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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지방선거…집권세력의 선정(善政)여부 판가름의 장
- ‘셀프공덕비’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무형의 공덕비가 더 오래가
감당지애는 좋은 정치로 업적을 남긴 사람을 기린다는 뜻으로 대선과 지방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들은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스스로 공적을 자랑하거나 돌•쇠붙이에 새긴 셀프 공덕비보다 국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무형의 공덕비가 더 오래 역사에 남는다. (사진=인터넷 캡처)
오는 3월 국정 최고책임자를 뽑는 대선이 치러진다. 6월에는 지방선거가 있다. 이들 선거를 통해 그동안 위정자들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한 정치를 했는지와 새 인물의 등장 여부가 판가름난다.
고금을 막론하고 관직에 종사한 사람이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업적이 오랫동안 칭송되기를 바랄 것이다. 예전 목민관이 선정을 베풀고 지역을 발전시켰을 경우, 백성들은 기꺼이 공덕비를 세워 주었으며 이런 공덕비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많다. 공덕비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도 있지만 탐관오리 자신이 떠나기 전에 아전들을 부추겨 억지로 세운 셀프공덕비가 대부분이다.
지자체들은 이런 셀프 공덕비의 처리를 고민하다가, 주차장 한구석에 몰아놓던가, 창고에 거꾸로 세워놓기도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 깔아 밟고 다니게 하는 경우도 있다.
선조가 죽어 묘앞에 세우는 비석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선조의 과(過)는 숨기고 공(功)만 내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자신은 살아생전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은 이미 분수에 넘친다며,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묘비조차 세우지 말라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조선 성종 때의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이다.
조선시대 3대 청백리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박수량의 무덤에는 아무 글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白碑)가 세워져 있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탐관오리의 셀프 공덕비나 후손들이 조상의 과(過)는 숨기고 공(功)만 과대포장한 글이 새겨진 비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사진=인터넷 캡처)
그는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조선 3대 청백리로 꼽힌다. 조정에서 참판, 판서 등 38년이나 봉직했지만 자기집 한 채 없었고 죽은 후에는 장례비용조차 모자랄 정도였다. 전남 장성군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는 어떤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가 세워져 있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기념물인 셈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황제로 15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여걸 측천무후는 자신이 죽고나면 남자들이 지을 비문은 보나마나 여자인 자기에게 결코 후한 평가를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아예 비문을 새기지 말라 했다.
박수량처럼 겸손한 마음에서건, 측천무후처럼 자존감 때문이던 무자비(無字碑) 또는 몰자비(沒字碑)라 불리는 백비를 세웠다해도 '역사의 비문'을 채우는 것은 온전히 남은 자들의 몫이다.
궁궐이나 향교에는 특별히 팥배나무를 심는다. 팥배나무는 꽃과 열매 그리고 단풍이 아름다워서 심기도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임금이나 관료들에게 선정을 베풀라는 의미가 있어서다. 이는 시경의 다음과 같은 노래 때문이다.
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 (폐비감당 물전물벌 소백소발)
蔽芾甘棠 勿剪勿敗 召伯所憩 (폐비감당 물전물패 소백소게)
蔽芾甘棠 勿剪勿拜 召伯所說 (폐비감당 물전물배 소백소세)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베지도 말라 소백이 멈추신 곳이다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꺽지도 말라 소백이 쉬신 곳이다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휘지도 말라 소백이 머무신 곳이다
이 시는 시경 소남(召南)에 실려있는 '감당(甘棠)' 즉 '팥배나무'란 사언시이자 일종의 민요다. 이 시에서 감당지애(甘棠之愛) 또는 감당유애(甘棠遺愛)라는 성어가 유래한다.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관리에 대한 믿음의 정이 깊음을 이르는 말이다. 아울러 청렴결백한 인물이나 은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기도 하며, 백성이 시정자의 덕을 우러러 그리워하며 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나라 성왕때 주공과 소공(召公, 감당시의 소백)이라는 두 현인이 있었다. 주공은 상(商)왕조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친동생이고, 소공은 무왕의 사촌동생이다. 무왕이 죽은후 그의 아들 성왕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성왕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정치를 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처음엔 주공이 정치를 보좌하다가 뒤에는 주공과 소공이 함께 보좌하게 되었는데, 정치를 위낙 잘해서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어느날 소공이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한수(漢水)상류의 어느 한 고을에 이른 그는 팥배나무 그늘 아래서 그 마을의 어려운 민원을 해결해 준 일이 있었다. 그후 주나라 말년에 이르러 유왕(幽王)이라는 포악한 임금이 나오자 백성들은 소공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감당(甘棠) 시는 소공이 예전에 남방을 순시할때 쉬어 갔다는 팥배나무를 정성껏 보호하면서, 그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3000년 전의 소공에 대한 칭송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 팥배나무는 일종의 송덕비(頌德碑)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와 좌씨춘추에도 실려있으며, 천자문 79~80번째 구의 '存以甘棠 去而益詠(존이감당 거이익영,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은 바로 소공의 일화를 정리한 성어다.
북송의 사상가 소옹(邵雍)이 편찬한 격양시(擊壤詩)에는 '큰 명예와 명성을 어찌 투박한 돌덩이에 새기려 하는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말이 비석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하거늘(大名豈在鐫頑石 路上行人口勝碑, 대명기재전완석, 노상행인구승비)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유래한 '인구승비(人口勝碑)'란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말이 돌에 새기는 비문보다 훌륭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록 돌이나 쇠붙이에 새기지 않더라도 구전되는 무형의 공덕비가 더 오래도록 역사에 보전되는 것이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손가락 몇번 두드리면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아직도 낯 뜨거운 글을 돌이나 쇠에 새겨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로 남기려 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 1권을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8권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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