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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 김산 직지사사적비 조종저(趙宗著)
■조종저(趙宗著,1631~1690)[생1660][문1672] 한양인(漢陽人). 字취숙(聚叔), 號간재(艮齋),남악(南岳).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조중려(趙重呂)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신경진(申景珍)의 딸이다. 『남악집(南岳集)』·『간재신사(艮齋新笥)』
<영남읍지,1895> <국역김천역사지리지>
直指寺事蹟碑
한양인 조종저(趙宗著,1631~1690)
直指寺事蹟碑銘(篆 題)
金山黃岳山直指寺事蹟碑銘幷 序
通訓大夫前行弘文館修撰知製 敎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趙宗著撰
顯祿大夫朗善君兼五衞都摠府都摠管 俁書
承憲大夫東平君兼五衞都摠府都摠管 杭篆
寺在金山黃岳山之東南號直指刱寺時能如大師不用圭杲測之直以▨指指開基處故寺之得號以此云爾或傳墨胡阿道刱一善冷山桃李寺時同時開基者也而本寺事蹟碑毁而失其文俱不可稽也盖墨胡阿道俱」
在新羅訥祇王朝而倡本國佛法者云爾世傳能如大師當麗祖仁同之役以神力濟之又能預告克敵之期麗」
祖統合後作大伽藍于茲以報師優賜土田財寶以爲祝釐之具自是惠宗定宗光宗朝賜賚相踵所以崇奉是」
寺者甚至命學士林民庇撰寺記集王右軍字刻之石能如弟子信弘慧安等八人繼居之以金字寫經五百九」
十三凾函皆以髹㓒黃金飾作海藏堂以安之殿宇之侈龍象之盛蔚然爲東方第一道場凡僧髡之三昧其道」
爲國師者無不由是寺而發蹟焉入我 朝以寺之北崗有吉兆安 恭靖大王御胎仍賜田于寺以寵之」
而巳有學祖大師被 光廟殊遇住是寺而經紀修葺故言有功德於是寺者皆以能如學祖兩大師爲首云」
壬辰之亂寺蕩爲灰爐山人仁守明禮等發願重修繼而有妙衍尙元信洽寶鑑道慧覺淳等幹其役七十年間」
首尾用力殿閣之數供佛之具實復舊貫其榜曰殿者八曰閣者三曰堂者十二曰寮者四曰莊者三曰門者四」
其正室三百五十三楹厨廊倍之山内二十餘菴皆屬焉諸比丘之營葺可謂勤矣寺僧嘉善階呂詳欲記本寺」
顚末鳩財伐石謁余而請文余念茲寺在勝國則協賛神謀肇基于此逮于我 朝長衞胎室爲 國家毓慶之」
基則靈異之跡利益之功豈他山寺比也寺之屢廢而旋興者亦以是夫遂叙其事繫之以銘曰墨道藏經始之迹兮何其茫昧而無可記 作之者能繼之者祖兮惟歷歷若前日事 雙檜蒼蒼兮不老」
與茲寺兮終始
崇禎紀元戊辰後五十四年辛酉七月 日立
(裏面)
粤在辛酉和尙呂祥刱刻此碑未克訖功謾作無用片石時和尙泰鑑慨然興歎滌其莓苔鋟其字畫龍頭龜床極力新備屹立於周甲之辛酉或非尋」常抑亦有待而然也況與前和尙宗益又成虹橋於紫霞門外名曰萬藏以助一寺顔色可不美哉 是歲季夏上澣水原人白鳳集記書
大師處明 儀天 雪閑 貫澄 湛肅 祖遠 卓行 太一 道人振其 法圓 効安 忠勒 鵬一 性安 彩認 定澄 前和尙雪雲 前和尙淸察 前和尙秀卞 前和尙曇現 前和尙宗順 前和尙就運 本寺秩 禪笁 得淳 杜哲 大俊 心哲 璽任 璽冾 智行 宗眼 敏浻 致學 釋能 笁岑 順己 世敏 克明 英印 太淑 位察 定悅 文印 進順 時應 時閑 位天 勝天 熈信 敀冾 觧玉 應伯 神益 神旭 再賛 演輝 寬悟 淸允 會玉 會鑒 會閑 世冠 信己 演己 戒察 省輝 太祐 位星 國念 會湜 雙玉 雙鵬 定訓 天一 國侃 國登 定學 戒哲 彩欠 順和 弘侃 祖演 智元 最訔 宗印 緇允 天俊 法淳 八澄 三元 信還 秋還 護彦 護信 護悅 再熈 若律 秋軒 呂順 明宗 豐性 豐淨 漢淑 月淳 月寬 月明 月和 月林 月訓 月三 賛裕 進哲 日點 豐一 快世 緇尙 緇律 肯行 八英 妙淨 師信 緇白 進善 熈俊 信英 快心 善元 漢鵬 弘敏 月瓊 善察 師訥 豐鑒 豐益 山庵 熈雲 斗星 妙雲 秀賛 雷遠 雪岑 呂淸 一玄 宗任 海淳 普雲 圓悟 時演 順明 定元 淸遠寺位田畓三十結各殿 大雄殿 八相殿 千佛殿 白華堂 冥府殿 影子殿 燃香閣 香積殿 雲門閣 大陽門 泛鍾閣 萬歲樣 天王門 金剛門 紫霞門各房 聽紏軒 寂默堂 說禪堂 摠運寮 摠運寮 聽雨堂 詠流堂 南月寮 月暎寮 淸風寮 明月寮 紙大同各庵 地藏殿 極樂殿 浮屠殿 隱仙庵 明寂庵 見佛庵 能如寺 內院 上院 金剛臺 白雲庵 深寂庵 靈雲庵 雲水庵 妙寂庵時僧統嘉善泰鑑 三綱 首僧智元 直舍惠鑒 三補月暹 持事善摠 書記尙圓 緣化秩 都監 通政宗益 別座通政漢定 片手嘉善最冾 刻手瑞鵬 興策 吳德貴 好賢 供養主大淑 抱遠 國俊 國冾 頓平 抱寬 緇淑 肯察 秋星 尊欠 守演 頓訓 豐訓 師圭 頓暹 肯連 緇覺 抱連 頓湜 頓奎 △修 尊熈 尊信 通律 通遠 緇悅 緇坦 抱善 抱信 頓熈 頓惠 頓己 尊△ 頓演 頓淨 尊惠 △能 朴太振 李重海 明惠 性俊 漢楚 金長守 善訔 通俊 頓律 宏益 善行 宋萬命 冶匠 應熈
崇禎紀元後一百十有四年辛酉秋七月既望立
금산(金山)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 사적비명(事蹟碑銘)과 서(序)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홍문관수찬(行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조종저(趙宗著) 지음
현록대부(顯祿大夫)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우(李俁) 씀
승헌대부(承憲大夫) 낭원군(朗原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간(李偘) 전액을 씀
절은 금산(金山)에 있으니 황악산(黃岳山)의 동남에 있어 이름을 직지사(直指寺)라 한다. 절을 처음 창건할 때 능여(能如)대사가 홀과 해시계를 쓰지 않고 곧바로 열 손가락으로 재고 손으로 개창할 곳을 가리킨 까닭에 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혹은 전하기를 묵호자(墨胡子)와 아도(阿道)가 일선군(一善郡, 경상북도 선산) 냉산(冷山)의 도리사(桃李寺, 선산군에 있는 절.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 함)를 창건할 때 함께 개창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사의 사적은 비가 훼손되어 그 글을 잃어버려 모두 상고할 수 없다.
대개 묵호자와 아도는 둘 다 신라 눌지왕(訥祇王, 417~457년 재위) 때의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불법을 처음 연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능여대사는 고려 때 인동(仁同, 경상북도 구미시의 옛 이름)의 전투에서 신통력으로 구제하고 또 적을 이길 시기를 예고하여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대가람을 이곳에 지어 대사에게 보답하고 토지와 재물과 보배를 많이 하사하여 왕실의 복을 비는 절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혜종(惠宗, 944~945년) 정종(定宗, 946~949년) 광종(光宗, 950~975년)조에 하사가 계속 이어져 이 절을 받들어 모심이 학사 임민비(林民庇)에게 절의 기록을 짓게 하여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돌에 새기기에 이르렀다. 능여대사의 제자인 신홍(信弘) 혜안(慧安) 등 8인이 계속 주석하며 금자(金字) 사경(寫經) 593함(函)을 조성하고 함은 모두 옻칠과 황금으로 장식하여 해장당(海藏堂)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전각과 당우의 화려함과 훌륭한 승려들의 번성은 우뚝 솟아 동방의 제일도량이 되었다. 승려들의 삼매 수행으로 그 도가 국사가 된 자는 이 절로부터 자취를 시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 절의 북쪽 언덕에 길한 자리가 있어 공정대왕(恭靖大王, 조선 제2대왕 정종, 1399~1400년)의 태(胎)를 봉안하였고 이로 인해 절에 토지를 하사하여 은총을 내렸다. 학조(學祖) 대사가 있어 세조의 특별한 우대를 입어 이 절에 머무르며 십년이 넘도록 중수하였고 그래서 말하기를 이 절에 공덕을 베푼 사람은 모두들 능여대사와 학조대사 두 분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절이 모두 불타 재가 되어 산인 인수(仁守)와 명례(明禮) 등이 중수를 발원하고 그들을 이어 묘연(妙衍) 상원(尙元) 신흡(信洽) 보감(寶鑑) 도혜(道慧) 각순(覺淳) 등이 그 일을 맡아 70년 동안 앞에서 뒤에서 힘을 써서 전각의 숫자와 부처를 공양하는 기구가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그 현판으로 전(殿)이라 이름한 것이 8개, 각(閣)이라 이름한 것이 3개, 당(堂)이라 이름한 것이 12개, 료(寮)이라 이름한 것이 4개, 장(莊)이라 이름한 것이 3개, 문(門)이라 이름한 것이 4개요, 정실(正室)이 353칸이고 회랑[廚廊]은 그 배나 된다. 산내의 20여 개의 암자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여러 비구들의 경영과 중수는 부지런하다고 할 만하다.
절의 승려인 가선(嘉善) 계려(階呂)가 본사의 전말(顚末)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재물을 모아 돌을 다듬어 새기고 싶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이 절은 전시대 고려 때에는 신성한 개국 사업을 도와 이곳에 터를 잡았고 우리 조선에 들어서는 길이 태실(胎室)을 보호하였으니 나라의 경사를 기르는 터전인 즉 신령하고 기이한 자취와 이익되게 한 공은 어찌 다른 산사에 비길 것인가. 절이 여러 차례 퇴락했다가 곧바로 부흥한 것은 또한 이런 까닭에서인 것이다. 마침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에 이어 명하여 이른다.
묵가와 도가의 장경을 시작한 자취는
어찌 그리 아득한지 기록할 수가 없네
창건한 자는 능여대사요 계승한 자는 학조대사라
오직 뚜렷하기만 하여 마치 어제 일 같구나
노송나무 두 그루가 창창하여 시들지 않으니
이 절과 더불어 처음과 끝을 같이 하기를
숭정기원 무진후 54년 신유(숙종 7, 1681년) 7월 일 세움
(뒷면)
지난 신유년(숙종 7, 1681년)에 화상(和尙) 여상(呂祥)이 이 비를 처음 새겼는데 다 마치지 못해 쓸모 없는 조각돌이 되고 말았다. 그때 화상 태감(泰鑑)이 슬퍼하며 탄식하여 이끼를 쓸어내고 자획을 새겼으며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온 힘을 기울여 새로 마련하여 한 주갑 뒤인 신유년(영조 17, 1741년)에 우뚝 세우니 혹은 보통 일이 아니며 아마도 인연을 기다려 그렇게 된 모양이다. 하물며 전 화상(前和尙) 종익(宗益)과 함께 또 자하문(紫霞門) 밖에 무지개다리를 이루어 만장교(萬藏橋)라 이름하여 절의 외양에 일조를 하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 해 6월 상순에 수원인(水原人) 백봉집(白鳳集)이 적는다.
대사(大師)
처명(處明), 의천(儀天), 설한(雪閑), 관징(貫澄), 담숙(湛肅), 조원(祖遠), 탁행(卓行), 태일(太一), 도인(道人), 진기(振其), 법원(法圓), 효안(效安), 충륵(忠勒), 붕일(鵬一), 성안(性安), 채인(彩認), 정징(定澄), 응희(應熙),
전화상(前和尙)
설운(雪雲), 전화상 청찰(淸察), 전화상 수변(秀卞), 전화상 담현(曇現), 전화상 종순(宗順), 전화상 취운(就運)
본사질(本寺秩)
선축(禪笁), 득순(得淳), 두철(杜哲), 대준(大俊), 심철(心哲), 새임(璽任), 새협(璽冾), 지행(智行), 종안(宗眼), 민형(敏浻), 치학(致學), 석능(釋能), 축잠(笁岑), 순기(順己), 세민(世敏), 극명(克明), 영인(英印), 태숙(太淑), 위찰(位察), 정열(定悅), 문인(文印), 진순(進順), 시응(時應), 시한(時閑), 위천(位天), 승천(勝天), 희신(熙信), 귀협(皈冾), 해옥(解玉), 응백(應伯), 신익(神益), 신욱(神旭), 재찬(再贊), 연휘(演輝), 관오(寬悟), 청윤(淸允), 회옥(會玉), 회감(會鑒), 회한(會閑), 세관(世冠), 신기(信己), 연기(演己), 계찰(戒察), 성휘(省輝), 태우(太祐), 위성(位星), 국념(國念), 회식(會湜), 쌍옥(雙玉), 쌍붕(雙鵬), 정훈(定訓), 천일(天一), 국간(國侃), 국등(國登), 정학(定學), 계철(戒哲), 채흠(彩欠), 순화(順和), 홍간(弘侃), 조연(祖演), 지원(智元), 최은(最訔), 종인(宗印), 치윤(緇允), 천준(天俊), 법순(法淳), 팔징(八澄), 삼원(三元), 신환(信還), 추환(秋還), 호언(護彦), 호신(護信), 호열(護悅), 재희(再熙), 약율(若律), 추헌(秋軒), 여순(呂順), 명종(明宗), 풍성(豐性), 풍정(豐淨), 한숙(漢淑), 월순(月淳), 월관(月寬), 월명(月明), 월화(月和), 월림(月林), 월훈(月訓), 월삼(月三), 찬유(贊裕), 진철(進哲), 일점(日點), 풍일(豐一), 쾌세(快世), 치상(緇尙), 치율(緇律), 긍행(肯行), 팔영(八英), 묘정(妙淨), 사신(師信), 치백(緇白), 진선(進善), 희준(熙俊), 신영(信英), 쾌심(快心), 선원(善元), 한붕(漢鵬), 홍민(弘敏), 월경(月瓊), 선찰(善察), 사눌(師訥), 풍감(豐鑒), 풍익(豐益), 산암(山庵), 희운(熙雲), 두성(斗星), 묘운(妙雲), 수찬(秀贊), 뇌원(雷遠), 설잠(雪岑), 여청(呂淸), 일현(一玄), 종임(宗任), 해순(海淳), 보운(普雲), 원오(圓悟), 시연(時演), 순명(順明), 정원(定元), 청원(淸遠)
절 위전(位田) 논 30결
각전(各殿)
대웅전(大雄殿), 팔상전(八相殿), 천불전(千佛殿), 백화당(白華堂), 명부전(冥府殿), 영자전(影子殿), 연향각(燃香閣), 향적전(香積殿), 운문각(雲門閣), 대양문(大陽門), 범종각(泛鍾閣), 만세루(萬歲樓),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자하문(紫霞門)
각방(各房)
청규헌(聽糾軒),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총운료(摠運寮), 청우당(聽雨堂), 영류당(詠流堂), 남월료(南月寮), 월영료(月暎寮), 청풍료(淸風寮), 명월료(明月寮), 지대동(紙大同)
각암(各庵)
지장전(地藏殿), 극락전(極樂殿), 부도전(浮屠殿), 은선암(隱仙庵), 명적암(明寂庵), 견불암(見佛庵), 능여사(能如寺), 내원(內院), 상원(上院) 금강대(金剛臺), 백운암(白雲庵), 심적암(深寂庵), 영운암(靈雲庵), 운수암(雲水庵), 묘적암(妙寂庵)
당시 승통(僧統) 가선(嘉善) 태감(泰鑑)
삼강(三綱)
수승(首僧) 지원(智元)
직사(直舍) 혜감(惠鑒)
삼보(三補) 월섬(月暹)
지사(持事) 선총(善摠)
서기(書記) 상원(尙圓)
연화질(緣化秩)
도감(都監) 통정(通政) 종익(宗益)
별좌(別座) 통정 한정(漢定)
편수(片手) 가선(嘉善) 최협(最冾)
각수(刻手) 서붕(瑞鵬), 흥책(興策), 오덕귀(吳德貴), 호현(好賢)
공양주(供養主)
대숙(大淑), 포원(抱遠), 국준(國俊), 국협(國冾), 돈평(頓平), 포관(抱寬), 치숙(緇淑), 긍찰(肯察), 추성(秋星), 존흠(尊欠), 수연(守演), 돈훈(頓訓), 풍훈(豐訓), 사규(師圭), 돈섬(頓暹), 긍련(肯連), 치각(緇覺), 포련(抱連), 돈식(頓湜), 돈규(頓奎), 돈수(頓修), 존희(尊熙), 존신(尊信), 통율(通律), 통원(通遠), 치열(緇悅), 치탄(緇坦), 포선(抱善), 포신(抱信), 돈희(頓熙), 돈혜(頓惠), 돈기(頓己), 존일(尊一), 돈연(頓演), 돈정(頓淨), 존혜(尊惠), 체능(体能), 박태진(朴太振), 이중해(李重海), 명혜(明惠), 성준(性俊), 한초(漢楚), 김장수(金長守), 선은(善訔), 통준(通俊), 돈율(頓律), 굉익(宏益), 선행(善行), 송만명(宋萬命)
야장(冶匠)
숭정기원후 114년 신유(영조 17, 1741년) 추7월 기망(16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