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 나무위키 (namu.wiki)
1922년 말,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자, 배상 위원회는 독일에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고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직접 받아내겠다는 명목으로 엄연한 독일의 주권 하에 있던 루르 공업 지대를 군대로 무력 점령하기에 이른다.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를 점령하자 현지 독일인들은 상당히 반발했고 이들은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해 프랑스와 벨기에에게 항의 의사를 나타냈다. 헌데 이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이 전세계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프랑스군이 독일 민간인들을 사보타주 혐의로 처형시켜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희생된 독일인들은 2년 동안 130명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럽 한복판에서 평시에 외국의 민간인들을 처형한 이 사건이 일파만파 알려지자, 프랑스 정부는 맹렬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독일을 동정하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협상국이던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경제적으로 연계된 점과 프랑스의 이런 행동이 독일이 소련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만들 것[26]이라는 우려 때문에 점령에 반대했다. 이러한 국제적 외교문제와 경제적 문제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미국과 영국의 비난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독일의 배상금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도스 안에 찬성한 채 1925년 7월과 8월에 걸쳐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이미 독일 경제는 배상금과 점령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도스 안의 채택 전부터 무리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한 외화를 사기 위해 당시 독일의 화폐였던 파피어마르크를 무식하게 찍어내었고, 이는 곧 독일에 초인플레이션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루르 점령 당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와 벨기에를 향해 총파업을 통해 대항하라고 지시한 독일 정부의 방침 또한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 했다. 1922년 말, 약 160 마르크였던 베를린의 빵 한 덩이는 1923년 말에 이르러선 200,000,000,000[27] 마르크가 되어 있었다.
나라는 초인플레이션에 허덕이고 공산당이 허구언 날 폭동을 일으키며, 국가 안에서는 배후중상설이 돌아 시민들 간에 불신을 만들고, 외국의 군대가 전쟁 배상금 갚으라고 강도처럼 처들어와 자국 시민들을 처형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많은 독일 국민들은 큰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28] 이 사건은 독일 정치에서 기존 중도 좌파 성향의 독일 사회민주당과 중도 우파 성향의 독일 중앙당 양쪽에게 불신을 안겨주었으며, 우익~극우 정당의 형성을 가속화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돌프 히틀러라는 뮌헨의 한 지역 정치인이 뮌헨 폭동을 통해 독일 전국 수준의 네임드 정치인으로 크게 부상하게 된다.
뮌헨 폭동에서의 실패로 체포 당한 히틀러는 1924년 2월 26일, 반역죄로 기소되어 특별 법정에 섰고 히틀러는 자진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전복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나서 그의 뛰어난 언변을 통해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러한 히틀러의 열변은 처음으로 독일 전국의 관심을 끌었고 전 세계 신문의 첫 페이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히틀러의 재판은 24일간 이어졌으며 이 재판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국가에 대한 그의 사상과 감정을 전국에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재판을 담당한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인물이었고, 재판이 그의 정치적 텃밭이던 뮌헨에서 열린 덕에 방청객은 히틀러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가득 찼다. 결국 이러한 점들이 겹쳐 히틀러는 금고 5년형을 선고받고, 편안한 옥중 생활을 즐기며 나의 투쟁을 옥중 집필하다가 8개월이 조금 지난 뒤 바이에른 주 정부에 의해 가석방 되었다.[30]
석방된 히틀러는 정치 노선을 바꾼다. 기존의 폭력적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라는 베니토 무솔리니식 방법론을 버리고 선거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즉, 독일 유권자에게 투표 받아서 집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의외로 1929년까지 나치당은 전국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했는데, 독일의 경제가 차츰 회복되고 서방과의 관계가 안정화되가면서 어려운 경제와 외부의 적에 맞서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라는 나치당의 캐치프레이즈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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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기 미국의 주가 변화와 주요 국가의 실업률. |
그러던 와중, 미국발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경제 위기가 터지고 온 유럽의 경제가 아수라장이 되자 독일의 경제도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로 실업률이 치솟았으며, 사회 전반에 정치극단주의가 팽배해지며 다시금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때 나치당은 혜성처럼 등장해 정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으며, 1928년 총선의 고작 2.6%에 그치던 득표율이 대공황 시기이던 1930년 총선에서는 18.3%로 수직 상승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이어진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당시 전쟁 영웅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36.7%의 득표율을 얻으며, 튼튼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뒤 이은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로 230석으로 마침내 원내 1당으로 등극했으며, 의회 해산으로 치러진 1933년 총선에서 44%라는 득표율을 얻은 뒤 의회 내 비나치 우파와 협력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에 죽음을 알렸다.
Unsere letzte Hoffnung: HITLER
우리의 마지막 희망, 히틀러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의 포스터 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