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는 억울을 먹고 자란다 나는 저녁용 찌개를 위해 양파를 잡는다 도마 위에서 양파는 잘린다 잘린 단면으로 눈물이 떨어진다
그것이 양파의 최선
억울한 사람들은 문을 두드린다 문의 이름을 당기시오
간혹 과열된 이름이 베란다 밑으로 떨어진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저녁이 부엌에서 맛있게 끓여지고 있고 냄새가 난다 죽은 양파 냄새가
나는 도무지 화목한 식탁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커튼을 쳤다 베란다에는 여전히 억울한 사람들이 죽어있고 아무도 밥을 먹을 때 어두운 곳을 쳐다보지 않는다
식사가 멈추고 나는 밥그릇에 붙은 몇 개의 밥알과 씹히지 않는 양파 꼬다리를 싱크대에 헹궈냈다
배수구로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또 다른 양파를 만나면 우리는 그들을 최대한 불쌍하지 않게 바라보았다고 어두운 저녁에도 밝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말해주길 기도했다 이 불온한 식탁에서 죄책감이 자라지 않도록
커튼을 치면 아침이 온다 아침의 이름을 미시오
베란다에서 걱정이 자란다 걱정은 누가 먹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2019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
류휘석 시인 1994년 충남 서산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시 감상
마경덕(시인)
거실과 이웃한 베란다는 집의 내부이면서 외부이다. 문 하나로 차단된 공간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싹이 튼 감자나 시들어가는 양파, 한물간 잡동사니가 모여 있을 것이다. 찌그러지고 짓눌린 것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방치되고 위험한 냄새를 풍긴다. 이때 경계선이 되는 거실 유리문은 집의 치부를 가려주는 암막 커튼이 된다.
류휘석 시인은 생물이나 무생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법을 사용해 베란다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모여있다고 한다. 삶의 바깥에 있는 죽은 사람들 역시 춥고 외로운 곳에서 살고 있다. 베란다로 밀려나 추위에 얼거나 썩어가는 것들도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대상에 화자의 감정이 이입되고 투사(投射) 되어 방치된 양파는 사람과 ‘동일시(同一視)’ 되고 있다.
양파는 억울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흙 한 줌 없이 방치된 양파는 제 살을 깎아 안간힘으로 새순을 내민다. 그것은 양파의 다급한 언어이다. 제발 살려달라는 몸의 마지막 신호일 것이다. 그러나 싹이 나기 시작한 양파부터 도마에 올라간다. 화자 역시 저녁용 찌개를 위해 양파를 잡는다. 도마에 놓인 양파는 칼날에 잘리고 숨겨둔 단면이 드러난다. 이때 양파가 할 수 있는 일은 맵고 독한 기운으로 칼날을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양파의 최선이다. 양파를 죽인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만 양파의 죽음을 애도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도 많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이름들, 보상조차 받지 못한 죽음들은 모두 암막 커튼에 가려져 있다.
“억울한 사람들은 문을 두드린다 문의 이름을 당기시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은 두드리거나 당기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두드리든지 당기든지 무언가를 시도하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당기시오’는 자신의 힘으로 열어야만 한다는 것이니 힘이 없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도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억울한 자들은 사회적 약자들이기에 진위조차 밝히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묻히고 마는 것이다.
간혹 과열된 이름이 베란다 밑으로 떨어진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저녁이
부엌에서 맛있게 끓여지고 있고 냄새가 난다 죽은 양파 냄새가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아파트 베란다는 외부에 노출되어 추락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장소이다. 과열된 삶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누군가는 세상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버린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저녁”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누군가의 죽음에도 저녁 식탁의 유쾌한 담소는 이어지고 양파의 죽음을 즐기는 인간들의 식사는 진행된다. 양파는 특유의 냄새로 존재를 증명하고 죽음에 대해 저항하지만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에 사람들은 암묵적 동조자가 되어 아무도 의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화자가 된 시인은 도무지 화목한 식탁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커튼을 쳤다고 한다. 동조할 수 없으니 차라리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말을 가슴에 묻고 떠났을까. 그 억울함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밥을 먹을 때 아무도 암울한 불행을 쳐다보지 않는다. 타인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안락이나 행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인 시인은 식사를 멈춘다. 도저히 삼킬 수 없는 것들이 밥그릇에 붙은 몇 개의 밥알로 남아있다. 씹히지 않는 양파 꼬다리를 싱크대에 헹궈내는 행위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배수구로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또 다른 양파를 만나면 우리는 그들을 최대한 불쌍하지 않게 바라보았다고 어두운 저녁에도 밝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말해주길 기도했다 이 불온한 식탁에서 죄책감이 자라지 않도록
물이 흘러 들어가는 싱크대 배수구는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어두운 곳이다. 배수구로 흘러가 잊힌 존재들은 억울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다. 또 다른 양파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존재들일 것이다. 그들이 사라졌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자들은 어두운 저녁에도 빛을 환하게 켜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죽은 자들과 무관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산 자들에게는 죽은 자들이 가지지 못한 권력과 풍족한 재물과 명예가 있을 것이고 죽은 자들의 죽음에 관여하거나 막대한 영향을 끼칠 권위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두운 저녁에도 밝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말해주길 기도했다는 것은 죄의식을 덜어내기 위한 역설법이다. 불온한 식탁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시인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세상의 목적과 시선이 다르기에 갈등하고 대립한다. 가려진 진실 앞에서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커튼을 치면 아침이 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아침에는 대부분 커튼을 걷어내고 시작되는 하루를 맞이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커튼은 일반 커튼이 아닌 암막커튼이다. 검은 천의 암막커튼은 빛을 차단하여 방 안을 어둡게 하여 수면에 도움을 준다. 대부분 야근을 하고 낮에 잠을 자야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능성 커튼이다. 밤을 낮 삼아 일하는 사람에게 아침은 잠을 자야하는 밤이다. 그 아침은 얼마나 고단한 아침인가. 잠이 들고 싶어도 소음이 새어들고 잠을 방해하는 외부환경에 따라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니 그 아침마저 스스로 밀어야 한다. 건강과 직결되는 수면은 중효한 몫을 차지한다. 암막 커튼은 두 가지 뜻으로 읽히고 있다. 암막 커튼을 쳐서라도 잠을 불러와야 하는 사람들의 고달픔과, 어둠에 가려 세상의 뒤편으로 사라진 존재들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되고 있다.
세상에는 아직도 미제의 사건들이 어둠 속에 쌓여있고 그 억울함을 파헤쳐 빛으로 끌어내려는 사람들도 있다. 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베란다는 잊기 쉽고 은폐되기 쉬운 곳이다. 버려져 썩어가고 곪아가는 것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추락하거나 던져지기 쉬운 불안한 공간에 모여 있다.
그래서 걱정이 많은 곳이다. 세상에 누가 걱정을 데려가겠는가. 그곳에 개입하면 그날부터 시작될 불이익을 알고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둠을 헤치고 빛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이다. 그 작은 빛들이 모여 세상은 오늘도 돌아가고 있지만 베란다에는 여전히 걱정이 자라고 있다. 불행하게도 근심은 누구도 먹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