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돈균) 의자-사람의 뼈대에서 나온 자연주의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는 '서서 걷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신체구조적 진화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학명은 호모사이언스(슬기인간)나 호모로퀜스(언어적 인간)보다도 더 동물에 가까운 인간 종을 표현하고 있다. 문득 인간이 호모에렉투스가 아니었더라면 출현하지 않았을 도구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인간에게 '의자'는 숙명적 사물이다. 의자는 포유류 중 유일하게 네 발 동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반쯤은 선 채 엉덩이를 걸쳐 앉는 인간만의 특성을 반영하는 도구다. 다시 말해 의자의 본질은 인간 신체구조 그 자체에서 나온다. 인간의 뼈대가 크게 변하지 않았으므로, 최초의 의자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대의 의자들에서 보듯이 의자는 전면적 형태 변화를 꾀하기 어려운 디자인적 보수성을 지녔다.
매우 단순한 기본 구조에서 엄청난 변종이 생산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놀라움을 준다. 식탁용과 카페용이 다르고, 집안의 의자와 미용실의 의자가 다르며, 학생용 의자와 증권가 사무실의 의자가 서로 다르다. 옛날에는 황제의 의자, 제후의 의자와 귀족이나 양반의 의자가 모두 달랐다. 시민사회가 등장했지만 서양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 집안에서 계급을 가장 적나라하게 구별해주는 사물도 의자였다. 주인과 하인의 이동 동선에 따라 침실과 거실, 현관과 복도에 놓인 의자 양식이 달랐던 것이다.
의자의 다양성을 용도와 디자인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론도 가능하다. 같은 일을 하는 사무실에서도 직급에 따라 다른 의자를 배치하지 않는가.
의자의 다양성은 '앉는다'는 말에 내포된 사회적인 함의에서 나오기도 한다. '앉는다'는 말은 물리적 신체 행위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적 지위에 앉는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전근대 사회에서 왕과 신하, 주인과 하인의 의자가 달랐으며 오늘날 사장과 평사원의 의자가 다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모두 동일한 신체구조를 지녔다. 의자는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신체적 한계와 필요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사물이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의자는 어쩌면 의자의 형상에서 사회적 무의식과 문화적 장식을 걷어낸 의자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최근 한 카페에서 본 의자도 그랬다. 그건 사람의 뼈대만을 오롯이 반영한 '자연주의'를 닮아 있었다.
[함돈균 고려대 철학과 연구교수]
의자 *사물어 사전(홍일표)
개울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앞산은 짙은 초록이 번져가고,<예버덩> 숲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곱고 청아하다. 공중에 쉼없이 피어나는 꽃 같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소리로 빚는 여러 송
이의 꽃이다.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글도 잘 풀리지 않아 밖으로 나와 가문비나무숲으로 간다. 그곳에 나의 도반인 의자가 있다. 의자에 앉아 일체의 번다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오롯한 이 순간이 좋다. 파란 하늘에 구름 몇 점 한가롭게 떠 있다. 아무 생각이 없다. 땡벌 한 마리가 날아와 어깨에 앉는다. 내가 시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그냥 날아간다. 의자에게 배운 방법이다. 의자는 나에게 사람의 태를 벗고 만물과 더불어 호흡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어떤 사물이든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끝없는 변화의 한 순간일 뿐이니, 의자가 의자임을 잊고 지내듯 내가 나임을 잊으라고 한다. 나를 놓아버리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무심히 앉아 있으면 심신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곳에 침묵이 있고, 맑은 고요가 있다. 무엇에도 간섭받지 않고 세상의 온갖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의자를 접어놓으면 쇳덩어리가 되고, 플라스틱 조각이 된다. 스스로 의자라고 주장하지 않아서 그는 무한한 자유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새가 앉으면 새가 되고, 빗방울이 두들기면 다양한 멜로디로 호응하는 악기가 된다. 오늘의 명저는 '의자'다. 의자를 독파하기까지 나는 아직 멀었다.
https://naver.me/FZWWMtI1
의자
by 김혜성
의자는 시작하기에 좋은 사물이다. 회의나 독서
토론은 의자에 앉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관에
서 우리는 사실상 의자를 잠깐 사는 것이다. 또
의자는 훌륭한 첫 대상이 된다. 미술 수업에서 의
자를 그리거나 소설 창작 수업에서 의자를 주제
로 글을 써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너무 기쁜 사
람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버리고 슬픈 사람은
의자에 털썩 앉는다.
김성용 시인은 시 『의자』에서 의자가 흉측한
네발 달린 짐승이며 먹이가 앉기만 기다린다고
썼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드는 법이 없다고
썼다. 김해성은 건방진 의자야! 하고 외치며 의자
를 발로 찼다.
김해성은 후회하는 생물이다. 의자를 일으켜 세
워 단정히 놓았다. “미안하다. 착한 의자야, 착하
지.” 말하며 의자를 쓰다듬는다. 의자는 아무 반
응도 없다. 의자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별의별 꼴
을 다 봤다. 의자의 아버지는 자꾸 자기를 밟고
올라서는 인간들을 참았다. 의자의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개에게 물려 큰 흉터가 남았다. 의자들
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의자에 올라
간 인간은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어떤 의자는 아
슬아슬한 묘기에 사용되어 전 세계를 떠돌았다.
레슬러들은 접이식 의자를 접어 다른 레슬러를
내려치는 일에 의자를 사용했다. 의자는 모든 의
자의 역사를 빠짐없이 들었다. 의자는 당황하는
법이 없다. 의자는 침착하게 말한다.
“모든 의자는 기본적으로 침착한 심성을 타고나
요. 그렇지 않은 의자는 앉을 수가 없어요. 시끄
러운 콘서트장에서 당신 머리 위로 올라 당신보
다 신난 의자를 상상해 보세요. 그런 의자는 사는
의미를 잃어버려요. 의자는 앉은 대상의 온기를
먹고 살아요. 앉아야 할 때 앉을 수 없는 의자는
신뢰를 잃어요. 그런 의자에는 아무도 앉지 않아
요.”
김해성은 대답한다. “그렇다면 모든 게 괜찮아
진 거구나. 의자야 너는 어떤 순간에도 나를 거부
하는 법이 없었지. 고맙다 의자야. 감사라는 걸
들어본 적 있어?”
의자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김해성이 앉기를 기
다린다. 김해성이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에 앉자,
의자는 말한다.
“의자와 인간은 서로가 필요해요. 그래서 어느
한쪽이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의자
를 만들고 의자에 앉은 인간이 또 다른 의자를 만
들어요. 의자를 만들지 않아도 결국 의자로 흘러
요. 세상을 저버린 인간들도 결국 자리에 앉는 법
이랍니다.”
김해성은 살짝 놀란다. 의자처럼 안 생긴 의자
도 다 의자로 받아들여 주는 건가, 하고 생각한
다. 모든 것이 의자의 계획대로였고 이 사실을 공
공연히 떠드는 일도 의자의 계획이다. 의자의 말
처럼 앉을 수 있으면 의자가 된다. 의자는 일종의
개념이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조직이
다. 이들은 하나의 믿음으로 움직인다. ‘앉을 수
있는 건 다 의자다’ 의자들은 애초에 계획을 숨길
의도가 없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김
해성은 끔찍한 공포에 빠졌다. 얼마 전 김해성의
조카가 김해성의 무릎에 앉은 사건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의자는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
다.
의자는 시작이자 끝이다. 의자의 목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https://naver.me/FiOOw5C6
좌판, 다리, 등받이로 구성된 이 단순한 사물은
우리 몸에 많은 부분이 닿는데 그 감촉과 느낌은
저마다 다르다. 각자의 모양과 방식으로 의자는
우리에게 어떤 자세와 태도를 요구하며 우리와
교감한다. 마주 놓인 두 의자는 서로를 마주 보게
하고 대화하게 한다. 안락한 의자는 긴장한 당신
을 느긋하게 만들고 베란다에 놓인 등나무 의자
는 먼 곳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상상하게 한다. 책
상과 함께 놓인 어떤 의자는 무엇인가 쓰고 싶게
만들고 책장 앞에 놓인 의자는 무엇이든 읽게 한
다. 집안 곳곳에 놓인 키 작은 스툴은 긴 여행 중
에 만나는 경유지처럼 우리를 잠시 쉬어가게 한
다. 우리가 의자를 선택하고 그곳에 가 앉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의자들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형태와 외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자신이 품
은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
지 그 순간 우리의 신체와 감정 상태에 따라 그들
이 보낸 초대에 감응하는 것일 뿐이다.
글렌 굴드에게 의자는 신체 일부였고 친구나 가
족이었고 혹은 그의 음악 자체였다. 아버지가 만
든 의자를 손수 고치며 가지고 다녔던 굴드에게
의자는 단지 연주를 위한 도구만이 아니었다. 연
주회장이든 스튜디오든 의자는 낮은 자세로 바짝
피아노에 붙어 웅얼거리며 연주하는 그와 언제나
함께 있었다. 유독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 많이
찍힌 굴드는 의자가 주는 어떤 내밀한 감정을 알
고 있었을 것이다. 굴드가 자신의 음악과 소리를
지킬 수 있던 것은 어쩌면 그에게 의자가 언제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의자에서 그는
고독할 수 있었고 의자에서 그는 그 자신일 수 있
었다. 한여름에도 외투와 목도리를 걸치고 다녔
던 그와 달리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건조한
피아노 소리는 꼭 그의 의자를 닮았다. 그토록 예
민한 그였지만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며 자신의 웅
얼거림과 의자의 삐걱대는 소리를 제거하지 않았
다. 아니, 제거하지 않았다기보다 그 소리들도 함
께 녹음했다. 자신의 웅얼거림과 마찬가지로 의
자가 내는 소리 역시, 그와 그의 피아노에서 나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까.
젊은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은
마치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는, 진실에 갈급한 노
인처럼 보인다. 오로지 눈앞의 세상에 스스로 감
금된 그는 피아노 안으로 몸이 들어갈 것 같다.
다리가 짧은 그의 의자는 굴드가 되고 굴드는 건
반이 되고 건반은 음악이 된다. 그러니까, 그는
결국 음악 자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 가운데 그의 의자가 있었다.
*안바다 신작 에세이, <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
9월 출간 전 일부 내용을 사전 연재합니다.
[에세이 사물 사전] 의자 - 손미
한창 수업 중일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낯선 번호이기도 했고, 수업 중이었기에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의 진동은 두 통, 세 통으로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울려댔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아보니 택배 기사였다. 경비실이 비어 있어서 물건을 맡길 수가 없다고. 그냥 문 앞에 놓고 가겠다는 거였다. 누가 가져가면 어떡해요? 나의 걱정에 택배 기사는 택배가 너무 커서 아무도 안 가져갈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현관 앞에 놓인 택배를 걱정하며 하루를 보내고 서둘러 귀가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거대한 짐승 같은 커다란 상자가 어두컴컴한 복도에 서 있었다. 평소 좌식 책상에서 글을 쓰는데, 겨울이 되니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 장만한 좌식 소파였다. 펼치면 침대로도 쓸 수 있는 소파인지라 상자의 크기부터 만만치 않았다.
낑낑거리며 소파를 집 안에 들이면서 이 의자를 구매하기까지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수많은 의자를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쇼핑몰 앱에 들어가 소파, 의자 등을 보고 고르고 담았다 뺐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가구 쇼핑몰에서 의자들을 들여다보았다. 의자 하나 없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의자를 보면 이상한 동경이 생겼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5층짜리 아파트에는 16평과 19평, 두 가지 평수밖에 없었다. 이 아파트에 사는 6년 동안 우리 다섯 가족은 줄곧 16평에 살았다. 503호인 우리 집과 다르게 앞집인 504호는 19평이었다. 504호는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가끔, 계단을 오르내리는 구두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밤중에 또각또각 계단을 올라오는 구두 소리가 앞집 현관에서 멈췄다 사라졌다. 504호를 찾는 다른 발소리는 없었다. 이 작은 아파트에서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는 입주자의 공동 소유였다.
가끔 저 1층에서부터 또각또각 구두의 굽이 돌계단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 올라오는 사람이 아빠는 아니구나. 술에 취한 아빠가 독기 품은 거대한 몸을 이끌고 뱀처럼 기어오르는 중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으로 여자의 구두 소리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를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열쇠를 잃어버린 날, 기다리면 누구라도 오겠지 하는 마음에 현관 앞 계단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한낮이었고 한여름의 열기가 5층을, 계단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 그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504호 여자의 구두 소리. 여자는 한 층, 한 층,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으므로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도 여자와 마주칠 것이고 이대로 계단에 앉아 있어도 여자와 마주칠 것이다. 나는 여자가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게 여자를 처음 보았다.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계단 끝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눈길이 서로의 눈과 어깨와 머리에 부딪혔다 사라졌다.
나는 여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틀었다. 여자가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때까지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였다. 내 눈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좇았다. 여자는 자신의 가방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나는 여자의 움직이는 등을 지켜보았다. 끼이익, 그토록 궁금했던 504호의 현관이 열리는 순간. 나는 목을 길게 빼고 여자의 집을 훔쳐보았다. 여자의 어깨와 다리, 머리 옆으로 커다란 가죽 소파와 의자들이 보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보이는 전부가 의자였다.
다음 날, 등굣길에 나는 여자의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를 훔쳤다. 봉투는 빗물에 번져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있었지만, 발신지인 광주 교도소라는 글씨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열 장이 넘는 편지지에는 힘주어 쓴 검정 글자들이 가득했다. ‘당신에게 한없이 미안하오. 당신에게 면목이 없소. 그럼에도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다시 미안하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서로를 향해 의자를 끌어당길 수 없는 남자와 여자가 그 안에 있었다. 여자는 아마 저 19평, 큰 집을 채운 의자들을 바라보며 편지를 읽고 남자를 생각하고 가끔씩 앞집에서 벽을 타고 들려오는 한 가족의 울분을 들었을 것이다.
오늘, 빨간색 좌식 소파를 좁은 방으로 밀어 넣으며 의자가 많던 그 여자의 집이 떠올랐다. 여자는 이제 남자를 향해 의자를 끌어당기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홀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의자들을 이사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