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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8년 임자(1732) 1월 22일(경진) 맑음
08-01-22[11] 진수당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김재로 등이 입시하여 《예기》 〈단궁 상〉을 진강하고, 북로의 육진 등에 문관 수령을 차임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덕수가 아뢰기를,
“〈단궁〉에서 논한 것은 대부분 상례(喪禮)여서 제왕(帝王)의 학문에 요긴하고 절실하지 않으니 굳이 부연하여 진달할 것이 없지만, 신이 증자역책장(曾子易簀章)에 대해서 아뢸 것이 있습니다. 배우는 자가 존양(存養) 공부가 정밀하지 않으면 평소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혹 삼가 힘쓰고 스스로 닦아서 태연히 숨길 수 있지만, 죽고 사는 즈음에는 진심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마치 딴사람처럼 판이합니다. 비록 조조(曹操)처럼 교활한 간웅(奸雄)도 죽기 전에는 변화무쌍하게 교묘히 농간을 부려서 심적(心跡)을 속였지만 향을 나누어 주라고 유언할 때에는 평소의 심적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으니, 온공(溫公)도 이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증자(曾子)는 생사가 눈앞에서 변하는데도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공부가 더욱 견고하고 돈독해서 비록 깔고 있는 하찮은 자리라도 편치 못한 것에는 편안히 있으려고 하지 않아 기어이 자리를 바꾸고야 말았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같으며 과실을 고쳐 바르게 마치는 덕은 바로 후학들이 표준으로 삼아야 할 부분입니다. 아래 장에 나오는 자장(子張)의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병들어서 장차 죽을 때가 되자 아들인 신상(申祥)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이제야 거의 군자의 경지에 가깝구나.’라고 하며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증자가 ‘이제야 내가 이 몸을 훼상할까 하는 근심을 면한 것을 알겠구나.’라고 한 뜻과 같아서, 평소에 잡아 지킨 마음이 죽고 사는 즈음에도 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당시에 공자 문하의 여러 제자가 보존하고 기른 바를 대략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구연왈호(瞿然曰呼)’의 ‘호(呼)’ 자를 ‘우(吁)’ 자로 보면 전혀 의미가 없으니, 본래 글자대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증자가 동자의 말을 듣고 놀랐다면 그 말을 대략 듣기는 했지만 자세히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라고 한 것이니, ‘호’는 아마도 동자로 하여금 다시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게 한 것입니다. 악정자춘이 만류하였는데, 증자가 ‘호’라고 하였기 때문에 동자가 앞에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한 것이니, 이렇게 보는 것이 응답하는 사이에 곡진하고 차서가 있지 않겠습니까. 주(註)에서 ‘호’를 탄식하여 숨을 내쉬는 소리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는 증자가 처음에 동자의 말을 듣고는 그저 스스로 놀라기만 하고, 자처함에 대해 별달리 묻는 뜻은 없이 한갓 탄식하여 숨을 내쉰 것일 뿐이니,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이는 비록 한 글자의 뜻이지만 관계된 것이 긴요한 듯하니, 신중하게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옛날에 황정견(黃庭堅)이 문장 짓는 법에 대해 소식(蘇軾)에게 묻자, 소식이 〈단궁〉을 읽으라고 권하였습니다. 대저 〈단궁〉은 문법이 간략하면서도 내포된 것이 많아서 천 마디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을 한마디로 말로 그려 내어 한 글자도 뜻 없이 쓴 글자가 없으니, 이것이 문장을 짓는 법입니다. 비록 ‘호’ 자를 가지고 보더라도 당일에 증자가 동자와 응답하는 기상이 완연히 눈앞에 있는 듯합니다. 단지 주설(註說)에 숨을 내쉬는 것이라고 말한 것만 가지고 보면 전혀 이러한 의미가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에 대해 의심하다가 우연히 고(故) 참판 임영(林泳)의 문집을 보았는데, 소견이 신과 대략 같았습니다.”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옳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호’ 자를 본래 글자대로만 보면 의미가 부족하니, 고주(古註)에 숨을 내쉬는 소리라고 한 것이 옳은 듯합니다. 이것은 깊이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하는 뜻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 자를 비록 숨을 내쉬는 소리라고 새기더라도 ‘우’ 자로 바꿀 필요는 없으니, ‘오호(嗚呼)’의 ‘호(呼)’ 자로 읽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하니, 이종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좋습니다.”
하였다. 이종백이 아뢰기를,
“‘호사정수구(狐死正首丘)’의 ‘수(首)’ 자는 향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 자는 ‘향(向)’ 자의 뜻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임정이 아뢰기를,
“순(舜) 임금을 창오(蒼梧)의 들에 장사 지낼 적에 순 임금의 세 비(妃)를 부장(祔葬)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세 비에 대한 말은 여기에만 있습니다.”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있습니다.”
하고, 이종백이 아뢰기를,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여기에는 ‘순 임금을 창오의 들에 장사 지냈다.’라고 하였고, 《맹자》에는 ‘명조(鳴條)에서 졸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맹자의 말씀을 준신(準信)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주-D005] 증자역책장(曾子易簀章) : 《예기》 〈단궁 상〉에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할 때, 동자가 ‘화려하고 선명하니, 대부(大夫)가 사용하는 돗자리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증자가 듣고 두려운 기색을 띠며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자가 재차 반복하여 말하자, 증자가 ‘바름을 얻고서 죽으면 그뿐이다.’라고 하고는 돗자리를 바꾸게 하였다. 이에 증자를 들어 올리고 돗자리를 바꾸었는데, 다시 자리에 누워 미처 안정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라는 내용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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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8년 임자(1732) 1월 21일(기묘) 맑음
08-01-21[13] 진수당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동지경연사 송인명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하고, 관서의 의열사에 사액을 내리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임정이 아뢰기를,
“증자역책장(曾子易簀章)은 선유(先儒)들이 증자께서 계손(季孫)이 준 대자리를 받았다고 논설한 경우가 많은데, 성인을 관찰하는 방도는 마땅히 그 대체(大體)를 보아야 하고 사소한 일은 생략해 버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당초 내려 준 물품을 받은 의리로 볼 때 반드시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니, 이것은 후학이 억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병이 심할 때였지만 동자의 말을 한 번 듣고 흠칫 놀라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깨달아 잠시라도 머뭇거려서 죽어서는 안 되는 대자리에서 죽고자 하지 않아 마침내 대자리를 바꾸게 한 다음 자리에 다시 누워 세상을 떠났으니, 성인이 허물을 고치는 용기와 마지막까지 바른 도리를 지키는 덕을 여기에서 겸하여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지고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化)한 성인(聖人)은 혼연히 천리(天理)여서 어떤 경우든 맞지 않음이 없으니, 처음부터 어찌 사소한 착오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안자(顔子), 증자, 자사, 맹자(孟子) 이하의 아성(亞聖)의 지위로도 오히려 면할 수 없어 간혹 사소한 과실을 저지르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실이 있었다 하면 바로 알 수 있었고 알게 되면 바로 고칠 수 있었으니, 무심결에 과실을 저지르는 일은 성인도 면하지 못했습니다. 과실을 저지르자마자 즉시 알았고 알자마자 즉시 고쳤으니 이것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공부입니다. 이것을 넓혀 나아가면 점점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세의 배우는 자가 혹 한때의 작은 과실은 그다지 이해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여겨 스스로 성찰하지 않아서 작은 것을 쌓아 크게 만들어 끝내 멸렬한 지경에 귀결되고 마니 이것은 마땅히 깊이 헤아려야 할 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정이 아뢰기를,
“주루(邾婁)에서 화살로써 초혼한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주에서도 ‘또한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不亦誣乎]’라고 배척한 것입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유신이 아뢴 것은 지나칩니다. 승형(升陘)의 전쟁에서 사상자가 많았기 때문에 화살로써 초혼한 것입니다. 마땅히 세상의 변화를 관찰해야지 그 시비를 지적하여 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임정이 아뢰기를,
“‘북상투를 하고 조문한다.[髽而弔之]’의 ‘좌(髽)’ 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음훈과 같지 않습니다. 좌는 바로 상(喪)을 맞이하는 예이지 서로 조문하는 예가 아니니, 이것은 예의에 심하게 어긋남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대태(臺鮐)의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피차간에 모두 상복을 입고 그대로 서로 조문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병화(兵禍)가 혹독해서 그런 것이니, 예의에 어긋났다고 전적으로 꾸짖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예기》 한 편은 대체로 예를 논하였지만 혹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예는 중도(中道)를 얻음을 귀하게 여기니 미치지 못하는 것은 본디 예가 아니고 지나쳐서 절제할 줄 모르는 것도 예를 제정한 본의를 잃은 것입니다. 지난번에 장릉(長陵)을 천봉(遷奉)할 때 성상께서 슬퍼하고 사모하며 두려워하신 것은 반드시 스스로 다하고자 하는 효성이니 신하들이 공경하여 앙모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의절(儀節)의 사이에 중도에 지나친 거조(擧措)가 많이 있었으니 이것은 신이 일찍이 개탄한 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기》를 진강하는 김에 감히 소회를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구석에 앉은 동자는 진정 증자의 마음을 알았고 진정 증자를 사랑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동자가 평소 옆에서 모실 적에 증자의 말과 행동이 털끝만큼도 바른 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음을 익숙히 관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병이 심할 즈음에 스스로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도 일깨워 주는 자가 없어서 죽어서는 안 되는 대자리에서 죽는 것은 증자의 평소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마디 말하고는 악정자에게 저지당했지만 그래도 그치지 않고 기어코 재차 말하여 경계시켜서 끝내 증자로 하여금 바른 도리를 얻고 죽게 하였습니다. 옛사람이 남이 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약석과 질병에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악정자가 증자를 사랑한 방식은 참으로 이른바 질병인 것이고, 동자가 증자를 사랑한 방식은 참으로 이른바 약석인 것입니다. 동자가 덕으로 한 사랑이 어찌 악정자의 고식적인 사랑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임금에게 과실이 있을까 염려하고 알면 말하지 않음이 없어서 부월(鈇鉞)의 주벌(誅罰)을 피하지 않고 반드시 귀에 거슬리는 말을 진달하는 사람은 진정 그 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혹 녹(祿)을 생각하고 위엄을 두려워하여 군주의 과실을 진(秦)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는 것처럼 하며 심지어 사실(私室)에서는 과감하게 말하다가 어전에서 잠자코 있는 자는 그 군주를 면전에서 기만하는 것이니 그 불충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군주가 대부분 면전에서 받들고 순종하는 것을 나를 사랑한다고 여겨 의심하지 않고 믿어 화의 계제를 점차 조성하니, 지난 역사의 자취에 매우 환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전하의 조정을 가지고 한번 살펴보자면 신은 한 사람도 전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신하들 중에 감히 기탄없이 직언하고 힘써 간쟁하여 기어코 전하의 뜻을 돌려놓고야 말겠다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성상의 마음이 한번 정해지면 조금도 바꾸지 않으십니다. 만약 성상께서 정말로 큰 잘못을 하신다면 전하의 신하들 중에 과연 부월의 주벌을 피하지 않고서 숨기지 않고 과감하게 말하기를 옷깃을 잡거나 난간을 부러뜨렸던 옛사람들처럼 할 이가 있겠습니까. 신하가 그 군주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에게 평소에 통한으로 남아 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동자의 일로 인하여 감히 소회를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절실하다.”
하였다.
[주-D011] 대자리를 바꾼 일 : 《예기》 〈단궁 상〉에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할 때, 동자가 ‘화려하고 선명하니, 대부(大夫)가 사용하는 돗자리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증자가 듣고 두려운 기색을 띠며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자가 재차 반복하여 말하자, 증자가 ‘바름을 얻고서 죽으면 그뿐이다.’라고 하고는 돗자리를 바꾸게 하였다. 이에 증자를 들어 올리고 돗자리를 바꾸었는데, 다시 자리에 누워 미처 안정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라는 내용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