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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궁인 작] 광풍겁(狂風劫)1 ≪차 례≫ ◈ 서 문 제1장 꿈이냐 생시냐 제2장 이상한 사제관계(師弟關係) 제3장 탄로 난 비밀(秘密) 제4장 암계(暗計)의 시작(始作) 제5장 같은 날 떠나는 네 사람 제6장 천락무예단(天樂武藝團) 제7장 세월(歲月) 제8장 인생은 연극(演劇)인가? 제9장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살수(殺手) 제10장 암중인물(暗中人物) 제11장 노출된 정체(正體) ◈ 서문(序文) 세월이 흐를수록 선악(善惡)의 경계가 모호해져 가는 것은 그 만큼 인간의 삶이 복잡해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늘날 인간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 도 모른다. 반면 강호(江湖)의 세계는 단순하다고 볼 수도 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논리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강자가 되기 위한 욕망으로 부침하는 것이 강호계의 논리고 보면 적어도 현 실의 삶처럼 모호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친구와 적이 한 배를 타고 있다면 언젠가 그 배는 뒤집히고 말 것 이다. 동상이몽(同床異夢)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상대를 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음모와 음모, 술수와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 그것이 당금의 현실 이라면 강호계의 역학구도를 통해 거울처럼 비춰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단순하게 보이는 것도 내면으로 파고들면 들수록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가 포진하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보다 단순해진다. 욕망(慾望)이 빚어낸 결 과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슬처럼 인과관계가 꼬이고 꼬이면 국외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얼마나 복잡해 보이겠는가? 무림계의 상식적인 구도나 풍습을 바꾸어 보았다. 어쩌면 현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무대배경이 무협소설의 새로운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현실처럼 극적(劇的)인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현실 을 잊고싶은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다.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배상 제1장 꿈이냐 생시냐 [1] 개봉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제일 먼저 나지막한 험산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세인들은 그 산을 막연산(漠然山)이라 불렀다. 아득히 사천(四川)을 출발하여 섬서(陝西)를 거쳐 하남(河南)까지 쭉 뻗은 진령산맥(秦嶺山脈)의 끝자락이 바로 막연산이었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생활고에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은 바로 이곳에서 거 친 탁류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황하(黃河)를 향해 뛰어내리곤 했다. 바로 이곳, 구릉처럼 펼쳐진 산언덕에는 수백 명의 난민들이 거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다할 생활의 근거조차 없는 빈민(貧民)들로 대부분이 중병에 걸린 환자(患者)들이었다.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흔히 황단(黃 )이라고 하는 황달병 환자나 두창(痘瘡:천연두)에 걸린 사람, 심지어는 문둥병으로 일컬 어지는 대풍창(大風瘡) 환자에 이르기까지 온통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 그 중에서도 막연산 골짜기 가운데 사곡(死谷)이란 외진 곳에는 특 히 중환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나라에서도 외면할 뿐더러 아무도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아 외롭게 이곳에서 군락(群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한데 이곳을 무시로 드나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불과 십 육칠 세밖에 안된 소년이었다. 기이한 것은 남녀노유 구분 없이 사곡의 병자들은 소년이 모습을 나타내기만 하면 환호하며 우르르 몰려들곤 했다. "야! 유청풍(柳靑風)이 온다. 어서 가서 만두를 먹어야지." "젠장! 빨리빨리 줄서란 말이야!" 벌떼처럼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 가운데 제대로 이목구비를 갖춘 자는 별로 없었다. 손가락이 사라져 뭉툭한 주먹만 남은 자, 눈알 하나가 빠지지 않았 으면 코가 뭉개진 여인, 아니면 전신이 온통 고름과 반점으로 얼룩진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사곡 환자들 가운데 그래도 이들은 비교적 행복한 편에 속했다. 구석진 곳에서 아예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더 많기 때문 이었다. 환자들이 난리법석을 떨 때, 어깨에 바랑을 멘 훤칠한 마의(麻衣)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게 탄 피부에 이목구비가 매우 뚜렷하여 다부져 보였으며, 반면 눈빛은 해맑아 보는 이로 하여금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을 주었 다. 사곡 환자들은 소년이 나타나자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으나 곧 네 줄로 나란히 열을 지어 섰다. 소년 유청풍은 지고 온 바랑 네 개를 풀밭 위에 내려놓았다. "자, 여러분! 따뜻할 때 드세요." 그가 내려놓은 바랑 속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가 가득 들 어 있었다. 실히 몇백 개 됨직한 만두는 상수리 잎에 하나씩 싸여 있 어 절로 온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감격한 환자들은 만두를 집기 전에 인사부터 건넸다. "이거, 번번이… 정말 고맙네." 그들은 하루에 먹는 것이 고작 한두 끼, 그나마 겨우 죽으로 연명 했다. 죽도 보리쌀 두어 되와 남과(南瓜:호박)를 몇 개 넣어 물을 잔뜩 부은 다음 멀겋게 끓인 돼지죽보다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있어 만두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고마워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개중에서 나이 든 환자들은 유청풍을 향해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휴... 벌써 십 년이 흘렀군. 만미당(萬味堂)의 매상고가 뻔할 텐 데... 우리들 때문에 더더욱 어려울 게 아닌가?' 소년이 가지고 온 만두는 이곳에서 삼십여 리 정도 떨어진 빈촌에 있는 만미당에서 만든 것이었다. 소년은 천민들이 사는 빈촌에서 부 친 유대진(柳大進)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만미당은 비록 십여 평 남짓한 조그만 가게였으나 만두 맛이 일품 이라 개봉부(開封府) 일대에서는 제법 소문이 자자했다. 유청풍은 부친과 함께 지난 십 년 동안 거의 모든 이익금을 사곡 환자들을 위해 사용해왔던 것이다. 유청풍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한데 거옹(巨翁)은 어디 계시죠?" "저기 있다네." 그의 앞에 있던 중년인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숲 쪽을 가리켰다. 숲 앞의 나무그늘 아래 칠순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 다. 그는 운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돌보고 있었다. 노인은 봉두난발에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 는데 팔 척 장신의 거구였다. 그가 이리 저리 움직일 때마다 허리춤 에 찬 수십 개의 약낭(藥囊)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난 수 년 동안 자신들을 보살펴 주는 그를 거옹(巨翁) 이라 부르며 존경해 마지않았다. 거옹은 쉴 틈이 없었다. 환자들이 사방에서 그를 찾아댔기 때문이었다. "거옹… 저 좀… 살려줘요." "물… 무울… 거옹......."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해 겨우 겨우 숨넘어가는 소리를 토해내곤 했다. 한데 정작 거옹은 자신이 의원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재주 는 워낙 신통하여 환자들에게 빈번히 발생하는 종기나 설사 등을 아 주 간단히 치료해 주곤 했다. 특이한 것은 흔해빠진 인동(忍冬:겨우살이) 따위로 종기약을 만드 는가 하면, 설사할 경우에는 토란(土卵)을 먹였고, 기침과 열이 많은 환자들은 차전자(車前子:질경이 씨앗)로 낫게하는 재주가 있었다. 더구나 그는 진맥은 물론 용약(用藥), 구급(救急), 해독(解毒)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치료방법을 구사하곤 했다. 유청풍은 만두 세 개를 들고 거옹을 향해 걸어갔다. 한데 그가 막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흐흐... 너 이 놈, 잘 만났다!" 어디선가 음산한 흉소와 함께 땅딸막한 체구의 청년이 불쑥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유청풍은 그 자리에 멈추면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곽구(郭瞿)!' 유청풍은 내심 곽구가 혼자 온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대로 나무와 바위 뒤에서 십여 명의 장한들이 속속 나타 나더니 그를 빙 둘러싸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한결같이 험악한 인상 을 지닌 자들이었다. 곽구는 뒤늦게 나타난 자들 중에서 원숭이처럼 생긴 삼십대 가량의 장한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형님! 이 놈이 사업을 방해한 놈입니다." 원숭이처럼 생긴 자는 거만한 표정으로 유청풍의 아래위를 훑어보 며 말했다. "나 원승안(袁承安)은 잘못을 빌면 용서하는 사람이다. 어서 무릎 꿇고 사과해라!" 그는 뒷짐을 짚은 채 눈짓으로 발 밑을 가리켰다. 아마도 그가 일 행 가운데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유청풍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못 하겠소." 원승안은 입가에 흉소를 머금더니 대뜸 유청풍의 손을 걷어찼다. "뭐야? 이런 건방진 놈 같으니......."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유청풍은 재빨 리 허리를 틀며 피했다. "헛!" 하지만 원승안의 발차기는 생각보다 빨랐다. 그 바람에 유청풍의 손에 들려있던 만두가 저만치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곽구는 음흉한 눈초리로 유청풍을 흘겨보았다. "어리석은 놈! 네가 정해단(情海團)의 비위를 건드리고도 살 것 같 으냐?" 유청풍은 냉소를 쳤다. "흥, 누가 너희들 같은 지저분한 자들을 겁낼 줄 아느냐?" 정해단은 중원 전역을 무대로 여인이나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여 인 신매매(人身賣買)를 하는 사악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조직은 중원 전역에 퍼져 있을뿐더러 그 우두머리는 물론 총단(總團)의 위치, 조직의 실체 등이 극히 은밀하여 그 규모는 물론 전모가 파악되지 않는 집단이었다. 심지어는 무림인에게까지 암살(暗殺), 납치 등을 가리지 않아 오래 전부터 공포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정해단의 폐혜가 심해졌으나 관(官)은 물론 무림계에 서조차 그들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었다. 한데 최근 들어 정해단은 이곳까지 손을 뻗었고, 아직 질병에 걸리 지 않은 사곡의 아이들을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 곽구를 비롯한 이들은 개봉부를 무대로 납치할 대상을 물색하여 정 해단에 정보를 팔아 넘기는 불량배들이었다. 유청풍은 그런 곽구를 일전에 혼내 준 적이 있었다. 한데 오늘은 곽구가 앙심을 품고 자신들의 동료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곽구는 조롱하듯 흉소를 흘렸다. "흐흐! 지저분해? 네 아비가 외팔이라며? 그럼 그 만두도 네놈의 아비가 더러운 손으로 빚었을 텐데 누가 누굴 지저분하다고 하는 거 냐?" 곽구는 일부러 시비를 걸러 온 것이 분명했다. 특히 유청풍의 부친이 오른 팔이 절단된 불구자라는 사실을 강조함 으로써 기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때 원승안은 환자들을 힐끗 바라보며 맞장구를 쳤다. "옳아, 같은 병신이니 아들인 널 보내 온정을 베푸는 모양이구나?" 순간 유청풍은 화를 참지 못해 원승안을 향해 번개같이 주먹을 휘 둘렀다. "이.. 비열한 놈들!" 그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원승안은 각저공(脚狙功)을 익힌 자였다. 비록 그가 원숭이처럼 몸을 놀리는 하찮은 무공을 수련했을망정 부 근에서는 거의 무적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 발 물러나 공격을 피해 버렸다. "놈! 오늘이 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어느새 그의 손에서는 시퍼런 단검이 뽑혀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 이 신호인양 사방에서 불한당들이 유청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얏!" 유청풍은 신형을 풍차처럼 회전하며 네 명을 차고 내질렀다.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었으나 그의 주먹과 발길질은 눈부시게 빨랐 다. "어이쿠......!" 불한당들은 얼굴과 배에 정타를 맞고 벌렁 쓰러지며 비명을 터트렸 다. 그러나 또 다른 네 명이 전후좌우에서 유청풍을 공격해왔다. 유청풍은 신속히 자세를 낮추어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이때 원승 안은 발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개종자 새끼! 뒈져라!" 빠악! 그의 발길은 정통으로 유청풍의 등을 걷어찼다. "윽!" 유청풍은 등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울컥 피를 토하며 비 틀거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주먹과 발이 날아와 그의 얼굴이며 등, 허리 할 것 없이 연타로 두들겨댔다. 퍽! 퍼퍼퍼퍽! 유청풍이 아무리 선천적인 완력을 타고 났다해도 무공을 익힌 원승 안을 당할 수는 없었다. 유청풍은 본능적으로 몸을 새우처럼 움츠리 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으.......' 이때였다. 기회를 엿보던 곽구가 단검을 잡더니 사정없이 그의 등에 내리꽂았 다. "이 놈! 칼 맛 좀 봐라!" 단검은 유청풍의 등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유청풍은 비명을 발하며 사지를 쭉 뻗고 말았다. 삽시에 그의 주위 풀밭은 흥건한 핏물이 번 져나갔다. 곽구는 그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붉은 피를 뒤집어 쓴 채 마치 짐승을 도살하듯 단검으로 유청풍의 온몸을 무지막지하게 찔러댔다. "크으으......." 유청풍은 전신에 수십 군데를 단검에 찔리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의 전신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옆에 있던 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핏덩이가 돼버린 유청 풍의 전신을 냅다 발로 걷어차 버렸다. "임마, 분명히 까불지 말라고 했잖아!" "병신들한테 만두 좀 나눠줬다고 으스대더니 꼴 좋다!" 원승안은 그런 모습을 보며 더욱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목을 따버려라! 경고용으로 나무에 걸어 놓게!" 곽구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눈앞에 치켜들었다. "좋지요. 흐흐흐!" 그가 싯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막 단검을 일자로 그어댈 찰나였다. 돌연 천둥과 같은 고함 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네 이놈들!" 그와 동시에 곽구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건너편 바위로 날아갔다 . "컥!" 놀랍게도 그는 단검을 자신의 목에 찌른 상태에서 바위와 충돌하는 순간 절명하고 말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시신이 바위에 부딪 쳤는데 시신과 바위가 동시에 새카맣게 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원승안과 수하들은 그만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헉! 저 자는 거옹!' 졸개들은 눈을 부릅뜬 채 눈앞의 사실을 보고도 반신반의했다. 그들의 앞에는 거옹이 태산처럼 우뚝 서있었다. 거옹은 고리눈을 부릅뜬 채 원승안을 노려보았다. 한편 원승안은 곽구의 시신을 본 후 그만 눈앞이 어지러웠다. ‘으헉, 저 수법은......?' 그는 아예 대항할 의지를 잃은 듯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 러다 갑자기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양 그의 수하들도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으아... 달아나자!" 그러나 그들은 운이 없었다. 거옹은 우수를 번쩍 치켜들더니 한 바퀴 빙 돌렸다. 번쩍! 순간 그의 장심으로부터 눈부신 광선이 뻗어나갔다. 아홉 줄기의 광선은 도주하는 자들을 한꺼번에 휩쓸어버리고 말았다. 막 십여 보 이상 달아나던 원승안과 그의 수하들은 온몸이 불에 데 인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 처절한 단말마를 터트리며 그만 새카맣게 타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공포에 찬 단말마가 꼬리를 물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아 홉 구의 시체가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게 숯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거옹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거옹의 얼굴 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윽! 기어코... 십장혈시독(十臟血屍毒)이 재발했군......." 놀라운 말이었다. 십장혈시독은 전갈, 독공(毒蚣) 등 사막에서 서식하는 열 가지의 독충과 부패된 사람의 시신에서 발효해 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맹 독(猛毒) 중의 하나였다. 무색무취(無色無臭)한 성질을 가진 이 독은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 능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진기로도 소진되지 않고 해독제 또한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설령 십장혈시독을 응고시켜 놓았더라도 진기를 운용하는 즉시 독 이 심장으로 번져 중독된 사람은 한 시진 안에 절명하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한동안 비틀거리던 거옹은 문득 유청풍을 번쩍 안아들고 신형을 날 렸다. '역질이 전염 안 될 곳으로 옮겨야겠군.' 그는 자신의 상세도 상세려니와 유청풍이 난자 당한 상태라 상처 부위를 통해 역질에 감염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2] 사곡에서 십여 리 떨어진 숲 속. 거옹은 유청풍을 풀밭에 내려놓자마자 상의를 벗기고 상처부터 살 폈다. "이런, 도도혈(陶道穴) 등 세 곳에 치명상을 입었구나." 지금 유청풍은 여러 부위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특히 독맥에 해당 하는 일곱 번째 척추 뼈인 도도혈(陶道穴)과 열 번째 척추 뼈인 신주 혈(身柱穴), 그리고 배꼽 우측 아래 대거혈(大巨穴)이 단검에 깊이 절개되어 있어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곳은 가벼운 부상만 당해도 자칫 불구자가 될 수 있는 요혈 중의 요혈이었다. 그는 신경과 혈관이 끊겨 호흡이 불규칙하며 출혈로 인하여 기식이 엄엄했다. 이대로 둔다면 머지않아 생명을 잃거나 최소한 식물인간 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거옹은 문득 개봉 쪽을 향해 원한에 찬 눈빛을 발했다. '흉수를 눈앞에 두고… 지난 이십 년 간 참아왔건만.......' 그의 눈에서는 평소 볼 수 없었던 신광이 이글거렸다.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는 그 안광은 가히 신의 경지에 도달한 내가 고수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거옹은 갈등 어린 눈빛으로 유청풍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내게 떨어진 운명이란 말인가? 허허... 고작 이것이 지난 이십여 년 간을 기다려온 결과란 말인가?" 거옹의 눈에서는 허탈한 빛이 가득했다. 하나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래... 어차피 사용하지 못할 공력이라면 이 아이가 해결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되면 저들은 안심하고 정체를 드러낼 지도 모르지." 거옹은 결심을 굳힌 듯 유청풍을 내려보았다. 유청풍은 시체처럼 풀밭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거옹은 장심 을 뻗어 그의 목과 등 한가운데에 갖다 붙였다. 그의 손가락이 갈고 리처럼 구부러지고 있었다. '우선 신경과 혈관을 연결하여.......' 일순 번개가 치듯 번쩍! 하는 빛이 손가락 끝으로부터 사출되었다. 그 빛은 유청풍의 상처부위를 빠른 속도로 파고 들었다. 그렇게 하기를 일각(一刻) 정도 되었을까?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만신창이였던 유청풍이었다. 한데 그의 상처가 마치 신통한 영약이 라도 바른 듯이 눈에 띄게 아물며 벌어진 상처 부위에서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닌가? 거옹은 유청풍을 살며시 뒤집어 놓은 다음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슬쩍슬쩍 가볍게 손놀림을 하고 있는 듯해도 실상은 엄청난 내공을 쏟아 붓고 있었다. 또 다시 일각이 지났을 때 유청풍은 나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으윽......." 그는 현재 규칙적인 호흡만 할 뿐 말을 하거나 사물을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거옹은 열 손가락으로 유청풍의 백회혈(百會穴)과 용천혈(龍天穴) 을 천천히 짚었다. "이제 진기만 넣어주면 완전히 회복할 것이다." 두 곳의 혈도를 동시에 짚어 진기를 보내주는 방법은 그의 독문 수 법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기가 빠르고 균형 있게 퍼지는 것이다. 곧바로 그는 모든 요혈을 바늘로 찌르듯이 하나 하나 누르기 시작 했다. 근육이 물결칠 때마다 유청풍은 긴 호흡을 들여 마셨다가 내뱉었다 . 어언 그가 규칙적인 호흡을 내쉬자 마침내 거옹은 손을 거두었다. 순간 유청풍은 눈을 번쩍 뜨며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거옹께서......?" 거옹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 그만하기가 다행인 줄 알아라." 그의 음성은 매우 자상하게 들렸다. 유청풍은 부지불식간에 상처부 위를 어루만져 보았다. '분명 곽구에게 무수히 찔렸는데......?' 그는 자신이 입었던 상처가 단순한 의술로 치유될 수 없음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처 부위는 약간 부어 올랐을 뿐 , 감쪽같이 아무런 통증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기운은 전보다 더 용솟음치는 것만 같았다. 유청풍은 벌떡 일어나 감사를 표하려다 말고 깜짝 놀랐다. "거옹께서 저를 구하셨... 앗! 피......?" 허름한 거옹의 장삼 앞자락은 아무런 무기에 찔린 흔적도 없건만 온통 거무튀튀한 피가 끈적끈적하게 굳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응고 된 피에서는 역겨운 독 냄새가 연신 배어 나오고 있었다. 거옹은 창백한 안색으로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사람처럼 거친 호흡 을 내쉬고 있었다. 유청풍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상해. 금세 죽을 사람처럼 보이니.......' 거옹은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돌연 예리한 안광을 뿜어냈다. "혹, 수리마제(燧離魔帝)라고 들어보았느냐?" 그가 쏘아보내는 직사광선은 폐부를 산산이 흩쳐 놓을 것만 같았다 . 순간 유청풍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예? 그렇다면... 검혈(劍血)... 이십니까?" 그는 전신이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거옹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내가 바로... 단궐(段闕)이니라." 단궐의 이마에는 서서히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유청풍은 너무나 엄청난 사실에 그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 검혈 단궐은 한 마디로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검혈 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 외에도 일명 수리마제라고도 불렸다. 수리마 제란 별호는 그가 지난 날 백여 명의 고수를 동시에 새카맣게 태워 죽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북망산(北邙山)에서 벌어진 무림 사상 가장 참혹했던 혈겁이었다. 훗날 세인들은 그 사건을 북망지겁(北邙之怯)이라 부르며 단궐을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여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단궐은 이십 년 전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점차 전설로 변해 가던 수리마제 단궐, 그가 거옹이었다니 가히 놀 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청풍은 비록 무림계에 몸 담고 있지는 않았으나 풍문으로 그에 관한 소문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다. 그는 기이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아아... 생명과 같은 진기를 저에게 주시다니......." 그는 목이 메어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 무공에 문외한일지언정 만두를 팔며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동안 강호계에 대해 대략 들은 바가 있던 터였다. 단궐은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을 발했다. "나는 살아 있다. 네 몸 속에 뇌운진기(雷雲眞氣)가 흐르는 이상.. ....." 그 비장한 말은 유청풍에게 수리마제란 칭호를 물려주겠다는 뜻이 었다. 유청풍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동이 치밀었던 것이다. 그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지금까지 왜 신분을 감추고 사셨습니까?" 그의 얼굴에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 진지함이 엿보였다. 단궐은 뼈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듯 검미를 가운데로 몰았다. "으음, 심한 독상을 당해 운기(運氣)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간단한 문답을 통해 유청풍은 어느 정도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단궐은 강적과 대결하여 치명적인 독상을 입었으며, 공력을 운용하 면 안 되는 상황에서 진기를 사용한 결과 상처가 재발한 것이 분명했 다. 또한 그는 독을 제거하기 위하여 홀로 부단히 노력해 오면서 그 경 험으로 사곡 환자들을 치료해 준 것이었다. 유청풍은 그가 의로운 거인임을 깨달은 순간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분이야말로 살신성인을 몸소 보여주신 진정한 무인이구나. 한 데 당대 최고의 검객인 이 분에게 중상을 입힌 자는 대체 누구란 말 인가?' 유청풍은 치솟는 분노와 함께 단궐이라는 진솔한 거인을 가슴속에 아로새겨 놓았다. 그는 회오리치는 격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에게 보답할 기회를 주십시오!" 단궐은 진기를 모두 소모한 나머지 등을 천천히 바위에 기댔다. "때를 기다려라. 너는... 현재 일 성의 공력만 운용할 수 있다. 내 가 관수점층술(灌水漸層術)을 시전해 두었느니라." 그의 독문 수법인 관수점층술은 저수지에 채운 물을 전답으로 보내 듯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야 진기가 풀리는 특이한 점혈 수법이었다. 유청풍은 그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하면 일정한 기간이 흘러야 무공을 연마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 또한 혈광마검(血光魔劍)의 주인은 반드시 전광신공(電光 神功)에 있는 광전검법(光電劍法)을 익혀야 한다." 혈광마검은 단궐을 상징하는 분신과도 같은 신검(神劍)이었다. 단궐은 혈광마검에 뇌운진기를 실어 광전검법을 전개함으로써 고수 들을 까맣게 태워 죽인 것이었다. 현재 그 검은 개봉의 모처에 보관되어 있으며 누구나 접근이 가능 했다. 하지만 단궐을 제외하고 혈광마검에 손을 댄 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검을 만지면 어찌하여 죽게되는지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 었다. 단지 전광신공을 이루는 심법과 검법을 동시에 연마해야만 혈 광마검을 소유할 수 있다고 알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유청풍은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그럼 제가 그 검법을 배우겠습니다!" 그는 단궐을 해한 자를 반드시 꺾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할 작정이었다. 돌연 단궐은 급격하게 호흡이 가빠졌다. "성급함은... 필패(必敗)다. 냉정해라. 그 참뜻을 깨우칠 때까지.. . 오늘 일을 비밀로 해야한다......." 그는 두 눈에 찬란한 안광을 발하며 마지막 남은 한 모금 진기를 간신히 끌어 모았다. 그가 태연히 회광반조(回光返照)현상을 일으키 는 모습은 실로 숭고하게 보였다. 이미 독이 전신에 퍼져 그의 피부 는 시커멓게 변하고 말았다. 순간 유청풍은 감내하기 어려운 심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머리가 빠 개질 것만 같았다. 전설로 알려진 고수가 자신 때문에 생을 마감한다니....... 마침내 유청풍은 절규인지 울음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를 토해냈다. "크으으... 그럼 대체 언제 배우란 말입니까?" 어언 그의 시뻘건 눈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단궐은 느릿느릿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스스로... 겪어야지. 무적의 수리마제가 되려면......." 무림을 울렸던 거성 수리마제 단궐! 그는 의미 깊은 유언을 남겨놓은 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무림에 하나의 거성(巨星)이 지는 순간은 그토록 허무했다. 아무도 그의 죽 음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외로운 한 소년의 눈앞에서 조용히 숨은 거 두고 만 것이다. 유청풍은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그가 당부한 뜻을 되새겨 보았다. '뇌운진기를 전수한 터에 어째서 검법과 흉수에 관하여 말씀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은 비급을 잃어버렸거나 누군가가 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또한 모든 것은 유청풍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유청풍은 단궐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현묘한 안배를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그 뜻을 이룰 겁니 다. 반드시......!" 잠시 후, 사곡 양지 바른 기슭에 이름 없는 무덤 하나가 쓸쓸히 자 리 잡았다. [3] 와호장(臥虎莊)은 개봉에서 가장 큰 장원이자 부(富)를 상징하는 의미로 통했다. 한데 장원사람들은 장주의 외동딸 고혜원(高蕙媛)을 보면 한결같이 혀를 찼다. "쯧쯧, 철딱서니 없는 게 무공에만 미쳐서......." 사실 내막을 알아보면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년 전, 그녀가 남해(南海)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귀가한 이래 와 호장은 살벌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일년 삼백 육십 오일, 사람들은 그녀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고함소 리에 깜짝 깜짝 놀래며 살아야 했다. 새벽부터 장원을 울리는 기합소 리가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비로소 잠잠해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정원수는 온통 베어지거나 화살이 무수히 박힌 흉물로 변했으며, 값비싼 화초들은 새싹이 돋을만 하면 싹둑 잘려져 나가 뿌 리만 남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에게 심술궂은 남동생이 하나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녀는 부친이 하는 일이나 집안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을 쓰지 않았다. 보다못한 그녀의 할머니인 장대부인(張大夫人)은 마침내 혼처를 물 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눈치 챈 고혜원은 매일 새벽만 되면 막연산으로 사냥을 나갔 다가 캄캄해져야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그녀는 사냥을 하기 위해 막연산을 누비고 다녔다. "엇, 어디서 나는 냄새지?" 그녀는 입안에서 군침이 돌만큼 구수한 냄새를 맡고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 봐도 눈에 띄는 것은 험한 바위 와 울창한 숲 뿐이었다. 그때 꼬르륵! 하는 소리가 배에서 들렸다. 고혜원은 자신이 무척 시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착각했어. 할머니 때문에 너무 서둘러 나왔더니.......' 그녀는 새벽같이 집을 뛰쳐나와 정신없이 사냥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어느새 등에 멘 전통은 텅 비었으며 심신마저 지칠 대로 지쳐 버렸 다. 오늘 하루동안 맞춘 멧돼지가 다섯 마리요, 노루, 토끼, 꿩 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어언 태양은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그때 계곡 아래 어디선가 연기가 모락모락 솟구쳐 올라왔다. 고혜원은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번화행류(飜花行流)!" 교음(嬌音)이 터진 후 육 척 교구는 허공에서 다섯 번 굴러 이십여 장 계곡 아래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늘진 계곡은 맑은 계류가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굽이치는 물길 따라 하얀 잔모래가 깔려 있고 휘휘 늘어진 수양버 들이 바람에 흔들려 무릉도원 같았다. 커다란 바위 옆에 자란 수양버 들 가지 사이로 연기가 솟아오르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조금 전 구수한 냄새는 바로 그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혜원은 바위를 막 돌아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앗......!' 일 장 전면, 상의를 벗은 한 소년이 송아지 만한 산저(山猪:멧돼지 )를 굽고 있었다. 언뜻 구릿빛으로 얼굴이 탄 소년은 체격이 딱 벌어 져 멧돼지보다도 더 다부지게 보였다. 한데 소년이 고기를 굽는 방법은 특이했다. 내장이 제거된 멧돼지가 온통 진흙이 발라진 채 뜨거운 자갈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연기는 바로 그 멧돼지와 시뻘겋게 달궈진 자갈 밑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탁! 탁! 소년은 예리한 낫으로 멧돼지의 몸통을 연신 두들겼다. 그러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진흙덩어리가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진흙덩이 한쪽 편에 노린내를 풍기는 기름과 잔털이 잔뜩 묻어 나 왔다. 이어 소년은 낫으로 멧돼지 고기를 삭 베어 낸 다음 소금에 쿡 찍어서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후우....... 아주 잘 익었군." 그는 뜨거운 고기를 연신 이쪽 저쪽 불로 보내며 맛있게 씹어먹었 다. 이런 광경은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군침을 삼키 게 만들었다. 소년은 고기 한 점을 다 먹고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앉지." 그는 그녀의 발 끝을 힐끗 쳐다보았을 뿐 여전히 멧돼지 고기를 잘 라 우물우물 씹었다. 고혜원은 그만 발끈하여 날카롭게 받아쳤다. "뭐야? 네가 언제 봤다고......?" "고혜원인 줄 알고 있어. 나는 유청풍이다." 순간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날이 시퍼렇게 선 섬뜩한 극( 戟)으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네놈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녀가 들고 있는 극은 오싹하리 만치 싸늘한 빛줄기를 뿌려댔다. 언뜻 보면 방천화극(方天畵戟)과 유사하나 시퍼런 날 중간에 두 개 의 날카로운 톱니바퀴가 부착되어 있었다. 길이도 휴대할 때는 두 자로 줄지만 진기를 흘려넣으면 단숨에 일 곱 자로 늘어나는 것으로 이름하여 쌍륜화극(雙輪畵戟)이라는 병기였 다. 그녀는 쌍륜화극으로 유청풍의 턱밑을 들어올렸다. 유청풍은 턱이 들린 상태에서 한 마디를 던졌다. "장대부인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일찍 나왔지?" 순간 그녀는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녀석, 잘 아는 것 같아도 너무 몰라서 겁 없이 행동하는군.' 물론 그녀의 할머니가 장대부인이고 아버지인 와호장주는 개봉 제 일의 갑부이자 명망 높은 무림 고수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고 성한 자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쌍륜화극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녀가 막 병기를 그어댈 순간이었다. 꼬르륵......! 열 아홉 살 도도한 처녀의 뱃속에서 느닷없이 비상 신호가 울려나 왔다. 찰나 고혜원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그머니나!' 장강(長江) 이북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난 그녀는 그만 쥐구멍 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유청풍은 갑자기 자신의 배를 힘차게 때렸다. "에잇! 먹는데도 재촉하긴......." 퍼버벅!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시커먼 주먹 자국이 난 그의 배 는 금세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모욕감을 느낀 고혜원은 날카로운 쌍륜화극을 그대로 휘둘렀다. "이 놈! 전신에 혈선(血線)이 돋아야 알겠냐?" 슉! 찰나 무지개 빛 한기(寒氣)가 반월형을 그리며 지나갔다. 그 바람에 쩍 갈라진 유청풍의 오른쪽 뺨에서 검붉은 피가 팍 튀어 올랐다. 그러나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바라보았 다. "잘했어. 역시 냉영괴화(冷影怪花)라 피를 보고 마는군." 웃을 때보다 화를 내는 모습이 더 아름다우며 그럴 때마다 서슴없 이 살초를 펼친다 하여 냉영괴화로 불리는 여인이 바로 고혜원이었다 . 고혜원은 내심 깜짝 놀랐다. '앗? 벌써 지혈되다니......? 이건... 뇌운진기가 일으키는 현상이 아닌가?' 쌍륜화극 끝에는 피가 방울져 있었다. 그러나 세 치 가량 찢어진 유청풍의 얼굴에는 희미한 상흔(傷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녀는 사부가 들려주던 말이 떠올랐다. '뇌운진기는 구름이 뭉쳤다 흩어지는 원리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검혈 단궐은 혈도가 주기적으로 이동하여 다른 고수들 보다 피가 빨 리 응고하는 것이다. 만일 단궐이나 그 전인을 찾으면 즉각 보고하거 라.' 이제 분노와 수치심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궁금한 점을 확인한 다음 사부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 는 유청풍을 기이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과연 이 자가 검혈의 전인일까? 한데 어떻게 무공을 익히지 않고 도 구사( 射)한 멧돼지를 잡았지?' 지금까지 그녀는 사냥을 하면서 짐승들을 죽이지 않고 다리나 깃털 만 맞추었다. 하지만 표범이나 멧돼지 등 맹수는 예외였다. 이러한 맹수들은 어설프게 상처를 입을 경우 독이 잔뜩 오른 나머 지 적개심을 품고 반드시 분풀이를 하는 습성을 지녔다. 따라서 활시 위를 최대한 끌어당긴 다음 신경이 예민한 발을 정통으로 관통시켜야 맹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쳐 버린다. 이렇게 활시위를 잔뜩 당겨서 쏘는 방법을 구사라고 한다. 저 자갈 위의 멧돼지 역시 다리에 부상을 입고 펄펄 뛰던 놈이었는 데 그만 운명을 달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죽은 멧돼지가 아니 라 그것을 잡은 유청풍의 엄청난 힘과 그 출처였다. 이때 유청풍의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놈을 네가 잡은 거야?" 고혜원은 반사적으로 바위에 기대 놓은 나무 지게로 시선을 돌렸다 . 지게 밑에는 촉이 빨갛게 변한 화살들이 칠 팔백 개나 쌓여 있었다 . 저 모든 화살들은 그녀가 지난 일 년 간 짐승을 향해 쏘았던 것이 었다. 엄청난 양도 그렇거니와 그 동안 모아 두었다가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때 유청풍은 큼지막한 돌을 가리켰다. "무엇이든 굶고 하면 안 좋아." 그는 낫으로 멧돼지의 낭( :복부의 연한 살코기)을 싹뚝 잘라 내 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멧돼지 고기에도 호기심을 느꼈다 . 그것은 야생음식을 전혀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만이 갖는 호기심 이었다. 이윽고 고혜원은 쌍륜화극을 짧게 줄여 허리에 꽂은 다음 고기를 받아 들었다. 한 입 베어 문 순간 그녀는 무엇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는 줄도 몰랐다. 씹으면 씹을수록 살점은 입안에서 살살 녹아 버렸다 . 멧돼지 살코기는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쫄깃쫄깃하고 고 소하여 그녀가 태어나 처음 맛보는 별미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쁜 입을 오물거렸다. "으음, 최고의 훈투(熏透)야." 훈투란 소금 같은 양념 맛이 제대로 배어 훈제가 잘 된 상태를 말 한다. 물론 그녀도 일류 연육(烟肉:훈제 육류)을 많이 먹어 보았던 터였다. 하나 이처럼 사람의 넋을 빼앗는 고기 맛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반 근(斤) 정도 되는 살코기를 더 건네 받고서야 자신이 고 기 한 점을 다 먹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그가 가리킨 돌에 앉아서 말이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청풍은 자신의 입가를 가리키며 원을 그렸다 . 새카만 검정이 그의 코밑에서 턱까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는 보 조개가 패이도록 환하게 미소 지었다. "풋, 나도 그렇단 말이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고혜원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 고기를 다 먹을 수 없잖아? 배부를 텐데 왜 계속 굽는 거야?" "사곡 환자들에게 줄 만두 속이거든." 일순 그녀의 눈에서 감동의 빛이 솟아 나왔다. "아, 그 역질 환자들......?" 그녀는 사곡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은 터라 그 근처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십여 리나 떨어진 이곳으로 사냥 나온 것이 었다. 그녀는 유청풍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한데 그 많은 만두를 누가 만들지?" "내가. 빈촌에 있는 만미당이 우리 집이거든."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그녀는 몹시 겸연쩍어했다. "아, 그렇구나. 나도 돕고는 싶지만......." 그녀는 무공만 배웠을 뿐 음식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유청풍은 하늘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둡기 전에 어서 들어 가." 어언 먼 거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고혜원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화살은 나중에 가져갈게." 그녀는 두 눈에 이채를 발하며 신형을 날려 가볍게 능선 위로 날아 올랐다. 경신술을 발휘하며 날아가면서 그녀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 고 있었다. '꿈처럼 듣던 얘기를 목격할 줄이야! 어서 사부께 보고해야지.' 그녀의 모습은 한 줄기 미풍 속에 사라졌다. 한편 멧돼지를 수습한 유청풍도 지게를 지고 산을 내려갔다. "그들을 도와 줄 의원을 구하면 좋으련만......." 단궐이 죽은 후 그는 사곡 환자들을 치료할 의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진료비를 많이 준다해도 의원들은 사곡 소리만 나오면 한결같이 거절하곤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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