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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과 순교자
1. 명동 성당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명실 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성당 정문 앞마당에 설치되었던 예수상. 현재는 교구청 앞마당으로 이전하였다.이승훈, 정약전 · 약종 · 약용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노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 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성당 제대와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열네 사도의 초상화 모습.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소에는 1900년부터 기해 ·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되었다. 순교한 지 약 20일 후 7-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이곳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이들 성인 외에도 지하 묘소에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1839년)와 무명 순교자(?-1839년)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008년 12월, 성당 정면 보수를 위해 2006년에 설치했던 철골구조물을 해체하는 모습.또 병인박해 때인 1866년 3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시신은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성해실로 모셔지기 전 1909년 이곳 지하 묘소에 잠시 머물러 있기도 했다.
1998년 5월 29일 축성 100주년을 맞은 명동 대성당은 신앙 자유의 상징으로서, 일제와 6.25 전쟁의 수난을 거쳐 70년대 독재에 맞서 민족의 양심과 지성을 지켜온 민주화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2002년 기존의 문화관과 부속건물을 합쳐 새롭게 문화관을 리모델링하여 문화의 전당으로 탈바꿈하였고, 그해 9월부터 심하게 훼손되고 부식된 외벽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문화재청과 함께 시작하였다. 이미 1974년과 1984년에 대규모 보수 공사를 진행했으나 이번에는 성당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낡은 벽돌들만 한 장씩 빼낸 뒤 새 벽돌을 끼워 넣는 고난도 보수 공사를 거쳐 2008년 말 공사를 위해 감쌌던 장막을 벗고 새 단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2010년에는 명동 대성당을 보존하고 열린 광장을 조성하며 사목 지원공간을 확보하여 신자들은 물론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기 위해 성당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명동성당 종합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어 2011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신부 순교일에 맞춰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기공식을 갖고 3년간의 공사에 들어가 2014년 9월 16일 1단계를 마무리하며 교구청 신청사 축복식을 가졌다.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를 통해 기존의 명동 대성당과 이질감이 없으면서도 교우와 시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교구청 신청사와 지하 주차장, 혼배를 위한 파밀리아 채플과 연회장인 프란치스코홀, 들머리 지하에 각종 편의시설들이 들어섰고, 대성당 진입로 또한 봉헌 당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2.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 수표교 인근
청계천변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인도에 세워진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기념표석.한국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이 1784년 겨울, 수표교(水標橋) 인근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년)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사도 요한) 등에게 세례식을 베풀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시작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2011년 8월 28일 현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앞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기념표석을 건립하였다. 1784년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표석을 건립한 것이다.
청계천 오른쪽 붉은 벽돌 건물 아래 인도에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기념표석이 설치되었다.기념표석은 가로 98㎝, 세로 75㎝, 높이 20㎝ 기단석에 가로 75㎝, 세로 75㎝, 높이 76㎝의 화강석 빗돌을 올리고 오석을 붙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라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기념표석에는 “1784(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李蘗, 1754-1785)의 집이던 이곳이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이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기념표석 근처에 있는 수표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새로 놓은 다리여서 옛 수표교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1441년(세종 23년)에 설치되어 1749년(영조 25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원래의 수표교는 청계천 수위를 재던 다리이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2011년 9월 26일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기념표석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관련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3년 6월 7일)]
3.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 대성당
100년 전인 1898년 5월 29일. 서울 남부 명례방(지금의 명동)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사적 제 258호)이 축성된 날이다. 당시 대성당의 건립은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뾰족집'의 상징인 종탑은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민주화의 요람이요 억압받는 민중들이 해탈을 염원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성당 뒷마당 성모동산에 설치된 한국교회의 수호자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상.바로 이곳의 복음사는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 1784년 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 해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곧 명례방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성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명례방 마을에는 당시 김범우(토마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벽의 집이 비좁아 집회 장소로 적당하지 않자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1784년 늦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봄까지 유지되었으나, 형조의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됨으로써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을사년(1785)의 사건으로, 갓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가 얻은 최초의 시련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이렇게 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이어 김범우는 유배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로 인한 상처가 덧나 배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4-25).
김범우의 죽음은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얻게 될 수많은 혈세(血洗) 곧 '피의 세례'를 예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가장 아래에 있는 주춧돌은 바로 김범우와 같은 초기 희생자들이었다.
을사년 사건 이후 명례방 공동체의 역사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기록에서도 명례방이란 이름 석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그것을 영원한 역사의 단절로 남겨 두지 않았으니, 박해가 끝나 갈 무렵인 1882년부터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다시 터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를 책임지고 입국한 제 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 주교는 명례방 언덕에 대성당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1882년부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그 중 한 한옥에 종현 학당(鐘峴學堂)을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모아 기초 학문을 가르쳤다.
성당 뒤편 모습으로 제대와 제의방이 자리하고 있다.블랑 주교는 이때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부지를 매입하였다. 조선 정부의 방해, 일본인과 개신교인들의 질투도 이를 막지는 못하였다. 1887년 겨울에 부지 정지 작업이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차츰 신앙의 자유를 찾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어 1892년 5월 8일에 제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 주교는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맞이하였고, 1898년 5월에 마침내 한국 교회는 40m가 넘는 종탑을 갖춘 길이 65m의 고딕식 건물을 갖게 되었다.
1900년 9월 5일에는, 1899년에 왜고개(瓦峴, 현 용산 군종 교구청 인근)에서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와, 1882년에 남포 서들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성 다블뤼(Daveluy, 安) 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유해를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어 1901년 11월 2일에는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 소재)에서 용산 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던 성 앵베르(Imbert, 范) 주교 등 3명의 유해를 지하 묘지로 옮겼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을 왜고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들 중 훗날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의 유해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성당 지하 묘지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성스러운 곳이다. 또 지금까지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순교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의 유해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3월호]
4. 명동성당 내부
명동성당 제대 뒤쪽을 보면 가운데 성모마리아 상이 있고, 그 아래 벽면에는 장면박사의 동생인 장발 화가가 제작한 열두 사도와 바오로, 바르나바 등 14분의 사도 성화가 있다.
제대를 향해 보면 중앙 왼쪽은 베드로 사도가 있고, 맨 끝이 배신자 유다 대신 마지막에 뽑힌 마티아 사도이고, 오른쪽은 바오로 사도이고 맨 끝에, 바오로 사도와 늘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니던 바르나바 성인까지 열네 분의 성화(서양화가장발작품)가 있다.
제대 위쪽에 스테인드 글래스의 그림은 왼쪽 위에서 아래로 환희의 신비, 이어서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각 5단, 총 15단이 새겨져 있고, 성당 내부를 살펴보면 왼쪽에 김대건 신부님, 이승훈, 오른쪽에 이벽 성조, 명례방 집주인 김범우의 초상화가 있으며, 명례방 신앙 공동체 그림 속에는 양반들과 중인, 천민까지 신분을 초월한 신앙 공동체인 종교 집회 광경이 걸려 있다.
우측에 성 분도상은, 이 성전을 건축할 당시 여러 차례 사고로 많은 사람이 다쳤으므로, 건축사의 주보를 모시고 기도한 후로는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성당을 완성할 수 있었기에, 제대 우측 벽면에 성분도상을 모시고 있다.
5.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 김범우 토마스.
지난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이며,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그들에 관한 자료를 함께 읽어보면서 ‘평신도 희년’을 맞아 역사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첫 공로자
“김범우 토마스(金範禹, 1751-1787년)는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구세주가 우리를 위해 골고타에서 수난하신 것처럼 그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구세주에게 바치는 영광을 가졌다. 그는 처음으로 이 나라에서 하느님이 우리의 왕이고 우리의 아버지이므로 충성과 참된 효성으로 지워진 의무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겪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피의 목소리로 증언하는 영광을 가졌다. 그는 처음으로 육신은 형벌에 쓰러질 수 있을지라도 영혼은 죽지 않고 완전한 불멸의 희망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이 극동의 폭군들에게 알리는 영광을 가졌다. 그러므로 조선의 수많은 순교자들 무리의 첫머리에 당연히 놓아야 할 것이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Daveluy, 1818-1866년)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김범우를 언급하면서 여러 차례 그가 한국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겪어냈던 사건을 강조했다. 또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도 “비록 참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신앙의 증거자로 죽었다는 것은 참되다. 김범우는 재판관들 앞에서 또 여러 형벌을 받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로를 지녔고 뒤에 오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였다.”고 언급했다.
다블뤼 주교는 자신이 『비망기』와 『약전』을 정리하던 불과 몇 해 전에도 “단양의 나이든 아전들은 외교인이면서도 여전히 존경심을 갖고 그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고 기록하였으니, 김범우 토마스가 아직 성인 반열에 들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될 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겠다.
씨앗에 떨어진 한 방울의 피
‘하느님의 종’ 김범우는 1751년(영조 27) 서울 남부의 명례방(현 명동 성당 부근)에서 중인 역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대대로 무관을 역임했으나, 부친이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사역원의 역원 판관에 오르면서 역관 집안으로 이름을 내게 되었다. 김범우는 집안의 장남으로 16세 되던 1767년에 천녕 현씨와 결혼한다. 부인 현씨[玄載淵]는 1801년에 순교한 복자 현계흠 플로로의 사촌으로, 혼인한 이듬해에 아들 인구를 낳았다.
『시복 자료집』에는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김범우 집안 소장 문서들 - 가첩 「경주김씨 세보」, 기일록 「장생보록첩」, 김동엽(김범우의 손자)의 「호구단자」 - 과 조선시대 통역관 등용시험인 역과 합격자의 주요 인적 사항을 적은 「역과방목」이 실려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김범우는 이벽(요한), 이승훈(베드로) 등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1784년 가을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세례를 받은 즉시, 윤지충(바오로), 김종교(프란치스코), 홍익만(안토니오), 최필공(토마스), 변득중, 허속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다.
『정조실록』을 보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 즉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이 김범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윤지충은 공초에서, “계묘년(1783) 봄 진사시에 합격하고 갑진년(1784)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마침 명례동의 중인 김범우의 집에 갔더니 집에 책 두 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천주실의』이고 하나는 『칠극』이었습니다. 그 절목에 십계와 칠극이 있었는데 매우 간략하고 준행하기 쉬웠으므로 그 두 책을 빌려 소매에 넣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 그 책은 돌려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김범우는 아우 현우(마태오)와 이우(바르나바)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으며, 스스로도 교리를 철저히 실천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여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했다. 1785년 이곳에서 한국 교회의 첫 공식 박해로 기록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다.
『사학징의』 권2 부록인 「형조의 을사년 봄 공문」을 보면, “을사년 봄에 본 형조판서 김화진이 차대한 뒤에 출근하였다. 중인 김범우가 서학을 받들어 봉행하므로 붙잡아다가 캐물었더니 김범우는 생각해 보아도 서학에는 좋은 내용이 많다. 그릇된 점이 있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김범우가 투옥되어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한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등과 함께 추조판서 앞에 나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주고 김범우와 함께 자신들도 처벌해 달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어이 김범우는 유배되었고, 가지고 있던 책자는 모두 추조 뜰에서 소각되었다.
그가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였음은 『시복 자료집』에 언급된 여러 기록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김범우는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형벌의 여독으로 쇠약해져 하느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투철한 신앙을 증명하는 기록들
『시복 자료집』에 따르면, 김범우에 대한 정부 기록은 『정조실록』, 『추안 및 국안』, 『사학징의』에 남아 있다. 또한 교회 기록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 그리고 「1789년 북경 교회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목구장 생 마르탱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8월 15일자 편지」가 대표적이다. 특히 구베아 주교의 친필 편지는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데, 지난해 바티칸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특별전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에 전시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한편 천주교를 반대하는 조선의 유생들이 지은 글을 수록한 『벽위편』(이기경 저, 이만채 편)에도 김범우의 기록이 있다. 천주교를 사교로 배척하고 박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편찬된 이 책에는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적 문서인 1785년 음력 3월에 작성한 「통문」도 실려 있다.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동생 현우는 그들 삼형제가 교리를 배울 때는 주문모 신부도 없었고, 맏형이 정배되어 죽은 후에는 집안에서 몰래 경문을 외웠다고 증언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두 형제 가운데 현우는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로, 이우는 포도청에서 장사로 순교했으며 지난 2014년 두 분은 시복되었다.
진정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으니, 그들의 피 흘림 덕에 감히 오늘 우리의 믿음이 있다고 증언할 수 있겠다.
[평신도, 2018년 여름호(VOL.60),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6. 명동성당 지하 묘소
명동성당 지하 묘소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앵베르 범 주교님과 샤스탕 정 신부님, 모방 나 신부님의 유해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 등 다섯 분의 성인 유해를 모시고 있다. 또 아직 시성 되지 않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님의 유해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 두 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1836년 1월 12일에 입국한 모방 나 베드로 신부, 1837년 1월 15일에 입국한 샤스탕 정 신부, 그 해 12월 18일에 입국한 앵베르 범 주교님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목숨을 걸고 입국하였다. 모방 나 신부가 제일 먼저 입국하여 구산에서 조선말과 풍속을 배우고 미사를 집전하면서 방인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36년 2월 6일 안양 수리산에 사는 최경환의 아들 최양업과, 3월 7일에는 홍주에 살던 최형(한지) 베드로의 동생 최방제를 선발하고, 7월 11일에는 용인에 살던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유홍열한국교회사300)을 선발하였다. 모방 나 신부는 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한편 성직자에게 필요한 성덕을 쌓게 하다가 1834년 1월 3일 입국하였던 중국인 여항덕(余恒徳) 신부가 1836년 12월 3일 귀국할 때 마카오에 유학을 보냈다.
또한 모방 나 신부님은 신분 위장을 위해 상복을 입고, 방갓을 쓰고 충청도 일대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2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 정 신부님을 맞아 두 분은 험한 산길을 헤매며 빵, 버터, 치즈, 고기대신 시래기로 허기를 채우고, 거적때기 위에서 새우잠을 자며 새벽 2시에 일어나 미사와 세례를 집전하고, 날이 새기 전에 상복으로 갈아입고 서리와 이슬로 옷깃을 적시며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모방 나 신부님이 입국할 당시 4.000명이던 신자는 2년 만에 8.000명으로 늘어났다.
1837년 12월 18일에는 앵베르 범 주교님께서 입국하여, 평신도에 의해 우리나라 천주교가 탄생한지 53년 만에 완전한 교계 제도가 이루어졌다. 앵베르 주교님도 조선 사람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李在誼)토마스와 이문우 요한과 최방제 신학생의 형 최형 베드로 등 어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직접 가르쳐 빨리 성직자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이 체포되고, 배교자 김순성의 간계로 주교님의 은신처마저 노출되자 포졸에게 먼저 자헌(自献)하시고, 두 신부님께는 편지를 보내 더 이상 박해를 막기 위하여 자수하게 하여, 9월 21일 새남터에서 세분 모두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처형된 세분 성직자는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 두었다가, 20여 일이 지난 뒤 군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박 바오로와 이문우 등 몇몇 교우들과 같이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두어, 지금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에 안장하였다가 4년 뒤에 삼성산으로 옮겨 모셨다.
그리고 1901년 박 바오로의 아들 박순집 베드로의 도움으로 세 성직자의 묘를 발굴하여 명동 지하 묘소에 모셨다.
명동 지하 성당에 모셔져 있는 유해
○ 범세형 앵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43세. 주교)
○ 모방 나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샤스탕 정 야고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님. (홍주. 옥사. 1839. 9.12. 34세. 장)
○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님. (구산. - . 1841. 4.29. 46세. 회장)
○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무명 순교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