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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史記사기≫ 百問100문 百答100답 소개
– 金瑛洙김영수 敎授교수님 -
* 飛龍비룡 辛鐘洙신종수 總務총무님 提供제공.
- 시진핑 주석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위상 변화(20분) https://www.youtube.com/watch?v=xxWo9hQatLk |
『사마천 史記 100문 100답』 司馬遷 ≪史記≫ 百問百答 |
- 저자 金瑛洙김영수 소개 - |
역사학자, 전 대학교수로 1959년에 태어났으며 홍익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중국 사마천학회 회원이며, 전 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중국 전문가로, 지난 20년 동안 중국을 150여 차례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해 그 성과를 대중하는 남다른 영역을 개척해왔다. 특히 사마천과 『사기』를 역사 현장과 결합해 심도 있게 연구해오고 있으며, 2007년 가을 32시간에 걸쳐 방영된 EBS 특별기획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에서 그간의 성과를 대중들에게 알렸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 유수의 대기업 임원과 CEO 및 공공기관의 리더들을 상대로 20년에 걸친 『사기』연구를 통해 얻은 인문학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리더십과 경영의 지혜를 강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십 종의 중국 관련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사기의 인간경영법』, 『난세에 답하다』와 같은 『사기』관련서를 비롯해 중국 역대 명인들의 자녀 교육을 통해 우리의 자녀 교육 행태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명문가의 자식교육』, 『어머니의 회초리』등 교육 관련서가 있다. 『중국사의 수수께끼』에서는 중국사 전반을 참신하고 남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해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간신 19인을 조명함으로써 우리 내부의 치명적인 ‘간신 현상’을 비판한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을 출간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번역가로서 그는 수십 종의 중국서를 번역했고, 특히 타이완의 지성 보양의 역사서를 집중적으로 번역해 『맨얼굴의 중국사』, 『추악한 중국인』, 『제왕지사』등을 국내에 소개했다. 또한 『모략』과 『용인』을 편역하고, 『지전』시리즈를 기획하는 등 국내에 중국 처세서를 선구적으로 소개해왔다. 이제 그는 『사기』완역이라는 방대한 작업을 통해 중국을 한층 깊게 들여다보며 중국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탐색하는 대장정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사마천司馬遷과 《사기》 그리고 중국을 연구하고 25년 동안 중국 현장을 150차례 이상 탐방해 온 사마천과 《사기》에 관한 당대 최고의 전문가다. 저자는 지금도 사마천과 중국의 역사와 그 현장을 지속적으로 답사하며 미진한 부분을 계속 보완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페이스북 - Young Soo Kim, 유튜브 - 김영수의 ‘좀 알자, 중국’, 블로그 - ‘김영수의 사기세계’, 밴드 - ‘좀 알자, 중국’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 太史公태사공 司馬遷사마천 - 소개 |
분류: 한나라의 관료, 한나라의 환관, 기원전 145년 출생, 중국의 역사가, 웨이난시 출신 인물 |
최종 직위: 中書令중서령 / 성: 司馬사마 / 휘: 遷천 / 자: 子長자장 / 생몰년: 음력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 고향: 陕西省섬서성 龍門용문 (現 웨이난시[1] 한청시[2]) |
1. 개요 |
중국 전한의 역사가이자 《사기》의 저자로, 동양에서 역사학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은 위인이자 동양 사학계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위대한 역사가 중 한 명이다. 서양의 헤로도토스와 함께 동서양 역사학을 각각 대표하는 거물이다. |
2. 생애[편집] |
한나라의 전성기인 기원전 145년에 용문[3]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4]이었다. 태사공서(사기)의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사마천 자신이 쓴 자서전 성격도 있다. 여기에 따르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20살 때부터 긴 시간 동안 중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적을 탐방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데 썼다고 한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과 회하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왕의 동굴 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절강성과 구의산 등을 보았다. 그 뒤 원수·상수 등의 강을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문수·사수를 건넜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도 하고 공자의 유풍도 관찰했다. 그 뒤 파·설·팽성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양과 초를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한 황실의 봉선례를 거행했다. 사마담은 태사령인 자신도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했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사마담은 실망한 나머지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기 전에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고 이후 황실과 조정의 석실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참고로 봉선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처럼 위대한 황제면 봉선을 지낼 정도로 위대하도다'란 일종의 과시인데 그 시초는 주나라 때부터라고 하나 정치적 행사가 된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고 한무제가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이후 후한의 광무제, 송진종 등 명군 혹은 시대를 잘 탄 행운아들이 봉선 의식을 거행했으므로 진짜 시대를 잘 만나고[5]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야 간신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놓친 사마담이 실의에 빠질 만하다.[6] 태사공서를 집필하던 중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했고 이로 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이릉은 선전했지만 상황의 여의치 못해 모두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항복한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패전의 책임은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가 져야 했으나 이광리의 누이가 무제의 애첩이었다. 따라서 이릉에 대한 변호는 무제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이릉과는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단순히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사마천의 변호는 무제의 미움을 샀고 옥에 갇히고 말았다.[7] |
무제는 옥에 갇힌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때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① 돈 50만 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기, ② 사형[8], ③ 궁형[9] 셋 중 하나였는데 당시 50만 전은 병력 5천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10]로 거금이었는데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그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11][12] 결국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받고 성불구자가 되었다.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구나!"(是余之罪也夫! 是余之罪也夫! 身毁不用矣!)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궁형을 받음으로써 그는 몸에도 마음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그나마 죄를 지어 받은 게 아니라 황제에게 억울한 누명으로 미움을 받아 궁형을 받은지라 가족들과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감염증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남는 행운(?)까지 누렸다지만 대신 여름에는 냄새 때문에 가족들도 멀리했다고 하고[13] 보임안서에서는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 뒤틀린다(장일일이구회(腸一日而九回))며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게다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이후 친구 임안(任安)[14]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죽고만 싶다고 쓴 기록이 있다. 이후 옥중에서도 역사서를 계속 집필했으며 훗날 무제의 신임을 되찾아[15] 중서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사실 신임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중서령은 당나라 때부터는 엄연한 재상직이었지만 중서령이 재상직으로 격상된 것은 위문제 때부터였다. 전한의 중서령은 황제의 서간 등을 관리하던 벼슬로, 당시에는 지위만 높았지 사실상 환관이나 맡는 자리였다. 즉, 한무제가 그를 중서령에 앉힘은 사실상 환관 취급했다는 얘기다. 그는 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는지, 왜 끝내 《사기》를 남겼는지 자신의 심정을 편지 하나에 담아 후대에 남겼는데 이를 '보임안서'(報任安書)[16]라고 한다. 사형수로서 죽음을 기다리던 익주자사 출신의 친구 임안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 처절한 문학성으로 동양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대충 취지를 정리하면 한무제는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데 도가 튼 위인이니 나중에 무고가 입증되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므로 임안에게 일단 살아서 견디고 재기를 노리라고 조언한 것인데 편지가 보내졌을 때는 안타깝게도 임안이 궁형을 받기를 거부하였고 한무제도 임안이 자신을 속이려 하고 불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처형을 지시하여 결국 사형이 집행된 뒤였다. ===== (전략) "죽음은 단 한 번이지만, 다만 그 죽음이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더 무겁고, 어느 때는 새털보다도 더 가볍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 옛날 주나라 서백은 제후의 신분이면서도 유리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이사는 진의 재상까지 지냈으면서도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받고 죽었고, 팽월, 장오는 한때 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갖은 문초를 받아야 했고, 강후 주발은 한나라 가문과 원수지간인 여씨 일족을 주살해 권세가 비할 데 없는 몸이면서도 취조실에 들어갔습니다. 협객으로 유명한 계포는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
예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해 고난 속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일들을 이뤄낸 인물들은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칭송되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문왕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연구해 글로 남겼으며, 공자는 곤액을 당하고 나서 《춘추》를 썼습니다. 좌구명은 두 눈이 먼 뒤에 《국어》를 지어냈고, 손빈은 두 다리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고서 그 유명한 《병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여불위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씨춘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혔기에 《세난》, 《고분》의 글을 썼습니다. 《시경》에 실린 시 300편도 대부분은 성현께서 분발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훌륭한 일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즉 궁지에 몰려 있을 때라야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자가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참혹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물러나서 글을 쓰고, 방책을 저술했으며, 울분을 토로했고, 문장을 남겨서 자신의 진정을 표현했습니다.“ 출처: 한서 62권 사마천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 ===== 사실 한무제가 대노한 이유도 꽤나 어이없었다. 이릉과 같이 출전한 이광리가 무제의 애첩 이부인의 오빠라 '편애 모드'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반면 이릉은 조손 삼대가 무제와 꼬인 관계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이광은 비장군으로 불리며 손꼽히는 명장이었지만 무제의 사주를 받은 위청에게 힐문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작은 아버지 이감도 나름 흉노를 토벌하여 공적이 있었지만 이를 위청에게 따졌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에게 살해당했다.[17]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슴뿔에 찔려 사망했다고 했지만 이릉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광리는 패했는데 이릉은 압도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8일 동안 저항하다 끝내 투항했다. 이런 일로 궁형을 당해야 했던 그는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총대장이었던 이광리 또한 나중에 흉노와 싸우러 출진하던 도중 무제 말년의 후사문제[18]에 휘말리게 되었다. 전쟁 자체는 계속 이겨나갔으나 무리하게 병사들을 이끌어서 내부 반란이 일어났고 그것은 진압했으나 직후 흉노에 참패한 후 망명해버렸다. 사마천을 성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이광리를 두둔했던 무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장안에 남아 있던 그의 일족을 모두 몰살해 버렸다. 투항한 이광리는 호록고 선우의 사위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오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호록고의 모친인 전대 선우 저제후의 연지가 병에 걸리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이는 먼저 투항해서 정령왕이 되었던 위율이 호록고에게 받던 총애를 이광리에게 뺏기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꾀를 써서 무당을 매수했고 무당은 위율과 함께 선우한테 이광리를 제물로 바치면 모친이 나을 거라고 꼬드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중에는 한무제가 이 일을 후회했는지 당시 사마천을 비방하거나 처벌하라고 했던 사람들을 싹 다 죽여 버리고[19] 사마천을 불러 '남자가 그까짓 거 없는 게 뭐 대수냐! 겨우 그런 걸로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녀라 하하하'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20] 《태사공서》 작성 이후의 기록은 전무해서 알 수 없지만 한서 사마천 열전의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통을 당했으니 그 최후가 평안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말년이 영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한서에는 그의 최후를 서술한 부분이 없다. 위에 서술된 보임안서 편지가 끝나고 바로 다음 줄에서 그는 이미 사망한 상태다. 보임안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거나 또 간언을 하다가 심기를 거슬러 투옥되어 무제 말년이나 소제 초년에 옥사했다는 주장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정통성 있는 황제가 내린 명령, 특히 누군가를 처형하라는 명령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여겨져서 기록을 빼먹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과 한서 열전 수록 인물 중에서 사마천 딱 1명만 사망 원인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을 토대로 무탈하게 생을 마쳤을 거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자택에서 조용히 사망하고 작은 규모로 장례를 치렀다면 역사에서 잊히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그 주장에서는 저 "고통"을 그냥 노환이라던가 말년에 거세당한 피부에 병이 생겨 고생하다가 죽었다던가 하는 정도를 쓴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사기 연구자인 천퉁성도 사마천의 말년이 비교적 평안했을 것으로 보며 그가 당했던 형벌과 그 형벌을 받은 연령을 생각하면 말년에 군주로부터 큰 핍박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형벌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질적인 질병에 시달려서 다른 귀족들보다 당시 기준으로도 말년에 더 고생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21] 그의 사망년도 또한 정확하게 기록된 바는 없으나 기원전 86년 즈음으로 인식되고 있다. |
3. 평가 |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선택을 두고 가족들과 지인들을 제외하면 당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멸시했지만 개의치 않고 더욱 발분해 기원전 90년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태사공서》를 완성했는데 이 태사공서가 훗날 이름이 바뀌어 전하니 그 이름이 바로 《사기》다. 사기는 그 책이 사찬서(私撰書)임에도 중국의 정사인 24사에 항상 포함되면서 나머지 사서를 압도하는 위엄을 뽐냈다. 사기와 한서, 삼국지, 후한서의 이른바 전사사(前四史)를 제외한 다른 정사서는 모두 관찬서(官撰書)이다. 《태사공서》는 그동안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 방식과 구별되는,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인 기전체(紀傳體)를 확립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동양 역사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서는데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사전이다. 이러한 사기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태사공서》에는 한무제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아무리 자신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당대의 권력자이며 황제인 한무제를 사마천 자신이 비판했으리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세의 가필이란 의혹을 받지만 사마천은 잃을 게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22] 어차피 죽을 마당에 황제를 욕한다고 해도 별 페널티는 없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가필이라는 물증도 없다.[23] 한문학자들 가운데서는 효무제 본기의 문체가 지나치게 다른 부분과 달라 후대의 가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그 외에도 한무제의 전 황제인 한경제 본기도 그 내용이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가필 의혹을 받고 있다. |
사마천 이전에 역사라는 개념은 주로 역(歷)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1년의 개념을 준 달력에 중심을 둔 생활중심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 사후 역사(歷史)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이는 역사의 개념이 도덕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역사로 바뀌었다는 것이자 태사공 사마천의 업적을 기리겠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사마천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사마천은 분서령 이후 아직 여러 군데에 여러 형태로 상당히 잔존해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모아 《사기》에 담았다. 프랑스의 사마천 연구자 샤반은 사마천이 종종 지방의 역사를 그대로 옮겼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사마천은 위나라(권 44), 연나라(권 34)에 대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우리 군대’, ‘우리 성’, ‘우리 도읍’ 등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사마천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료들을 얼마나 살려내려 노력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열전> 등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망실 위기에 놓인 역사들이 <사기>에 수록되거나 녹아들어 살아남는다. 나아가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사료의 저자는 물론 그의 문장 스타일, 그의 생애, 나아가 저작 자체도 모으고 연구했다. 그래서 저작에 나오는 주요한 문장이 발췌돼서 실리곤 했다. 바로 이 덕분에 고대의 진귀한 문장들이 후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은 천재적인 학자 가의의 과진론(過秦論)[24]과 시 2수도 발굴해 보존시키고 있다. 나아가 사마상여의 이색적인 작품인 부(賦)[25],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기 전에 지은 부(賦), 한비자의 세난(說難)[26], 명의 편작의 의론(醫論)[27]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렇게 해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사마천은 동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진시황이 전국 각지에 남긴 5개의 각석(刻石)을 비롯해 한나라의 황제들이 그 황자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줄 때의 수령문, 항우와 유방의 시 같은 게 그런 예이다. ===== 내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는 세상을 뒤덮을 수 있건만 / 때가 불리하여 추(騶)도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 우(虞)여! 우여! 너를 어찌 하리. ===== |
* 紀傳體기전체 : 人物인물의 行蹟행적을 中心중심()으로 하여 쓴 歷史역사 敍述서술의 한 形式형식. 普通보통 本紀본기, 世家세가, 列傳열전, 書서, 표 따위로 나누어 쓰는 데 사마 천의 ≪사기(史記)≫에서 비롯했음. * 本紀본기(帝王제왕): 紀傳體기전체의 歷史역사로 帝王제왕의 일을 적은 部分부분. * 世家세가(諸侯제후): 여러 대를 이어 가며 나라의 重要중요한 地位지위에 있어 特權특권을 누리거나 世祿세록을 받는 집안. * 列傳 열전(人物인물): 紀傳體기전체의 歷史역사로, 많은 사람의 傳記전기를 次例차례로 벌여서 記錄기록한 글. * 書서(制度제도, 文化문화): 儒學유학 五經오경의 하나. 孔子공자가 堯요임금과 舜순임금 때부터 周주나라에 이르기까지의 政事정사에 관한 文書문서를 蒐集수집하여 編纂편찬한 冊책이다. 中國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經典경전이다. 20卷권 58篇편. * 表표(年表연표): 1. 겉, 거죽, 겉면 2. 바깥 3. 표, 圖表도표 |
수많은 공적인 보고서, 명령문서, 변론, 담화 등도 모두 사마천의 손을 거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오자서와 손빈이 울분을 딛고 복수에 성공하며 노자와 공자가 천지와 인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영원히 소멸될 수도 있었던 고대의 영웅들이 사마천의 손을 통해서 부활한 것이다. 사마천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기’를 저술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했던 14년 동안 수많은 과거의 인물들이 살고 죽은 이유를 기록하고 전하면서 그 인물들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동시에 자신도 해원했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가 감응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억울함과 치욕을 알아줄, 《사기》 저술의 집념을 알아줄 또 다른 청운지사를 기다렸다. 사마천의 그 바람은 이루어졌고 《사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사마천은 불멸의 존재로서 살아 있다.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서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서사문학으로서의 전(傳)이라는 장르는 사마천의 태사공서 중 열전에서 비롯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특히 한문학에서는 문학과 비문학 간 경계가 불분명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열전의 구조와 정신을 그대로 본뜬 실전이 나타나고, 여기에 허구적 형상화를 거친 탁전[28], 가전 등의 형태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몇몇 전들은 아예 사마천의 열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전은 훗날 소설(小說)로 이어지는데 주로 단일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전책 양식의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사기 중 회음후열전은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 통일의 큰 역할을 맡은 한신의 이야기다. 여기서 한신이 젊은 시절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수모를 당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런데 사마천은 의도적으로 한 구절을 끼워 넣었다. "한신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봤다.(信孰視之)"[29]는 네 글자다. 심리적 갈등과 인내, 내면적 성장의 깊이가 함축된 문장이다. 사마천은 기존 자료로 작업하면서도 그것을 재구성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기의 문학성이야말로 인간을 입체적이고 폭넓게 묘사할 수 있었던 열쇠다.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해 비장하게 자결한 항우,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형가, 자신을 알아준 주군의 복수를 위해 칼을 뽑아든 예양 등은 그런 사마천의 붓끝에서 피와 살을 얻어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난다.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감성과 깊이, 현대 시나리오를 방불케 하는 치밀한 설정과 구성,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자유자재로 상승과 하강을 그리는 변화무쌍한 문장이 《사기》를 불멸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백이열전>에서 불행한 삶을 산 의인과 천수를 누린 악인을 대비시키는 말인 "살인 강도짓과 인육을 먹는 짓만 일삼은 천인공노의 악당 도척은 천벌은 커녕 잘 먹고 잘살며 명을 다했는데 비해, 의로운 형제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깊은 곳에 풀만 캐 먹자 결국 아사하였다."라고 한 뒤 돌연 간결한 문장으로 "몹시 헷갈리는구나! 천도란 옳은가, 그른가(天道是耶非耶)"라고 절규할 때 독자도 함께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역사를 현상으로 기록하지 않고 문학성과 교훈성을 섞어 첨삭했다는 비판이 다소 존재한다. |
4. 기타 |
* 사마천이 남긴 대표적인 글로 알려진 《사기》와 <보임안서> 외에도 몇 편이 더 남아 있는데[30] 반고의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여덟 편의 산문과 《사마천집》 한 권, 《소왕묘론》 두 권이 더 있다고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두 편의 산문[31]과 《소왕묘론》 일부만이 다른 책들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32] * 궁형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술 후 생존 확률이 줄어드는데 당시의 수술 기술로 40대 후반인 사마천이 궁형을 택했다는 건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잃어버리고 자칫 목숨까지 같이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특히 사마천은 궁형으로 인해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린다'고 할 정도로 신체적 고통을 받았지만 태사공서(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 수모와 고통을 감당하였고 결국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 돈을 내고 형을 면제받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경제적인 면을 주로 다룬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여러 부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돈만 많으면 고자도 되지 않고 황제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니 가급적 돈을 많이 버는 게 좋다는 식의 서술을 써넣었다. * 사료 문제로 공자의 견해에 대놓고 반대하기도 했다. 유학자들이 이 글을 싫어합니다[33] 하나는 백이 숙제의 건인데 공자는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34]고 기술하였으나 사마천은 시를 인용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하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임금과 허유의 이야기인데 이것이 유교 경전에 나오지 않는다고 기술하였다. * 그의 아내는 유씨(柳氏)였고 그 딸[35]이 낳은 외손자 양운(楊惲)[36]은 《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를 익히다가 세상에 내놓았으며 전한을 멸한 왕망이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서 사통자(史通子)라는 사관 벼슬을 주었다. 근데 신나라가 15년 만에 망했다. * 남성기를 잃은 공통점으로 인해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강철장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환관들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물론 사마천 훨씬 이전에도 환관은 있었고 사마천 본인이 환관인 건 아니지만 상징적 의미의 시조다. * 현대 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사마천의 작품 2개를 가르친다. * 그의 이름을 딴 별도 있다. 소행성 12620 쓰마첸(Simaqian)은 바로 그의 이름의 중국어 발음에서 이름을 따 왔다. |
* 그를 소재로 한 시들도 있다. |
- 사마천 (司馬遷)[37]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38] / 긴 낮 긴 밤을 /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 글을 썼던 사람 / 육체를 거세당하고 / 인생을 거세당하고 /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
-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39]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 세우기 위해 산다 / 좀더 튼튼하고 / 좀더 당당하게 /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 해구신을 고아먹고 / 산삼을 찾아 / 날마다 허둥거리며 /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 기둥으로 끌 수 없는 / 제 눈 속의 불 /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후의 여자 하나 /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일본의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필명(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을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로 만든 이유도 '자신은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40] 사마천 사후 등장한 서진 고조 사마의는 같은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사마천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다. 즉, 전주 이씨로 비유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와 이안사의 후손이긴 하지만, 조선 왕실 직계가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의 한 직장인의 관계-본관은 같으나 분파는 다른 관계-로 볼 수 있다. 《사기》에 의하면 사마천의 가문은 원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가문은 주나라를 떠나 위(衛)나라, 조(趙)나라, 진(秦)나라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한편 진(秦)나라로 간 사마씨 중에 사마착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진 혜문왕에게 촉을 정벌할 것을 고하였고 이에 사마착이 촉을 정벌하여 진왕으로부터 촉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장평대전에서 조나라를 대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백기가 숙청될 때 두우에서 함께 처형당하고 말았다.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진나라에서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었다. 사마창의 아들 사마무택은 시장(상업 지역을 담당하던 관리)이 되었고 사마무택의 아들 사마희는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마희의 아들 사마담은 태사공에 이르렀다. 사마천은 이 사마담의 아들이었다. 한편 조(趙)나라로 들어간 사마씨의 후손인 사마앙은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조왕 무신 휘하의 장이의 장수가 되어 조가를 함락했는데 항우에 의해 은왕으로 봉해졌고 한고조가 항우를 정벌할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하내군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이 사마앙의 11대손이 경조윤 사마방이었으며, 방의 차남이 사마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 → 진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착 → 사마근 (착의 손자) → 사마창 (근의 손자) → 사마무택 (창의 아들) → 사마희 (무택의 아들) → 사마담 (희의 아들) → 사마천 (담의 아들)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 → 조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앙 → 사마방 (앙의 11대손) → 사마의 (방의 아들) ===== |
한중 FTA 체결 기념으로 그의 고향 산시성 한청시에서 제작을 의뢰하여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오페라 <사마천>이 2016년 뉴서울 오페라단의 공연으로 초연되었다. 심영물 제작자 차커 Chaco가 그가 궁형을 당한 뒤 사기를 저술하는 과정을 담은 심영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사마천이 된 심영 대응되는 인물은 야인시대 김두한 - 한무제, 심영 - 사마천, 이정재 - 임안, 김좌진 - 사마담이다. 심영물 장르 특성상 한무제는 낭심 자르는걸 즐기는 특이취향에 김두한의 아버지인 김좌진이 여기선 심영의 아버지인 걸로 치자며 권총을 들이대는 괴짜로 나온다. 한실이 쇠퇴한 삼국시대에서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당하고 왕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채옹은 그가 동탁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탄식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정위에게 넘겨졌다. 이때 채옹은 문신을 새기는 경형이나 발뒷꿈치를 자르는 월형을 받아도 좋으니 자신이 저술하고 있는 한나라 역사책을 완성하게 해달라고 왕윤에게 간청했고, 태위 마일제도 왕윤에게 채옹의 구명을 부탁했으나, 왕윤은 "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는 대신 궁형에 그쳤는데, 사마천은 황제를 비방하는 책을 쓰지 않았는가?"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좀 이상한 부분은 사마천은 당시 시대 인식으로 봐도 억울하게 한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을 받은것이다. 채옹의 죽음은 왕윤의 몰락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폭정과 선정이 교차하던 한무제와 다르게 동탁은 폭정만 저질렀고 채옹은 동탁의 어용지식인이었다. 그런 인물이 동탁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니 곱게 볼수 없긴 했다. |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司馬遷 ≪史記≫ 百問百答- 책소개 |
130권 52만 6,500자의 《사기》는 어떤 책일까? 위대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역사가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서한이란 왕조에서 태어나 국가 기록 등을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이란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인 《사기》를 완성하고 기원전 90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56세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중략)… 이 정도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이제부터 우리는 바로 역사가 사마천과 그가 남긴 《사기》라는 역사책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고 이 역사가와 역사서가 중국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머리말〉 중에서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목차 |
서문 _ 100문 100답 사연 제1부. 130권 52만 6,500자의 《사기》, 어떤 책일까? 001. 교과서 속의 사마천과 《사기》와 그 영향 002. 정사(正史)의 출발점 《사기》, 그러나 정사가 아니다? 003. 《사기》의 다섯 체제 004. 기전체, 무엇이 남다른가 - One for All, All for One 005. 본기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이라면? -〈오제본기〉와 〈항우본기〉, 〈고조본기〉에 대하여 006. 역사를 주도한 나라와 인물들 -세가의 명장면 감상 007. 마음으로 한 약속도 지킨다 -〈오태백세가〉의 계찰 008.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진섭세가〉 속 진섭의 외침 009. 죽은 말 뼈다귀 이야기의 함의 -〈연소공세가〉의 개혁군주 소왕 010. 어리석은 남자들을 한껏 조롱한 하희 -〈진기세가〉에 기록된 섹스 스캔들 011.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은 따라간다 -〈공자세가〉와 사마천 012. 뜻을 잃지 않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기록 -열전의 명장면을 감상하다 013. ‘창백한 정신’의 귀족 -〈백이열전〉을 어떻게 읽을까? 014. 인간관계 최고의 경지 ‘관포지교’와 풍자와 유머의 명재상 안영 -〈관안열전〉 015.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가하다 - ①〈오자서열전〉과 중국인의 은원관 016.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가하다 - ②복수관의 형성과 변화 017.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가하다 - ③승화된 복수, ‘문화복수’ 018.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가하다 - ④《사기》 속 은원과 관련한 고사 019.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가하다 - ⑤은원관에 관련된 명언명구 020. 개혁의 본질은 무엇일까? - ①〈상군열전〉과 중국의 개혁사 021. 개혁의 본질은 무엇일가? - ②진(秦)나라의 개혁 논쟁 022. 카메라 3대가 동원되어야 가능한 장면 묘사 - ①〈위공자열전〉의 놀라움 023. 카메라 3대가 동원되어야 가능한 장면 묘사 - ②〈위공자열전〉의 놀라움 024. 문무의 화합은 나라의 반석 -〈염파인상여열전〉의 메시지 025. 역사에 상상력을 허락하라 - 굴원의 죽음과 〈굴원가생열전〉 040. ‘다다익선’ 뒤에 숨어 있는 ‘토사구팽’ - ①〈회음후열전〉의 복선과 장치들 041. ‘다다익선’ 뒤에 숨어 있는 ‘토사구팽’ - ②〈회음후열전〉의 복선과 장치들 042. ‘다다익선’ 뒤에 숨어 있는 ‘토사구팽’ - ③〈회음후열전〉의 복선과 장치들 043. 일제와 식민 사관이 짜놓은 ‘강역 프레임’을 깨라! - ①〈조선열전〉을 둘러싼 내홍 044. 일제와 식민 사관이 짜놓은 ‘강역 프레임’을 깨라! - ②〈조선열전〉을 둘러싼 내홍 045. 일제와 식민 사관이 짜놓은 ‘강역 프레임’을 깨라! - ③〈조선열전〉을 둘...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책 속으로 |
핵심은 말 뼈다귀가 아니라 인재에 있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뛰어난 인재가 선뜻 오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을 우대할 것인가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보다 못한 사람을 먼저 모셔와 잘 대우하면 된다. 천금으로 말 뼈다귀를 사온 대목은 이것을 의미하며, 특출한 재능이 있지도 않은 곽외를 황금대(黃金臺)에 모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곽외가 특별대우를 받는 것을 본 인재들이 연나라로 모여들었다. 천금으로 말 뼈다귀를 사다’는 ‘천금매골(千金買骨)’ 또는 ‘천금시골(千金市骨)’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인재에게 달렸다는 사마천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 간단하게 말해 하희는 적어도 ‘네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일곱 남자의 혼을 뺀’ 여성이었다. 기록에 남은 여성 가운데 하희만큼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여성은 없었다. 이 때문에 역사에는 “남편 셋, 임금 하나, 자식 하나를 죽이고, 한 나라와 두 명의 경을 망하게 했다”는 기가 막힌 오명 (?)이 뒤따랐다. 혹자는 장부(張負)라는 부잣집 노인(노파)의 손녀딸로 다섯 명의 남편을 잃고도 진평(陳平)에게 시집간 진평의 아내를 하희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파장이란 면에서 보자면 비교 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희의 무엇이 이와 같은 파문을 낳았을까? 단순히 미모 때문에?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무는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하희 스캔들은 그 규모 면에서 상상을 뛰어넘는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죽었고, 한 나라가 망했으며, 국제정치의 질서 및 사회의식이 바뀌어가는 서곡이었다. *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의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견디기 힘들었다. 궁형은 개인적 치욕이자 조상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망가진 몸은 불효의 표지였다. 공자의 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士’)의 유전자를 품고 있었던 사마천에게 이런 치욕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 전통과 개인적 심리면에서 보아도 복수는 필연이었다. 요컨대 궁형의 치욕은 강렬한 복수 심리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하를 일통(一統)한 절대군주에게 종법복수나 사림복수, 어느 것 하나 실행할 수 없었다. 피의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천은 제3의 복수 방식을 찾아냈다. 대의를 행하되 유혈은 피하고 인생의 경지를 승화시키는 복수의 형식, 이것이 저술함으로써 울분을 발산한다는 ‘발분저술(發憤著述)’의 문화복수였다. 사마천은 《사기》 저술을 통해 전통적 복수관을 초월한 고차원의 복수 관념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를 통해 복수와 보상을 실현하고 정의의 구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여 고귀한 정신을 청사(靑史)에 남겼다. * 굴원(屈原)의 마지막 장면에서 핵심은 돌을 품었다는 ‘회석’에 있다. 아마도 돌을 몸에 묶었을 것이다. 그래야 떠오르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돌을 끌어안는다는 ‘포(抱)’나 돌을 묶는다는 ‘방(綁)’이란 글자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마천은 마음 ‘심忄’ 변...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출판사 서평 |
■ 사마천과 《사기》를 100문 100답으로 알기 쉽게 분석한 책! 《사기》는 5천 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로 꼽는다. 3천 년이란 시간을 다 루고 있는 통사이자 한반도 넓이의 약 15배에 해당하는 약 300만 km2의 공간을 섭렵하 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세계사이다. 《사기》는 객관적 사실만을 기록한 기록물이 아니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관통하여, 일가의 말씀을 이룬’ 아주 주관적인 역사서이다. 사실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추구하려 한 역사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서이다. 《사기》는 또 사마천이 발로 쓴 현장 보고서이자 그의 극한 고통이 수반된 비극적인 자술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기》는 슬픈 책이다. 이제부터 《사기》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본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관련 대 목으로부터 궁금증을 풀어간다. 아울러 《사기》가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도 함께 살펴보려 한다. 《사기》의 매력과 정신세계를 좀 더 깊이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해보면서. - 〈본문 중에서〉 《사기》와 사마천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편집한 책! 이번에 펴낸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은 사마천과 《사기(史記)》 관련 최고의 전문가가인 한국사마천학회 김영수 이사장이 중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쉽게 편집했다. 100가지 항목(실제로는 150개가 넘는)을 선정해서 저자가 자문자답히는 형식으로 꾸몄다. 《사기》는 130권 52만 6,500자라는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쉽게 접하기가 어려운 책이다. 이런 점을 착안해서 《사기》는 어떤 책이며, 어떻게 읽어야 하고, 또 사마천은 누구인가를 최대한 쉽고 편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잘 몰랐던 〈조선열전〉도 소개하고 있어 그 의의를 더한다.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은 《사기》, 사마천, 한성시 3부(제1부. 130권 52만 6,500자의 《사기》, 어떤 책일까? / 제2부. 사마천, 위대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역사가 / 제3부. 사성(史聖)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분량은 《사기》60%, 사마천 25%, 한성시 15% 정도의 비율이며, 이해를 돕기 위한 133개의 도판 자료도 실었다. 부록으로 《사기》 관련 국내 출간 저·역서 목록(석박사 학위 논문 포함)과 《사기》 130권의 편명 목록도 수록해서 자료적인 가치도 보탰다.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공정뉴스 |
[조나단 더 인터뷰]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 인간과 권력 속살 經典 '사기' ...아사리판 정치 해답 제시 |
'사기(史記)100문 100답'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사마천 정신 담은 현대인 필독서 "지식인은 정직하고 정당해야 하며 사회에, 시대해 대한 책임감으로 무장해야 한다" [공정뉴스_조나단 기자] 여의도의 전쟁(戰爭)이 시작됐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이 자중지란에 빠졌다. 국민의힘은 설화(舌話)·지도부 리더십 문제가, 더불어민주당은 사법리스크·전대 돈 봉투·김남국 코인투자 등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존 정지를 탈피한 제3지대 정당론까지 거론되고 있다. |
-개혁의 성공 요인: 멘토를 통한 민심 단합(6분 30초) https://www.youtube.com/watch?v=lW8_-QX2pXo |
- 사마천과 사기 : 3천년 인간학의 교과서(제1강 인고유일사) https://www.youtube.com/watch?v=-aHSr6SG2DA&list=PLX9xXlTjdQqEnV8HwSLILEsvXS89o4T_r |
- 명상, 명언, 명곡 : 06.주극생란(술이 극에 달하면 난리가 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RiM5niSV9Q&t=1s |
- 개혁의 성공 요인: 멘토를 통한 민심 단합(6분 30초) https://www.youtube.com/watch?v=lW8_-QX2pXo |
- 김영수의 ‘좀 알자, 중국’ https://www.youtube.com/@user-tm8fq2bx8s |
- 개혁의 시대와 놀라운 인재정책(10분 54초) https://www.youtube.com/watch?v=jopyrFIOFC0 |
- 문화저널21 [송금호의 고사성어와 오늘] 주극생란(酒極生亂) 낙극생비(樂極生悲) https://www.mhj21.com/160751 |
- [#벌거벗은세계사] (2시간) 사마천 ‹사기›를 통해 알아보는 진시황제! 압도적 스케일을 자랑하는 그의 무덤에 관한 미스터리까지! | #편집자는 https://www.youtube.com/watch?v=IxE3F6R7-mo |
- [동양고전]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사기(史記)(김영수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gulU1FDuA_A |
- ['엠빅' 이슈] '파묘' 영화 속 쇠말뚝과 식칼..25년 전 이순신 묘에서도? (2024.02.29./엠빅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vS68IWsycBM |
*****(2024.09.06.)
첫댓글 JTBC
'펀쿨섹' 고이즈미, 자민당 총리 도전장…야스쿠니 참배 뜻
https://v.daum.net/v/2024090620295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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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고이즈미 아들, 출마 선언…총리 후보 12명 경쟁
https://v.daum.net/v/20240906201417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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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TV
로마시, 명물 트레비 분수 유료화 검토…방문객 급증 대비
https://v.daum.net/v/20240906200838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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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7월 수출 전년동월 대비 1.2% 감소…2분기 GDP 0.1% 감소 이어 우려 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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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 지지' 푸틴 발언 진심? 크렘린 "듣는 이가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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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파푸아뉴기니 도착...3박 4일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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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 피란민촌 폭격... 어린이 포함 20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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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율 0.94에서 1.97로… 일본 기업에 기적 불러온 비결은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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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이민 제한이 우선순위" 밝힌 프랑스 우파 신임 총리, 의회 신임받을 수 있을까
https://v.daum.net/v/2024090620023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