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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몰트만, 희망의 신학
-기독교 종말론의 기초와 결과에 대한 연구-
차례
I. 머리말 - 몰트만 신학의 위치와 개관
II. 희망에 관한 명상 - 희망의 신학 방법론
III. 종말론과 계시 - 종말론의 재발견
IV.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미래 -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V. 새 출발의 교회 - 희망의 공동체
참고문헌
I. 머리말 - 몰트만 신학의 위치와 개관
J. 몰트만1)의 <희망의 신학>의 배경은 폰 라트(G. von Rad)의 구약신학과 베버(O. Weber)의 개혁교회신학, 이반트(H.J. Iwand)의 헤겔철학이다. 블로흐(E. Bloch)의 희망의 철학과는 무관하다.2) 그의 신학은 종말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기독론으로 발전했으며, 교회론을 거쳐 신론에 이르며, 해방신학과 환경문제를 다루었다. 기독교 종말론의 배경은 구약성서로부터 유래하는 묵시문학이다. 종말은 예수 안에서 이미(schön) 시작되었으나. 아직 (noch nicht)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희망의 신학의 주제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 곧 희망(Hoffnung)을 뜻한다. 그래서 희망은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이다. 그는 안셀무스의 명제를 종말론적 사고에 따라 변형시켜 spes quarens intellectum-spero ut intelligam (이해를 추구하는 희망 - 이해하기 위해 나는 희망한다.)라고 말한다.3)
본서가 출판된지 2년만에 6판이 거듭되는 사실에 대해 몰트만 자신도 아직 시도에 불과한데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1967년 몰트만은 말하기를 “희망의 신학은 구약신학의 인식, 종말론의 제목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철학적 진술들, 오늘날 세상에 있어서 기독교의 새로운 역사적 과정들의 신학적 정리의 시도였다”고 했다. 독일학계에서 본서에 대한 수많은 찬반 비판들을 간추려서 마르쉬(Wolf-Dieter Marsch)는 <희망의 신학논쟁> (Diskussion über die Theologie der Hoffnung von J. Moltmann, 1968)을 발표했다.4)
본서의 신학사적 위치는 대체로 말해서 세계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신학을 성격지었던 실존신학, 초기의 바르트의 신학을 포함하는 말씀의 신학, 특히 불트만의 케류그마 신학과 그의 새로운 해석학파로부터의 떠남이었고, 신학적 관심의 초점을 개인의 실존과 역사의 해석으로부터 역사의 미래와 역사의 변혁으로 옮기는 새로운 신학이 일어나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종말론적인 면에서 본서는 두 개의 종말론의 형태를 거부하고 있다. 하나는 불트만의 케류그마의 개인주의적-실존주의적 해석(현재적 종말론) 즉 ‘복음의 종말론적 교훈의 비신화화’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과 이 땅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미래적 종말론(futuristic apocalyptic)에 대해서이다. 본서는 경건주의적-개인주의적 기독교 해석에 대해서 역사와 사회, 정치적 책임성에도 주의를 돌린다. 이는 오늘의 맑스주의의 유토피아원(사상)에 대해서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를 둔 희망과 미래’를 제시하려는 것인데, 이는 몰트만의 메시야적-종말론적 그리스도론을 의미하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며, 희망의 신학을 보여준다.5)
II. 희망에 관한 명상 - <희망의 신학> 방법론
1. 기독교의 종말론은 어떠한 합리적 근거(logos)를 가지고 있는가 ?
종말론이란 최후의 사물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마지막 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 세계의 심판, 하나님 나라의 완성, 죽은 자의 일반적 부활, 만물의 새로운 창조가 l기독교 종말론의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그 자체를 지탱시키는 장래의 희망을 자기의 삶에서 제거하고, 그 장래를 피안이나 영원에로 추방했기에 희망은 항상 교회에 거슬러 왜곡된 형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종말론은 기됵교 희망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기대된 것과 그것에 의해서 움직여진 희망을 포함한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의 부록이 아니라,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고, 앞을 향한 전망이며 성취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에서 살고,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미래의 약속을 얻으려고 애쓰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은 메시야에 의해서 일어나는 고통이요 수난이다. 모든 기독교의 선교, 실존, 성격이 종말론적으로 지배되어 있다(롬 15:13, 희망의 하나님). 기독교의 종말론은 미래 일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일정한 역사적 현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의 부활의 현실을 인식하고 부활자의 미래를 선포한다. 예수의 역사와 부활에 기독교 종말론이 기초를 두는 점은 유토피아적 희망과 구별지어주는 시금석이다. “그는 우리의 희망” (골 1:27)이란 신앙은 아직 실현되지 않는 그의 미래를 향한 약속을 지칭하기에 종말'론'(Lehre, Logos)이란 표현은 맞지 않을 수 있다. 로고스가 뜻하는 반복적이며 경험적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약속의 희망에 대한 진술은 그것이 오고 있는 현실을 해명하고 있기에 항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경험과 희망은 상호 모순이다(롬 8:24-25). 기독교 종말론은 부활의 희망이며 여기서 보증된 의의 미래가 죄에, 생명이 죽음에, 영광이 고난에, 평화가 전쟁에 거슬러 있는 모순에서 그 진리를 증명한다. 이러한 모순에서 희망은 스스로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종말론은 먼 곳에서만이 아니라 고난, 악, 죽음이 경험되는 현실에서의 투쟁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2. 신앙의 희망
신앙은 세상의 출애굽에 가담하여 고난과 죽음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으로써 억압이 없는 열린 영역, 자유와 기쁨의 전망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전개되는 자유의 미래의 시작을 인식하며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매어준다. 희망은 이 신앙을 그리스도의 포괄적인 미래로 열어준다. 그러기에 희망은 신앙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다. 신앙의 그리스도 인식이 없으면 희망은 허공에 떠 있는 유토피아가 되며, 희망이 없으면 신앙은 무너지고 죽은 신앙이 된다. 신앙은 기대적인 희망 속에서 십자가에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 무너진 그 한계를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앙은 부활에서 하늘의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서 있는 땅의 미래를 본다. 그래서 신앙이 희망으로 발전되는 곳에서는 인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있으며, 인내가 아니라 초조함이 따른다. 신앙 자체가 인간 속에 있는 ‘불안한 마음’(cor inquietum)이다.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는 자는 현실과 타협할 수 없고 이와 대립하며 고난을 당한다. 희망은 인간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불안하게 한다. 희망은 인간을 나그네로 만들고 영원한 도성을 찾아가는 충돌과 힘을 준다.
3. 절망의 죄
신앙이 살아 있으려면 희망에 의존하듯이 불신앙의 죄는 희망의 상실에서 온다. 죄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실망, 체념, 게으름, 비애도 이에 속한다. 하나님을 인간을 높이고 인간에게 넓은 세계를 향한 전망을 주셨지만, 인간은 뒤에 처지고 실망한다. 그가 게으르기에 희망을 결핍한다. 중세기에는 게으름(acedia) 또는 비애(tristitia)를 죽음에 이르게 하여 성령을 거스리는 죄가 된다고 가르쳤다. 희망 상실은 불손(=오만)과 절망의 형태를 취한다. 불손은 하나님이 바라는 성취를 미리 제맘대로 선취하는 것이요, 절망은 바라는 불성취를 미리 제맘대로 선취하는 것이다. 19세기 초에 우리는 독일 관념론에서 불손의 인간상을 괴테, 실러, 맑스 등에서 보는데 이들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와 신의 종의 형태를 반항한 Prometheus 를 현대의 성자로 삼았다. 여기서 철학적, 혁명적 천년왕국설이 나왔고 그리스도는 이의 혁명가로 변모시켰다. 20세기 중엽 실존주의적 문학에서는 Prometheus가 Sisyphus(헛되이 돌을 언덕위로 굴러 올림)로 변모한다. 그는 정녕 길, 싸움, 결단, 인내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다만 성취의 희망은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도 희망이 없는 성실한 친구로 된다. 삶을 새롭게 하는 힘은 오만, 절망 가운데에는 없다. 그것은 다만 지속하는 확실한 희망 가운데 있다. 종말론의 희망의 여러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모든 가능적인 것, 즉 희망의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으로 충만해 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2:5)고 말씀하시는 분의 손 안에서 현실과 인간을 본다. 이 약속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제 여기서, 생이 새로워지는 자유와 이 세상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4. 희망은 사람을 속이고 현재의 행복을 빼앗는가 ?
희망의 신학에 대한 격심한 반대는 오만과 절망에서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겸손한 묵인의 종교에서 일어난다. 희망은 사람을 아직은 없는 미래에 던져 버린다. 추억과 희망은 분리되지 아니한 현재에 관해서 그를 속이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참된 현재는 시간에 내재하는 영원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희망이 우리를 속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현재의 행복만이 아니고 그 이상의 것, 곧 현재의 하나님 영원히 현존하시는 하나님이다. 희망은 이러한 영원한 현재에 속한다.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운동과 변화(파르메니데스적과 반대개념), 역사와 미래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 존재의 이성은 역사의 힘으로부터 영원한 현재로 우리들을 해방하고 높여 준다. 완전한 현재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다. 신약성서의 ‘지금’이나 ‘오늘’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인, 영원한 현재의 ‘지금’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된 장래의 새로운 것이 빛나는 ‘지금’이며, ‘돌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종말론적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만 대망의 범주로 파악되고 이는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뜻할 뿐이다. 신앙자는 삶의 밤낮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날의 서광속에 놓인 것인바, 거기서는 밤과 낮, 지나가는 것과 오고 있는 것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래서 신앙자들은 주어진 대로의 날들을 넘어서 창조자와 부활자의 약속에 따라서 오고 있는 것들의 대망 속에 사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사람을 속일까 ? 그럴 수가 없다. 그와는 반대로 바로 그것이 현재의 행복이다. 희망은 행복도 불행도 꿰뚫고 자나가는 것, 죽어가는 것, 죽은 것까지라도 장래의 하나님의 약속속에서 본다. 그러기에 희망없는 삶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지옥이란 실로 희망상실이다.
5. 희망과 사고
기독교의 종말론은 희망을 세상적 사고 속으로 가져오고 사고를 희망 속으로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안셀름은 fides quaerens intellectum - credo, ut intelligam (지식을 찾는 신앙 -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는 근본 명제를 확립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spes quaerens intellectum - spero, ut intelligam (지식을 찾는 희망 - 나는 알기 위해서 희망한다.)라는 근본 원리를 따르는 것이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은 스스로 믿는 바를 알기 위해서 희망한다. 그러기에 모든 인식은 하나의 선취적 단편적인 인식이며, 약속된 장래의 서곡으로서 희망에로 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개시하는 희망은 사유속에 있는 추진력, 불안, 탄식이다. Spes quaerens intellectum 은 종말론의 출발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하는 한 종말론은 ‘학문적 희망’(docta spes)이 된다.
III. 종말론과 계시 - 종말론의 재발견
19세기 말 바이스(Johannes Weiss)6)와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7)를 통해 시작된 예수의 메시지와 실존 그리고 윈시 기독교에 대한 종말론의 중심적인 의미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세계 1차 대전 뒤 ‘변증법적 신학’의 창시자들에 의해서 비현실성으로 선고된 종말론이 주석적 연구 분야 뿐 만이 아니라 교의학 연구의 중심주제가 되었다(K. Barth, R. Bultmann, Althaus). 하지만 이런 연구동향이 원시 기독교적 종말론의 발견을 더 이상 전개시키지 못함은 종말론의 초월적인 이해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진리를 발견하기에 희랍적인 로고스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열린 방식에서 역사가 경험되었다. 진리의 나타남(Epiphanie)이 아니라 진리의 계시(Apokalypsis)이다. 종말론적 메시지의 참된 이해를 위해 신구약 성서에서 보여주는 약속을 알아야 한다. 구약성서에서의 하나님은 약속의 방식으로 약속의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스라엘 주변세계의 종교는 그들 나름대로 계시의 종교인 신들의 에피파니 종교 (Epiphanienreligionen)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계시는 약속으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개념과 불트만의 인간의 ‘참된 자기 존재의 드러냄’으로서의 계시 이해 속에는 어떠한 종말론의 이해가 깔려 있는가 ? 자기 계시의 사상이 칸트가 사용한 의미인 ‘초월적 종말론’의 영역안에 표현되어 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2판 (1921년) 은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이 그 기초를 이룬다.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을 초월하는 의미이기에 그것은 모든 순간들과 비교될 수 없다” (참고 롬 13:12, 고전 15장). ‘자기 계시’의 사상은 19세기의 헤겔학파의 신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같이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에서 그들의 스승인 헤르만에게서 배워 계시와의 관련에서 ‘자아’를 강조했다. 헤르만은 그의 저서 <Gottes Offenbarung an uns>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동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다르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라고 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행동과 인식을 결합하는 현실주의에 바르트와 불트만은 일치한다. 이후 바르트는 자기계시의 사상을 신학적 인격주의로 향하지 않고 삼위일체론의 관련에서 발전시켰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의 선포와 결부시킨다. (내재적 삼위일체론)
불트만은 헤르만에게 보다 충실했다. 그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진술의 배타적인 실존관계, 즉 자기 관계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자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는 관계에 있다. 인간은 창조에 의해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지향되어 있다. 그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의 구조이다. 인간의 실존의 문제 안에서 하나님의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다만 하나님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얻고, 자기 자신을 얻는 곳에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얻는다. 성서의 증언이 실존으로부터 실존을 향하여 말함으로써 실존적 해석과 비신화화의 프로그램이 규정된 것이다. 이리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Deus dixit) 행동 속에 있는 객관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간의 주체성으로부터 구별하고 하나님의 ‘자기’를 인간의 ‘자기’에서 분리함으로써 헤르만에게서 떠났지만, 불트만은 하나님과 자아의 숨은 상관관계의 마력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불트만에게는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척도와 해명이 되지 않고, 거기에 인간의 본래성 또는 자아의 해명이 대신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점진적인 계시’로 이해하려고 함은 계시를 역사적으로 보려고 한데에서 기원한다. 이 개념은 근래의 계약신학(Föderaltheologie), 17세기, 18세기의 예언적 신학과 경륜적 신학에서 유래한다. 구원사적 신학을 가능케 한 조건은 신학적으로나 세속적으로 현대의 탄생과 연결되어 있는 묵시문학적 희망과 사고의 부활에 있다. 그러나 이 신학은 현대의 정신 속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심오한 교회의 가르침의 진부한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신학적 고려를 초월적 주관성의 반성철학에서 대답해 보려는 시도는 W. Pannenberg, R. Rendtorff, U. Wilckens, T. Rendtorff 등이 했다. ‘역사로서의 계시’ 논의는 우주로부터의 하나님의 증명에서 오는 하나님에의 물음에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그의 역사의 행동의 거울속에 있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자기계시‘의 인식이 나타난다. ”전체로서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이는 종말에서 비로소 계시로서 인식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는 시작이 아니라 계시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난다“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의 대망과 기독교 종말론 사이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모든 부활의 신학에는 십자가의 종말론 (eschatologia crucis)의 성격이 들어있다.
성서에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 (Epiphanie)으로 이해되는 때, 결국 그것은 항상 희랍적 사고와 탐구의 영향이다. 이는 출애굽과 부활의 하나님 보다는 파르메니데스적 하나님을 가리킨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 영원한 현재의 에피파니의 형태가 아니고, 진리의 약속된 미래의 묵시로서의 이해에 필요하다. 기독교 계시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인간 예수에게서 표현된 것’ (Ebeling)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의 운명’ (Pannenberg)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양자가 서로 결합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질적인 차이 속에서 예수의 동일성에 있다. 끝없는 모순 속에 있는 이 동일성은 신학적으로 동일화의 사건, 하나님의 진실의 행동으로 이해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은 자로서 자기를 계시하고 확인한다. 그 점에서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에서 계시하고 동일화한다. 그는 장차 올 그의 영광의 길에 있는 주로서 자기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미래의 계시는 그의 나타남들에 있어서는 ‘감취어 있는 것’이다. 희망을 통해서 신앙자의 삶은 그와 같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다. 신앙은 희망과 기대 속에서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감춰진 것으로서 발견한 것의 계시를 향해 있다. 그의 계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며 아직 끝나지도 일어나지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부활에서 약속되고 보증되었다. 부활하신 주의 계시는 싫든 좋든 (nolens volens) 전진하는 역사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최초의 동력’ (primum movens)과 같이 역사적 과정의 꼭대기에 있다. 인간과 그의 세계의 현실은 이 계시와의 관계에서 역사적이 되고, 이 계시 위에 둔 희망은 불안한 약속 (promission inquieta)이다.
약속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만나는 사람은 그의 존재 그대로서 인정되고 앞으로 될 존재로서 구별된다. 그는 희망 속에서 자기자신이 된다. 그래서 신앙자는 본질적으로 희망하는 자가 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직 미래이다. 그는 자신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의 미래는 전적으로 부활하신 주의 과정의 결과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미래를 그리스도의 미래 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는 희망에 있어서 (in spe)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고 사물에 있어서 (in re)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게 되지 못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homo absconditus 가 된다. 약속된 진리의 미래로부터 세계는 역사로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종말론적 의미는 회상과 기대에서 역사를 위해서 의미를 연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 실존의 문제성과 현실의 문제성을 전체로서 받아들이고 약속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 존재와 세계의 종말론적 문제성으로 처리하는 방식에서 인간 현실과 인간에 관한 세계의 현실에 관해서 그의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죽음에 위협을 받는,’ ‘허무한 것에 속하는,’것은 일반적 실존의 경험과 세계 경험이다. ‘희망을 향하여’는 분명히 기독교 신학이 이 문제들을 과제로 삼고 그것들을 약속된 하나님의 미래로 지시하는 방식이다.
IV.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미래 -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1. 복음과 약속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사람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고 또 의, 생명, 자유를 함께 포함한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에 관한 복음 선포 가운데 이 미래가 그리스도의 약속에서 이미 현재가 되어 있다. 복음은 이 미래가 현재적으로 동텄다는 것을 선포하며 그것으로써 이 미래가 복음의 약속에서 통고 되는 것이다.
예수의 신비에 접근해 가는 길은 그의 인격과 그의 역사의 구체성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기독론에 이르는 두 길은 다 구약성서를 거쳐야 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에서 부활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신 야훼이시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이 두 명제는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첫 명제가 뜻하는 것은 예수에게 계시된 분은 출애굽과 약속의 하나님으로서 ‘존재의 본성으로서의 미래’를 가진 하나님으로서 생각해야 하며, 헬라적 하나님 이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영원한 미래,’ 플라톤의 최고의 이념, 아리스토텔레스의 처음 원인 등과 동일시 될 수 있으나, 그의 속성은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약속의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에 의해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 되셨다. 두 번째 명제인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다룬다면 예수는 구약성서의 약속사와 연관을 맺고 또 갈등을 지으면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율법과 약속의 갈등이라는 관계에서만 이해되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인류의 구원이 된다(갈 3:28).
2. 약속의 하나님 (히 10:23, 11:11 등)
약속하신 이는 믿음직하다. 그의 신성은 심판과 은총의 모순 가운데 믿음직하게 되는 그의 신실성을 지속하는데 성립한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랍비전승과 묵시문학 전승에서 하나님은 약속하는 하나님이고 그의 신실성은 약속이 성취되는 것으로 확증되고 이싿.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율법, 의에 대한 관심을 초점에 맞추듯, 바울도 아브라함의 인격을 그의 복음과 약속을 석의하는 중심점에 세웠다. 바울이 율법을 대립시켜 모세와 아브라함을 ‘약속의 아바지’로서 파악하는 근거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불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결’이나 약속의 종결이 아니고 갱생과 해방과 효력 발휘에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며 그 근거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능력이 없던 것을 있게 하도록 할 수 있는데 있다. 그의 약속 성취는 순종하는 사람의 힘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에 대립하고 약속에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데서만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 완성으로 입증된다.
3. 원시 기독교에서의 실현의 감격과 십자가의 종말론
기독교가 묵시문학적, 메시야 대망적 유대교의 영역에 머무르는 한, 그리스도의 사건과 복음을 종말론으로 이해함은 바울에게는 자명한 일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형성된 교회는 벌써 ‘갱신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신비종교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안에서 논쟁의 대상으로 삼은 헬라주의적 열광주의 가운데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신비주의적 기독교의 열광주의 명백히 그 전제를 원시기독교의 묵시문학적 열광주의 곧 성령체험에서 오래 기다렸던 약속이 성취된 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은 것에 두고 있었다. 영원의 현재에 집중하는 현재적 종말론의 이해로부터 예수의 말씀과 행위, 죽으심과 부활을 약속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약속의 사건으로부터 이제 구속의 사건이 생겨났다. 성례전의 사건은 신성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한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높이 추대되고 즉위하는 식으로 이해되고 그의 성육신에 연관시켜졌다.
역사가 종말론을 삼키는 것이 아니고 (슈바이처), 종말론이 역사를 삼켜버리는 것도 아니다 (불트만). 종말에 관한 논리(Logos)는 아직 없는 것의 약속이며 그것이 역사를 지어간다. 종말을 통고하는 약속 또 그 안에서 종말이 스스로 통고하는 약속이 역사의 동력이요 동기요 용수철이요 진통이다.
5. 하나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만일 그대가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롬 10:9) 원시 기독교의 선교설교의 핵심은 (1)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행 2:24, 3:15, 5:31, 고전 15:3 등) (2) “우리가 그것에 대한 증인이다” (3) 그 이 안에 죄인을 의롭다 인정하는 미래와 죽음에 내던져진 자에게 생명을 주는 미래가 근거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제일되는 질문은 언제나 부활절 증인들의 보도와 선포의 중심사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기사에 대한 양식사적 방법 때문에 부활의 사건을 제자들의 신앙의 사건으로 실존화시킨 부활해석은 타당치 않다. 예수의 부활은 결절적으로 십자가에 죽은 자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 부활사건이 새로운 서곡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면 그의 재림을 생각한다. 재림이라는 것은 현실로는 떠나가신 이의 다시 오심이 아니고 임박한 내림이다. 재림(임재)는 내일이면 지나가 버릴 현재가 아니고 오늘과 내일, 사람이 기다려야 할 현재이다. 우리에게 내림하는 현재 곧 ‘다가오는 미래’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립해서 어떤 새 건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종말은 종말론적 약속에 의해 그때 그때 체험되는 현재를 과거의 파괴와 미래에로의 출발에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계시이다.
7.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와 인간의 자유
종말론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지배로 약속되고 기대된 것 가운데 있다. 이스라엘 초기에 이미 희망은 하나님의 지배의 약속을 근거로 해서 세워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 약속과 신실과 완성에서의 지배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의 지배아래서의 생은 새로운 지평이 전개되며 순종하여 미래를 맞을 준비를 갖출 역사적인 유랑을 의미한다. 약속으로 시작되고 약속을 향하여 열려진 생을 말한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메시지와 행동, 기적과 비유는 ‘하나님 나라’로 표현된다. 예수는 메시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직접 자기 자신의 현재의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 십자가에 죽으신 이의 부활 해석은 하나님 나라 약속의 이해에 대해 규범적이 된다.
1)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나타남에 관한 체험은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가 열어 놓은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와 도래를 ‘변형시켰다’ (verstellen).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서 형태를 나타내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파견과 사랑에 의하여 그의 고난이 뒤따르도록 되어 있다.
2)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기독론적으로 이해될 뿐 아니라 새로운 방도로 종말론적으로 이해된다. 의를 위한 주림, 고난, 약함, 무법성, 무분별속에서 모든 것이 의와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진리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배타적이 아니고 포섭적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 그의 이웃됨, 그와 함께 고생함이 포괄적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될 것을 희망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promissio)은 세상을 향한 사람의 선교(missio)의 근거를 이룬다. 이는 육체적 순종 가운데 성령의 밖으로의 행진을 근건해 준다 (롬 8:23, 고전 15:42 참고).
(요약: 미래가 가져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이의 부활인 그리스도 사건에 의하여 단한번 신뢰할 만하게 기대될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희망의 종국이 아니고 희망안에서의 확신이다 (히 11:1).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첫째’(prius)이지만 희망은 이 신앙가운데서의 ‘우위성’(primat)을 가진다. 시간적으로는 뒤지나 논리상 앞선다.)
V. 새출발의 교회 - 희망의 공동체
(현대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종말론적 이해를 위한 고찰)
1. 절대자 숭배와 현대사회
우리는 현대사회 안에서 종말론적 희망으로 사는 구체적 형태를 취급할려고 한다. 여기 ‘출애굽의 교회’(Exodusgemeinde)라는 말은 ‘나그네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의 실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히 13:13-14 참고). 1537년에 제정된 슈말칼덴 신조에 의하면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순수한 말씀과 성례전의 바른 집행으로 여러 가지 입장과 바른 행위를 (cognitione. vocationum et verorum operum) 비추고 거기에 영양을 공급받는다”. 이는 신자가 매일의 복종에서, 세상직업에서, 사회적 역할에서, 자기를 신자로 나타냄을 의미한다. 그런데 16세기 개혁운동의 제3의 통찰은 현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개혁운동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이는 사회학적 근거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국가나 가정을 의미하지 않고 근대적 산업조직으로 구성된 사회이다. 인간관계가 물질과 상품으로 매개되는 공공생활을 의미한다. 이 문명의 현대성은 그 사회를 가치와 종교로부터 중립화시키고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이리하여 현대사회는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콘스탄틴대제 이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회는 많은 사회변동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윤관을 가진 공공적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해감에 따라 교회는 한세기동안 익숙했던 공적예배(cultus publicus) 성격을 상실했다. 이제 사사로운 예배(cultus privatus)가 되었다. 절대자의 예배 (the cult of the absolute)는 사회의 통합원리로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 절대자는 오직 해방되고 사회적 책임을 벗은 주체성 안에 찾아지고 체험될 것이다. 종교는 이제 공적이고 사회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사사롭고 자유로운 활동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과제를 부여 받는다.
2. 새로운 주체성의 예배로서의 종교
산업사회가 종교에 바라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해방된 새로운 ‘주체성의 초월’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신들은 죽고 말았다. 세계는 이미 인간에게 어떠한 고향도 어떤 숨을 곳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등장한 것이 ‘주체성의 형이상학’이며, 여기서 객관적 세계는 인간의 주체에 의해 계획 되는대로 맡겨졌다. 합리화 작업은 세계에서 ‘마술적인 것을 빼버렸다’ (Max Weber).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오직 주체성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해야 했다.
이러한 주체성의 철학에 상응한 신학이 실존주의적 신학(신앙론)이다. 이 신학은 만남, 결단의 윤리적 현실 안에 거주한다. 이 신학은 그래서 정치적, 사회적 생활을 위한 윤리적 지시는 주지 못한다. 그래서 실존주의적 정열도 기독교 신앙이 사회적으로 버림받게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3. 공동사회의 제의로서의 종교
현대사회가 종교에 바라는 기대 중 두 번째는 공동체(Gemeinschaft)에로 동료인간(Mitmenschlichkeit)을 끌어 올려 인도할 일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인간을 그 인간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여겼던 모든 제약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은 결국 ‘공동체’라고 하는 이념에 고착되었다, ‘공동체’는 이익사회(Gesellschaft)와는 달리 분명코 근대 이전의 목가적인 촌락의 인간관계이다. 이 개념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유래한다. 공산당 선언, 민족공동체 개념, 소집단 등이 이의 결과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인정미, 친근미, 이웃, 고향을 느낄 수 있기에 ‘진정한’ 공동체를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사회에서는 행동의 기술적 규제가 있는데 대해서 여기서는 인간의 자발성이 모든 문제를 새롭게 해결한다.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간을 위한 일종의 노아의 방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비세계적이 될 수 있다. 이렇다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말할 수 있어도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교회는 사회적 모든 제도에 대한 현실적인 반려가 되기 어렵다.
4. 제도의 예배의식으로서의 종교
현대사회가 기독교적 종교 활동에 기대하는 제3의 역할은 놀랍게도 다시 공적 요구를 채우는 사회제도가 되는 것이다. 18세기 산업사회 이전의 시대보다도 현대의 계몽주의 이후의 문화는 다시 종교제도와 결탁한다. 이런 새로운 제도는 다시 이전의 불안정한 시대에 개인을 덮어 씌웠던 항구적인 결단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상에서 살핀 ‘주체성의 예배로서의 종교’ ‘공돛에의 예배로서의 종교’ ‘제도의 예배로서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역할을 개개인간의 의욕이나 기피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자기 이해에 속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생겨났다. 이는 언제나 사회의 ‘자기 이해에 속한 것’에 기독교 신앙의 신학적 ‘자기 이해’가 관계 맺게 된 것이다. 이 연관이 비판적으로 의식되어진 곳에서만 이 '공동 생존'(symbiose)이 해결될 수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것이 사회적 자기 이해에 배치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생명 속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현대 산업사회가 그들에게서 기대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기대해야 한다면, 기독교는 새로운 출발(Exodus)을 해야 하고, 그들의 현재의 사회적 역할을 새로운 형태의 ‘바벨론 포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하나님 나라 기대에 있는 기독교
신약성서에서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고, 종말론적 기대의 지평에서 교회의 회집과 사명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나 교회가 기다리는 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하고 통고하고 파견하는 말씀에 의해 산다. 선교, 세례, 성만찬이 모두 종말론적 긴장 가운데 서 있다. 교회는 파루시아와 그리스도의 부활 사이에 서 있다. ‘세상을 위한 교회’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대로 세상을 섬기고 세상에 일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기대는 그리스도의 파견과 사도직에 있어서 밝히 드러난다. 여기서 ‘세상을 위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활기 있는 희망을 북돋우는 것이 선교이다. 이는 모든 기독교인의 임무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선교행위로 선포하는 것의 의미는 구약성서에 있다. 예언자적 종말론의 배경에서 본다면 선교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화해, 죄의 용서, 하나님 상실의 폐기를 목표로 하며 살롬의 완성이다.
6. 사회에 있어서의 기독교의 소명
부활한 그리스도의 장차 이뤄질 지배는 단순히 희망, 기대 될 뿐 아니라 이 희망은 역사 가운데서 생과 행동과 고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선교의 사명은 생을 역사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의미한다. 믿고 희망하는 모든 자는 부름을 받은 자(vocatus)이며 자기의 생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되는데, 믿음의 자유를 얻는데 헌신해야 한다. 이 소명과 위탁은 개인의 구체적 봉사와 사회의 인간화를 통해서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강요한다. 이같은 희망의 삶은 이 세상에 대해서 변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게 미래의 세계를 희망으로 열어 주는 것이 교회의 과제이다.
참고문헌
원서: Moltman, J., Theologie der Hoffnung - Untersuchungen zur Begründung 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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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이 말하는 그의 신학 by 이덕휴-dhleepaul 2021. 10. 26.
1. 희망의 신학(1964년)
내가 이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64년에 출간된 "희망의 신학"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원래 내가 의도한 것은 그 시절에 잡지 "Evangelische Theologie"(개신교 신학)에서 이루어진 "약속과 역사"에 관한 논의에 대해 나의 입장을 표명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여기서 나는 게하르트 폰 라트(Gehard von Rad), 발터 침멀리(Walter Zimmerli), 한스-발터 볼프(Hans-Walter Wolff), 한스-요하힘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 등에 의해 대변된 "구약성서신학"과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의해 세워지고 특히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에 의해 수정, 발전된 "신약성서신학"을 중재하려고 했다. 앞에서 거론한 구약성서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에 있었다면, 불트만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과 신앙 안에서 실천된 "역사의 종말"의 현재적 종말론에 의해 규정되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이를 다음과 같은 그의 도발적인 테제로써 문제삼았다: "묵시문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어머니이다." 그가 말한 "묵시문학"은 물론 세계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사변이 아니라, 언제 하나님이 그의 나라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될 것이며, 언제 그의 정의가 세계 안에서 승리할 것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 "역사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미 현재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나 자신의 신학사상은 괴팅엔 대학에서 발터 침멀리와 에른스트 케제만에게서 배운 내용을 통하여 이미 이런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홀랜드의 신학자 아놀트 반 룰러(Arnold van Ruler)를 통하여 나는 "사도직의 신학"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 "종말을 바라봄"(Walter Freytag)으로써 메시야적인 동기를 갖는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책 속에서 나는 종말론적 희망과 역사적 실천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다루었다.
그 후에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희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1960년에 일어났다. 나는 스위스에서 휴가를 갖는 동안에 "희망의 원리"(Prinzip Hoffnung)를 동독판으로 읽었고, 이 책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스위스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 즉시 받았던 나의 인상(印象)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이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원시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영은 오늘의 그리스도교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희망의 "신학"에 착수했다.
나는 성서의 약속의 신학과 묵시적 희망의 신학, 사도직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 유물론적 성분을 지니고 있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희망의 철학을 서로 결합하였다.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를 계승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나는 그를 추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에 칼 바르트가 바젤에서 의심한 것처럼, 내가 그의 희망의 원리에 그리스도교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그 자신의 전제를 근거로 삼아 비교해 보려고 했다. 블로흐가 현대적인 무신론만을 희망의 근거로 생각했고, "무신론이 없다면, 메시야적 희망도 없다"는 테제를 제시했다면, 나는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켜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 블로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위로를 받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철학적으로 다시 복권시켰고, 그래서 "억압당하고 멸시받는 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정의의 유토피아를 실천하려고 했다면, 내게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희망과 성서적인 하나님 증언에 기초한 기다림이 중요한 것이 되었고, 사회적 유토피아와 정의의 유토피아를 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우리의 논의는 자주 단순한 양자택일로 빠졌다: 블로흐는 초월성이 없이 초월하고, 나는 초월성을 지니고 초월한다. 블로흐는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희망하고,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희망한다.
"희망의 신학"에 착수할 때, 나는 중세기의 "사랑의 신학"과 종교개혁 시대의 "믿음의 신학" 다음으로 희망, 그 근거와 그 미래, 그 경험과 그 실천, 즉 - 지금껏 실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상을 우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는, 임마누엘 칸트가 천명한 것처럼, 현대의 유일한 종교적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의 신학은 현대적인 신학이다. 하지만 책을 써 내려가는 중에 내게는 희망이 점점 더 강하게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희망에 관하여 신학하지 않고, 희망으로부터 신학했다. 신학적으로 희망으로부터 사고한다는 것은 신학 전체를 이 초점에 모아서 이 희망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에 덧붙여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매개체이고,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음색이며,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기대되는 새 날의 여명의 빛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은 그 미래의 목표로부터 생각되어야 한다. 종말론은 그 마지막이 아니라 그 시작이어야 한다"(12쪽). 그러므로 종말론(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론)만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역사를 거쳐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든 이론들은 다르게 나타나며, 새롭게 반성될 수 밖에 없다. 나의 "희망의 신학"은, 그 당시의 역사의 경험, 그리스도교적 역사이해와 역사적 실천과 관련을 맺으면서, 나의 전제들과 가능성의 틀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해내었다: "신앙이 희망으로 나타날 때면, 언제나 신앙은 잠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게 하며, 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더 이상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고난당하며, 이에 저항하기 시작한다"(17쪽).
그러나 자연철학이나 자연과학과 관련된 창조론 분야는 아직까지 새롭게 형성되지 않았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기꺼이 받아들였던 "우주적 종말론"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1245쪽) 외에는 "희망의 신학"에서는 그것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당시의 나는 묵시적 종말론에 나타난 "우주의 역사화"를 생각했다. 나는 하늘과 땅의 새 창조, 즉 요한 계시록 21장으로부터 창조론을 구성하려고 했고,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더 이상 창세기 1장으로부터 창조론을 구성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964년에는 "생태학적 위기"가 아직 내 의식 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 당시의 우리는 여전히 역사의 충격 때문에 더 경악하였고, 그 가능성에 더 사로잡혔다. 1985년에 이르러서야 나는 1964년 이래로 내게 절박한 것으로 느껴지던 창조론을 출간할 수가 있었다.
1964년에 희망, 새출발이라는 주제는 말하자면 이제 막 떠오르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위해 문호를 개방했다. 미국에서는 민권운동(Civil-Right-Movement)이 극에 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교회일치운동은 큰 진보를 이룩하였다. 이전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많은 것들이 60년대에는 가능해졌다. 그러나 1968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희망으로 인해 쓴 환멸을 맛보았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희망의 신학"의 한 가지 사상이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 즉 "창조적인 제자도(弟子道)"의 관점 안에서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을 함께 보는 시각이었다: "종말론은 악한 세계로부터의 영혼의 구원, 개인적 구원, 시련당한 양심의 위로만을 뜻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정의의 희망의 실현,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온 피조물의 평화를 뜻하기도 한다"(303쪽).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사귐을 창조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질서를 형성하는 사랑 안에서 창조적인 제자도가 종말론적으로 가능해진다"(309쪽). 요한 밥티스트 메츠가 60년대에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맑스주의의 대화 속에서 발전시킨 정치신학은 이 영향을 받았다. 제임스 콘(James Cone)이 미국의 억압받는 흑인들의 인권 운동(Black Power Movement)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한 흑인신학은 이 사상을 수용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츠(Gustavo Gutiérrez)의 해방신학도 역시 이런 노선으로 기울었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이 관점 안에서 예수의 민중(오클로스)을 하나님 나라의 민중으로 발견했다. 나는 채 알지 못했지만, 많은 영역에서 이러한 역사적-종말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새로운 실천적 장(場)들이 발견되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1983년에 니카라과를 방문했을 때, 그는 사제들에게 백성의 정치적 해방운동에 참여하지 말고 백성이 영생을 얻도록 도울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양자택일을 그 당시의 우리는 그릇되다고 선언했다. 나는 영생을 믿기 때문에, 백성의 삶을 위해 투신하게 된다. 나는 치명적인 억압권력에 맞서서 싸우는 백성의 저항에 참여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다. 여기서 "종교적으로 단지 영생만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세속적으로 단지 이 세계의 변혁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나누는 자이다.
2.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
그리스도교 희망의 신학적 근거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부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신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는 자는 항상 다시금 이 근거의 다른 측면, 즉 부활한 자의 십자가를 회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희망의 신학"의 그리스도론적 출발점의 논리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소 지려고 할 바로 그때에 "창조적인" 것이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도 실천으로부터도 나왔다. 그러므로 나는 1970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신학이 형성되어 감에 따라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학, 교회와 사회에게 던져 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성공과 행운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눈이 어두운 문화 속에서, 실패하고 고난당한 그리고 수치스럽게 죽어 간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회상시켜 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눈을 떨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일으켜 세계의 희망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회상시켜 주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권력자들과의 결탁을 끊도록 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연대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Umkehr zur Zukunft, 1970년, 14쪽).
나는 "희망의 신학"에서 의도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금 시도했다. 즉 나는 전체 신학을 하나의 초점, 즉 십자가에 모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관점 안에서 신학의 많은 내용들을 이전과 달리 보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게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거와 비판"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 앞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신학이다. 여기서 견디지 못하는 것은 신학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적인 하나님 진술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마가가 시편 22편의 구절로 해석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죽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당한 그리스도의 이 외침은 모든 신학의 종말이든지 아니면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신학의 시작이다. 모든 신학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앞에서 욥의 친구처럼 서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버림당한 신학적 이유를 말함으로써, 신학자들은 모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버림당한 그리스도의 외침이 신학의 비판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거는 신학자들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이러한 하나님 경험을 그들의 모든 하나님 사고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그 당시의 나는 루터가 1518년의 하이델베르크 신앙논쟁을 위한 주제들 속에서 기초한 십자가의 신학(theologie crucis)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능력과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라는 반대형상 아래서(sub contrario) 불경한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며, 이렇게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 그러나 나는 질문을 뒤집어 보았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가 그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골고다 위의 아들의 죽음과 결합되어 있고 그 안에서 계시되는 아버지의 깊은 고난을 깨달음으로써,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의 고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난받는 하나님의 표상은 하나님의 불사성(不死性)과 함께 그의 본질적인 고난불가능성(무감정)도 가르쳐 온 서방의 신학전통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성서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인 이러한 무감정 공리를 극복하기 시작했을 때,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나는 전혀 꿈도 꾸지 못했다. 첫 번째의 발견은 하나님의 열정에 관한 유대교적 표상이었다.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chel)은 이 표상을 갖고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해석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랍비들과 카발라 신학이 가르친 하나님의 쉐히나(Schechina), 즉 하나님이 박해당하고 고난당하는 백성 이스라엘 안에 내주한다는 표상이다.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는 "구원의 별"에서 이를 설명한 적이 있고,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도 이를 설명한 적이 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켜 나감에 따라, 나는 이스라엘 안의 하나님의 수난사를 가르치는 유대교 신학에 접근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그리스도론"이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했다. 내가 내 세대 위에 드리운 아우슈비츠의 그림자 안에서 골고다를 깨달았고, "아우슈비츠 이후의 유대교 신학"에서 도움을 받은 한, 이 말은 옳다.
더욱이 나는 전쟁 말엽에 "하나님의 고통"을 발견하고 이로써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넘어선 일본 신학자 카초 키타모리에게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도 역시 감옥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내 책이 출판된 지 몇 년 후에야 나는 스페인의 철학자요 시인인 미구엘 드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에게서 "하나님의 근심"의 이론을 발견했고,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Berdjajew)에게서 "하나님 안의 비극"의 표상을 발견했다. 나는 나의 책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년)에서 이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렇지만 나를 더 크게 놀라게 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 영국에서 이미 하나님의 수난가능성에 관한 상세한 공개적인 논의가 있었다는 발견이었다. 친구 바론 폰 휘겔(Baron von Hügel)을 통해서 이를 알게 된 에른스트 트뢸취를 제외하고는 대륙의 신학은 온통 이 논의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이온 소브리노(Ion Sobrino)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심화시킬 때, 나의 십자가의 신학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론만으로가 아니라 직접 겪은 고통을 통해서도 형성된 그의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나는 배웠다.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며 고난당하는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의 번역된 글들을 통하여 나는 그들과도 친밀한 사귐을 나누었다. 놀랍게도 정교회 신학의 진영에서 나의 생각에 동의한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드미트루 스타닐로에(Dumitru Staniloae)와 게바르케세 마르 오스타티오스(Geevarghese Mar Osthathios)이다. 그들은 나를 매우 감동시켰다. 또한 십자가의 신비를 위해 특별히 수행하는 카톨릭 교회의 수도회와도 연결되었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겪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관심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희망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일방성에 대한 비판이다. 몬댕(B. Mondin)에 의하면 이 책은 "일부러 그리스도의 한 가지 신비, 즉 십자가의 신비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로흐만(J. M. Lochmann)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은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만은 아니다." 이러한 "일방성"은 분명히 방법론이기 때문에, 나는 "희망의 신학"에 대한 논쟁서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이 책에 나타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방성'을 다른 신학자들, 다른 신학들과 갖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의 인정과 표현으로 이해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 무엇을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빙점(氷點)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이 책은 비현실적으로 모든 측면을 다 포용하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모든 방면에 영향을 주려고 하지 않는, 열린 대화를 위한 하나의 기여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한 논쟁서에도 나는 다시 한번 더 이 비판에 대한 나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일방성'이 미리 선택한 주제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나는 신학의 전체를 그때마다 하나의 초점으로부터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면 물론 지나친 강조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신학의 다른 교설들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들로써 모든 면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지혜를 만족시키는 신학 교과서를 쓸 계획도 아니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나는 그때마다의 정신적, 신학적, 정치적 상황에 대해 특별한 그 무엇을 말하려고 했고, 그 어떤 편을 들었다. 그것들은 시대로부터 시대를 위하여 쓰여졌고, 실로 현재적인 삶의 상황과 갈등 안에 있는 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시대를 초월하는, 순수하고도 정선된 학문적 이론의 의미를 배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론이 주어진 시간(카이로스)의 상황 안에 있는 신학보다 더 영원에 가까운 것만도 아니다. 지나간 20여 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고독한 학자로서가 아니라 신학운동과 신학논쟁의 참여자로서 느끼면서 신학활동을 했다. 이 사실은 내가 받은 영향들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들의 다양성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줄 것 같지만, 이 때문에 나의 신학을 연구하는 많은 박사후보들은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3.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출간된 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교회와 성령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이 일이 필요했는가?"라고 많은 친구들과 비판가들은 물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 십자가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나로 하여금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골고다에서 예수와 그가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나는 오로지 삼위일체론적으로만 파악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삼위일체론의 실질원리이고,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의 형식원리이다"라고 나는 그 당시에 요약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고난" 혹은 "천국의 보좌"라고 일컬어지던 중세기의 유명한 삼위일체론적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십자가의 횡목(橫木)을 손에 쥐고 있고, 여기에 죽은 아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성령은 죽은 아들을 일으키기 위하여 아버지 면전에서 한 마리의 비둘기의 형상으로 그에게로 내려온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려고 했던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나의 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위일체(二位一體)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니케아 신경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하고 찬양하여야" 한다고 고백한 그 성령은 어디에 있었는가? 예수가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역사(歷史)와 이 하나님이 아들 예수와 함께 하는 역사(歷史) 안에서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러므로 저 십자가의 신학이 이위일체론적 신학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에 따른 성령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세미나와 박사후보 모임에서 성령론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그 여러 결과들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에서 발표했다.
2. 다른 이유는 시대사적인 상황에 있다. 60년대에 서구 전체를 휩쓸던 학생소요가 끝난 후 서독의 개신교회는 적합성의 위기에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사람들은 전통과 제도 속에서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그 어떤 것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교회의 이러한 징조가 그 원천으로부터 자신을 갱신할 새로운 기회의 징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가 서 있던,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갈림길은 다음과 같이 생각되었다: 개신교회가 자신에게 위기를 가져다 준 이 길, 즉 국가교회로부터 국민교회로 가는 길, 국민교회로부터 목회자가 국민을 위해 돌보는 교회로 가는 길 그리고 이 교회로부터 제도화된 이 사회의 종교로 가는 길을 계속 갈 것이냐, 아니면 교회가 아래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써 자신을 갱신하고,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공동체(회중) 교회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있다. 같은 시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회중교회"의 구상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교구가 변하여 공동체로 변한다!" 이 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바닥 공동체로부터 카톨릭 교회가 갱신되던 다른 현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함께 모인 공동체는 국가교회와 국민교회로부터 되찾지 못한 종교개혁의 약속이었다. 미국, 제3세계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의 자유교회를 방문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나는 개신교회가 "국민교회"로부터 공동체 교회"로 넘어가야 할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다. 책을 쓰려는 실천적 이념은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에 관한 신학적 이념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서 새로이 성령을 경험하는 일이 없이는, 교회의 갱신이란 전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이 성령론의 관점 아래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설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두 책과 같이 여기서도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의 초점에 맞추어 이해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론에서는 너무나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과 맺는 교회의 관계 안에서, 이 관계를 무시하지 않고 교회의 자기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또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예수의 민중"을 늘 주목하면서,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자기이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못지 않게 나는 성례론, 예배론 그리고 직무론에서 항상 교회의 사귐의 형태로부터 시작하고, 이를 지향하면서 그 이론들을 새롭게 전개하려고 애썼다.
다른 두 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찬성과 거부를 동반한 활발한 논쟁이 이루어졌지만,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또 다른 논쟁서가 나올 만큼 그다지 집중되지 못했다. 이 책은 교회일치운동을 강하게 지향하였기 때문에, 다른 종파들과 교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리고 나는 침례교회와 정교회의 신학자들과 함께 성령론에 관해 새롭게 대화하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복음주의적 교회론, 프로테스탄트적 교회론과 개혁주의적 교회론의 종파적 윤곽을 더 이상 분명히 보진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그러한 종파적 특수성을 더 이상 중요시하진 않았다.
1975년 이후로 나는 여러 모임에서 이 책의 실천적인 기본사상을 논의하였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소책자에서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직접 말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 개신교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추세는 오래된 국민교회를 국민을 위한 종교적인 "구호교회(救護敎會)"로 계속 현대화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물론 공동체로부터 시작해서 공동체를 향해 가려는 새로운 착안점은 수용되었지만, "공동체 교회"라는 표어가 가리키는 것과 같은 방향전환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 개신교회는 목사가 돌보는 "교회 공동체"로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설문조사는 특히 대도시에서 교회라는 이 제도로부터 소리없이 빠져나가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교회를 종교적인 구호기구, 의미의 원천, 직업적인 생활동반자, 다시 말하면, 단지 소속되고 관리되는 기구로만 경험하다 보면, 교회는 공허해지고 교인들은 물이 새듯 빠져나간다. 여하튼 독자적인 결단과 능동적인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요구하는 자발적인 공동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교회의 미래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를 깨닫고 제때에 방향전환을 착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과 사람들은 좌절감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들로 인하여 더 큰 신뢰성을 갖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미리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세 책들이 서로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부작(三部作)"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약 우리가 이 세 책들을 동시에 보면, 내가 분명히 부활절과 희망으로부터 성금요일과 고난으로, 그리고 결국엔 오순절과 성령으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학의 빛을 모으는 초점들은 바뀌었다. 초점들은 매우 의미있게 바뀌었으므로 서로를 보충하며, 나로서는 불가피했던 그때마다의 일방성을 교정한다.
그런 후에 나는 신학을 하나의 초점에 모아서 요약하는 이러한 방법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고, 앞으로는 역으로 신학의 전체에 기여하기 위해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나의 논문들을 제공하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향전환은 단순히 이론적인 이유만을 갖지 않고, 시대사적이고 생애와 관련된 계기들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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