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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하나님과 만남
1. 들어가는 말
Karl Barth는 “교회의 예배는 그 자체를 위하여 수행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대하고, 가장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다.”라고 표현하였다. 과연 우리는 예배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 예배라는 용어는 어느 한 가지 뜻으로 표현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먼저, 우리가 행하는 활동들과 ‘예배’가 구별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예배는 일상생활의 일들과 습관적인 행위와는 다른 형태의 특별한 것일까? 또한 기독교 공동체 자체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활동들과 예배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다음으로 우리가 일단 예배를 정의한다면 어떤 예배가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나라의 문화는 여러 다른 문화와 함께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교파 간에 그들 나름대로의 예배 형태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많은 교파들이 예배 의식을 행하지만, 기독교적인 예배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도 있다. 아마도 “교회에서 섬기며 봉사할 때에 이런 것이 기독교 예배에 속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 예배의 특성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계속 나오게 된다. 이런 물음은 그 어느 것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우리도 이런 질문들에 모두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의 질문들은 해결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를 위한 첫 발걸음으로 먼저 예배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아야 한다.
2. 예배의 의미
예배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예배에 대한 사전적(辭典的)인 의미를 찾아보고, 기독교 예배의 근원인 성서 안에서 어원적 의미와 신학적 의미를 찾아보자.
(1) 사전적 의미
가. 예배
국어사전에 따르면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경례하고 절함. 신이나 부처 앞에 경배(敬拜)하는 의식. 종교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의식(儀式)이 있음. 신을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 Worship
예배라는 말의 영어 단어인 Worship의 의미는 ‘가치를 돌린다’, ‘어떤 사람에게 가치 혹은 존경을 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간혹 영국에서 시장(市長)들이 연설할 때 사용하곤 하였다. 1549년부터 영국 국교도(성공회)의 결혼식에서 “나는 그대를 내 몸으로 존경합니다”라는 맹세를 할 때 사용되었다. 이 경우에는 한 사람이 몸으로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며, 가치를 높인다는 뜻이다. 이 worship이라는 단어의 기본 개념은 ‘가치를 드린다’ 혹은 ‘존경을 표한다’라는 말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린다는 의미이다.
다. Gottesdienst
‘예배’라는 말의 독일어 단어는 ‘Gottesdienst’인데 이 단어는 Gott와 Dienst의 합성어이다. 이 독일어 한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꽤 길어진다: God’s service and our service to God(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봉사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봉사). 우리 인간의 편에서 표현하면 하나님께 ‘봉사한다’, ‘드린다’, ‘헌신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진다. 즉 이 단어는 예배의 다른 면인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응답, 곧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답변을 나타내고 있다. 곧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헌신적인 대답인 것이다.
이 독일어 단어에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Dienst라는 부분이다. 이 단어에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Service이다. 이 서비스란 우리가 비서직, 주유소 직원, 판매직, 우유배달 등과 같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 준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말은 개인의 편리를 위할 때 사용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공익 사업에 관련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원래 서비스란 말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로잡혀 있는 노예를 의미하는 라틴어 ‘servus’에서 유래되었다. 이렇게 볼 때 ‘Gottesdienst’의 단어 안에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하나님(빌2:7)과 그러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섬김을 반영하고 있다.
(2) 구약에서의 의미
가. ה(사하)
이 단어는 ‘웅크리다’, ‘상체를 굽히다’, ‘몸을 구부리다’, ‘나무 등이 구부러지다’, ‘기울다’, ‘~할 만큼 비열해지다’,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을 낮추어 ~하다’, ‘머리, 고개 등을 숙이다’, ‘굴복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경배’,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머리를 숙여 경배했다” 라든가 “엎드려 경배했다”라고 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사용한 것과 관련된다(창24:26, 출4:31; 34:8). 이 용어는 ‘인간’(창18:2, 삼상25:41)이나 ‘이방신’(레26:1, 왕하5:18)에게도 사용되었다. 그 의미는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단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들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달아 알게’ 하는 때 사용되었다(출4:31, 신26:10, 삼상1:3, 사66:23). 이렇게 살펴볼 때 예배와 관련하여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의 현존으로 나아갈 때 굽혀 경배하며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며, 예배하고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복종해야 할 존재이며, 하나님께 대해 마음과 몸으로 최대한 존경의 태도를 지녀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나. (아바드)
이 단어는 ‘봉사하다’, ‘경배하다’, ‘섬기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다’, ‘경작하다’, ‘양성하다’, ‘문학이나 기예를 연마하다’, ‘~와 친분을 가지려 하다’, ‘친구를 구하다’, ‘교제를 깊게 하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 성경에 312회씩이나 사용될 정도로 자주 사용된 단어이다. 명사형(ה : 아보다)는 ‘예배’, ‘경배’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어원적으로 이 단어는 노예나 혹은 고용된 종들의 노동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호와 하나님과 연관되면서 제의 봉사, 곧 제물과 예물을 드리는 봉사(사19:21), 그리고 일반적으로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행하는 봉사(민3:7~8, 4:23, 30, 47)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열방(사42:19)에 대해 특별한 임무를 가진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사43:10)인 여호와의 증인으로 선택되어 드리게 되는 봉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 단어에서 ‘예배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구약성서에서 예배와 관련되어 ‘’(다라쉬)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찾는다’, ‘자주 방문하다’ 또는 ‘구한다’는 뜻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사모하여 찾아 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스4:2).
이상의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예배 어휘에서 나타나는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동시에 모든 삶을 내어 드리며,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3) 신약에서의 의미
신약에는 예배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그 용어들은 약간씩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 προσκυνἑω(프로스퀴네오)
이 단어는 예배라는 말에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프로스’(~에게)와 ‘퀴네오’(입 맞추다)의 합성어로 원래는 종이 주인에게 문안할 때 존경의 표시로 땅에 입맞추는 것을 가리켰다. 이 용어는 사람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허리를 굽히는 행위를 말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여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릎을 꿇어 경배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어휘는 마태복음 4:10에서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사탄에게 대답하시는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προσκυνἥσεις)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는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유명한 성경 구절인 요한복음 4:23에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προσκυνἥἰαὶ)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신 부분에 사용되고 있다. 낯선 구절이지만 요한계시록 5:14에서 24장로가 엎드려 경배했다는 구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66회가 나타나고 있어 예배에 관련되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예배라는 개념은 사람이 존경,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그에게 그의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때의 예배가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맛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혹자는 오늘에는 교회당에 의자를 놓았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가 너무 세속적인 예배가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구교인 가톨릭교회에는 의자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그런데 비록 현대 교회가 의자를 놓고 고급화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가톨릭교회와 같이 무릎을 꿇도록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예배에 참석한 모든 회중은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 장소가 들이든, 산이든, 가정이든, 교회당이든 어디든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개신교 예배의 특색이 되어야 한다.
나. γονυπετἑω(고뉘페테오)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무릎을 꿇다’, ‘완전히 부복하여 엎드리다’이다. 이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이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어떤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사용하는 단어로, 겸손과 자기의 부족감과 존경과 복종과 숭배의 표현이다(마17:14, 27:29; 막1:40, 10:17).
다. λατρεἰα(라트레이아)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삶’, ‘일이나 보상’, ‘일반적인 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일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개념은 전혀 없고 노예의 일에 비하여 보다 포괄적인 뜻을 띠고 있다. 이 단어는 종교적으로 사용되어서 주로 신에 대한 숭배, 제사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로마서 9:4과 히브리서 9:1, 6에서 이 단어는 성전에서 드리는 유대적 예배를 지칭하고 있다.
라. λειτουργἰα(레이투르기아)
영어로 ‘liturgy’(전례)로 사용되는 이 용어의 근원은 원래 세속적인 것이었다. 이 단어의 기원은 ‘일’(ἕργον, 에르곤)과 ‘사람’(λαὀς, 라오스)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단어는 도시와 국가의 유익을 위한 공적인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백성이나 국가에 대한 봉사와 관련되어 있다. 즉, 국민은 세금을 내고 이것으로 국가는 국민을 위해 봉사를 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데 바울은 로마 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일꾼”(롬13:6)으로 말하고, 그 스스로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롬15:16)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는 제의적이고 제사적인 봉사, 경배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1:23에서 유대 헤롯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며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성전에서 행하는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다음으로 히브리서 8:6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직무와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를 통해 예배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수행하는 노동’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예배는 전체 회중의 일이요, 회중의 참여와 모인 회중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뜻이다. 동방교회에서 이 ‘liturgy’는 성찬 성례전에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참여의 성격을 가진 거의 모든 형태의 공중예배에 적용할 때 ‘전례’란 말을 사용한다. ‘liturgy’라는 말이 원래 공공사업을 가리킬 때 사용한 세속적인 단어지만, 기독교 예배에 아주 기본적인 용어가 되어 왔다.
(4) 예배의 신학적 의미
예배 용어에 대한 각각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히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는 그 말이 어떤 경우에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개신교 신학자들이 예배라는 용어를 어떤 경우에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 예배가 의미하는 바를 발견하여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진전시키고, 그 의미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폴 훈(Paul W. Hoon)은 “예배의 정의는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예배의 의미 분석도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론 중심의 기독교 예배를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event)에 기초를 둔 성육신적인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 예배는 구속사의 사건에 직결되는 것으로써, 예배에 있어서 모든 행위는 구원의 사건을 우리와 연결시키고 현재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는 또한 “예배의 핵심은 자신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어 그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개인으로서 혹은 교회로서의 우리 모두는 예배에 의하여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며, ‘크리스천의 생활은 곧 예배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훈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에 대한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다. 이 양자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다. 바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게 된다. 그것은 상호 관계적이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그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 그리고 인간은 다양한 감정, 말, 행위를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고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던 피터 부르너(Peter Brunner)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뜻과 사람이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예배라는 단어 ‘Gottesdienst’에 집중한다. 부르너는 예배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이용하여 예배의 이중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에서 훈의 ‘계시와 응답’과 유사한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은 양편 모두에 역사하시는 분임이 강조되고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 그 한 분만이 예배를 가능하게 하심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헌신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 말씀을 통한 그 사건의 실재로써 우리들에게 그 자신을 내어 주신다. 목회자가 행하는 말씀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또한 목회자가 집례하는 성례전의 진리도 역시 하나님의 사역하심이다. 부르너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배란 우리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인간인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또한 인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순종의 태도로서의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그분의 역사하심에 올바로 응답하는 것이다. 또한 부르너는 기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그분의 사역에 일치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자녀들에게 준 허가의 방법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부르너에게 있어서 예배의 이중성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고 자신의 은사에 우리가 응답하게끔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그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장 자크 폰 알멘(Jean-Jacques von Allmen)은 기독교 예배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의 재연으로 이해하였다. “예배란 인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른 구속사의 과정을 새롭게 확인하고 집약함이다. 이와 같은 구속사의 집약과 끊임없는 확인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그분의 구속 사업을 추구하신다.” 이러한 예배는 구속 사건의 성서적 연대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사건들을 새롭게 집약하는 것이며,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에 새롭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 있다.
폰 알멘의 예배에 대한 설명은 중요한 면을 지니고 있다. “예배란 구속사의 집약이기 때문에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며 교회로 하여금 자기의식을 갖게 하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고백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교회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교회 자체의 본질을 명백히 하고 교회 자체의 진실한 존재 이유를 고백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세속 사회에도 그들 나름대로 모여서 그들의 신념이나 믿음을 선언하기는 하나, 예배는 그 모두를 포함한 이 세계 전체에 대한 최후 심판과 소망의 약속을 함께 제시한다. 기독교의 예배는 인간 스스로가 의롭다고 하는 생각에 도전하는 것이며, 모든 일의 성취와 실패가 심판받게 될 그 날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소망과 약속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폰 알멘의 주장 가운데는 기독교 예배가 갖는 세 가지 핵심적인 차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구속사의 재연, 현현, 최후의 심판이다.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예배는 그것이 어떠한 수준과 행태를 취하고 있든지 간에 영원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라고 한다. 모든 공적인 예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라는 것은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는 예배자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관계에 의해서 결정지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는 항상 기독교적인 믿음을 그 조건으로 함으로써 구별되는데, 특히 삼위일체 및 성육신의 위대한 교리로 압축되는 하나님의 본성과 행동에 대한 믿음으로 특징지어진다. 기독교 예배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전적으로 공적이며 조직적인 특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그것은 기독교 예배가 결코 사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언더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예배’와는 달리 기독교 예배는 ‘분명한 계시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포함한 “초자연적 행동이며 초자연적 삶”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예배는 구체적 특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피조물을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서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드리려 하는 충동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주어져 있고, 이러한 내면적 동기는 인간의 희생적 사랑과 기도와 기타 행위를 통하여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기타 다른 예배 신학자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헉스티벌(John Huxtable)은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또한 지글러(Franklin M. Segler)는 기독교의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믿음) 안에서의 사랑 어린 응답”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이디(G. Hedey)는 예배란 “한마음 한 목소리 한뜻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부르짖음”이라 정의하여 예배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데비슨(Richard Davison)은 “예배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며, 또한 무엇인가를 행해야 되며, 하나님 앞에 함께 서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고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구속주 하나님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그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레이번(Robert G. Rayburn)은 첫째로 “기독교 예배는 신실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존엄성을 인식하고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굽어 엎드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께 경외와 찬양과 감사와 존귀를 드릴 수 있음을 강조한다. 다음으로 “예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었던 대로 순종하는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함”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유혹도 물리치고 십자가의 희생을 감수하시는 섬김과 희생의 자세가 예배의 본이 됨을 말하고 있다.
3. 예배: 하나님과의 만남
위에서 보아 왔듯이 예배를 하나로 정의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예배를 한 문장으로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시간에서는 ‘만남’이라는 단어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 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만난다.
1986년 한 영화가 상영되어 기독교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 영화는 깐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그 제목은 “미션”(Mission)이다. “미션”은 1750년경,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국경 부근에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주고 있다. 원주민 과라니족을 상대로 선교를 하는 선교적 차원에서 보면 선교 영화이며, 또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역사영화이다.
미션의 내용을 잠시 간추려 본다. 이 영화는 한 추기경이 로마 교황청에 보고하는 형태로 시작하고 있다. 야만의 땅 라틴 아메리카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예수회 소속 산 크를로스 선교회 소속의 신부들은 목숨을 걸고 그 지역으로 향한다. 영화 초기 부분에 복음을 전하던 한 선교사가 원주민에 의해 십자가에 묶여 폭포로 떨어진다. 이러한 동료 신부들의 죽음으로 가브리엘 신부는 결국 험악한 지형의 폭포수 위에 사는 과라니족들을 선교하는 데 성공한다. 용병 출신으로 원주민들을 팔아버리는 야만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노예상인 로드리고는 자신의 부인과 동생이 서로 사랑함을 알고 격분해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만다. 그는 그런 식민지적 잔혹성에 반성을 했다기보다는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가브리엘 신부를 따라 사죄의 길을 걷는다. 과라니족은 자기의 형제를 팔아넘긴 로드리고를 용서하고 로드리고는 가브리엘을 도와 복음으로 가득 찬 원주민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하지만 교황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권 다툼에 끼여 복음의 땅을 초토화하려는 것을 묵인하고 만다. 스페인 군대의 막강한 화력과 병력 앞에 하나씩 쓰러져 가는 원주민과 사제들, 그리고 복음의 땅은 불길로 휩싸이고 만다. 살아남은 과라니족의 아이들이 모여서 폭포의 더 높은 상류로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추기경은 숨진 두 신부와 원주민들에 대한 독백과 요한복음 1:5로 끝맺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몇과 과라니족의 멸종으로 끝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고 그들은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겁니다.”, “빛이 어둠을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영화의 내용이 바로 우리 삶이며, 이런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며 예배드린다.
영화 중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원주민들은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위해 교회를 건축하는 장면이 있다. 과연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기에 바로 여기에 예배의 중요성이 있다. 예배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인간적인 연극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만나야 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삶 속에서 나타내야 한다.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고는 자신들이 만난 하나님을 두 가지 모습으로 실천한다. 가브리엘 신부는 묵묵히 싸움에 참가하지 않은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이에 반해 로드리고는 싸움으로 이들을 보호하려 한다. 가브리엘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없소. 당신이 옳다면 하나님이 지키시겠지. 하지만 옳지 않다면 축복은 무의미해. 무력이 정당하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없어질 거요. 틀림없이 그럴 것이오. 나는 그러한 세상에서는 살아갈 힘이 없어진다오. 축복도 할 수 없소. 로드리고.” 예배에서 만난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자리잡도록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4. 나가는 말
예배를 하나의 정의로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예배는 역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로 고정된 정의를 내리기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란 분명히 객관적인 것이고, 인간에 의해 정해지며, 인간 자신 밖에 것 또는 그 이상인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하나님을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분명히 하나님은 객관적 실체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예배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말하는 것 또는 자기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 예배는 이러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위대하고 신성한 인격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생각, 마음, 영혼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적절한 방법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과 깊이 만나서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깊이 만나서 교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떠한 행동을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등이다. 우리는 게으름, 상상력의 부족 또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등의 이유로 ‘안전’하고 익숙한 것에 호소하는 타성적인 연약함을 극복하고 습관의 거미줄을 걷어치우려면 이러한 필사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예배에 관심을 기울인다.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그분은 자주 최우선이 아닌 우리 생각의 마지막 대상이 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우리의 예배는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이 정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분명히 예배를 다르게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정의들은 서로 상호 보완적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예배에 대한 정의에 대해 열린 마음의 자세를 지녀야 하며, 예배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하여 예배에 대한 계속적인 경험과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