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액(扁額) 에 대한 이해
편액(扁額)은 널빤지에 그림·글씨를 새긴 액자를 일컫는다. 현판(懸板)으로도 부른다.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이 건물의 내용, 즉 좌우명을 보여준다면,
현판은 그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편액 오른쪽 위에 자리 잡는 두인은 글쓴이의 신조와 사유를 담으며 ‘글씨의 시작’을 의미한다.
두인은 편액의 오른쪽 위에, 낙관은 왼쪽 아래에 자리 잡아 편액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편액에 이름은 백문(白文·하얀 글자), 호는 주문(朱文·붉은 글자)으로 새기는 게 편액 제작의 원칙
가계
김돈희(金敦熙,1871~1937)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숙(公叔), 호는 성당(惺堂)이다. 가계는 대대로 중인출신으로 6대 조는 역과출신으로 중국에서 구입한 방대한 장서를 통하여 신진 문물과 지식을 익혀 가전하였으며, 사자관(寫字官)을 역임한 부친 김동필(金東弼) 에게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
관료생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후, 1895~1903년까지 검사 · 주사 · 참의 등을 거쳐, 주전원주사(主殿院主事) · 전라남도검사 · 내각서기랑서판 · 내각주사 · 정삼품통정대부 · 조선총독부위원 · 금석문편찬사로 근무하였다.
서예 활동
오세창(吳世昌,1864~1953), 김규진(金圭鎭,1868~1933),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晉,1853~1920) 등과 함께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창립하였으며, 서법연구단체인 ‘상서회(尙書會)’를 결성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서예가 손재형과 화가 장우성 등도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중국의 여러 서체를 섭렵한 다음에 개성을 가진 자신의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특히 해서(楷書) 글씨에는 송나라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1945~1105)의 서법이 진하게 깔려 있었으며, 단순히 글씨를 잘 쓴 것 뿐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더해 구태의연했던 기존의 서예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인정받았다.
성당 김돈희를 유명하게 만든 '황정견체' 글씨는 오른쪽이 살짝 올라가는 느낌이 있어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이 든다. 이런 필체는 현판으로 제작하기에도 좋아 전국에 있는 사찰과 명문가에 많이 제작되어 걸렸는데, 청암사에도 여러곳에 이러한 글씨가 걸려 있다.
다른작품
김돈희의 친일 문제
오마이뉴스 황정수입력 2019. 9. 12. 19:00 https://v.daum.net/v/20190912190003656
김돈희는 빼어난 서예 실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서예가로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때로는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친일' 전력 때문이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1910년 일제가 강제로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할 때 '한일병탄조약문'을 쓴 것이다. 그가 이 조약문을 쓴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불려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문화계의 주도적 인사로서 그러한 불명예를 피해가지 못한 것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고, 한편으론 정치에 예속된 예술가로서의 숙명 같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또한 그는 한일병탄 이후 중추원에서 근무하며 글씨 쓰는 업무를 맡았고, 3.1독립운동 이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도맡아 함으로써 총독부의 정책에 일조를 했다는 혐의도 제기된다.
이러한 김돈희 삶의 궤적은 그의 장기인 '황정견체'가 당시 일본에서 대유행을 하였고, 한국에 와 있던 일본 관료들이 유난히 좋아하였다는 면에서 더욱 친일 인사로 몰리는 어려움을 겪게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광복 이후 김돈희의 이름은 점차 사라져 갔고, 서예가로서 친일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