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기병 武林奇兵
- 와룡강
무림기병(1) 武林奇兵
저주부활(咀呪復活)의 권(卷)
서장(1)
마종(魔鐘) 혈뇌(血雷), 고금제일마병(古今第一魔兵)의 저주
-저주(咀呪)를 내리노라!
-구천(九泉)을 울리는 나 귀수천기옹(鬼手天器翁)의 뜨거운 원혈(怨血)로 저주(咀呪)를 내리노라!
-신종(神鐘)이 나의 분노로 마종(魔鐘)이 되리니......
-마종(魔鐘)은 너 혈황종(血皇宗)에게 천하(天下)를 줄 것이나, 또한 네 영혼(靈魂)을 천 가닥 만 가닥으로 찢어 발기리라!
-크하하하하...... 기억하라! 노부의 저주는 억겁을 지나 네놈의 잔혼(殘魂)을 바스러뜨릴 것임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구천(九泉)을 떠도는 나 귀수신장(鬼手神匠)의 저주(咀呪)를...
저주(咀呪)! 천지멸렬(天地滅裂)의 대파란을 몰고올 저주(咀呪)는 이렇게 시작된다.
<마종(魔鐘) 혈뢰(血雷!)>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피(血)의 냄새가 풍기는 고금제일마병(古今第一魔兵)이다. 뎅! 뎅! 심혼을 박살낼 듯한 종성(鐘聲)이 울리면 한순간에 구천(九泉)이 뒤흔들리고, 천하가 시산(屍山)으로 변하고 만다. 고금(古今)을 통하여 그 명성을 천하에 떨친 수천, 수만 종의 병장기가 있었다. 그러나...... 고금제일장인(古今第一匠人)의 처절한 저주(咀呪)가 실린 피의 종(血鐘)을 능가하는 것은 단연코 없었다. 단언하건데 결코......!
"종(鐘)을 만들어라!"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흡사 뇌신(雷神)을 연상케 하는 적포노인의 입에서 벽력같은 음성이 터져나왔다. 구 척의 거구, 하늘로 곤두선 시뻘건 피빛 모발(血髮), 타는 듯이 이글거리는 혈안(血眼)을 지닌 인물. 그의 모습은 전설로 전해지는 뇌신(雷神)의 형상 그대로였다. "크...... 혈황종(血皇宗)! 패도제일존(覇道第一尊)이라는 그대가 이 따위 비겁한 심사를 지녔다니......" 한 명의 마의노인(麻衣老人)이 분노에 떨며 자신의 앞에 천신처럼 우뚝 서있는 적포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평범한 외모에 굳은 살이 박힌 거친 장인(匠人)의 손을 지닌 인물. 하지만 그의 이름 만큼은 결코 외모같이 평범하지가 않았다.
--고금제일장인(古今第一匠人) 귀수천기옹(鬼手天器翁)!
고금제일(古今第一)! 그렇다. 그는 감히 고금제일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인물이었다. 그의 손(手)! 그것이 바로 그로하여금 고금제일의 칭호를 듣게 만들었다. 그의 손은 보통 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귀수(鬼手)이고 신수(神手)였기 때문이다. 그의 손(手)을 거친 물건들...... 그것들은 이미 인간의 물건들이 아니었다. 바로 하늘의 물건(天器)이 되는 것이다. 귀수신장(鬼手神匠)은 바로 이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으......" 지금 고금제일로 불리는 그 귀수신장의 불끈 쥔 투박한 두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치민 화를 어쩌지 못해 안색마저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신기(神器)를 만드는 장인답게 그는 평소 침착하고 끈기있는 성격으로 좀처럼 화를 내거나 격동하는 법이 없었다. 그른 그를 분노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한가지. 그것은 다름아닌 그가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한 여인에 관한 일밖에 없었다.
__신화(神花) 위지낭예(尉遲娘霓)!
바로 이 여인이 천수신장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가히 천하제일(天下第一)로 꼽혔으며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움마저 지닌 그야말로 꽃중의 꽃(花中花)이었다. 여인 위지낭예는 천하제일미인의 그 화려한 명예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수많은 조건과 기회마저 포기한 채 주저없이 한 남자를 택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 남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외모에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직업을 가졌으나 위지낭예는 오직 그의 여자만으로 살고자 모든 부귀영화를 떨치고 그 남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에게 선택된 그 행운의 남자는 바로 귀수신장이었다. 그런만큼 귀수신장의 아내 사랑은 지극하고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모든 영화를 버리고 조건없이 자신의 아내가된 위진낭예를 자신의 몸보다 더 사랑했다. 그의 삶의 관심은 언제나 아내에게 있었으며 신기를 만드는 작업도 오직 그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장인(匠人)이라는 것을 언제나 자랑스러워 했으며 그 남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연장이나 도구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으므로. 따라서 귀수신장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그를 불행하게 하는 것도, 그리고 그를 이토록 분노케 하는 것도 모두 그의 아내와 관련된 일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아내 위지낭예의 신상(身上)에 관한 일, 그것만이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혈황종(血皇宗)! 요구가 무엇이냐?" 귀수신장은 터질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의 눈은 강렬한 분노와 함께 안타까움의 빛이 뒤엉켜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강렬한 그의 눈빛은 혈황종이라 불린 적포노인의 오른손에 머물러 불길을 토하고 있었다. 혈황종의 오른손에는 한명의 여인이 죽은 듯이 잡혀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선녀가 하강한 듯한 모습. 신화(神花) 위지낭예(尉遲娘霓)! 귀수신장이 너무도 사랑하는...... 그의 애처가 바로 이 여인이었다. 고금제일의 명예라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헌신짝같이 버릴 수 있었다. 그녀가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신을 선택했을 때 귀수신장 또한 그녀만을 위해 살고자 다짐하지 않았던가? "흐흣......" 문득 혈황종의 입에서 낮고 음산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웃음과 함께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담긴 음성이 터져나왔다. "종(鐘)! 신종(神鐘)을 만들어라! 대천자(大天子)에게 깨뜨려진 천뢰금종(天雷金鐘)을 능가하는 신종(神鐘)을 만들어라!" "신종(神鐘)......" "그렇다! 신종(神鐘)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백 일(百日)의 기한을 주겠다! 네 부인은 그때 신종(神鐘)과 교환될 것이다!" 무례하고 명령적인 어조의 일방적인 말을 내뱉은 혈황종은 광풍(狂風)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잊지 마라! 네 부인을 다시 보려면 백 일 내로 신종(神鐘)을 만들어야 한다." 까마득한 허공에서 혈황종의 음사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전을 웅웅거렸다. 백 일......백 일 내에 신종(神鐘)을 만들라!
땅! 따---- 땅! 치---- 지지직! 쇳물이 끓는다. 시뻘건 열기를 토해 내며 쇳물이 끓어오른다. 그러나, 그 쇳물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쌍의 눈(眼)! 화산보다 천 배 만 배 더 뜨거운 심화(心火)를 토해 내는 눈이었다. "오냐! 신종(神鐘)을 만들어 주마! 낭예...... 사랑하는 낭예 만큼 완벽한 신종을 만들어 주마!" 치지지지직! 땅! 따---- 당! 심화(心火)로 쇠를 두드리는 인물... 그는 바로 귀수신장이었다. "낭예와 교환될 물건이다. 낭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완벽한 신품(神品)을 만들겠다. 노부의 영혼을 담아서......" 집념에 찬 그의 손놀림은 정교하고 눈부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품(神品)을 탄생시키기 위한 작업, 그보다 사랑하는 여인을 되찾기 위한 작업은 귀수신장의 심혼 깊은 곳에 자리한 강렬한 집념과 웅지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쇠를 두드리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 속에 귀수신장의 생의 목적과 목숨같은 사랑이 함께 녹아 어우러지고 있었다.
"신종(神鐘)은 여기 있다!" 귀수신장의 지친 손길이 하나의 신품(神品)을 내놓았다. 종(鐘)! 하지만 그것은 결코 평범한 종이 아니었다. "오......" 혈황종(血皇宗)의 손길이 기대와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토록 바라던 신종(神鐘)이 마침내 완성품이 되어 그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다. "신종(神鐘)을 만들었다. 이제 낭예(娘霓)를 돌려다오!" "네 부인...... 크큿! 물론 돌려 주어야지!" 신종을 확인하고 득의와 희열을 금치못하던 혈황종의 입가로 문득 칙칙한 죽음의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그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있다!" 휘____익! 혈황종은 비릿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보자기를 귀수신장의 발 앞으로 던졌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보자기. 하지만 너무나 놀라웠다. 그 안에서 굴러나온 것! 그것을 본 귀수신장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낭...... 낭예!" 그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으로 눈을 부릅뜨며 부르짖었다. 믿을 수 없게도 보자기 안에서 굴러나온 것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 아니 그 여인의 잘려진 목이었던 것이다. 원한으로 이지러진, 미인의 잘려진 목.... 그렇다. 그것은 바로 귀수신장의 애처 신화(神花) 위지낭예의 처참하게 잘려나간 목이었다. "크크...... 신종(神鐘)의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네 마누라 뿐만 아니라 너까지도 죽어주어야겠다." 혈황종은 잔혹한 눈으로 귀수신장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엄청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망연자실해 있는 귀수신장. 혈황종은 그런 귀수신장을 향해 사악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쿵쿵! 다가들었다. 그자의 사악한 인성(人性)은 후환을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완벽하게 비밀이 보장될 테니까. 귀수신장은 혈황종의 그런 사악한 욕심에 희생된 제물이었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슬픔과 충격에 넋이 나가있었다. "낭예......" 그는 울먹이듯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뇌까리며 그녀의 잘려진 목을 부둥켜 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처절한 슬픔이 녹아내린 그의 눈물은 영원히 그치지 않을 듯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문득, 뿌연 눈물로 젖어 있던 그의 동공에 한가닥 강한 결의의 빛이 어렸다. "구천(九泉)에서라도 함께 있겠소!" 귀수신장은 낮게 중얼거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집게를 손에 든 채 천천히 일어섰다. "......?" 그 모습에 혈황종은 흠칫 몸을 세웠다. 귀수신장의 눈이 실로 예사롭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눈은 무서운 저주와 원한으로 불타고 있었다. 상대의 심혼을 바스러뜨릴 정도로 처절한 눈빛. "혈황종(血皇宗)! 노부의 뜨거운 원혈(怨血)을 저주로 내리겠다..........!" 한순간 벌겋게 달아오른 집게가 귀수신장의 심장으로 푸욱! 파고들며 시뻘건 선혈이 솟구쳤다. 너무나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이었다. 촤---- 아악! 귀수신장의 심장에서 뿜어진 선혈은 마침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신종(神鐘)을 뒤집어 쒸워 눈 깜짝할 순간 종을 시뻘건 혈종(血鐘)으로 만들었다. "신종(神鐘)이 나의 분노로 마종(魔鐘)이 되리라!" 귀수신장은 온 몸으로 선혈을 쏟아내며 원한에 찬 음성으로 저주했다. "마종(魔鐘)은 너 혈황종에게 천하를 줄 것이나, 그 댓가로 네 영혼(靈魂)을 천가닥 만가닥으로 찢어 발기리라!" "미...... 미친 놈......" 혈황종은 귀수신장의 저주에 섬칫한 전율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내 그자는 귀수신장의 저주를 무시해 버렸다. 지금 그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눈앞의 신종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쿠---- 콰콰콰---- 쾅! 때마침 거창한 벽력성(霹靂聲)과 함께 번쩍이는 뇌전(雷電)이 대지를 두들겼다. 콰---- 르르릉! 그 엄청난 낙뢰를 맞은 귀수신장의 대장간은 삽시에 박살이 되어 날아갔다. 귀수신장의 원한이 하늘까지 사무쳤음일까? 그의 저주는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들어맞고 있었다. 갑자기 떨어진 낙뢰로 혈황종은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자의 안색이 불안과 당혹감으로 크게 흔들렸다. "신...... 신종(神鐘)은......"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간일발의 차이로 대장간을 빠져나온 그자는 다급히 폐허로 다가갔다.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다. 귀수신장의 시신도 이미 재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웅__웅___웅! 데___에엥! 모든 것이 부서지고 타버린 폐허 속에서 웅혼한 울림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신...... 신종(神鐘)!" 혈황종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어느새 폐허를 파헤친 그의 손에 사람의 머리만한 핏빛 혈종(血鐘)이 들려 있었다. 스스로 웅혼한 울림을 발하는 혈종! 벼락을 맞은 탓인지 종의 표면에는 전에 없던 뇌전(雷電)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크하하하! 신품(神品)이다! 이제 너를 혈뢰(血雷)라 부를 것이다....크큿! 천하는 네 울음소리에 무릎을 꿇으리라! 크하하하핫!" 혈황종은 흡족함과 만족에 겨워 천지를 뒤흔들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자의 득의에 찬 웃음소리는 사악한 욕망과 음모를 안고 폐허를 찌렁찌렁하게 울렸다.
-마종(魔鐘) 혈뢰(血雷)!
천지를 피로 물들일 마물(魔物)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마종(魔鐘) 혈뢰(血雷)____! 그 이름을 기억해 두자.
서장(2)
금부(禁符), 천상(天上)의 전설(傳說)
정공(正功)! 바름(正)과 밝음(明)을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힘을 말함이다. 그런데, 이 정공(正功)이 극강(極强)해져 초극(超極)의 지경에 이른 때가 있었다. 정(正)과 사(邪)! 그 구분마저 지나 역천지경(逆天之境)에 이른, 그야말로 사상최강의 정공(正功)이 천상(天上)까지 이른 때가 있었다. 바름(正)과 밝음(明)을 수호해야할 정공. 그것의 목적마저 무색해졌던 때가 있었으니....
일천 이백 년 전,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오던 마교(魔敎)의 성세(盛勢)가 최극(最極)에 이르렀었다. 천지가 마기(魔氣)로 가득하고 시산(屍山)이 구주에 널려 인세(人世)의 종말이 온 듯 하였다. 더불어, 그 혈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대의 권력자로 우뚝 떠오른 마교최강의 인물이 등장했다.
-따르는 자만이 살아 남으리라!
그자가 표명한 뜻은 명백하고도 간단했다. 그자의 말은 곧 법이고 진리였다. 사상최강의 마종(魔宗)으로 급부상한 인물. 그자의 이름은 천마대제(天魔大帝)였다. 천마대제(天魔大帝)는 자신의 능력을 내세워 지금까지 마교가 고수해온 오랜 전통마저 부인하고 절대의 권위를 주장하며 천하지존(天下至尊)으로 군림하려고 했다. 즉, 그는 마교(魔敎)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천마부(天魔府)>
천마대제는 마도사상 최강이라 일컬리는 천마일천수라존(天魔一千修羅尊)을 동원하여 천마부(天魔府)라는 거대한 세력을 탄생시켰다. 그자가 세운 천마부(天魔府). 그것은 단일세력으로는 최강이라고 무림사에 기록되었다. 천마대제는 고사하고 천마일천수라존의 막내인 벽혈마웅(碧血魔雄)마저 꺾을 자가 없을 정도였다. 바야흐로, 천지가 천마부의 그림자로 가득차 들어가는 듯이 보였고, 아마도 대변수가 없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실현되었으리라.
-대변수(大變數)! 그것은 천외(天外)로부터 온다. 대저, 진정한 강자들은 세외(世外)에 많다. 남과 다투어 영욕을 취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강함을 자족(自足)하며 은인(隱忍)하는 인물들이 많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강자였기에 천하를 위해 스스로 해야할 일과 나서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천하가 천마대제(天魔大帝)의 천마부(天魔府)에 눌려 위중지경에 처하고 양민들의 숨통이 조여지는 사태에 입각했음을 인식한 것이다. 이에, 진정한 강자들이 차례로 세외(世外)로부터 나와 천마부(天魔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은자(隱者)들은 아주 신중하다. 그들은 천마부(天魔府)가 사상최강의 세력임을 알기에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고 암중에서 서로의 힘을 연결하여 세력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__무림천상천(武林天上天)!
고금을 통하여 다시 없을 거대한 태동이 이로 시작된다. 구주팔황(九州八荒)의 중원 뿐만이 아니고, 천축(天竺), 관외(關外), 서역(西域), 대막(大漠), 고려(高麗) 등..... 천하로부터 의혈(義血)을 지닌 강자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상일백무존(天上一百武尊)!
이들은 무림천상천(武林天上天)을 대표하는 강자들이었다.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이미 더 이상 이를 곳이 없는 최고최강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개개인이 천마대제(天魔大帝)의 자웅을 결할 정도라 하니 그들의 강함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하여 마침내 장장 일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대전(大戰)의 서막이 올랐다.
천마부(天魔府)대 무림천상천(武林天上天)!
처음에는 물론 천마부가 무림천상천을 압도했다. 그러나, 무림천상천은 천마부의 거창한 공세를 의연히 버티어 냈다. 그리고 점차 그들은 천마부와 호각을 이루게 되었다. 무림천상천의 기인(奇人)들은 사욕이 없다. 그들은 허삼탄회하게 서로의 지닌 바 재주를 공개했고 자신들의 절기중 장점만을 가려 새로운 공통절기를 창안하고자 뜻을 모았다. 그들은 천마부의 절기를 능가할 무공의 창안에 주력했다. 그것은 장장 일백 년의 긴 세월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 세월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마침내, 천마부(天魔府)의 천마절기(天魔絶技)를 휴지조각으로 만든 절대신공(絶代神功)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몰락(大沒落)! 결과는 천마부의 대몰락으로 종결지어졌다. 천마대제(天魔大帝)만이 피를 토하며 세외(世外)로 달아났을 뿐, 천마일천수라존(天魔一千修羅尊) 전원이 천마부와 함께 한줌의 먼지로 스러졌다. 무림천상천(武林天上天)의 대승! 그것으로 마침내 백년대전(百年大戰)이 종식된 것이다. 천하는...... 실로 오랜만에 광명(光明)을 되찾았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은 큰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바탕 열병을 앓고난 뒤의 후유증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무림인들은 열병 뒤에 얻은 또 다른 걱정과 불안으로 저마다 전전긍긍했다. 그것은 바로 무림천상천(武林天上天)의 존재 때문이었다. 무림천상천은 실로 너무도 큰 벽(壁)이었다. 천마부의 거대세력을 일거에 뿌리뽑은 그들의 존재는 무림인들에게 또 다른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천하가 넓다 하나 무림천상천이라는 거인(巨人)들이 몸을 담기에는 너무 좁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이 강하다함은 필연적으로 악(惡)을 대동한다. 마치 태양이 밝으면 밝을수록 그 그림자가 짙어지듯이..... 이것은 무림천상천과 천하가 해결할 공동의 난제였다. 마침내, 무림천상천(武林天上天)의 기인들은 의연한 결단을 내린다.
__천하를 위하여 무림천상천은 천외금부(天外禁府)로 들어 영원히 나오지 않으리라!
희생! 그렇다. 그것은 희생이었다. 천하를 위하여 노기인들은 단호한 희생을 결심한 것이다. 그들은 천하무림의 번영을 위하여 스스로를 천외(天外)의 절지에 묻어버린 것이다. 이는 진정한 강자만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이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무림천상천의 천주이며 최강자였던 금부지존(禁府至尊)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없이 천외금부(天外禁府)로 든다.
<금부(禁府)를 남긴다. 후일 천마대제(天魔大帝)의 후인이 나서 천하를 어지럽힐 때 금부가 현신할 것이고...... 한 명 대기재(大奇才)가 나서 금부로 천외금부(天外禁府)를 열게 되리라.>
금부(禁符)!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천하인 누구든지 안다. 금부를 얻는 자, 곧 천외금부주(天外禁府主)이며, 동시에 고금제일존(古今第一尊)이 될 것임을......
-금부(禁符). -천외금부(天外禁府). -무림천상천(武林天上天).
과연 그것은 누가 얻을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주인으로 고금제일존의 영예를 누릴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1장 폐허의 풍운(風雲)
황원(荒原). 풀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거친 황원(荒原)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다. 우루루루루... 아주 먼 곳에서 은은한 우뢰성(雨雷聲)이 들린다. 암천(暗天)! 하늘은 온통 시커먼 먹장구름으로 가득했다. 아직 밝은 대낮이지만 대지를 짓누를 듯 시커먼 흑운(黑雲)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어둡고 음산함이 가득한 하늘. 금방이라도 한바탕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였다. 문득, 따각...... 따---- 각! 황원 저쪽에서 규칙적인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암천(暗天)을 등에 지고 일인일기(一人一騎)가 나타났다. 인마(人馬)는 모두 깨끗한 백색이었다. 검은 하늘, 침침한 대기를 배경으로 눈부시도록 흰 일인일기는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듯 확연한 대조를 이루며 다가왔다. 백마의 등에 타고 있는 사람. 그는 한명의 청년서생이었다. 잡모 하나 없는 백마(白馬)의 등에 단아한 자태로 앉은 그는 이제 약관 정도로 보이는 서생이었다. 맑은 눈에 윤곽이 뚜렷한 인상적인 용모.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으나 일견 단호함이 엿보이는 붉은 입술. 그는 깨끗한 백삼에 운치있게 펄럭이는 붉은 수심을 단 패검(佩劍)을 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탈속하여 인세(人世)의 인물 같지 않은 청년이었다. "비가 오겠구나!" 청년은 암천을 힐끗 올려다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백마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백풍(白風), 조금 빨리 이 황원을 지나자 자칫하면 비로 목욕을 하게 되리라!" 히---- 히힝! 백마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백마의 달리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그럼에도, 백마의 등에 앉은 청년은 여전히 등을 바로 세운 채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다. 백마도 당대의 명마(名馬)이지만 그 주인의 기마술도 놀라운 것이었다. 두두두두... 백삼서생을 태운 백마는 삽시에 십여 리를 달렸다. 그 때였다. "이런 황원에 집이 있다니......" 앞을 바라보던 백삼서생의 눈이 번득 빛을 발했다. 이삼 장밖에 음침한 암천을 이고 한 채의 장원(莊院)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낡고 허름한 장원은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우선...... 저곳으로 가서 비를 피해야 겠군." 그나마 잠시 쉴곳을 발견한 서생은 기쁜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백마는 주인의 뜻을 알았는지 곧장 장원으로 달려 갔다. 이내 백삼서생은 장원 앞에 이르렀다. "폐장이었군." 그는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장원을 둘러보며 백마의 등에서 내렸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으나 장원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폐장으로 낡고 퇴락한 모습이었다. "흠...... 비를 피할만한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군." 서생은 중얼거리며 장원의 정문쪽으로 다가갔다. 음산한 바람결에 정문 처마에 매달린 편액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귀보(鬼堡)>
칠이 벗겨진 편액에는 흐르는 듯 유려한 서체로 그와같은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귀보(鬼堡)...... 이상한 이름의 장원이군." 백삼서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그 이름에서 풍기는 어감이 기이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다 부서신 장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꽤나 웅장하게 지은 장원이었군." 안으로 들어서며 서생은 저으기 감탄했다. 장원은 생각보다도 넓고 웅장했던 것이다. 허물어지고 퇴락하기는 했으나 고루거각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따각따각.... 백삼서생은 백마를 이끌고 무성한 잡초 사이를 걸어갔다. "백풍! 너는 이곳에서 쉬거라." 그는 전에 마구간으로 쓰던, 제법 형체를 갖추고 있는 건물에 백마를 집어 넣었다. "대전(大殿)으로 가보아야겠다!" 백마를 마구간에 넣은 백삼서생은 귀보의 대전이 있을법한 장원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후두둑...... 후두둑! 쏴아____아! 그가 대전 중앙을 향해 나서자 갑자기 한 소리 우뢰성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삼서생은 총총히 걸음을 옮겨 전면의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우두두두두......쏴---- 아아! 그 직후, 대지를 두들기며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군만마가 일시에 치달리듯, 땅이 흔들리고 뽀얀 물안개가 일시에 귀보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시원하게 쏟아지는군!" 서생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가슴속까지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앉아 장대 같은 빗줄기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생각난 듯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반 쪽의 고색창연한 옥부(玉符)였다. 옥부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 옥부를 만지작거리던 서생의 준미한 얼굴에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어느새 눈가가 축축이 젖어드는 것은 너무 짙은 그리움 때문일까? 그의 가슴으로 그리운 얼굴이 서러운 오열처럼 솟구쳐 올랐다.
"콜록.... 콜록.... 천궁(天弓).... 기억하거라. 그.... 천기옥부(天機玉符)는.... 우리 천기문(天機門)의 근원이 되는.... 신물(神物)이다......" 밀납 같은 안색에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의 중년문사. 그는 자리에 누운 채 힘겹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앞에는 한명의 백삼서생이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으로 중년문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버님....!" 그의 가슴은 참담함으로 찢어지는 듯 했다. (아버님은 암습을 받으셨다. 아... 천하제일의 내공을 지니신 아버님의 심맥을 마다마디 끊어 놓다니... 대체 어떤 자이기에....) 서생의 안면이 의혹과 분노로 이지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격렬한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점점 짙어지는 의혹. 지금의 상황이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리천궁(百里天弓)!
이것이 준수한 용모를 지닌 백삼서생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완연한 창백한 안색의 중년문사는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의 부친 백리자현(百里紫玄)은 천하제일의 내공대가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지금 그는 심맥이 갈갈이 끊겨 임종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콜록.... 천기옥부(天機玉符)에는.... 비밀이 있다.... 그것은.... 천외천(天外天)의 비밀이고.... 누구도 풀지 못한 것.... 반 쪽의 옥부를 마저 찾아.... 비밀을.... 풀어라!" 백리자현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완연했다. 억지로 쥐고 있는 한가닥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는 그대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릴 것이다. "......" 그런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는 백리천궁의 마음은 천만 갈래로 찢기는 듯하였다. 다시 그의 귓전에 들리는 부친의 목소리는 괴로운 기침과 거친 호흡을 가누기 힘드는 듯 점점 낮게 잦아들고 있었다. "콜록.... 천기옥부가 백리가문에.... 들어온 지 천 년.... 아비가 불충하여..... 옥부가 둘로..... 나뉘고 말았다.... 강호에 나가.... 백봉(白鳳)을.... 표식으로 삼는.... 여인을 찾아라.... 옥부의.... 반은.... 그 여인이.... 콜록.... 콜록......" 끊어질 듯 격심한 기침속에 백리자현의 숨결이 급격히 거칠어졌다. "아버님!" 백리천궁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급히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백리자현의 손은 이미 얼음장같이 차가와지고 있었다. 산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손길. "천...... 궁(天弓)...... 너...... 를 믿는...... 다. 마종(魔宗)을...... 조심...... 하고......" 툭!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백리자현의 머리가 마침내 격렬한 고통에서 떠나 힘없이 옆으로 꺾여졌다. "아버님!" 백리천궁은 터질 듯한 슬픔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오열이, 피보다 짙은 통곡이 그의 가슴을 메아리쳤다.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복받치는 울음을 목구멍 깊숙이 삼켜버렸다. 그런 그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뚝! 떨어지며 천기옥부 위로 떨어졌다. 떨어진 그의 눈물은 마치 안개같이 천기옥부의 문양 사이로 스며들었다. 백리천궁은 슬픔으로 침잠된 망연한 눈으로 천기옥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에 문득 무엇인가 들어왔다. "금(禁)......" 그는 미간을 좁히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뜻밖에도 천기옥부의 복잡한 문양 속에는 깨알같은 글들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 상단의 가장 큰 글씨가 제일 먼저 백리천궁의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금(禁)이란 글자였다. "금(禁)......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반 쪽의 천기옥부를 찾아야만 알 수 있는데......" 백리천궁은 자신도 모르게 궁금증에 빠져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백리가문은 대대로 독자(獨子)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가주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기재(奇才)들이었다. 특히, 백리천궁은 백리가문 일천 년을 통하여 이어져온 기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재였다. 다만 그 자신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만...... 그는 천기옥부를 전수받은 지 한 달이 못 되어 천 년 동안 그의 선조들을 괴롭혔던 천기옥부의 비밀을 일부 해득하고 있었다. 즉, 천기옥부의 복잡한 문양 속에는 갑골문(甲骨文)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갑골문들은 너무도 은밀하여 해박한 지식과 관찰력이 없으면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백봉(白鳳)...... 어디가서 백봉(白鳳)을 찾는단 말인가?" 백리천궁은 절로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끼며 막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크아아-- 악!" 한소리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생각에 깊이 잠겨있던 백리천궁의 귓전을 두드렸다. 그 비명은 사람의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너무도 처절한 고통의 울부짖음이었다. "......" 백리천궁은 흠칫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상념을 떨치며 얼른 대전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쏴--- 아아아! 우두두두...... 하지만 귀를 기울여봐도 여전히 빗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릴 뿐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을까?) 백리천궁은 검미를 모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가 막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뎅! 데---- 엥! 마치 구천지옥(九泉地獄)의 아수라가 울부짖는 듯한 사악하고 섬뜩한 종음(鐘音)이 다시 백리천궁의 귓전을 울렸다. 그것은 결코 잘못 들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아주 섬뜩하고 무서운 소리였다. "크읏!" 그 종음을 들은 백리천궁은 금방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종음을 듣는 순간 전신의 심맥이 마디마디 끊기는 듯한 고통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종음에 고통을 느낀 것은 비단 백리천궁만이 아닌 듯 했다. "크윽!" "케에엑___!" 간장을 후벼팔 듯 처절한 비명은 연이어 터져나왔다. 그 비명들은 거의 동시에 터져 마치 한 사람이 지른 듯이 느껴졌다. 백리천궁은 더 이상 망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서쪽이다!" 그의 몸이 한순간 벼락같이 귀보의 서쪽으로 폭사되어 갔다. 전혀 무공을 지닌 것 같지 않던 백리천궁. 하지만 실상 그의 일신에는 천하를 놓고 다툴만한 절기가 숨겨져 있었다. 스슥! 쏴아___ 아! 백리천궁의 그림자는 여전히 기세를 늦추지 않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연기같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백리천궁은 의사청이었던 듯 싶은 한 채의 웅장한 전각 앞으로 날아내렸다. 그곳으로 내려서던 백리천궁은 문득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죽음의 냄새가 느껴지는데......) 그는 잡초를 밟고 허공에 둥실 뜬 채 어두운 의사청 안을 들여다 보았다. 타다닥! 츠츠츠...... 쏟아지는 폭우는 백리천궁의 몸 반 자 정도에서 무형의 벽에 부딪쳐 퉁겨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선천강기가 그의 몸 주위로 흐르는 있는 것이다. 그가 의사청 안을 살펴보고 있는 바로 그때,. 돌연 파파팍! 하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일더니 의사청 안에서 두 마디의 비명이 재차 터져나왔다. "크---- 아악!" "악!" 그 중 나중의 신음소리는 뜻밖에도 여인의 것이었다. 백리천궁은 그 신음소리에 튕겨지듯 벼락같이 의사청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날아든 백리천궁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두운 의사청 안. 죽음의 그림자가 칙칙하게 흐르는 가운데 역겨운 피냄새가 확 끼쳐온 것이었다. 백리천궁은 검미를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사청 안에는 끔찍하게도 수십 구의 시신이 처참한 형색으로 죽어 있었다. 죽어있는 자들은 대부분이 중년인으로 태양혈이 불끈 솟은 내가고수들로 보였다. 그런데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모공에서 선혈을 토한 채 만면에 공포의 기색을 띤 채 죽어다는 점이었다. 예리한 백리천궁의 눈은 이내 그것을 파악해냈다. (하나같이 심맥이 끊어져 죽었다. 이런 증세는...... 아버님이 당하신 암습과 같은 것인데......) 시신을 주의깊게 살피던 백리천궁의 눈빛의 어둠 속에서 강렬한 뇌전을 흘렸다. 바로 그때, "으......" 문득 한소리 미약한 신음성이 백리천궁의 귓전을 울렸다. 백리천궁의 신형은 그 신음성을 듣자마자 흡사 용수철같이 튀어올라 신음성이 들린 곳으로 날아내렸다. "여인......" 신음성이 들린 곳을 찾아 내려선 백리천궁은 일순 흠칫 몸이 굳어졌다. 한 명의 백의여인이 벽에 기댄 채 누워 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제 십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손을 대면 하얗게 묻어날 듯한 뽀얀 피부를 지닌 여인이었다. 너무 희고 깨끗한 피부 탓인지 그녀의 인상은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용모는 흰 피부에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었고 오똑한 콧날은 마늘쪽같아 도도하면서도 귀엽고 깜찍한 인상을 풍겼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해맑은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인은 몸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눈을 꼭 감고 벽에 기대앉아 있는 여인. 그녀의 오른쪽 젖무덤에는 하나의 날카로운 검편(劍片)이 박혀있지 않은가? 그런 그녀의 섬섬옥수에는 한 자 가량의 하얀 비수(匕首)가 꼭 쥐어 있었다. 그 여인의 맞은편에는 한 명의 혈의노인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아주 흉폭한 인상의 노인으로 그의 심장에는 한 자루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했군." 백리천궁은 두 남녀를 주시하며 단번에 전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여인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상세를 살피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녀의 맥문을 쥐었다. 그런데, 여인의 맥문을 쥐던 백리천궁은 일순 흠칫했다. 여인의 손목이 너무도 차가왔기 때문이다. (얼음 같은 여인이다. 극강한 극음강기를 익혔고...... 그 극음강기가 심맥을 지켜 즉사를 면했다.) 백리천궁은 이내 여인의 상세를 짚어내며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의해 여인의 부드러운 젖무덤에 박혔던 검편이 뽑히며 붉은 선혈이 여인의 깨끗한 백의를 적셨다. 여인의 가슴에 박힌 검편을 제거한 백리천궁. 그의 영준한 얼굴에 문득 홍조가 떠올랐다. "치료를 하려면 의복을 벗겨야 하는데......" 그는 잠시 난감해졌다. 철이 든 이후로 여인을 전혀 접해보지 못한 그 인지라 여인의 의복을 벗긴다는 것이 쑥스럽고 멋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주위에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인 또한 고통을 참지못해 지금은 혼절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선뜻 여인의 옷을 벗긴다는 것이 백리천궁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백의미녀는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젊은 피를 지닌 백리천궁이기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는 불규칙해지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한 모금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의도(醫道)란 인명을 구함에 그 목적이 있다. 이제 나는 인간이기 전에 의원이다.) 백리천궁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신중히 손을 내밀어 백의미녀의 저고리 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다듬기는 했으나 그래도 백리천궁의 손길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백의미녀의 상의가 벗겨지며 탐스럽기 이를 데 없는 뽀얀 수밀도가 눈앞에 드러난 것이었다. 그녀는 가녀린 체구에 비해 풍만한 젖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뽀얗고 탄력 있는 육봉. 그 위에는 두 알의 분홍빛 열매가 파르르 수줍음에 떨고 있었다. "중상인데...... 자칫했으면 유심혈(乳心穴)을 다칠 뻔했다." 백리천궁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여인의 오른쪽 유두 밑에 난 자상을 살펴보았다. (그...... 괴종음(怪鐘音)에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저 혈의노인과 겨루어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뻔했다.) 그는 이내 백의미녀의 상세를 파악해내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정확했다. 그는 만 가지 방면에 재주가 있었고 그 중에서도 의술은 가히 발군이었다. "우선 지혈을 하고 추궁과혈을 해주어야 한다." 백리천궁은 염두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백의미녀의 몸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 갑자기 백리천궁은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침을 느꼈다. (살기(殺氣)!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노린다.) 그의 몸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경직되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난생 처음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적과 조우(遭遇)한 것이다. 스---- 으읏! 한순간 무형의 서릿발 같은 경력이 백리천궁의 등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너무도 은밀하고 기쾌한 공세였다. 백리천궁의 안색이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입에서 문득 용트림하는 듯한 한소리 창룡후가 터지고 무형의 강벽이 폭발하듯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석실 전체를 날려버릴 듯 뒤흔들었다. 그 폭음속에서 "큭!"하는 한소리 묵직한 신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백리천궁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백리천궁 역시 충격은 컸다. 그는 등이 베어지는 듯한 고통에 절로 신음성을 흘리며 쓰러질 듯 몸을 비틀거렸다. 하지만 한 번 휘청거리던 그의 몸은 이내 다시 쾌첩하게 휘돌아 뒤로 돌아섰다. "음...... 애송이였군!" 돌아선 백리천궁의 눈에 한 명의 청포중년인이 들어왔다. 그자는 흉폭한 시선으로 백리천궁을 노려보며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가늘게 찢어져 날카롭고 무서운 눈매. 휘어질 듯 예리한 콧날과 얄팍한 입술이 아주 섬뜩한 느낌을 풍기는 자였다. 그자는 손을 휘둘러 허리춤에서 일곱 자 길이의 채찍(鞭)을 풀어냈다. 그것은 시커먼 윤이 도는 구절낭아편(九絶狼牙鞭)이었다. "잠깐, 본인은 귀공과 다툴 이유가 없소." 백리천궁은 급히 청포인의 행동을 저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청포인의 냉혹한 안면에는 살기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감히 탁세육흉(濁世六兇)을 건드리고도 발뺌을 하려 하다니..." "탁세육흉?" 백리천궁은 처음 듣는 이름에 의아한 표정으로 검미를 모았다. "크큿...... 그렇다. 네놈이 빙백서시(氷魄西施) 냉(冷)가 계집과 합세하여 위해한 분이 바로 탁세육흉의 셋째 형이신 혈검제(血劍帝)시고 본인이 다섯째 잔독신마편(殘毒神魔鞭)이다!" (빙백서시(氷魄西施)...... 탁세육흉(濁世六兇)......) 백리천궁은 아직도 혼절상태에 있는 백의미녀를 흘깃 돌아보며 입 안으로 되뇌었다. 빙백서시, 탁세육흉! 그들은 당금 천하를 떨어 울리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물론, 강호 경험이 전혀 없는 백리천궁으로서는 그것을 알 까닭이 만무했지만.
__빙백서시(氷魄西施)! 그녀는 장백(長白) 빙백일문(氷魄一門)의 후인이었다. 빙백노조(氷魄老祖)라는, 일 갑자 이전에 은퇴한 노기인이 그녀의 사부이고, 천하삼대미인(天下三大美人)에 드는 미인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성품이 얼음장 같았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손속으로 무림인에게는 공포의 존재가 되는 여인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추근거리다가 비명횡사한 후기지수들이 부지기수일 정도였다.
__탁세육흉(濁世六兇)! 삼십 년 동안 사파무림의 일단을 지켜온 거마(巨魔)들이다. 그자들은 하나같이 잔혹하고 교활한 성격을 지닌 마두들로서, 개개인의 독문절기 또한 한 방면에 일절로 불릴만큼 뛰어났다. 무림도의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그자들이었기에 공공연히 협공이나 암습 등을 자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한 번 탁세육흉과 원한을 맺으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당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 이유로 탁세육흉의 횡포가 날로 극심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그들을 제지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특히 다섯째인 잔독신마편은 그 심기가 독랄함으로 아주 유명한 자였다.
"흐흣...... 각오해랏!" 파파파팟! 한순간 잔독신마편의 구절낭아편이 영사같이 백리천궁의 목을 휘감아 왔다. "손을 거두시오!" 백리천궁은 기쾌한 신법으로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잔독신마편의 일편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제법이군. 독심마라편(毒心魔羅鞭)!" 잔독신마편이 재차 휘두른 구절낭아편에 사위는 일시에 어지러운 편영(鞭影)으로 뒤덮였다. "헛!" 미처 피하지 못한 백리천궁의 어깨가 구절낭아편에 스치며 선혈이 배어나왔다. 백리천궁은 검미를 꿈틀하며 잔독신마편을 주시했다. "진퇴를 모르는 자군!" 백리천궁의 우수에서 문득 뇌전같은 강기가 피어올랐다. "크크큿...... 뒈져랏!" 파---- 아앗! 일편을 섭공한 잔독신마편은 득의하며 또 다시 백리천궁을 향해 마편을 휘감아 왔다. "물러가랏!" 백리천궁의 입에서 한소리 분노의 외침이 터짐과 함께 그의 우수가 휙! 뿌려지며 장내가 갑자기 천가닥 만가닥의 강기로 뒤덮였다. 흡사 강기의 그물이 뒤집혀 씌워지는 듯한 형상. "헉!" 그제서야 잔독신마편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공포의 기색으로 아연하여 외쳤다. "이...... 이것은...... 바로 천기(天機)......" 콰르르르르! 하지만 그 다음은 곧바로 터져오른 요란한 폭음속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크--아--아!" 그 폭음에 묻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무지개같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피무지개 속에서 독신마편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자의 전신은 수십 개의 강기에 관통당해 있었다. "천.... 천기팔극망(天機八極網).... 천.... 천기대제(天機大帝)의..... 절기가....." 잔독신마편은 공포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고개를 옆으로 툭 꺾고 말았다. 절명한 것이었다. "......" 백리천궁은 망연한 표정으로 자기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천기팔대절기(天機八大絶技) 중 일곱 번째인 천기팔극망(天機八極網)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그는 놀라움과 함께 문득 가슴이 착잡해짐을 느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른 자신이 놀라웠고 그와 함께 가슴속에 무거운 죄의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비록 상대가 죽음을 자초하기는 했으나 그에게는 이것이 최초의 살인이었다. 백리천궁의 기분이 편할 까닭이 없었다. 그는 착잡한 심정을 애써 거두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문득, 그는 독독신마편이 죽음 직전에 남겼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천기대제(天機大帝)라...... 아버님이 강호를 행도하실 때 얻은 별호인가?) 백리천궁은 몸을 돌리며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휘---- 이익!" 멀지 않은 곳에서 돌연 한 소리 날카로운 장소성이 들려왔다. 섬뜩한 사기가 섞인 장소성이었다. "흉사(兇邪)들이 주위에 있다. 귀찮음을 피해야 하는데......" 백리천궁은 또 다시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않아 미간을 모았다. 그렇지 않아도 첫 살인을 저지른 그로서는 영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는 문득 두 눈을 번득 빛냈다. 그는 얼른 주위에 널려있는 중인들의 시신에서 병장기를 빼냈다. 그리고 그 병장기들을 빙백서시를 중심으로 둥근 반원형을 이루도록 대전바닥에 꽂기 시작했다. 얼핏 보아 무질서해 보였지만 병장기들은 어느덧 하나의 진식을 이루었다. 실로 눈 깜짝할 순간에 하나의 진(陣)이 백리천궁과 빙백서시의 주위에 형성된 것이었다. 진세가 이루어진 직후, 스--슥! 화라락! 두 줄기 인영이 의사청 안으로 날아들었다. 창백한 안색을 지닌 한명의 노문사와 철탑 같은 체구의 장한이었다. (범상한 인물들이 아니다. 특히 저 노문사는......) 백리천궁은 진세 안에서 눈을 빛내며 두 인물을 주시했다. 안으로 들어선 두 인물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다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엇! 다섯째가...!" 철탑거한이 한쪽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잔독신마편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호목을 치뜨며 급히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지독한 손속입니다. 일격에 즉사했습니다." 철탑거한은 잔독신마편의 사인을 살펴보며 놀라움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말을 하는 그의 숨결은 분노를 애써 참느라고 황소같이 거칠어져 있었다. "......" 철탑거한의 말을 들으며 노문사는 예리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진세속에서 두 인물의 동태를 살피던 백리천궁. 그는 두 눈에 은은한 놀라움의 빛을 드러냈다. (탁세육흉의 인물인 모양인데...... 대단히 심기가 깊은 자다.) 그는 예의 노문사를 면밀히 주시했다. 친인의 주검을 보고도 냉정을 잃지 않는 것은 범인(凡人)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노문사는 철탑거한과는 달리 동료인 잔독신마편의 시신을 보고도 냉정하고 침착했다. 그것은 그의 심기가 아주 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 차례 주위를 살핀 노문사는 그제서야 잔독신마편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자의 시선이 예리하지만 백리천궁이 펼친 진세를 간파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아 셋째도 당한 것 같다. 귀보(鬼堡)에 마종(魔鐘)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 이래 강자들이 속속...... 헉!" 말을 하던 노문사의 안색이 갑자기 밀납같이 굳어졌다.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잔독신마편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문득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으...... 천...... 천기팔극망(天機八極網)! 천...... 천기대제가 나타났다!" "천...... 천기대제!" 철탑거한의 안색도 대번에 흙빛으로 변했다. 사람의 이름이 이같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으......" "......" 두 인물은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들의 안면은 극심한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심기가 깊어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노문사이건만 그가 이토록 공포심을 드러낼 정도라면 그 놀라움이 어느 정도인지는 능히 짐작할만했다. "천...... 천기대제마저 이십 년 만에 나타났다면...... 귀보는...... 더 이상 머무를 곳이 못 된다!" "가...... 가지요, 둘째 형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견의 일치를 본 두 인물. 철탑거한은 재빨리 잔독신마편의 시신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와 함께 두 인물은 꽁무니가 빠져라 의사청 밖으로 달아났다. 쏴---- 아아! 소나기는 이따금 뇌성을 동반한 채 여전히 기세좋게 귀보(鬼堡)를 두드리고 있었다. 두 인물이 사라지고 나자 백리천궁은 문득 실소를 흘렸다. "아버님의 명성이 그토록 대단하셨단 말인가?" 그는 돌아가신 부친의 명성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아직도 혼절한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빙백서시에게 생각이 미쳤다. "서두르자, 잔독신마편 때문에 상세가 중해졌다!" 백리천궁은 급히 빙백서시에게로 다가갔다. 백서시의 안색은 밀납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급하군." 그는 급한 마음에 빙백서시의 백의가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단번에 그녀의 의복을 벗겨 내렸다. 그의 손길에 이루 형용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빙백서시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한 여인의 나신. 그것은 완벽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잘룩한 세류요(細柳腰), 미끈하게 뻗어내린 대리석같은 두 다리. 그리고 그 다리가 살짝 갈라지는 지점에 자리한 은밀하고 부끄러운 여인의 비역.... 백리천궁은 갑자기 숨이 탁 막힘을 느꼈다. 생전 처음 대하는 성숙한 여인의 나신. 그것은 백리천궁에게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하지만 여체의 유혹에 흔들려 정작 중요한 일을 잊을 그가 아니었다. 파파파팟! "화개(華開), 풍부(風府), 유심(乳心), 단중(丹重)......" 그의 손 끝은 어느새 정심한 기운을 담은 채 빙백서시의 전신요혈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손 끝이 스치는 곳마다 우르르! 폭풍이 일었다. 그의 정심한 내력이 빙백서시의 심맥 중에 잠겨 있던 잠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 잠력은 폭풍같은 기세로 일어나서 빙백서시의 뒤틀리고 끊긴 심맥을 파죽지세로 타통해 나갔다. 우르르....파파팟! "음......" 백리천궁의 이마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내공(內功)이 딸려서가 아니었다. 그의 가문은 천하제일의 내공가(內功家)이다. 그 덕분에 백리천궁의 일신에는 사흘 밤낮을 써도 마르지 않을 내공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가 땀을 흘리는 것은 다른 까닭에서였다. (음.... 여인의 몸이라는 것이 이토록 감당하기 어렵다니......) 그의 손 끝이 자꾸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로 자신도 모르게 연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빙백서시의 나신을 두드릴 때마다 손 끝에 와 닿는 감촉. 그 아찔하고 짜릿한 느낌에 백리천궁은 흡사 불에 덴 듯한 충격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빙백서시의 하체로 다가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삼수(三水)...... 기해(氣海)...... 단전(丹田)......" 백리천궁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적셔졌고 그의 두 볼은 모닥불같이 달아올랐다. "회음(會陰)......" 한순간 그는 손을 내리 찍으며 그만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여인의 알몸, 그것도 여체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의 혈도를 짚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짜릿한 충격과 함께 야릇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회음(會陰)을 지난 백리천궁의 손길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에 따라, 끊어질 듯이 미약하던 빙백서시의 호흡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기맥(氣脈)의 활동도 정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삼리(三里).... 분수(分水).... 지곡(支谷)..... 용천(湧泉)!" 파파팟! 백리천궁은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담을 씻었다. 비로소 추궁과혈이 끝난 것이다. 빙백서시의 창백하던 옥용에는 발그레 홍조가 감돌았다. 백리천궁은 조용히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진 듯 누워 있는 빙백서시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귀여운데......) 그는 그린 듯 아름다운 빙백서시의 모습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나찰의 손속을 지녔다고 알려진 빙백서시(氷魄西施). 그러나 세상 모르고 잠이 든 그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仙女)처럼 아름답고 순결해 보였다. 백리천궁은 빙백서시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 보며 그녀가 꼬옥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백리천궁의 검미가 꿈틀했다. 한 줄기 인영이 유령같이 의사청으로 날아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백리천궁은 의복으로 빙백서시의 나신을 덮어주고 몸을 돌렸다. 의사청 안에는 한 명의 청삼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는 제법 영준하게 생긴 자로 한 자루 보검을 허리에 걸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입술이 얄팍한 것이 첫눈에 보기에도 오만한 인상이었다. (검을 오른쪽에 걸고 있음은 좌수검(左手劍)을 쓴다는 뜻인데...... 어느 문파의 제자이기에......) 백리천궁은 진세 안에서 청삼청년을 자세히 주시했다.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인물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흠...... 귀보(鬼堡)의 비밀 암로가 이 의사청에 있을 줄 알았는데......" 청삼청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의사청을 둘러보았다. 그자의 시선도 몹시 예리하지만 역시 백리천궁의 진세는 간파하지 못했다. "검제(劍帝) 사부님의 실종이 이곳 귀보와 관련된 것이 틀림없거늘 여태껏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다니......" 청삼청년은 의혹의 표정으로 송충이 같은 눈썹을 찌푸렸다. 백리천궁은 청삼청년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검제? 검제라고 불릴만한 검도고수는...... 해남파(海南派)의 제일고수 해천신검제(海天神劍帝)밖에 없다. 저 청년은 해남파(海南派)의 제자일까?) 그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많지 않은 무림인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위____잉! 파츠츠츠! 갑자기 한 무더기 시뻘건 혈영이 의사청 밖에서 날아들며 청삼청년을 쇄도해 들었다. "혈혈마뢰(血血魔雷)!" 그것을 본 청삼청년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와 함께 그의 좌수가 번쩍! 하더니 순식간에 한자루 검(劍)으로 화해 날아드는 혈영(血影)을 베어갔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쾌검(快劍)이었다. 무서운 불꽃이 튀며 혈영의 무더기가 일시에 수십 조각으로 잘려 흩어졌다. 보고 있던 백리천궁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청삼청년의 쾌검은 빠른 것이었다. (무서운 쾌검이다! 저 정도라면 십 장 내의 그 무엇이라도 일순지간에 벨 수 있으리라!) 그는 놀라움과 함게 청삼청년의 솜씨에 내심 감탄했다. 그때, 의사청 밖에서 음험한 웃음소리와 함께 야유에 찬 음성이 터져나왔다. "흐흐흣...... 해천검룡(海天劍龍)! 쥐새끼같이 숨어 있지 말고 나와서 목을 높여라!" 그것은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청삼청년의 검미가 팔자 모양이 되었다. "혈혈사황(血血邪皇)! 다른 자들은 너를 두려워할 줄 알지만 본인은 다르다!" 해천검룡(海天劍龍)이라 불린 청삼청년. 그의 입에서 벼락 같은 일갈이 터졌다. 그는 혈기등등한 기세로 보검을 비껴들고 그대로 섬전같이 의사청 밖으로 폭사되어 나갔다. "우우!" 해천검룡이 내지른 장소성은 이내 쏟아지는 폭우와 우뢰(雨雷) 소리에 파묻혀 잦아들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의사청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혈혈사황! 사도(邪道)의 고수인가? 이런 궁벽한 곳에 하나같이 절정의 고수들이 모여들다니 기이하군!" 진세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백리천궁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그런 느낌을 받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탁세육흉, 빙백서시, 해천검룡, 혈혈사황등..... 이제껏 나타난 인물들 중 누구 하나 범상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리천궁 그 자신도 범인(凡人)이 아닐뿐더러 또한 이 귀보에 얼마만큼의 고인(高人)들이 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백리천궁. 문득 그는 등 뒤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짐을 깨달았다. 그는 나직이 헛기침을 하며 빙글 돌아섰다. "......" "......" 돌아선 그의 시선이 살기로 서늘하게 빛나는 한 쌍의 봉목과 부딪쳤다. 빙백서시(氷魄西施)! 살기를 담은 봉목의 주인은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온통 당혹함과 치욕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억울함과 수치로 어쩔 줄 모르며 두 손으로 애써 나신을 가리고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 맑고 아름다운 그녀의 두 눈은 백리천궁을 향한 분노로 서늘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백리천궁은 말없이 깨어나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빙백서시의 모습에 일순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가로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금의 사심도 담겨있지 않은 담백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영준한 용모와 어울려 그 미소는 더할 수 없이 싱그럽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 백리천궁의 부드러운 미소에 접한 빙백서시는 그만 자신의 가슴 한쪽이 얼음처럼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왜일까? 단 한 번의 미소에 그녀의 옥용에 떠오른 분노와 살기가 누그러들고 말았으니... 너무도 부드럽고 기품있는 백리천궁의 미소. 그것은 빙백서시의 빙심(氷心)을 여지없이 녹여버리고 만 것이다. "소저, 불편하신 곳은 없소?" 백리천궁은 미소 지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빙백서시의 기분을 물어왔다. 백리천궁의 온화한 시선을 받은 빙백서시. 그녀의 옥용이 금방 발그레 홍조로 물들었다. 눈앞의 낯선 사내. 그는 방금전까지 그녀가 수치와 분노로 살기마저 느꼈던 상대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런 백리천궁이 밉거나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 빙백서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알몸을 보인적이 없었다. 그것은 오직 미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몫이었다. 그런데 백리천궁은 고이 지켜온 자신의 순결한 청백지신을 모두 보여버린 것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빙백서시는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와 함께 야릇한 설레임이 그녀의 차가운 가슴을 비집고 새싹이 돋듯 은밀하게 싹터오르고 있었다. 빙백서시는 고개를 떨구며 평소의 차갑고 도도한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성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 덕분에......" "다행이오. 상세가 중하여 실례를 범했소이다. 우선 이것이라도 걸치시지요!" 백리천궁은 백삼을 벗어 빙백서시에게 건네주고 몸을 돌렸다. 얼굴을 붉힌 채 잠시 망설이던 빙백서시. 그녀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찢어진 자신의 의복 위로 백리천궁의 백삼을 걸쳤다. "은공의 구명지은에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백리천궁이 내민 옷을 받아 걸친 빙백서시는 이윽고 고개를 떨군 채 백리천궁에게로 다가왔다. "어려움을 보면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백리천궁은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그런 그를 향해 갑자기 빙백서시는 날아갈 듯이 절을 올렸다. "소녀의 이름은 빙백서시(氷魄西施) 냉설염(冷雪焰)이에요! 장백(長白) 빙백일문(氷魄一門) 출신이에요." "백리천궁(百里天弓)이외다." 백리천궁도 정중한 자세로 마주 포권을 취했다. 절을 마친 빙백서시. 문득 그녀의 시선이 부끄러움을 담은 가운데 조심스레 더듬듯이 백리천궁의 초탈한 용모를 훔쳐보았다. (이 사람...... 평생을 맡겨도 될만한 사람일까?) 그녀는 백리천궁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가슴이 까닭없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녀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설레임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은 이렇게 급격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랑의 시작일까? 사랑이라는 열병. 그것은 언제 어떤 식으로 닥쳐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그 열병이 얼음이라 불리던 한 여인의 가슴에도 봄빛이 녹아들 듯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하지만 가슴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뜨거운 열정을 뿜어올리며 그렇게 격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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