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했던 퇴근길
공주 시내와는 거리가 있는 산골 마을 가교리. 무성산과 태화산에 둘러싸인 이곳은 겨울이 되어 눈발만 보이면 이내 폭설로 둔갑하였다. 차 운전대를 잡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꺼리는 가파른 경사 도로까지. 첫차를 타고 공주 시내까지 출근해야 했던 과거에는 겨울이 가장 두려웠다.
내 나이 서른 후반 때 일이다. 점심 밥을 먹고 커 피 한잔을 들고서 회사 공터로 나왔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눈발이 나비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땅에 닿자마자 물이 되었다.
그러나 퇴근길에는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도로는 물기만 있을 뿐 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마곡사 행 버스는 정상 운행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상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 거실문을 열어 밖 날씨를 다시 확인했다. 어느새 눈발은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일까지 주간인데 공주행 6시 50분 첫 차가 운행할지 걱정이 되었다.
마곡사행 버스는 눈만 살짝 내려도 가파른 사곡 재를 넘지 못한다. 더욱 나처럼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버스 시간을 빼먹기 일쑤였다. 다음날 출근 걱정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 몸을 뒤척였다.
알람을 듣고 깨자마자 거실문을 열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마당엔 눈이 소복소복 쌓여있고 함박눈은 여전히 내렸다. 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깬 남편은 대문 앞 축사를 다녀오더니 머리에 수북이 눈을 이고 들어 왔다. 그러면서 첫차는 타기 힘들 거 같다고 말한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전화번호 책을 펼쳐 시내버스사무실에다 전화했다. 그러나 첫차는 물론, 오늘 마곡사행 버스는 운행이 어려울 거 같다고 한다.
나는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시내버스가 운행 중단되어 출근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대번에 언성을 높였다.
“공장 문을 닫으면 하루 손해가 얼만데? 책임질 거야?”
‘무조건 걸어서라도 출근하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으셨다.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러자 남편은 돈에 환장했냐며 뒤통수에 대고 모진 소리를 퍼부어댔다. 담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공포와 위험을 무릅쓰고 출근하려는 이유를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아직 나는 직조 기술이 서툴뿐더러 다른 사람에 비해 경력도 얼마 되지 않는다. 여기서 잘리면 갈 곳이 없다. 더욱이 농사짓는 남편은 겨울에는 수입이 아예 없지 않은가. 현재 두 아이의 학업으로 인해 내 지갑은 늘 홀쭉하였다.
‘엄마 왜 우리는 가난해? 부모님이 열심히 일만 했어도….’ 유년 시절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나는 원망의 말로 친정어머니의 가슴에 상처를 주곤 했었다. 그 화살이 방향을 틀어 이젠 내 가슴에 꽂힌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폭설을 뚫고 반드시 출근해야 했다.
불빛마저 잠든 산골 마을, 눈 속에 발을 푹푹 빠트렸고 함박눈을 맞아 점점 눈사람이 되어갔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만나지 못하고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는 작은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는 마음속으로 공포의 대상을 수없이 생성해냈다. 그리고 등골이 오싹해질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곡면에 도착하여 유구에서 오는 공주행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온종일 내렸다. 일하는 내내 조바심을 내며 틈틈이 현장 밖으로 나가보았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도 야속하게도 사장님께서는 저녁 7시까지 꾹꾹 눌러 근무하게 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집으로 되돌아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주 시내에서 마곡사행 버스를 탔다. 그런데 통천포 왔을 무렵, 기사 아저씨는 사곡에서 차를 돌려 갈 거라고 하였다. 아직 스노타이어를 장착하지 않아서 얼음판이 되어버린 사곡 재를 넘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버스 안의 승객들을 둘러보았다. 그날따라 마곡사로 길을 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출근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걸어서 집으로 가야 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점점 밝아졌던 아침과는 달리 어둠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버스가 사곡면에 도착할 때까지 불안에 떨며 손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손전화가 있는 딸한테 문자를 넣었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한테 마중 나올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하였다. 아들은 두말하지 않고 곧장 누나 핸드폰을 빌려 출발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곡에서 집을 향해, 아들은 가교리에서 사곡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들과 나는 무서움을 잊기 위해 대화하듯 문자를 주고받았다. 30분가량 걸었을 무렵 저만치서 희미하게 작은 물체가 보였다. 아들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고 나서 마주 보고 뛰었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졌을 때 우리는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듯 포옹하며 기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말 할 수 없이 즐거웠다. 아들과 손잡고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눈싸움도 하고, 공포의 퇴근길이 아들과의 동행 덕분에 행복한 시간으로 변했다.
우리 모자가 사곡중학교를 지나 사곡 재를 막 넘으려 할 때 스타렉스 한 대가 절벽을 기어오르듯 조심조심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한쪽으로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차가 우리 앞에 멈춰서더니 조수석에서 남편이 나왔다. 스타렉스 아저씨는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마중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남편은 겉으론 쌀쌀맞게 굴었지만, 속으론 걱정을 한 거였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거실에 이불을 펴고 다 함께 잤다. 온돌처럼 따뜻한 마음이 이불속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그동안 남편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봄볕을 만난 것처럼 따뜻해졌고 철부지로만 여겨졌던 아들이 커다란 바위처럼 느껴졌다.
내 생애 그날처럼 따뜻했던 퇴근길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 같다. 그날 밤 나는 앞으로 내게 어떤 풍파가 닥쳐온다고 해도 가족이 있는 한 너끈히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예감했다. 이 세상에서 온전한 내 편은 가족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랬다. 나는 그날 가슴에다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볼 수 있는’ 소중하고 값진 보물 하나를 장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