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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과 삼위일체
사랑샘은혜교회 ・ 2023. 11. 11. 9:33
많은 이단들의 가르침의 사용되는 양태론적 교리 비판에 근거가 되는 글입니다.
이단들의 실제
1 양태론: 삼위를 동일한 한 인격으로 보는 주장, 혹은 명목상으로만 세 인격으로 구별하는 주장
2 단일신론: 삼위자체를 부정하는 주장
3 삼신론: 삼위를 세 분의 분리된 신으로 보는 주장
4 삼위일체: 하나의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한분의 하나님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세 위격으로 구별되는 하나님 .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 성령 하나님(성령) 세 분이시나 한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나 세 분으로 계시며 일하신다. ‘삼위일체’란 단어는 성경에는 없으나, 교회는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위(persons)가 한 하나님이신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수 있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회 역사에서 제일 처음 삼위일체라는 말을 한 이는 터툴리안이었다.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라 설명 하였다.
어거스틴은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이 문장에서 "형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락텔"이다. 그 원래적인 정확한 의미는 "정확한 복사, 조각(the express image, mark)"라는 뜻이다. 또 "본체"란 말은 "휘포스타시스"로 "본질, 실상, 실체(confidence essence, of person)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동일인격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삼위일체는 존재론적 동등함과 질서적 종속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며,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혹은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으로 설명된다.
♣ 바로 삼위일체의 "일체"라는 말이 히브리서의 "본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삼위일체란 성경적인 근거를 통하여 아래의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며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만든 논리가 아니며, 성경적인 정리를 체계화 시킨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즉 삼위의 인격은 각각 다르지만, 그 삼위의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관계가 가능한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그 삼위는 같은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물으면서, 아들이시면 아버지와 같이 동등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데서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하게 된 교리이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재확인하기까지 교부들이 많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교회가 교의로 받아들이게 된 교리이다.
혹간 사람들은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리라고 비판한다.그러나 삼위일체란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리가 아니라, 당시 초대교회시절에 성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들에 맞서 만들어진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 AD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아리우스 장로는, 성자는 어느 순간에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성자는 성부와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아리우스는 단일신론자, 즉 여호와의 증인의 조상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즉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인가 동일본질인가 라는 문제가 대립되어진 것이다.
장로 아리우스와 감독 알렉산더의 두 사이에서 시작된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으로 교회 분열의 문제가 대두되자, AD 325년, 318명의 감독들이 모이게 된 니케야회의가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회의 도중에 갑작스러운 알렉산더 감독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당시 서기이며 집사였던 청년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로 이 토론이 계속되었으며, 황제의 비호와 많은 감독들의 정치적인 동조가 있었던 아리우스에 비하여 청년집사 아타나시우스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토론이 계속되어진다.결국 니케야회의는 동조세력이 없었던 아타나시우스 집사가 오히려 아리우스 장로와의 토론을 승리하게 됨으로서 "성자는 피조된 것이 아니며 성부와 동질이다"라는 삼위일체의 초석이 되는 니케야 신조가 계승되어지게 된다.
청년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장로와 논쟁 끝에 무려 다섯 번을 유배당하였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돌아올 때마다 지지자들에게 열렬히 환영을 받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결국 아리우스장로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타나시우스는 말년에 자신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존경을 받으며 평안한 시간을 갖게 된다. 당시의 유명한 유행어는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을 반대하고, 세상은 아타나시우스를 반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타나시우스의 어려운 토론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항상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가 승리한 것은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명백히 논리적, 성경적으로 주장하지 못하였고, 여러번 자기 주장을 번복하기도 하고 말을 바꾸면서, 오직 외부적인 정치적 공세로 아타나시우스를 압박해 나갔던 것이다.
니케야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와 대결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을 확립하였고, 콘스탄틴노플회의에서는 양태론자 사벨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함으로서 양태론을 비성경적인 논리로 확정짓게 되고, 에베소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양성론자)와 단성론자가 대결하게 되었는데, 네스토리우스가 추방을 당하게 되며, 유티케스(단성론자)가 예수는 신성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버렸으나, 500여명의 각 지역의 교회 감독들이 참여한 칼케톤회의에서는 그리스도는 변화와 혼합이 없이 두 (인성과 신성의) 본성을 한 위격안에 연합하여 갖고 있다고 확인하게 되므로써,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기독론)에 대한 논리가 매듭되어진다.
즉 325년 니케야 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 에베소 회의,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기독론)에 대한 결론이 150년이란 시간을 통해 일단락되어진 것이다.즉 그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성립시초는 이단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그 유래는 이단들이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2000년 동안 이 논리들은 숱한 이단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으나, 단 한번도 성경적인 논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삼위일체와 기독론은 이단판정의 시금석이 되어왔다.
◈ 양태론이 무엇인가?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이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성도들 가운데에서도 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더욱이 목회자들도 이러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태론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태론은 물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기본적인 양태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사람이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되어진다든지, 동질의 물이 얼음과 수증기의 형태를 가진다는 예를 말한다. 또 수박과 수박즙과 수박조각으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이러한 비유는 한 실존적인 인격의 세가지 양태(Mode)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을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일반 성도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기도 하다.한사람의 세 양태, 사장과 권사와 가장이라는 사역적인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교류나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세 양태가 동일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역적인 분류를 곧 경륜적삼위일체(사역적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4세기 무렵에 잠시 있던 견해로서, 물론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즉 한 인격의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곧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이다.또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성부하나님 자신이 되어지므로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으며,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벨리우스, 노예투스, 파락세아스등이 있었는데, 양태론도 변형되어 몇가지 유형을 갖고 있다.(하나님의 교회의 교리)
또 삼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본질과 인격이 다른 세분의 신(하나님)이 각각 분리되어 계시다는 주장인데, 다시 말하자면 세분의 신을 믿는 이러한 주장은 삼신론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삼신론은 인격뿐 아니라 본질도 셋으로 분리시키는 주장이다.기독교의 하나님은 세분의 분리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주장하므로서,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인격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하나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또한 단일신론은 오직 성부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대표적인 곳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가 이에 속하며, 구약성경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되고만다. 양태론도 결국은 단일신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삼위를 모두 한 인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태론은 지방교회(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성락교회(베뢰아), 뉴예루살렘교회(스웨덴 보그)등이 주장하고 있으며,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들에서도 보여진다.
또한 몰몬교와 같이 다신론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으며, 더욱이 누구나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몰몬교의 삼위일체는 성부는 엘로힘, 그리고 성자는 구약에서는 여호와이며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또 통일교와 같이, 사람은 성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지방교회, 몰몬교 역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신인합일) 곳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또 그밖의 몇몇 사이비집단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삼위일체는 자신들의 교주나 지도자를 삼위일체 중에 한 형태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토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설명을 생략한다.
그동안 삼위일체론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오랫동안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때로는 한 물방울이 셋으로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로 합하여지는 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삼위적인 양식을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욱 혼란만 가증시킬 뿐이며, 양태론적인 자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물에 대한 비유 외에도,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비유하여 삼위일체를 동일한 수박의 다른 형태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혹간은 삼각형의 세 내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의 어떤 물질에 대한 유비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위의 여러가지 유비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약간의 도움은 줄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바람직한 설명은 결코 되지 못한다.
특히 지방교회는 물과 수증기, 얼음의 비유를 하고 있으며 그리고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삼위일체를 비유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동등함과 질서적 종속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며,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혹은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으로 설명된다.바로 삼위일체의 "일체"라는 말이 히브리서의 "본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삼위일체란 성경적인 근거를 통하여 아래의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며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만든 논리가 아니며, 성경적인 정리를 체계화 시킨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즉 삼위의 인격은 각각 다르지만, 그 삼위의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관계가 가능한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그 삼위는 같은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 정통신학이 말하는 양태론
그렇다면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그러나 본인이 양태론에 대해서 정통신학서적을 참고하려는 이유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많은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인 것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물론 뒤에서 성경적인 설명도 충분히 할 것이다) 양태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가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 자신이 성자 예수로 오셨고, 성자 예수가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은 분명한 양태론이다. 실제적으로 양태론은 동일인격의 세 과정이기 때문에, 그 세 양태는 서로 인격적인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 347쪽)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관 중 삼위일체의 문제, 특히 성부와 성자의 내적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단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했다고 보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 바로 성부 자신이었기에 성부수난설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의 단일성과 조화시키고자한 단일신론자들이었다.(교육목회협의회, TBC 성서연구. 546 쪽)
이제 유명한 신학자들의 교과서적인 신학서적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무엇이 양태론인지 충분히 분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 세가지
◆그렇다면 명실상부한 양태론자이며, 지방교회의 지도자인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하여보자.
♣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위의 글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이다, 워치만 니와 함께 위트니스 리를 지방교회는 사도라고 부른다. 지방교회의 교리는 위트니스 리와 100% 동일하다.더욱더 위트니스 리의 견해를 살펴보자.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쪽)
위의 내용은 양태론적 설명의 잘못된 해석이다
◈ 우리는 왜 양태론을 조심하고 유의하여야 하는가?
1) 성부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성자하나님으로 오셨다고 주장하면,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되고만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영원불사이신 하나님이 돌아가신 시간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성자예수님이 성령이 되셨다고 한다면, 부활의 신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인격적인 재림을 부정하여야만 하고, 예수님의 영적재림을 주장하여야만 하는데, 이것 역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3) 성경에 기록된 삼위의 인격적 교류와 상호작용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예를 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신 것과 성자가 성령을 파송한 것, 성자예수가 성부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성경적 기록, 성자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 성부하나님의 소리가 들린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4) 성부하나님이 성자예수로 되었다가 성령이 되었다고 하면, 인격적인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은 현재 어느 곳에서도 계시지 않고 성령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되고만다.
5)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진 성자예수와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므로 구속의 성취를 이루신 성부하나님의 인격이 구별되지 않고 동일시 되어진다. 즉 양태론은 십자가의 대속적인 개념이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교회의 구원론은 일반 기독교와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서 말하였듯이 예수의 인격적 재림을 부정하므로 종말론에서도 달라진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버뱅크라는 학자가 말하였듯이, 첫단추를 잘못 꿰메면, 마지막 단추는 채울 수가 없어지게 된다.
▶ 양태론의 성경적인 모순: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존재과 동시존재를 주장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한 "내 주"는 곧 예수이시다..... 다윗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였으며 예수님이 직접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만일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다윗은 세 인격을 어떻게 구별하였을까?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장차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를 구별하여 보았는가? 신약에서 예수님은 그 문장을 유대인들에게 친히 직접 말씀하셨다.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안에서 들려오던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다시 말하면, 양태론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시110:1에 “…내 우편에 앉으라…”, 히8:1에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12:2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행2:35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에서 우편, 보좌 우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다고 하는 뉘앙스는 자칫 하나님의 오른쪽으로, 흔히 우의정, 오른팔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좌에 앉은 자가 모든 주권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연 보좌우편은 무엇인가?
Calvin은 하나님의 다음에 자리할 만큼의 자리라 했습니다. 성경관용어사전은 가장 영화로운 자리라고 했습니다. 허주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누리고 계시는’이라고 했습니다. F.F. 부르스는 지극히 높임을 받으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능력과 권위로 거기에 앉으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카일과 델리취는 하나님의 지배에 동참하면서 그 위엄과 통치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출처/ 그리스도인 김기철님 블로그 에서
현재의 많은 거짓 가르침(하나님의 교회. 신천지등)근간이 되는 왜곡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이 시급한 시대입니다. 아버지하나님, 어머니하나님과 세대를 구분하여 구약에는 성부하나님이 신약에는 성령하나님, 그리고 현재는 성령하나님의 시대라고 하며 결국 사람을 신격화 하는 거짓된 가르침은 진리의 왜곡이며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