 않으시니, 사림(士林)이 답답하게 여기는 것이 오래 갈수록 더욱 절실합니다. 지난번 윤현(尹俔) 등이 전에 청한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비지(批旨)가 온순(溫諄)하고 수작이 메아리가 울리듯 하여, ‘내가 바야흐로 잠자코 있는 가운데 마음에 깨닫는 바가 있다.’고 하교하시기에 이르셨으므로, 온 나라 안의 선비들이 모두 용동(聳動)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욕례(縟禮)의 거행을 얼마 안 가서 보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이 다행하고 성덕(聖德)이 매우 빛나는 때입니다. 바라건대, 흔쾌하게 명명(明命)을 내리셔서 빨리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사문을 행복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어진이를 높이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일전에 여섯 도의 유생의 상소에 비답(批荅)한 가운데에 말한 것은 진실로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까지 망설이던 것과 매우 달랐다. 이튿날 조겸빈 등이 다시 상소하여 성대한 전례를 빨리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선정의 도덕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망설인 것은 대개 신중히 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합사하여 같은 목소리로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 것이 수십 년이 되었고 매우 간절하니, 공의(公議)가 있음을 대개 알 수 있다. 온천에 가서 제사하는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므로 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한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성대한 전례를 빨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5월 20일을 배향하는 길일(吉日)로 가리고, 또 하루 전에 대성전(大聖殿)에 고유(告由)하고, 본가(本家)에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교서(敎書)를 내리게 하고, 또 종사한 이튿날에 팔방에 반교(頒敎)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구제(舊制)에 따른 것인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甲寅/命配享文元公 金長生於文廟。 太學生趙謙彬等上疏。 略曰:
人君臨事聽斷之道, 其言可從, 則宜卽聽從, 不當留難, 其事可斷, 則卽宜斷行, 不當持久。 旣審國言之歸一, 且審享禮之允當, 而夬從亟斷, 如雷厲風飛, 豈非聖主之明政也? 竊伏念先正臣文元公 金長生, 東方之大賢, 而我朝之儒宗, 繼成、李而集大成, 承程、朱而傳道統, 被累朝之禮遇, 爲一世之誦法, 則宜與兩賢臣, 從享聖廡, 竝列祀典。 八路合辭, 館學齊聲, 前後章甫, 逐歲勤請者, 今將四十年于玆。 惟我聖明, 旣已洞悉先正道德之允合從祀之典, 而只緣過於愼重, 兪音尙閟, 士林之抑鬱, 久而愈切。 乃者尹俔等, 復申前請, 而批旨溫諄, 酬酢如響, 至以予方默會于心爲敎, 擧國之士, 莫不聳動。 縟禮之擧, 將不日而見, 此誠斯文幸會聖德冞光之時。 伏願夬賜明命, 亟擧盛典, 以幸斯文。
上答曰: "尊賢之誠, 深用嘉尙。 日昨六道儒生疏批中所云, 意固有在, 殊異於向來留難矣。" 翌日, 謙彬等復疏乞亟擧縟典, 上答曰: "先正道德, 予豈不知? 尙此留難, 蓋出於愼重, 而中外章甫, 合辭同聲, 文廟腏食之請, 累十年而彌懇, 則公議所在, 槪可見矣。 不必待臨溫致祭之日, 故特允所請。 其令禮官, 亟擧縟典焉。" 禮曹推擇五月二十日, 爲配享吉日, 又請前一日, 告由於大成殿, 遣禮官賜祭及敎書於本家, 又於從祀翌日, 頒敎八方, 蓋舊制也。 上可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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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오재집(玉吾齋集) 송상기(宋相琦)생년1657년(효종 8)몰년1723년(경종 3)자옥여(玉汝)호옥오재(玉吾齋)본관은진(恩津)시호문정(文貞)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문인
玉吾齋集卷之十二 / 敎書 / 敎贈領議政文元公金長生從祀文廟書
王若曰。人君之表章正學。所以定士趨。聖廟之陞躋先賢。所以明道統。縟禮將擧。公議僉同。予惟本朝。治尙儒術。學校庠序之大備。久道化成。聰明豪傑之相望。名世繼出。猗人文之極盛。逮宣廟而尤隆。惟卿早歲志學。大賢爲師。言其宏深。則地負海涵之氣象。語其篤實。則人一己百之工夫。始自切問而近思。終焉下學而上達。性命精微之蘊。洞見大原。理氣先後之分。益闡遺旨。年彌高而德卲。體旣立而用行。探討講論之功。風動乎遠邇。玩賾沉潛之效。日造乎高明。以至奧禮疑文。亦多毫分縷析。吉凶常變。靡不折衷羣言。鉅細尊卑。擧皆沾被嘉惠。巍然山斗之一世。皎若日星於昬衢。肆勤聖祖之招延。俾作國人之矜式。正心誠意之學。格君是先。天德王道之要。爲國何有。嗟抱負之未究。尙典刑之斯存。菽粟之味布帛之文。莫云知貴者鮮。江漢以濯秋陽以曝。可見慕德之深。孔門四科。德行居十哲之首。曾氏三省。忠恕得一貫之傳。其功則繼往開來。其化則範世敦俗。英才樂育。鉅儒多出於門墻。正道大明。後學咸仰於標準。奚但一邦之誦法。抑亦百代之師宗。雖貤贈無以復加。而崇報未稱其實。顧聖廡從享之禮。咸曰其宜。盖文正致隆之論。豈阿所好。輿情久菀於三紀。衆籲彌亟於八方。不待廷議之博詢。已有予志之先蔽。誣賢醜正之習。於彼何誅。衛道崇儒之誠。在今當盡。玆以卿從祀于文廟之廡。統緖相承於前哲。位序差次於文成。弄月吟風。依然石潭之函丈。升堂入室。怳如杏壇之攝齊。非盛德孰能與焉。殆天意若或相者。光儀莫接。幾恨難起於丘原。享祀長存。更命不祧於家廟。于以彰明聖化。于以慰答衆心。於戱。功大者其報必隆。德厚者其及必遠。英靈默佑。庶致國脉之延長。文敎蔚興。佇見世道之亨泰。故玆敎示。想宜知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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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吾齋集 卷十二 / 頒敎文 / 贈領議政文元公 金長生從祀文廟頒敎文
王若曰:天生名世之眞儒,統緖旣承於前哲;國有從祀之盛典,腏食新擧於泮宮。式循輿論,庸申誕告。
予惟聖廟之俎豆,實爲道學之淵源,親炙私淑之賢,禮固宜於咸秩;受業傳道之士,功不廢於一經。迨我列聖之相承,乃有群賢之輩出,右文興化,寔賴培養之方;啓後光前,大贊休明之治。斯天意之可見,故吾道之長存。
睠玆哲人,生際煕運,服膺賢師之旨訣,切問近思;潛心聖學之根源,博文約禮。惟其眞知而實踐,是以德成而道尊,瑞日和風,萬物煕融,堪比氣像之渾厚;蠶絲牛毛,衆理昭晣,自臻造詣之崇深。以弘毅醇篤之姿,有充實光輝之美,沈潛理窟之旣久,考究禮家之尤詳,古今損益之宜,斟酌得正;吉凶常變之節,會通靡遺,質諸聖賢而無疑,言其本末則具備。
關中諸子,競就禮敎之橫渠;洙泗正傳,終歸質魯之曾氏,年彌高而望若山斗,跡雖退而化被家邦。聞風覿德之流,無大小而咸仰,淑世正俗之效,豈存歿之有殊?奚但文獻之足徵?抑亦功烈之莫尙。授受端的,親承文成之嫡傳;規模謹嚴,上接考亭之正脈。肆文廟從享之議,卽擧國公共之辭,靳群請之一兪,始緣愼重之意,覽遺編而三復,益切尊尙之懷。比漢儒箋註之功,此爲大矣,置孔門羽翼之列,孰敢間然?矧當士趨之多岐,宜明斯道之一統,崇報表章之擧,寔惟在予;鼓舞振作之方,亦將由是。豈容一人之私意?亶爲百世之定論。
玆於本月二十日,以贈領議政文元公 金長生,從祀于文廟西廡。於戲!儒先之道術增光,國家之元氣自壯。羹墻江、漢,慰多士無窮之思;《棫樸》、《菁莪》,期一世丕變之化。故玆敎示,想宜知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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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吾齋集 卷十二 / 敎書 / 敎贈領議政文元公 金長生從祀文廟書
王若曰:人君之表章正學,所以定士趨;聖廟之陞躋先賢,所以明道統。縟禮將擧,公議僉同。予惟本朝,治尙儒術,學校庠序之大備,文道化成;聰明豪傑之相望,名世繼出。猗人文之極盛,逮宣廟而尤隆。
惟卿早歲志學,大賢爲師,言其宏深,則地負海涵之氣象;語其篤實,則人一己百之工夫。始自切問而近思,終焉下學而上達,性命精微之蘊,洞見大原;理氣先後之分,益闡遺旨。年彌高而德卲,體旣立而用行,探討講論之功,風動乎遠邇;玩賾沈潛之效,日造乎高明,以至奧禮疑文,亦多毫分縷析。吉凶常變,靡不折衷群言;鉅細尊卑,擧皆沾被嘉惠,巍然山斗之一世,皎若日星於昬衢。肆勤聖祖之招延,俾作國人之矜式,正心誠意之學,格君是先;天德王道之要,爲國何有?
嗟!抱負之未究,尙典刑之斯存,菽粟之味,布帛之文,莫云知貴者鮮。江、漢以濯,秋陽以曝,可見慕德之深。孔門四科,德行居十哲之首;曾氏三省,忠恕得一貫之傳,其功則繼往開來,其化則範世敦俗。英才樂育,鉅儒多出於門墻;正道大明,後學咸仰於標準,奚但一邦之誦法?抑亦百代之師宗。雖貤贈無以復加,而崇報未稱其實。顧聖廡從享之禮,咸曰‘其宜’,蓋文正致隆之論,豈阿所好?輿情久菀於三紀,衆籲彌亟於八方,不待廷議之博詢,已有予志之先蔽,誣賢醜正之習,於彼何誅?衛道崇儒之誠,在今當盡。
玆以卿從祀于文廟之廡,統緖相承於前哲,位序差次於文成。弄月吟風,依然石潭之函丈;升堂入室,怳如杏壇之攝齊,非盛德,孰能與焉?殆天意若或相者。光儀莫接,幾恨難起於丘原?享祀長存,更命不祧於家廟,于以彰明聖化,于以慰答衆心。
於戲!功大者其報必隆,德厚者其及必遠。英靈默佑,庶致國脈之延長;文敎蔚興,佇見世道之亨泰。故玆敎示,想宜知悉。
[주-D001] 文 : 底本에는 “久”. 《肅宗實錄》 43年 5月 18日(辛未) 기사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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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9권, 숙종 43년 5월 18일 신미 2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증 영의정 문원공 김장생에 관한 유고문
승지(承旨) 이성조(李聖肇)를 보내어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사당에 유고(諭告)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임금이 정학(正學)을 표창하는 것은 선비의 추향을 정하기 위함이고, 성묘(聖廟)에 선현(先賢)을 올리는 것은 도통(道統)을 밝히기 위함인데, 욕례(縟禮)를 거행하려 하니, 공론이 다 같았다. 내가 생각하건대, 본조(本朝)에서는 치도(治道)에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학교(學校)·상서(庠序)를 크게 갖추니, 문도(文道)가 개선되어 총명(聰明)한 호걸(豪傑)이 잇달았고 명세(名世)가 이어 나왔는데, 인문(人文)의 극성(極盛)을 더한 것은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였다. 경(卿)을 생각하건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대현(大賢)에게 배우니, 그 넓고 깊은 것으로 말하면 땅이 만물을 지고 바다가 만물을 적시는 기상이고, 그 독실함을 말하면 남보다 백배 힘쓰는 공부이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간절히 물어서 근사(近思)하다가, 마침내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워서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니, 성명(性命)의 정미(精微)한 온오(蘊奧)가 큰 근본을 환히 알고 이기(理氣)의 선후(先後)하는 분별은 끼친 뜻을 더욱 밝혔다. 나이가 더욱 높아지면서 덕이 밝아지고, 체(體)가 서고 나서는 용(用)이 행해지니, 탐구하고 강론(講論)한 공(功)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감화(感化)되었고, 완책(玩幘)하고 침잠(沈潛)한 보람은 날로 고명(高明)해졌다. 뜻이 깊은 예절과 의심스러운 글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한 것이 많고, 길흉(吉凶)의 상례(常禮)·변례(變禮)에 대해서도 뭇 논설을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사람들이 다 훌륭한 은혜를 입었으니, 한 세상에서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뛰어났으며, 어두운 거리에서 해·별처럼 밝았다. 그래서 성조(聖祖)께서 불러서 나라 사람들의 긍식(矜式)을 삼게 하시니, 정심(正心)·성의(誠意)의 학문은 임금을 바르게 하는 일을 먼저 하였고, 천덕(天德)·왕도(王道)의 요체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아아! 포부를 다하지 못하였어도 전형(典型)은 남아 있으나, 숙속(菽粟)162) 의 맛과 포백(布帛)163) 의 무늬가 귀한 줄 아는 자가 드물다고 말하지 말라. 강수(江水)·한수(漢水)에 빨고 가을 볕에 쬐었다 한 데에서 덕을 사모하는 것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공문(孔門)의 사과(四科)164) 에서는 덕행(德行)이 십철(十哲)165)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증자(曾子)의 삼성(三省)166) 에서는 충서(忠恕)가 일관하여 전해졌으니, 그 공은 옛것을 이어서 뒤를 열었고, 그 교화는 세상에서 표준이 되어 풍속을 투텁게 하였다. 영재(英才)를 즐겨 길러 큰 문하에서 많은 선비가 나왔고, 정도(正道)를 크게 밝혀 후학(後學)이 모두 모범을 우러렀으니, 어찌 한 나라에서만 본받겠는가? 또한 백대(百代)의 사종(師宗)이다. 이증(貤贈)은 다시 더할 수 없는데 숭보(崇報)는 미처 그 실상에 맞지 못하니, 또한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는 예(禮)가 모두 마땅하다고 한다. 대개 문정(文正)167) 이 높인 논의가 어찌 좋아하는 바에 아첨한 것이겠는가? 뭇사람의 뜻이 3기(紀) 동안 답답해 하였고, 뭇사람의 호소가 팔방에서 더욱 조급해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을 널리 묻기 전에 이미 내 뜻이 먼저 정해졌으니, 어진 사람을 무함하고 바른 사람을 헐뜯는 버릇이 그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도(道)를 지키고 유(儒)를 높이는 정성을 지금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을 문묘(文廟)의 곁채에 종사(從祀)하여 통서(統緖)를 전철(前哲)에 잇고, 위서(位序)를 문성(文成)168) 의 다음에 둔다. 음풍농월(吟風弄月)169) 한 것이 의연(依然)함은 석담(石潭)의 함장(函丈)이고, 승당입실(升堂入室)170) 하여 황연(怳然)히 행단(杏壇)171) 에 섭제(攝齊)하였으니 큰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낄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뜻이 선택하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대하지 못하므로 구원(丘原)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향사(享祀)는 길이 보존되므로 가묘(家廟)에서 조천(祧遷)하지 않도록 다시 명하고, 성화(聖化)를 창명(彰明)하여 군심(群心)을 위답(慰答)한다. 아아! 공이 큰 자는 그 보답이 반드시 클 것이고 덕이 두터운 자는 그 미치는 것이 반드시 요원할 것이니, 영령(英靈)이 잠잠히 도우면 국맥(國脈)의 연장을 이룰 것이고, 문교(文敎)가 성하게 일면 세도(世道)의 형태(亨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글을 지었다.
[註 162]숙속(菽粟) : 두류(豆類)와 곡류(穀類). 사람이 상시 먹는 것들을 뜻하는 말.
[註 163]포백(布帛) : 삼베와 비단. 사람이 상시 입는 것들을 뜻하는 말.
[註 164]사과(四科) : 네 과목. 공문의 사과는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
[註 165]십철(十哲) :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10인의 고제(高弟). 곧 안회(顔回)·민연(閔捐)·염경(冉耕)·염옹(冉雍)·재여(宰予)·단목사(端木賜)·염구(冉求)·중유(仲由)·언언(言偃)·복상(卜商).
[註 166]삼성(三省) : 증자(曾子)가 날마다 자신을 반성한 세 가지 일. 곧 "남을 위하여 꾀하되 충심(忠心)을 다하지 않지 않았는가? 벗과 사귀되 성신(誠信)하지 않지 않았는가? 전수(傳授)하는 일에 평소에 강습하지 않아서 함부로 전하지 않았는가?"한 것임.
[註 167]문정(文正) : 송시열(宋時烈)의 시호.
[註 168]문성(文成) : 이이(李珥)의 시호.
[註 169]음풍농월(吟風弄月) : 맑은 바람을 쐬며 시를 읊고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지어 즐겁게 논다는 뜻.
[註 170]승당입실(升堂入室) : 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 학문을 닦으면 심오(深奧)한 경지에 이르게 됨을 비유한 말임.
[註 171]행단(杏壇) : 옛날 공자(孔子)가 사수(泗水)에서 그 제자들을 가르치던 유지(遺趾). 강학(講學)하는 곳을 뜻하는 말로 쓰임.
○遣承旨李聖肇, 諭告于贈領議政文元公 金長生之廟。 其文曰:
王若曰, 人君之表章正學, 所以定士趨; 聖廟之陞躋先賢, 所以明道統。 縟禮將擧, 公議僉同。 予惟本朝, 治尙儒術。 學校、庠序之大備, 文道化成; 聰明豪傑之相望, 名世繼出。 猗人文之極盛, 逮宣廟而尤隆。 惟卿, 早歲志學, 大賢爲師。 言其宏深, 則地負海涵之氣象; 語其篤實, 則人一已百之工夫。 始自切問而近思, 終焉下學而上達。 性命精微之蘊, 洞見大原; 理氣先後之分, 益闡遺旨。 年彌高而德邵, 體旣立而用行。 探討講論之功, 風動乎遠邇; 玩賾沈潛之效, 日造乎高明。 以至奧禮疑文, 亦多毫分縷柝。 吉凶常變, 靡不折衷群言; 鉅細尊卑, 擧皆沾被嘉惠。 巍然山斗於一世, 皎若日星於昏衢。 肆勤聖祖之招延, 俾作國人之矜式。 正心、誠意之學, 格君是先; 天德、王道之要, 爲國何有! 嗟抱負之未究, 尙典刑之斯存。 菽粟之味, 布帛之文, 莫云知貴者鮮; 江漢以濯, 秋陽以曝, 可見慕德之深。 孔門四科, 德行居十哲之首; 曾氏三省, 忠恕得一貫之傳。 其功則繼往開來, 其化則範世敦俗。 英才樂育, 鉅儒多出於門墻; 正道大明, 後學咸仰於標準, 奚但一邦之誦法? 抑亦百代之師宗。 雖貤贈無以復加, 而崇報未稱其實。 顧聖廡從享之禮, 咸曰其宜; 蓋文正致隆之論, 豈阿所好? 輿情久鬱於三紀, 衆籲彌亟於八方。 不待廷議之博詢, 已有予志之先蔽。 誣賢醜正之習, 於彼何誅; 衛道崇儒之誠, 在今當盡。 玆以卿從祀于文廟之廡, 統緖相承於前哲, 位序差次於文成。 弄月吟風, 依然石潭之函丈, 升堂入室, 怳如杏壇之攝齊。 非盛德孰能與焉? 殆天意若或相者。 光儀莫接, 幾恨難起於丘原; 享祀長存, 更命不祧於家廟。 于以彰明聖化, 于以慰答群心。 於戲! 功大者其報必隆, 德厚者其及必遠。 英靈默佑, 庶致國脈之延長; 文敎蔚興, 佇見世道之亨泰。 故玆敎示, 想宜知悉。 大提學宋相琦之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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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9권, 숙종 43년 5월 20일 계유 1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증 영의정 문원공 김장생에 관한 반교문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의 서무(西廡)에 종사(從祀)하고, 팔방에 반교(頒敎)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하늘이 이름 높은 참선비를 내어 통서(統緖)가 이미 전철(前哲)에 이어졌고, 나라에 종사(從祀)하는 성대한 전례(典禮)가 있어 제사가 방금 반궁(泮宮)172) 에서 거행되었으니, 여론에 따라 널리 알린다. 내가 생각하건대, 성묘(聖廟)의 제사는 실로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위한 것이니, 친히 가르침을 받거나 사숙(私淑)한 어진이에 대한 예(禮)는 본디 모두 질서에 따라 다해야 하거니와, 학업을 받고 도(道)를 전한 선비의 공도 한 경서(經書)에만 통달한 이를 폐기하지 않았다. 우리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오며 뭇 어진이가 배출되었는데, 문(文)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킨 것은 참으로 배양(培養)한 방도에 힘입었고, 후학(後學)을 계도(啓導)하고 전철을 빛내어 아름답고 밝은 정치를 크게 도왔으니, 여기에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그러므로 오도(吾道)가 길이 전해졌다. 이 철인(哲人)을 보건대, 성세(盛世)에 나서 현사(賢師)의 깊은 뜻을 잘 지키면서 간절히 물어 자신을 돌이켜 보며 생각하였고, 성학(聖學)의 근원에 마음을 깊이 두어 널리 배워서 예(禮)로 자신을 단속하였는데, 오로지 참으로 안 것이라야 실천하였다. 그래서 덕이 성취되고 도(道)가 높아지니, 상서로운 해와 온화한 바람에 만물이 화평하여 기상이 크고 두터운 데에 이를 수 있었다. 상세하게 뭇 사리가 밝혀져서 조예가 높고 깊은 데에 저절로 이르니, 홍의(弘毅) 순독(醇篤)한 모습에 충실하고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사리를 깊이 생각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예가(禮家)를 고구(考究)한 것이 더욱 상세하였다. 고금에 손익(損益)한 마땅한 것을 참작하여 바른 것을 얻어 길흉(吉凶)의 상례(常禮)·변례(變禮)를 남김없이 모두 통달하니, 성현(聖賢)에게 질정해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다. 그 본말(本末)을 말하면 모두 갖추어져 관중(關中)의 선비들이 예절로 가르치는 횡거(橫渠)173) 에게 앞다투어 나아가고, 수사(洙泗)174) 의 바른 전통이 마침내 질박한 증자(曾子)에게 돌아간 것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높아져서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우러러보았는데, 자취는 물러갔을망정 교화가 나라에 두루 미쳐서 소식을 듣고 덕을 본 무리가 크건 작건 할 것 없이 모두 우러르니, 세상을 맑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은 효험이 어찌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다름이 있겠는가? 어찌 문헌(文獻)을 밝힐 수 있을 뿐이겠는가? 또한 공렬(功烈)이 더욱 높다. 전해 주고받은 것이 명백하여 문성(文成)175) 의 정통을 친히 이어받았고, 규모가 근엄하여 위로 고정(考亭)176) 의 정맥(正脈)을 이었으니, 문묘에 종향(從享)하자는 의논은 온 나라에서 함께 하는 말이었다. 뭇사람의 뜻에 대하여 한 번 윤허를 아낀 것은 처음에 신중히 하는 뜻 때문이었으나, 유편(遺編)을 여러 번 보고 높이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한(漢)나라 선비가 전주(箋注)한 공에 비하여 이것이 더 크니, 공문(孔門)의 우익(羽翼)의 반열에 둔들 누가 감히 비난하겠는가? 더구나 선비의 추향이 여러 가지로 갈라져서 사도(斯道)의 일통(一統)을 밝혀야 할 이때이겠는가? 숭보(崇報)하여 표창하는 일이 진실로 나에게 달려 있고, 고무하여 진작하는 방도도 여기에 말미암을 것이니, 어찌 한 사람의 사사로운 뜻으로 함부로 백세(百世)의 정론(定論)을 삼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달 20일에 증 영의정 문원공 김장생을 문묘의 서무에 종사한다. 아아! 유선(儒先)의 도학(道學)이 더욱 빛나고, 국가의 원기(元氣)가 절로 굳건해지니, 갱장(羹牆)177) ·강한(江漢)은 많은 선비의 끝없는 사모를 위로하고 역복(棫樸)·청아(菁莪)는 한 세상의 크게 변하는 교화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글을 지었다.
[註 172]반궁(泮宮) : 성균관(成均館).
[註 173]횡거(橫渠) : 장재(張載)의 호.
[註 174]수사(洙泗) : 공자가 나고 제자를 가르친 곳.
[註 175]문성(文成) : 이이(李珥)의 시호.
[註 176]고정(考亭) : 주희(朱熹)의 호.
[註 177]갱장(羹牆) : 전왕(前王)을 사모하는 말임. 옛날에 요제(堯帝)가 별세한 후에 순제(舜帝)가 3년 동안을 앙모(仰慕)했는데, 앉으면 요제를 담[牆]안에서 보고, 밥을 먹으면 요제를 국[羹]그릇에서 보았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癸酉/以贈領議政文元公 金長生, 從祀于文廟西廡, 領敎八方。 其文曰:
王若曰, 天生名世之眞儒, 統緖旣承於前哲。 國有從祀之盛典, 醊食新擧於泮宮。 式循輿論, 庸申誕告。 予惟聖廟之俎豆, 實爲道學之淵源。 親炙私淑之賢, 禮固宜於咸秩; 受業傳道之士, 功不廢於一經。 迨我列聖之相承, 乃有群賢之輩出。 右文興化, 寔賴培養之方; 啓後光前, 大贊休明之治。 斯天意之可見, 故吾道之長傳。 眷玆哲人, 生際熙運。 服膺賢師之旨訣, 切問近思; 潛心聖學之根原, 博問約禮。 惟其眞知而實踐, 是以德成而道尊。 瑞日和風, 萬物熙融, 堪比氣象之渾厚; 蠶絲牛毛, 衆理昭晣, 自臻造詣之崇深。 以弘毅醇篤之姿, 有充實光煇之美。 沈潛理窟之旣久, 考究禮家之尤詳。 古今損益之宜, 斟酌得正; 吉凶常變之節, 會通靡遺。 質諸聖賢而無疑, 言其本末則具備。 關中諸子, 競就禮敎之橫渠; 洙泗正傳, 終歸質魯之曾氏。 年彌高而望若山斗, 跡雖退而化被家邦。 聞風覿德之類, 無大小而咸仰; 淑世正俗之效, 豈存歿之有殊? 奚但文獻之足徵? 抑亦功烈之莫尙。 授受端的, 親承文成之嫡傳; 規模謹嚴, 下接考亭之正脈。 肆文廟從享之議, 卽擧國共公之辭。 靳群請之一兪, 始緣愼重之意; 覽遺編而三復, 益切尊尙之懷。 比漢儒箋注之功, 此爲大矣; 置孔門羽翼之列, 孰敢間然? 矧當士趨之多岐, 宜明斯道之一統? 崇報表章之擧, 寔惟在予; 皷舞振作之方, 亦將由是。 豈容一人之私意, 亶爲百世之定論。 玆於本月二十日, 以贈領議政文元公 金長生, 從祀于文廟西廡。 於戲! 儒先之道術增光; 國家之元氣自壯。 羹墻、《江漢》慰多士無窮之思; 《棫樸》、《菁莪》, 期一世丕變之化。 故玆敎示, 想宜知悉。 大提學宋相琦之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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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9권, 숙종 43년 4월 5일 기축 3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진사 이상채가 김장생의 비난 상소를 올려 의주에 정배하다
진사(進士) 이상채(李相采)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묘(文廟)에 승부(陞祔)하여 선성(先聖)에 배식(配食)하는 것은 사문(斯文)의 성대한 전례(典禮)이므로, 진실로 도(道)가 순일(純一)하고 덕이 갖추어져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가 아니면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더욱 떨어져서 변괴가 거듭 일어나고 있는데도 고(故) 참판(參判) 김장생(金長生)을 종사(從祀)하려는 청이 또 일어났습니다. 아아! 김장생은 본래 보통 속류(俗流)로서 음관(蔭官)으로 등용되어 발신(發身)하였는데, 사부(師傅)로 선임할 때에는 청의(淸議)에 지색(枳塞)당하였고, 낭서(郞署)로 의망(擬望)할 때에는 엄교(嚴敎)를 특별히 부지런히 하셨습니다. 80세에 훈귀(勳貴)에 인연하여 차서를 뛰어넘어 재상(宰相)의 반열에 이르러 문득 당세의 은사(隱士)에 억지로 채워졌으나, 문재(文才)가 짧고 견식이 어두워서 보통 서간도 오히려 남들만 못하였습니다. 일생의 사업은 다만 《가례(家禮)》의 분수(分數)에 있었으나, 이른바 《비요(備要)》117) 와 《집람(輯覽)》118) 은 본디 지은 사람이 있었으며, 《의례(疑禮)》119) 라는 글이 본디 하치않은 것인데도 크게 칭찬을 받았으나 혹 경서(經書)의 뜻을 잘못 풀이하거나 그릇된 소견을 섞어 넣었으므로 본디 식자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그 문답한 것은 의장(儀章)의 품식(品式)에 관한 말단과 명물도수(名物度數)에 관한 잗단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천인(天人)·성명(性命)의 본원(本原)과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의 학문에 대하여는 막연하여 그것이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당돌한 향사(鄕社) 또한 참람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성무(聖廡)에 제사하는 줄에 끼어 의논될 만하겠습니까마는, 지난번 조겸빈(趙謙彬)·윤현(尹俔) 등이 도학(道學)의 문자를 모아서 크게 칭찬하였는데, 종이에 가득히 장황한 것이 자가(自家)의 안면(顔面)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으로 사방의 귀를 속이고 한 세상을 속여서 올라서는 안될 곳에 굳이 올리려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일편(一篇)의 정신은 본디 뜻의 소재(所在)가 있고, 김장생은 하나의 효시(嚆矢)일 뿐이니, 신들은 이에 대하여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또 그 소(疏)에 김장생의 원류(源流)를 성대히 말하여 연평(延平)120) ·회암(晦庵)121) 을 끌어대어 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아! 그 원(源)을 논하면 이(理)를 기(氣)로 아는 학문이 선유(先儒)에 배치(背馳)되고, 그 유(流)를 말하면 예(禮)를 무너뜨리고 적통(嫡統)을 어지럽힌 신하로서, 죄가 선조(先朝)에 관계되니, 연평·회암에게도 이러한 병통과 이러한 오류(汚流)가 있었습니까? 아아! 김장생이 평생 동안 존중하고 사사한 자는 주인을 배반한 천얼(賤孽)이고, 친근하여 귀부(歸附)한 자는 어진이를 죽인 거간(巨奸)입니다.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명유(名儒)를 헐뜯어 완전한 사람이 거의 없고, 원통하게 죽은 어진 선비를 근거 없이 더럽혀서 사우(祠宇)를 헐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심술이 이처럼 매우 편벽되고 논의가 이처럼 어그러졌으나, 다만 그 문하에서 심법(心法)을 이어받은 사람이 한때의 큰 권세를 잡았기 때문에 형세에 몰려 흑백이 거꾸로 놓여 혹 창도하고 혹 화답하여 앞뒤가 서로 응하고 차차로 밀어 물리쳐서 마침내 이에 이르렀습니다. 대성인(大聖人)을 제사하는 곳이 얼마나 중대한 곳이며, 여러 제자를 승배(陞配)하는 예(禮)가 얼마나 중대한 예인데, 전하께서는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지 않고 삼사(三司)에 묻지않고, 당세의 비웃음을 당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후세에서 비난하여 조소할 것을 헤아리지 않고, 거둥하여 갑작스러운 때에 서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문득 윤허하셨습니까? 이제부터 저들이 성묘(聖廟)를 마치 사당(私黨)의 원우(院宇)처럼 생각하여 오늘 한 사람을 올리고 내일 한 사람을 올리곤 하여 차례로 탐내어 다시는 꺼리는 것이 없어서 당당한 부자(夫子)의 사당이 한 사당의 뜰이 될 것이니, 통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진사(進士) 양명하(梁命夏)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종사(從祀)는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성도(聖道)의 적통(嫡統)을 이어 사문(斯文)에 큰 공이 있지 않으면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김장생(金長生)은 한낱 자애(自愛)하는 선비일 뿐이고 학문에 뜻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 자품(資稟)이 둔체(鈍滯)하고 식견이 고루(固陋)하여 그 독서(讀書)하고 강학(講學)한 공부에 있어서는 통한 것이 문자에 지나지 않고 본 것이 의리 밖에 없으니, 이제 그 저술한 것에는 전혀 견해(見解)가 없어서 이따금 구어(句語)를 이루지 못한 것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 재주가 이미 도학에 나아가기에는 부족하였으며, 또 세속적인 선비의 학업도 닦으려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예경(禮經)을 공부하여 일생의 가계(家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동(異同)을 고교(考校)하고 잗단 것을 초록(抄錄)하는 것은 궁리(窮理)·치지(致知)하는 것처럼 대단히 힘을 쓰는 것이 아니었으나, 사장(詞章)을 기송(記誦)하는 학문에 견주었으니,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한 대강입니다. 그 평생의 언론이 당습(黨習)에 물드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공평한 기상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말하면 본원(本源)의 병통을 식자가 의심하는데, 이제 김장생에게 편드는 자는 《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 따위 글이 마치 유문(儒門)의 큰 사업인 듯이 말하나, 그 또한 쓸쓸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대부 중에 취하는 자가 있는 것은 다만 상을 당하여 급작스러울 때에 시골의 글이 없는 곳에서 상고하여 열람해 보는 데 편리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제 글을 지을 줄 아는 선비로 하여금 예서(禮書)를 모아서 자료를 찾아 모으고 한두 해 동안 공부하게 한다면 누가 흔쾌히하지 못하겠습니까? 그 수립한 것을 논하면 뛰어난 행실이 없고, 그 학문을 말하면 어리석다는 비평이 있고, 그 전문한 공을 들면 약간의 책 내용을 분류하여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 때문에 배향하는 줄에 올리는 것은 또한 외람되지 않겠습니까? 김장생이 평소에 유자(儒者)로 자처하지 못하고 세상에서도 김장생을 유현(儒賢)으로 처우한 적이 없는데, 이제 좋아하는 바에 아첨하는 논의는 그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차서를 중시하여 받들어 높이려고 마땅히 견주지 않아야 할 곳에 견주었으니, 대개 그 마음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의발(衣鉢)은 전할 것이 없고 연원(淵源)은 비롯되는 바가 없어서 세상에 과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참으로 그 말을 반드시 옳아서 의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셨겠습니까? 아아! 이들의 말이 어찌 믿을 만하겠습니까? 전하께서만 호유(湖儒)가 이상(李翔)을 칭송하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상의 일은 전하께서 친히 보셨어도 감히 찬미하는 말을 만들어 천청(天聽)을 속이고 어지럽혔는데, 더구나 김장생이 죽은 것은 이미 1백 년 가까이 되어 영향이 점점 희미해지고 일의 자취도 징험할 것이 없으니, 터무니 없는 것을 찾아내어 뜻대로 펼쳐서 전하 앞에서 현혹시키는 짓을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두 소가 함께 이르렀는데 정원(政院)에서 처음에는 물리쳤으나, 이상채 등이 또 소 끝에 정원을 헐뜯었으므로 정원에서 계품(啓稟)하여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문원공(文元公)의 도덕과 학문은 내가 존앙(尊仰)하는 바이다. 처분이 이미 정해졌고 성대한 의례가 장차 거행될 것인데, 이상채·양명하 등이 각각 상소해서 한없이 헐뜯어 욕하였으며, 이상채의 소는 지극히 도리에 어그러지니, 일이 통탄스럽기가 무엇인들 이보다 심하겠는가? 이처럼 바른 사람을 해치는 무리는 엄중하게 징계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상채는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고 양명하는 변원(邊遠)에 정배하라. 그리고 이후로 이러한 소장(疏章)은 일체 봉입하지 말라."
하였다. 그래서 이상채를 의주(義州)에 정배하고 양명하를 장흥(長興)에 정배하였다. 이후 지평(持平) 송필항(宋必恒)이 상소하여 이상채의 배소(配所)는 너무 편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다시 경원(慶源)에 정배하고, 형조(刑曹)의 해당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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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等。甞歷觀前代興亡之籍。至於所謂世治則公論行於上。世亂則淸議欝於下。而道之汚隆係焉。國之存亡判焉。未甞不太息流涕。以爲有天下國家者。欲爲興衰撥亂之治。其可不先審夫是非公論之所在乎。一時用舍施措之間。猶尙如此。而况所謂道者。乃天下萬世公共之物。亘古今如一日。而上古聖帝明王。建學立祠。實爲崇儒重道設也。其腏食陞享。惟當一視其道力當否。公論從違而已。尤不可以一毫私意參錯其間。以拂天下後世萬口一辭之公議也决矣。恭惟我主上殿下。臨御以來四十餘年之間。非無願治之誠。右文之志。而是非邪正。未甞分別。好惡與奪。惟意所欲。上不念聖祖之成訓。下不恤公議之所在。雖道德未醇。疵累有謗之類。許隮聖廡。無少留難。此誠有識之所閔惜。士林之所嗟痛。而公議之拂欝。固已久矣。不意今者。又有以故參判臣金長生從祀之命。而不待詢謀僉同。取决於立談造次之間。是殿下視聖廟如過客之傳舍。以俎豆爲勢家之奕棋。欲以右文而終歸於長滛朋之痼弊。名爲興學而適足以致世道之日紊。一之已甚。其可再乎。臣等於此。悼心失圖。相與太息流涕之不足也。何殿下之輕聖廟乃爾。何殿下之不恤公議乃爾。如殿下之不問是非。惟其言而莫余違。則臣等固無可言者。如其見道或未盡。知人或未明。以長生爲可合從祀而有此處分。則是臣等猶有可得而言者。今請先言長生之爲人。然後繼陳公議之不可抑。聖廟之不可輕也。惟殿下留神澄省焉。長生本以凡品庸才。生於形勢之家。非有智術器業可以自見於世。遂從事專門之業。搜尋禮家故事。以備遺忘而資答問。今其平生大事業。有所謂備要問解者。或出於他人之手。或待其賢子之修。而終始意見滯碍。文字短淺。雖詳名物度數之間。率多穿鑿杜撰之失。原其所以。豈但爲言語文字之病哉。誠以其格致無功。心地未明。而於理有所未通。於道有所未聞故也。極其功用。不過爲遐方下邑鄕曲委巷之人倉卒考撿之資。而一番沒見識輩。乃敢籍此揄揚。遂稱大有功於聖門。而遽然濫躋。則實爲萬萬猥越。彼曹褒之漢儀。蕭嵩之開元禮。賀循,庾蔚之之所評隲。多者或至數十百篇。下至高閎,楊復之徒。亦皆有所論著。班班見於禮書。其言之有關於後學。奚亶如長生寂寥數卷殘書比。而上下數千載間。未聞其與論於從祀之列者何哉。豈不以聖廟至重。道學自別。不可以區區纂輯之故。輒擬陞祀也哉。若以我東言之。近世先輩長者。各以所見編集禮書。使綜彙有倫。類例得當。以盡情文之宜。不但如長生之爲者。非止一二。今皆不數也。獨於長生乎汲汲升享。惟恐其或後。則夫誰曰不出於一時光焰之盛。偏黨之私。而雖欲是非之不紊。公議之不激。其可得乎。至於先正臣文純公李滉四七理氣之辨。眞所謂灼見道體。發前聖所未發者。而長生乃以其鈍滯膚淺之見。輒敢阿其所好。祖述李珥無稽之言。侵攻李滉已定之論者。累發於往復文字間。使千古是非。旣明而復晦。則其邪正得失之分。相去甚遠。不啻薰蕕氷炭之不可同器而已也。前旣以一國公共之論。陞祀李滉。則長生之廁其間。不亦傎乎。雷霆雖震。石笋必出。其亦無怪乎公議之愈欝。世道之日棼。而求國無危。不可得也。雖然長生聦明見識。本自低下。其於大源頭極精密處。全未有見。其所以詆斥李滉者。實同矮人之看墻。多見其不知量也。亦何傷於李滉乎。抑臣等所大懼者。又有大於此者何也。昔者王安石餙六藝以文姦言。著邪說以塗耳目。流毒餘烈。迄于數世而未已。及蔡京用事。挾安石以圖身利。幷其子雱而躋之孔庭。是非之顚倒。公議之拂欝。其已極矣。卒之夷狄伺釁。馴致靖康之禍。至今追思。令人扼腕。此楊文靖公時所以當國勢旣去之後。猶必以黜安石之享。爲第一義者也。迺今李珥之學。認氣爲理。認人欲爲天理。振而矜之。偃然自以爲聖人吾不易。然夷考其言。追跡其事。則全沒硏究克治底道理。都是矜能逞快底氣像。其於聖賢溫厚和平修己治人之道。槩乎其未有聞也。自是以來。其徒寔繁。其黨用事。轉相祖述。假僞眩眞。使人心日壞。世道日非。以長生言之則締交朋比。漸染黨習。侵詆異己。矯誣名賢。言論風旨。常落在這一邊。其流之弊。至於宋時烈而極矣。珥以是傳之長生。長生以是傳之時烈。淵源來歷。畢竟以貪權樂禍。貶降君父。爲歸宿究竟地。知禮者固如是乎。有道者固如是乎。當今據要津執國命者。非其子孫。卽其門生。挾李珥以爲祖師。推時烈以爲宗主。而欲重其師承之序。擬長生於不當擬之地。噫。是豈特爲長生地也。惟此數十年來。乾文示警。坤軸屢動。其他變異層疊。憂虞溢目。而此輩曾莫之恤。惟以黨同伐異。爲盤根固結之計。不自知其終歸於前代亂亡之轍。縱此輩無狀。負國家億萬斯年之業。奈何以殿下之明睿。其忍躬駕而隨之耶。臣等思之至此。不覺拊心長吁也。夫道之待人。非假勢力。民之秉彛。好是懿德。苟其人體道成德。有可尊可敬之實。則雖無置錐之地。而人自尊親。不待爵賞而景從。苟其人騖虗張担。爲欺世取寵之資。則雖有席薰天之勢而匹夫難奪。不以威䝱而苟徇。是誠何心哉。誠僞之分也。他事或可以僞爲。至於尊道尙德。其可以外面假借爲哉。是以古之祭於學也。有其人則躋之。無其人則不强躋也。惟其公而已矣。今也不然。惟以一時形勢。苟充其數。有若朝廷官爵承乏補闕者然。夫安有是理哉。皇甫充隱不幸近之。而髣髴禪家一祖二祖三四祖。若此不已。幾何其不至於有三十六祖也。今之論長生者。或摘抉文字病敗。或捃摭言語差失。以爲其一生斷案。臣等之意。以爲不然。自非大賢以上。安得每事盡善。惟其看道理不透。蓄偏私未祛。全無實見實得。則雖有相如子雲之文詞。宰我子貢之言語。擬諸從祀之列。固不倫矣。嗚呼。以常情言之。則巍然一聖廟。何關人事得失。而漢家四百年精神力量。實在於過魯祀孔子之日。晉氏二百年宗社衰亡。已肇於不報修孔廟之失。若是乎聖廟之關人事得失。而能興替人家國也。向所謂汚隆係焉。存亡判焉者。豈不至此而尤信矣乎。臣等俱以嶺外寒賤。蓽門圭竇是守。自非斯文顯晦之幾。國家存亡之故。不宜出位犯分。以取越俎之譏。惟是於仲尼則受罔極之恩。於殿下則被菁莪之化。目見聖廟汚衊。宗國危墜。誠有所不忍默默坐視者。是敢相率褁足。齊聲瀆擾於宸嚴靜攝之中。狂妄之罪。在所難逭。而彼黨人者。方且席累勝之勢。以箝制人爲能事。臣等非不知言發禍隨。而亦念夫古之人忠憤所激。至有爲聖廟露胷受箭者。則一時禍患之來。臣等固有所不暇計也。伏乞殿下小寬威怒。特採蕘言。亟寢金長生從祀文廟之命。仍下敎中外。無復以此等僭猥非分之請。輒干冕旒之下。以幸斯文。以安宗社。千萬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