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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특강] 2500년 만에 밝혀지는 열반과 무아의 실체 1강(47:36)
0:07 <시작>
[니까야ㆍ아함경 특강
초기불경에 나타나는 3가지 식]
“니까야·아함경 특강” 해가지고 26페이지의 글인데 또 상당수는 예전에 “진여와 열반” 때 했던 겁니다. 했던 걸 다시 가져온 게요 지금 이 관점에서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보면 우리가 읽었던 글들이 또 살아날 거예요. 그래서 복습도 할 겸 또 새로운 관점도 명확하게 세울 겸 자료들이 과거 중복된 자료도 꽤 있습니다. 그래서 양이 많다고 쫄 필요 없어요. 그래서 이제 총 결론을 미리 앞에다 제가 박아놨어요. 뭔 얘기를 하겠다는 거냐? 이 얘기하겠다는 겁니다. “초기불경에 나타난 3가지 식(識)” 지금 이런 식 관점으로 보지 않아요. 초기불경에 부처님이 말씀하실 때 식이라고 하는 게 3가지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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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識). 지금 어떤 의식이죠. 의식인데 의식, 식별 작용을 하는 의식인데 3가지가 있더라. 이렇게 정확하게 나눠보지 않으면요 경전이 안 보여요. 니까야만 해도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니까야에 해당되는 게 이제 남전(南傳=남인도)으로 간 거는 니까야 팔리어로. 이제 한역(漢譯)된 거는 아함경(阿含經)이죠. 아함경과 같아요. 그래서 한역돼 있으니까 한역본하고 팔리어본하고 맞춰보는 그 맛인데요 각각의 아함경에 해당되는 니까야경이 있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납니다만 둘을 또 충돌시켜보면 원래 뜻이 더 잘 드러나고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진여와 열반”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구절이 뭐죠? 옆에 보시면 2페이지에 께왓다경 디가 니까야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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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왓다경입니다. 께왓다경. 한번 이거부터 읽어보고 들어가 볼까요.
[* 께왓다경, 디가 니까야
“[질문] 어디서 ‘지수화풍’은 견고하게 서지 못하며, 어디서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하고 더러운 것과, 어디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대답] ‘의식’(열반의식ㆍ무분별지)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명색을 초월한 열반의식에 안주). 여기서 ‘지수화풍’(4대)은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색色의 소멸).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하고 더러운 것(명名의 소멸,이원성의 소멸), 여기서 ‘정신과 물질’(명색名色, 5온 혹은 식온을 제외한 4온)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의식(5온의 식온, 명색을 발생시키고 대상화하여 집착하는 의식)의 소멸로 인해서, 여기서 이것(명색)이 소멸한다(열반의식 안에서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名色은 다시 발생할 수 없으니 윤회의 흐름이 끊김).”
께왓다경. 오늘은 이 강의는 오늘과 또 다음 이어진다면 오로지 식(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지금 가장 포인트입니다. 식과 더 나아가면요 12연기. 12연기 박사님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 오늘 이후로 12연기 하면요 전 세계 어디 가서도 “들어와”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해드릴게요. 왜냐하면요 12연기를 이해 못했으면요 부처님을 이해 못한 거예요. 뭔 말을 하시는지? 께왓다경 디가 니까야. 예전에는 질문까지 안 봤었죠. 이제 질문까지 더 제가 찾아서 넣었어요. 질문, 우리 예전에 답만 봤잖아요. 질문이요 “어디서 지수화풍은 견고하게 서지 못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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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화풍(地水火風)이 어디서 소멸됩니까? 질문 의도가 또렷하죠. 그러니까 열반을 물어보는 거예요. 열반에 들면요 지수화풍도 사라지고. 지수화풍은 대상이죠. 우리의 인식 대상이죠. 유식학에서 상분(相分)이라고 하죠. 이 상분에 이제 반대되는 게 견분(見分)이죠. 견분이 상분을 알아차리죠. 그래서 인식 주체입니다. 이 식이죠. 식이 인식 주체죠. 그럼 상분은요 인식 대상. 인식 대상. 그래서 견분과 상분이 있습니다. 지수화풍은 상분 쪽이죠. 우리가 알아차리는 대상 쪽이죠. 지수화풍이라는 게 어디서 사라집니까? 왜 이걸 물어보느냐? 지수화풍도 사라지고 지수화풍을 알아차리는 이 견분도 사라져야 열반에 들어가니까. 지수화풍은 어디서 사라집니까? 어디서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하고 더러운 것. 자 첫째 지수화풍을 먼저 물어봤고요. 그러면 5온 중에서는 색(色)이죠. 지수화풍이 색.
4:10 <반야심경의 5온>
지수화풍 하면 무조건 색이 떠오르셔야 돼요. 상분도 되지만 색이죠. 물질이라는 겁니다. 물질. 그런데 어디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거칠고 청정하고 더러운 거. 이거는요 이원성이죠. 각종 이원성들. 이원성 얘기를 했고요. 그다음에요 “어디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여기서 또 명(名)과 색을 또 얘기했습니다. 이걸 명색(名色)이라 그래요. 정신작용을 명, 물질작용은 색 그럽니다. 초기불교의 핵심을 볼 텐데 많은 걸 알아야 되지 않아요. 12연기 정도 알면 돼요. 12연기 5온. 복잡하게 아실 필요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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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초기불경에는 수많은 논리가 전개되는데 제일 골자는요 5온이에요. 그러니까 반야심경에서 뭐만 때리죠? 반야심경도 보면 뒤에 다양한 걸 다 공격하죠. 18계니 12연기니 그런데 맨 첫 머리에서 뭘 공격하죠? “5온이 공하더라.” 5온을 때리죠. 5온이 제일 본질입니다. 우리 존재의 본질이 5온이에요. 정신작용 물질작용. 오늘 이 강의는요 철저히 선입견을 배제하고 부처님 말씀 따라가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알아차리셔야 돼요. 정신을 차리시고 마음챙김을 하시면서 강의를 들어주시면 더욱 효과가 좋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뭔 말 했는지 알아차리려면요 그 경을 읽는 사람이 마음을 챙기면서 봐줘야 돼요. 마음을 안 챙기고 들으면 부처님 말씀하신 걸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체험을 해야만 개념이 서거든요. 그래서 필요한 최소의 체험은요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겁니다. 마음을 챙겨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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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가 미는 게 뭐죠? 1인칭. 1인칭 관점에서 1인칭, “나는 1인칭이고 견분이고 너는 상분이야.”라는 마음으로 보셔야 돼요. 대상을 볼 때 보는 자가 나고 보여지는 게 너라는 걸 알고 보시는 거랑 멍 때리고 보시는 건 천지 차이입니다. 알고 보는 게 정념(正念)이에요. 마음을 챙겨야 보여요. 마음을 챙겨서 이제 이 얘기들을 들어주셔야 실상이 보입니다. 마음을 챙기면 이 견분의 입장에 서게 되죠. 즉 이 식(識)이 또렷해집니다. 의식하는 의식의 주체인 식이 또렷해져요. 이게 다른 말로 유식학에서 심왕(心王)이라 그래요. 심왕. 여러분 마음의 왕입니다 식(識)이. 1식부터 8식까지 다 들어가요. 같아요. 한 식이에요 사실은. 보고 듣고 맛보고 다양하게 하는 것 같지만 한 식이에요, 1식부터 8식까지가. 그래서 예전에 선사들이 이런 말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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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우리 참나까지 포함해서 다 한 식(識)으로 보는 그런 선문답 기억하세요? “집 안에 원숭이가 하나 있는데 부르면 대답을 하는데 여섯 창문으로 소리가 들린다.” 6근이 작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체가 하나다. 그래서 “1식부터 8식까지가 심왕(心王)이다.” 그러면 “8개나 되네 왕이.” 그러지만 사실은 한 식이라는 걸 아셔야 돼요. 한 식이 안에서 원숭이가 우는데 창문 6개로 울린다라고 하듯이 6근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이 식은 사실은 하나다. 한 식인데 우리가 나눠서 봐야 될 이유가 있으니까 나눠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질문에는요 색·이원성·명색 이 3가지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여기 이원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시면 이원성이라는 건 여러분 생각입니다. 상(想). 내 마음(心)속에 상(相)을 세운 거예요. 내 마음(心)속에요 상(相)을 세우는 게 생각(想)입니다. 5온 중에 명(名) 중에 사실은 대표적인 상(想)의 작용이에요. 5온으로 가면요.
8:13 <5온의 개념>
5온이 뭔지 기본 개념만 좀 잡고 있어요. 이거(色受想行識) 이제 다 아시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만 지금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색(色)이 물질이죠. 식(識)이요. 이게(色) 사실은 상분(相分)이면 이게(識) 견분(見分)이죠. 식(識)이 색(色)을 알아차리겠죠. 그럼 이것들(受想行)은요? 여기(識)가 심왕(心王)이면 이것들(受想行)은 심소(心所)라고 하죠. 마음작용들입니다. 마음의 작용들이에요 이거(受想行)는. 느낌(受)·생각(想)·마음의 행위(行). 대표적인 걸 의지(行)라고만 하지. 그래서 제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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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번역을요 느낌(受)·생각(想)·의지(行) 이렇게 하는데 셋이 구별되는 측면이 있고 이 마음의 주요 작용들이라서 그렇지 행에는요 모든 게 다 들어가요. 이게 결국 심행(心行)이에요. 심소(心所)가 심행(心行)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수상(受想)도 다 행(行)에 들어가요. 마음(識)의 행(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色)을 향해서 마음(識)이 어떤 작용(行)을 일으킨 거예요, 마음의 작용(行).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느끼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온갖 이런저런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 그래서 이 의지 작용(行) 안에 탐진치 다 들어갑니다. 탐진(貪瞋)이 다 들어갑니다. 이런 탐진치들이 다 여기 들어가요. 탐진이 다 들어가요. 이런 탐진치들이 다 여기 들어가요. 그래서 이 생각(想)은 뭐라고요? 마음(心)에 상(相)을 세운 겁니다. 이 상(想)이 뭐냐? 이제 개념화입니다. 개념을 세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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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개념을 세운 겁니다. 이제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뭐다 뭐다. 느껴요(受). 좋다 싫다는 느낌이 와요. 그거에 대해서 “좋다 싫다”라고 말을 하면 상(想)이 돼요. 그러니까 이게 개념화고요, 이 의지(行)는 마음의 움직입니다 그쪽으로. “하고 싶다.” 그래서 “좋다 싫다.” 그리고 생각으로 해요. 느낌(受)을 생각(想)으로 “좋다 싫다.” 따라서 “좋은 건 하고 싶고 싫은 건 피하고 싶다.” 그럼 마음이 움직이겠죠. 수상행(受想行)이 바로 일어나죠. 이 모든 게 식(識)의 작용이죠. 그리고 식이 이 모든 움직임들을 식별하고 있어요. “이러고 있네.” 하는 걸 또 알아차려요. 알아차리는 자리니까. 색(色)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수상행(受想行)이 일어났고 색과 수상행 모두를 알아차리고 있는 게 식(識)이에요. 어떠세요? 이거 이해하셨으면 오늘 이야기 한 반은 이해하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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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識)이 색(色)을 그리고 이놈들(受想行)을, 그래서 이놈들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어요? 명(名). 명과 색을 식이 알아차리고 있다. 이게 지금 5온(五蘊)의 실상입니다. 이게(識) 견분(見分)이면 이 색(色)이 상분(相分) 역할을 하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또 이게(識) 심왕(心王)이면 이게(受想行) 심소(心所) 심행(心行) 마음의 작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걸 대표해서 뭐라고 그래요? 5온을 우리가 보통 “자아” 그럽니다. 이걸(5온) 나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감정·오감 한 게 이거예요. 그냥 요즘 말로 생각·감정·오감 이런 게 이겁니다. 이걸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은 이렇게 설명했어요. 부처님은 이것에 대해 체계적인 이해를 갖고 계셨습니다. 아주 누구보다 정밀한 이해를 하고 계셨어요. 이걸로 가지고 힌두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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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하려고 기존 힌두교와 다른 새로운 열반에 드는 방식을 제안했어요. 힌두교랑 그전에 이제 브라만교였죠. 브라만교랑 통하는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데 그건 차차 강의 중에 다 얘기해 드릴게요. 지금 여기까지 이해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라는 게?
이 색(色)은요 2가지가 있어요, 몸과 세계. 여러분 몸은 상분도 되면서 또 인식을 돕습니다. 여러분 몸이 없으면 어떻게 인식해요? 여기까지 하면 거의 뭐 5온에 대해서... 왜 이걸 명(名)이라고 했냐면요? 물질은 형체가 있죠. 이놈들(受想行)은요? 형체가 없어요. 그럼 뭐로만 구분되죠? 이름(名)으로만요. 우리 이름(名)이 한자가 어떻게 나왔죠? 사실 상관은 없는데 기억하시기 좋으라고. 저녁 석(夕)자에 입 구(口)자죠. 저녁에는 안 보여요. 그래서 이름 불러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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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밤에 만나는데 안 보여요. 어떤 놈이 와요. “누구냐?” 보고 모르니까 부르는 거죠. “나 누구다” 해야 “아, 누구구나” 하는 거죠. 자 (색은) 형체가 있어요. 지수화풍 알 수 있어요. 세계를 이루는 게 지수화풍, 몸도 이루는 게 지수화풍, 이 모든 걸 지수화풍으로 만들어요. 요즘 같으면 이제 원자 분자 얘기하겠죠. 원자라고 하겠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불교의 원자에 해당되는 미진(微塵)도 결국은 지수화풍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더 미세한 지수화풍으로 만들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식으로 말하면 양자(量子) 원자(原子) 모든 거는요 물질이다 하는 모든 것은 지수화풍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게 거칠건 미세하건. 자 여기까지. 그래서 이 친구들(受想行)은 정신작용이라 이름(名)으로만 구분이 된다는 거예요. 개념으로만. 느낌이라고 해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아는 거예요. “느끼고 있구나. 좋다 싫다.” 좋다 싫다 입니다 느낌은. 이 수(受)도 행(行)에서 빼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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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와 상(想)은 행 중에 제일 대표적인 것들이라 빼온 거예요. 여기서 좀 더 빼오면요 늘 심왕과 함께 움직이는 그 심소들이요 촉(觸). 접촉. 촉(觸)·수(受)·상(想) 저 행(行)에 해당되는 사(思). 이게(思) 의지죠. 의지. 행 중에서 의지. 촉·수·상·사·작의(作意). 뭔가 마음을 일으키는 거. 이것들(촉·수·상·사·작의)은 어디서 배웠죠 우리? 8식 아뢰야식도 항상 갖고 있던 거였죠.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라고 합니다. 5, 5가지 변행(遍行), 널리 두루 돌아다니는 마음작용이다. 이거는 아뢰야식에도 있어요.
14:43 <명색의 의미>
가장 그 미세한 의식인 아뢰야식에도 있는 작용입니다. 접촉하고(촉) 느끼고(수) 생각하고(상) 의지를 내고(사) 뭔가 마음을 일으키는 것(작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 그 방향으로. 어때요? 그럼 이 중에 이게(受想行)다 행(行)이에요. 행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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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受想)만 앞으로 뺀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불경에는요, 교재 안에 들어있습니다만, 이 명(名)을 얘기할 때 5온 중에서 3개(受想行)만 주로 얘기하죠. 명(名) 얘기할 때 촉·수·상·사·작의 5개의 명을 얘기하는 경전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 친구들(촉·수·상·사·작의)이 다 명(名)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지금 미리 얘기했어요. 경전으로 다 확인할 겁니다. 어때요? 여기까지 보시면 5온이 좀 확장되죠. 저게 나예요. 그래서 지금 물어볼 때 “물질이 어디서 소멸합니까?” 이원성이 어디서 소멸합니까? 이원성은요 우리 개념입니다. 길다 짧다. 그렇죠. 다 개념이에요. 그럼 다 이것도 정신작용이에요. 이원성이자 동시에 상(想)을 말합니다. 그럼 그 이 모든 걸 포함한 물질과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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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물질 얘기하고 정신 얘기하고 종합해서 “정신과 물질이 어디서 소멸합니까?”라고 물어본 거예요. 이제 물질작용과 몸과 세계, 지수화풍의 세계와 정신작용 의식도 포함해서 의식과 이 명을 말할 수도 있고요. 이게 지금 여러분 좀 여기서 이상하다고 느끼신 거 없으세요? 명색(名色) 그러면 명(名)에 식(識)까지 들어가야죠 원래. 처음 아신 분들은 이대로 외워버리실까 봐. 원래 명색 그러면 뭐예요? 5온이에요. 명과 색 그러면 원래 5온입니다. 왜 그러냐? 명(名)에는 식(識) 플러스 방금 말한 이 심소(心所)들이거든요. 식도 무형이잖아요. 개념으로만 구별이 되죠. 이것도 명이에요 사실은. 그래서 이걸 구분하셔야 돼요. 명색(名色)과 식(識)이 대비될 때는 식을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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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명색은 5온을 말하는데 원래 기본적으로. 문맥에서 명색(名色)이 나오고 식(識)이 따로 나와 있으면 이 명색은요 4온(色受想行)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아까 4온 이렇게(色受想行) 하면 4온이죠. 4온도 알고 계셔야 돼요. 4온은 이 식(識)이 색(色)을 알아차려서 수상행(受想行)을 또 일으키죠. 그래서 이 색수상행(色受想行)을 다 알아차리고 있어요 식(識)은. 그렇죠. 식에서 모든 게 나옵니다. 식이, 이 의식이 붙어야 이 색도 인식이 되니까. 의식이 붙어야 이 색과 접촉이 일어나고 거기에 대해서 수(受)·상(想)·사(思)·작의(作意) 같은 수상행(受想行)의 작용이 일어나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 행(行)에는 사(思)와 작의(作意)가 지금 들어있는 거죠 촉(觸) 같은. 이게 지금 다 행(行)으로 그냥 퉁쳐 있는 거죠. 펼치면 5가지가 되고. 대표적인 것만 얘기한 거예요 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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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라고 아뢰야식마저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5가지 마음작용이니까 모든 의식 작용에는 기본적으로 있는 작용이죠. 그래서 이것들(受想行)을 명(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식(識)과 명색(名色)을요 구분해서 말할 수도 있고 통합해서 그냥 명색 이럴 수도 있어요. 이거는 문맥 속에서 보셔야 돼요. 여기까지 되셨죠. 지금 서양의 후설 현상학이랑 이거 지금 부처님 가르침이 제일 닮았거든요.
18:34 <현상학적 환원>
그래서 후설 현상학적으로 마음을 챙기고 보라는 게요. 거기서는 에포케(epoche)라고 해서 판단중지(判斷中止)를 하고 보라는 겁니다.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바라보면요 1인칭과 2인칭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게 판단중지입니다 후설의. 이걸 하는 게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천지 사방으로 흩어진 정신을 확 쪼그라들게 하는 거예요. 딱 쪼그라들면 지금 내 정신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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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요. 제가 늘 얘기하는 지금 우리 정신에서 뭔 일이 있죠? “지금·여기·나와 너·뭘 대상으로 이렇게” 어떤 걸 하고 있는지를 보세요. 이게 확 쪼그라든 정신이에요. 확 쪼그라뜨려 놓으면 현상학적 환원을 해서 보신 거예요 부처님이. 정념(正念)으로 보니까 뭐가 보여요? 5온이 보인 거예요. “나는 지금 이 순간에 5온일 뿐이구나!” 이 찰나의 대상, “내(識)가·너(色)를·이렇게(受想行).” 이해되세요? 지금·여기 여러분(識)은 제 몸뚱이(色)를 보고 계세요(受想行). 색(色), 제 지수화풍을. 그렇죠. 여기서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소리 뭐 냄새까지는 안 느껴지시겠죠. 아무튼 뭐 보고 듣고 지금 하시면서 뭐라고 좋다 싫다(受), 개념 이렇다 저렇다(想), 내 마음의 움직임(行) 이게 펼쳐져요. 그게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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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사진처럼 딱 찰나를 찍으면 어때요? “지금·여기·나너·이렇게” 이 한 찰나의 마음이에요. 이 찰나찰나의 마음이 흘러갑니다 불교도. 똑같아요. 후설 현상학도 찰나찰나 마음이 흘러가요. 여기다 새로운 어떤 이론을 붙이자는 게 아니라 후설 현상학이요 모든 기존의 선입견, 특히 과학주의에 물들어 있는, 객관적으로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서 다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괄호 안에 다 때려 넣어버리고 이걸 인식 주체로서 존재해 보는 거예요.
이걸 바라보기만 하는 거예요. 모든 대상을 다 넣어버려요. 우리 식으로 “몰라”죠. “몰라”를 다 하는데 “몰라”를 못하는 게 뭐만 남죠? “몰라”의 주체인 이 인식 주체는 “몰라”가 안 돼요. 이놈만 남아요.
20:51 <부처님의 5온>
이게 부처님한테는 이게 열반의식입니다. 지수화풍을 다 때려놓고 “몰라” 날려버리는데 안 사라지는 게 있죠. 이거는 체험으로 하실 수 있는 거기 때문에 체험을 해보세요. 지금도요 “지금·여기·나너·이렇게”를 다 괄호 안에 넣어버리세요, 정신을 딱 차리시고. 바라보는 1인칭이 되신 다음에 제 목소리, 제 모습, 느낌, 생각 여러분의 마음의 의지 작용, 싹 “몰라” 해버리세요. 그럴수록 순수하게 바라보는 절대 대상화되지 않는..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거는 “몰라”가 돼요. 대상화되지 않는 게 남아요. 그렇죠. 이게 마음 챙김을 통해서 정념·정견으로 알아내는 겁니다. 정념(正念)을 통해 봤더니 정견(正見)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보여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못 보시면요, 제가 왜 현상학을 얘기를 했냐면 판단중지를 하고 그 과학주의,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게 불교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법집(法執)이거든요. 그 모든 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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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중지, 즉 우리식으로 “몰라”를 하고 쭉 바라봤더니 순수의식만 남더라. 이게 후설 현상학인데 그 방법론이 부처님 방법론과 같아요. “있는 그대로의 사태로 돌아가서 알아차려보자.”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자.” 부처님이 택하신 방법이요 과학주의의 유럽 학문이 위기가 왔다 하고 후설이 주장한 게 “판단중지하고 알아차리자”였어요.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인가만 하자”고요. “자명한 걸 수용만 하자”고 한 겁니다. 부처님이 쓰신 방법이요 브라만교가 아트만과 온갖 신, 베다에 얼마나 많은 신들이 나옵니까. 신·아트만·참나 이런 걸로요 열반, 완전히 정신세계를 물들여 놨어요 선입견을. 실제 참나를 만나는 놈들은 없고 다 참나·아트만·신에 의지하고 기복하고 자기 나름대로 열반을 얻겠다고 온갖 고행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대해 부처님이 뭘 내놨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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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최근에 그 후설이라는 철학자가 했던 거랑 같은 거라니까요. 판단중지·정념, 들이쉬고 내쉬고 호흡을 보면서 일단 정신을 모은 다음에 쪼그라뜨려요. 들이쉬고 내쉬고는 지금 이 순간에 색수상행식 지금 이 순간의 6근밖에 안 보이죠, 확 쪼그라들면. 그걸 보면서 “이 6근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를 부처님은 방편으로 쓴 겁니다. 일체의 참나니 아트만이니 하는 건 다 괄호 안에 때려 넣었어요. 다 “몰라.” 왜? 그거는 당시 수행자들이 맹신, 체험도 없이 맹신하고 있는 개념들이에요. “불변의 자아가 있다.” 벌써 보세요. 불변의 자아가 있다. 여러분 경험을 넘어선 얘기죠. 지금 죽은 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분들이 “자아가 있다” 이 말도 장담할 수 있어요? “지금 살아서는 그래도 자아가 동일할 거다.” 장담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이런 것들은 다 “몰라” 해버리라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라고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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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찰나 한 찰나 흘러가는 마음을,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렇게 한 찰나 한 찰나가 흘러가는 마음들이 이게 나중에 부파불교(部派佛敎)에 가면요 이게 이제 후념(後念), 이게 전념(前念)입니다. 전찰나의 마음, 후찰나의 마음. 전찰나의 마음에 기대서 의지하여 연기로 후찰나의 마음이 있고, 후찰나의 마음이 다시 전념(前念)이 돼서 그 연기로 뒷마음(후념)이 일어납니다. 이 구조예요 불교는. 이게 지금 근현대 서양철학의 기본이에요 이게.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한 이후로요 나는 생각한다는 게요 “지금·여기·나너·이렇게” 예요.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의 어떤... 보세요.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내가 있는 건 확실하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 색(色)도 못 믿겠고 다 못 믿겠는데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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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게 제일 자명하다. 여기에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근대철학이 다 불교적으로 흐른 거예요. 있는 그대로. 왜? 중세신학에서 나오려다 보니까. 후설은 과학주의에서 나오려다 보니까. 부처님은요 힌두교에서 나오려다 보니까. 브라만교, 당시 베다가 발전해서 우파니샤드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견고한 형이상학과 신화를 갖고 있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게 다 자명하지 않다고 본 거예요. 한 방에 날려버릴 방법. “일체의 그 모든 거를 모른다 하고 정념 오직 알아차려서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의 작용만 알아차려 보라.” 그래서 5온을 내놓은 겁니다.
25:45 <부처님의 열반>
힌두도교가 막 아트만·하느님 얘기할 때 신 얘기할 때, 내 얘기를 한 거예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 확실하다. 니가 지금 이러고 있다는 것만 확실하다.” 어때요? 이게 지금 서양이 부처님 못 따라간다니까요. 이렇게 자명했던 분이에요. 2500년 전에 자명의 극치입니다. 믿어야 되는 건 다 배제해버린 거라니까요. 지금 불교랑 비교하시면 안 돼요. 지금 불교는 다시 더 어마어마하게 믿어야 할 걸 만들고 형이상학 체계도 부파불교 대승불교 거치면서 어마어마하게 지금 거대해졌습니다, 형이상학도. 그렇죠. 밀교까지 해서 대일여래니 이제 하느님 같은 존재도 다 등장하고 다 했어요. 지금 불교랑 비교하지 마시고 2500년 전 숲에 앉아 계신 아주 자명 덩어리인 한 분이 있어요. 거기에 힌두교인들이 와서 막 “저 이제 이렇게 깨달으면 어때요? 참나는 뭘까요? 열반이 뭘까요?” 온갖 망상으로 얘기하겠죠. 자기들 교리에 근거한 얘기를 할 거 아니에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온갖 다양한 교리를 들고 와서 열반에 들고 싶다는데, 부처님은 뭘로 보였겠어요? “네 정신이나 좀 알아차려라. 네 안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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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모으고 들이쉬고 내쉬고 호흡을 바라보면서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 감촉들을 알아차리면서. 그러니까 있는 거를 알아차리라고 한 거예요. “있는 거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이런 작용(5온 작용)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라.” 그리고 이것들은 특징이, 여기서 부처님이 놀라운 게 본인이 알아차려보고 깨달은 게 있어요. 이 모든 게 뭐예요? 연기법으로 굴러가더라는 거예요. 연기법은 뭐예요? “이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또 이것이 있더라.” 색(色)이 있어서 또 수(受)가 일어나죠. 그리고 이 색이 있어서 수상행(受想行)이 일어나요. 색은요? 지수화풍들이 있어서 색이 일어나고. 색이 있어서 수상행이 일어나고. 색과 수상행이 있어서 식(識)이 일어납니다. 자, 부처님 논리를 따라오시면요 이 식이 또 먼저 있는 것만이 아니에요.
27:52 <부처님의 연기법>
색수상행이 있어서 식이 있어요. 식이 있어서 색수상행이 있고요. 여기까지 이해되세요?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거예요. 그런데 상호의존적인 존재들밖에 지금 알아차려지지 않는데 여기서 아트만이라고 하는 참나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있어요? 인식이 되세요? 없죠.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고정불변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다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게 현재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결론도 이겁니다. 상호의존적으로 물질은 서로서로에게 관측되면서 존재하는 거예요. 상호 반응하는 그거밖에 몰라요. 실제 “A는 어떤 존재다.” 이게 없어요 “B랑 만날 때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 예요. C랑 만날 때는 또 다른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여러분 인생이 영 마음에 안 드시잖아요. 여러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애들이 이상해서 그래요. 걔들한테 내가 더 내놓을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노는 물을 바꿔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물이 바뀌면 내가 다른 상호작용을 일으켜요. 이해되시죠? 이게 양자부터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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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까지 똑같아요. 물리세계나 심리세계나 누구랑 접촉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반응을 하는 걸 보고 나를 규정합니다. 그러니까 이 5온 작용이 일어나는 걸 보고 내가 그걸 가지고 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실상을 아는 게 중요해요. 나가 있다 없다가 아니에요.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시라는 거예요. 여기서 그럼 자아란 말을 쓰면 안 되지 않나요? 자아란 말은요 나라고 하니까 너랑은 절대 다르죠. 이래서 고정불변의 요소가 생겨요, 이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래서 이거는 오염성을 각오해야 돼요. 오염성이 있어요. 그래서 이 유루의 이름을 붙이고 집착하는 행위를 뭐라고 해요? 변계소집성의 행위라고 하잖아요. 변계소집성은 무지와 아집이죠. 그래서 여기 오염성이 있습니다. 아집, 나에 대한 집착이 생겨요. “자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렇죠. “이게 내 5온이다”라고 하는 순간 법집이 생겨요. 내 5온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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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집·법집이 생깁니다, 이름을 붙이면. 근데 안 붙일 수도 없는 게요 왜 그러냐면 이 연기법은요 무한 상속입니다. 지금 이게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영원히요. 일단 영원히 이어져요.
그럼 연기에 그게 중요한 게 뭔데요? 연기의 상속성입니다,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그런데 상속성만큼 또 중요한 게 있어요. 연기의 개체성이에요. 이 얘기를 정확히 안 하니까 부처님이 자꾸 오해받는 거예요. 연기의 개체성이 있어요. 즉 여러분이 지은 업은 여러분이 받습니다. 내가 밥 먹었는데 옆의 사람이 배부르지 않아요. 이건 뭘까요? 이게 자아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자아를 절대 부정하지는 않아요, 완벽하게. 왜 연기의 개체성이 있기 때문에. 근데 아트만처럼 고정된 자아는 절대 인정 안 해요, 부처님 논리 체계에서. 왜 부처님의 모든 논리 체계는요 12연기입니다. 연기법의 세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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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緣起)는요 상호의존적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가 완벽한 내가 있는 게 아니에요. 서로 인연을 맺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찾아가는 거예요. 모습을 드러내고. 누구랑 만나느냐가 중요하다니까요. 누굴 만나면 기분이 썩죠? 누구를 만나면 기분이 피고. 이게 상호의존적으로 서로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하잖아요. 다함이 없는 연기 작용을 하면서 우리가 살아간다. 그래서 부처님의 머릿속을 딱 이해하시려면 지금 이거 이해하셨으면 지금 거의 다 이해하신 거예요, 부처님 머릿속을. 부처님은 모든 걸 볼 때 연기로 봅니다. 연기 외의 걸 누가 얘기하면요 비판하는 거예요. 대답을 안 해버려요. 부정하거나 대답을 안 해버립니다. 말도 해주시면 좋을 텐데 친절하게. 그런데 안 하세요. 그러니까 표현하는 거예요. “아닥해!” 이렇게.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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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에 어긋난 생각을 할 거면 침묵해.”라고 말하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 있죠. “말로 할 수 없는 거는 침묵해라.” 침묵하는 게 자명하다. 부처님이 지금 철저히 연기의 세계에서만 얘기하시고. 왜? 연기의 세계만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어요. 형이상학으로 가는 걸 차단, 원천 차단. 참나니 아트만이니 이런 말 안 씁니다, 원천 차단. 이걸 써버리면 또 다른 형이상학이 나와요. 연기의 세계에서 인과가 서로 적용되는 것만 얘기합니다. 이 연기를 벗어난 이야기를 안 해요. 그러니까 아트만 뭐 참나 주장하면 부처님이 말 안 해버려요. 왜? 연기를 벗어난 얘기니까. “아라한는 죽은 뒤에 어디로 갑니까? 어디 있습니까?” 대답 안 하세요. 왜? 연기를 벗어난 얘기니까. “세계는 무한합니까?” “시간적으로 영원합니까?” “공간적으로 무한합니까?” 지금 이 연기에서 파악이 안 되는 얘기는 안 하세요. 이 세계도 상호연기 속에 굴러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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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처님한테 세계는요 벌써 우리가 세계 그럴 때 여러분 머릿속에 뭐 떠오르셨어요? 안드로메다 지나가고 하셨으면 부처님은 뭐예요? 세계라는 게 6근밖에 없어요. 내가 현재 경험한 거요. 부처님은 철저히 현재 내가 파악되고 경험된 거 이 안에서만 얘기합니다. 이게 세계예요. 일체예요. “이게 무한하냐? 영원하냐?” 연기하고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연기하고 있다 이상의 얘기를 안 하십니다. 누가 신을 물어봤더라도 대답 안 하셨을 거예요. 아니면 비판을 했거나. 신의 어떤 논리적 모순을 비판하거나 얘기를 안 하십니다. 이게 무기(無記)라고 하거든요. 옳다 그르다 말을 아예 안 해버리세요. 그럼 듣는 사람은 이제 답답한데 일종의 무언의 메시지예요. “아가리 닥쳐줄래!” 이런 거예요 진짜로. “그거 닥치고 알아차려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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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지금 세계가 무한한가? 영원한가? 떠들고 있는 너의 생각 작용을 알아차려 볼래?” 이겁니다. 선문답 같으면 “네가 부처인 줄 알아차려라.” 이럴 텐데 부처님은 그게 아니에요. 선문답이랑 또 달라요. 부처님은 “연기의 세계를 알아차리라”는 거예요. 바로 참나로 가라고 안 해요. 연기를 알아차려라. 그러니까 신(身) 몸을 알아차려라. 수(受), 마음작용을 알아차려라. 호흡을 알아차려라. 그렇죠. 다 알아차리라는 것은 현상계에 지금 찰나찰나 일어나고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여기·나너·이렇게”를 알아차리라는 거예요. 부처님의 방편 이해되세요? 부처님 머릿속이 지금 이해되시지 않았어요? 이게 다예요. 앞으로 이 얘기만 계속할 겁니다. 모든 경전이 그걸 증거할 거예요, 여기 이 글에 실려 있는. 핵심 다 이해하셨죠. 그런데 인식 주체, 순수 인식 주체는 절대 아무리 “몰라”해도 안 사라지죠. 후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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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했듯이 부처님도 똑같아요. 이 색수상행식 자체가 연기의 세계입니다. 5온의 세계고 자아의 세계. 이 자아는 연기의 자아라고 할게요, 구분하게. 우리가 흔히 5온의 자아 그러면요 이거는 5온이 고정불변·영원하다고 믿는 그런 식의 자아거든요. 이거는 비판받습니다. 이게 깨져야 돼요. 단 어떻게 이해하면 맞아요? 연기하고 있다. 연기의 개체성을 나는 자아라고 방편으로 부른다. 이러면 의타기성(依他起性)이 됩니다.
35:32 <부처님의 자아>
근데 “5온에 내가 있다” 그러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돼버리고 끝나요. 그러니까 이름이라는 방편을 부득이하게 쓰더라도 실상을 알고 쓰면 방편이 되죠. 오염성은 있더라도 그게 방편은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나라고 얘기하세요. “내가 해탈했다. 네가 해탈했다. 너 다음 생에 어디로 태어난다.” 다 자아를 전제하고 얘기하시죠. 본인도 나라는 말을 다 쓰신다니까요. 그러니까 나라는 말 쓰면 뭔가 또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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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병 걸려가지고 “나도 없는데...” 막 이런 짓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내 연기는 내가 책임진다” 예요. “내 인과는 내가 책임진다. 내 업보는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나라고 쓰시면 돼요. 다만 이 나는 연기하는 나요. 이제 이거 하나만 더 넣을게요. 부처님은 대승이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랑은 달라요. 소승불교 쪽에 가깝게 얘기하셨죠, 방편이. 그래가지고 그러니까 법화경에서 “내가 그때 소승식으로 얘기했던 거는 방편이었어.” 하고 얘기했잖아요. 법화경하고 바로 이거 하려니까 좀 민망한데 이거 한 다음에 법화경 했으면 더 웃겨요. 막 열변 토해놓고는 법화경에 가서 “다 구라였지” 하고 시작하면. 오히려 전에 한 게 나은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머릿속은 다양, 이게 유연하게 보셔야 돼요. 법화경은 법화경이고 실제 부처님은요 왜 자아가 영원하다는 말을 안 하냐면 부처님이 말하는 자아는 무조건 연기 안에서 자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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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안에서 자아는 영원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이 윤회의 고리를 끊으라고 주장하신 분인데. 소멸시켜야 할 자아예요. 기본적으로 부처님한테 자아는 소멸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자아가 계속 있다는 게 저주예요 오히려. “에라잇, 영원히 자아에 있어라.” 그러면 이게 “윤회를 영원히 굴러라” 하는 거예요 부처님한테는. 부처님이 “너는 다음에 어디로 태어날 거다.” 하는 건요 이게 오히려 안 좋은 말이에요. “너 해탈 너 못 해!” 이거예요. 여러분이 부처님한테 지금 가서 질문했는데 “저 다음 생이 어떻게 될까요?” 부처님 딱 보시고 “다음 생이 안 보이네.” 해야 좋은 겁니다. “어, 공부 잘했나 봐. 안 보여.” 열반에 든다는 소리예요.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자아가 이제 끝났다고 하는 걸 환호하겠죠. 하지만 이 자아마저도 고정불변의 자아는 아니죠. 고정불변인 거는요 이 이름만 자아라는 이름만 그래요. 실상은 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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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놓치시면 안 돼요. 이름을 방편으로 쓰더라도 실상은 계속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연기하고 있다. 그 연기의 개체성이 동일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흐르거든요. 고정된 동일성은 아닙니다만 인과의 동일성이 있어요. 그러면 이거를 “자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한테 누가 “자아가 있나요? 없나요?” 하면 쉽게 대답을 못 하시는 거예요. “연기하는 자아는 있는데 고정된 자아는 없어.” 이 얘기를 해주셔야 하려면 12연기를 다 이해시켜야 되거든요, 이 제자한테. 근데 제자들은 잘 알지만 가끔씩 출가 외도들이 와서 질문해요, 브라만교들이. 그럼 브라만교들은 머릿속에 딱 아트만 세워서 와 가지고 “저기 아트만 진짜 있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제 연기부터 시작해야 되거든요. 오늘 제가 한 얘기를 다시 시작해야 돼요. 그래서 부처님 보통 침묵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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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그래?” 하면서. 보통 그러고 돌아가요. 대답 못 듣고 돌아가요. “부처 유명하다고 해서 왔는데 아트만도 모르네,” 하고 가겠죠. 이런 내용이 여기 다 들어 있습니다. 지금 미리 맛보기 해 보셨는데 어때요? 이것까지만 하고요. 이 5온을 다 날려버리는 게 열반입니다. 이걸 다 날려버리면 뭐만 남아요? 뭐가 남을까요? 이거를 이 모든 것을 “몰라” 해도 괄호 안에 싹 넣어버립니다 후설 식으로. 이 모든 거를 12연기를 싹 연기의 세계 일체 5온만이 아니라 일체, 5온이 단순히 5온이 아니에요. 5온이 자아를 이루기도 하지만 일체 세계가 사실 5온 작용밖에 없어요. 5온이 6근이잖아요. 6근 작용밖에 없어요 석가모니한테는.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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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5온 작용 말고 다른 세계가 없어요. 일체 세계를 “몰라” 해버리면 뭐만 남아요? 알아차리고 있는 의식, 순수 1인칭 주체만 남습니다. 순수 1인칭 주체. 그래서 1인칭이라는 거는 알아차린다는 거죠. 모든 것을, 일체를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여러분 삶에서 알아차리는 자는 자기밖에 없죠. 나머지는 다 VR의 지금 대상일 뿐이에요. 각자 자기가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한 자리밖에 없죠. 그 자리는요 순수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주객이 없다는 얘기예요. 어떤 이원성도 없어요. 그냥 알아차리고만 있어요. 그리고 주체이기 때문에 절대로 대상화되지 않습니다. 알아차려지지 않아요. 알아차려지는 의식은 또 있어요. 이 식은 알아차려지는 의식이에요. 누구한테? 이 순수의식한테. 순수의식 자체는 누구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순수의식이 맨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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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는 자리니까. 모든 걸 “몰라” 해도 남아있는 자리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하셨죠? “형체가 없다.” 대상화되지 않는다는 소리예요. 형체가 없고, “모든 곳에서 빛난다”는 건 일체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무한이라는 건요 주객만이 없는 게 아니라 생멸도 없다는 거예요. 연기 작용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때요? 이 의식 빼고는 다 무너지겠죠. 그러면 이 의식이 있어서 열반이 성립 가능합니다. 그래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부처님이. 그럼 이 자리를 아트만이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이게 우파니샤드에서 이 똑같은 자리가 아트만이에요. 다시 헷갈리시면 안 돼요. 그런데 부처님 입장은 뭐라고요? 아트만이라는 말을 안 쓰겠다는 거예요.
41:43 <부처님과 아트만>
교회 가면 뭐 있잖아요. 신천지 출입 금지. 부처님 학원에는 아트만 출입 금지인 거예요. “참나·아트만 출입금지. 이 단어 쓰지 마시오.” 굳이 쓸 거면 뭐라고 해야 돼요? 열반이라고 해야 돼요. 왜? 열반은 탐진치가 소멸됐다는 의미만 갖습니다, 소극적인 의미만. 참나·아트만이 돼버리면 다시 힌두교의 브라만교의 논리가 참나·아트만에서 우주가 나온다니까 또 우주를 생성시키는 형이상학이 또 나와요. 전제돼 있어요. 그러니까 잔뜩 오염된 게 묻어 있다고요, 그 아트만 사상에. 그게 전개돼버리면 부처님이 지금 바라는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의 내 마음만 알아차리면 바로 열반에 들 수 있는 이 쉬운 방법, 자명한 방법이 있는데 머릿속에 잔뜩 또 일체유심조와 아트만의 그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형이상학 체계를 잔뜩 머리에 넣게 되겠죠. 이게 싫으신 거예요, 부처님은. 이 방법을 안 쓴 거예요. 부처님만의 방편을 아셔야 부처님이 왜 이런 식으로 설법하셨는지 안다고요. 가장 쉬운 방법을 쓰신 거예요. 들이쉬고 내쉬고만 보면 돼요. 부처님도 평생 하신 게 출입식념(出入息念)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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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 날숨 알아차리기. 이거 알아차리다 보면요 “지금·여기·나너·이렇게”가 쪼그라들어요. “지금·여기” 호흡 들고 나고 밖에 없어요. 여기에서 5온이 확 쪼그라들겠죠. 그럼 5온이 쪼그라들었다는 건 일체 세계가 이것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나한테. 이 세계가 굴러가는 원리가 잘 보이겠죠. 이렇게 축소해놓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데 어떻게 안 보여요? 뭐로 보여요? 연기법. 들숨이 있어서 날숨이 있고, 서로 다 인연 속에서 하나가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게 없습니다. 다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뿐이에요. 우리 인간관계처럼 상호의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나라는 캐릭터가 생기죠. 고정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관계 속에서 생긴 캐릭터일 뿐이에요. 어떤 사람 만나느냐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또 바뀝니다. 계속 바뀌고 있는 거예요. 그 자체를 알아차려서 모든 무상한 것들을 “몰라” 해버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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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열반에 도달하는 거예요. 쉽죠. 이 방편 쓰려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트만을 부정하신 거예요. 그런데 대승에 오면 어떻게 돼요?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하게 된 거예요. 왜? 부파불교 때부터 이미 형이상학화가 시작된 거예요. 제자들은 형이상학이 필요했던 거예요. 힌두교에 맞설 우리만의 형이상학. 힌두교랑 계속 싸우면서 발전하니까. 그럼 서로 닮게 됩니다. 이것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상호의존적으로요. 누구랑 노냐? 그 당시 이제 새롭게 불교의 영향까지도 받아요 힌두교가. 또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요 불교가. 그러면서 서로 정립돼요. 우리나라는 아니고 동양에도요 불교가 들어오니까 노장 사상이 도교로 거듭나버립니다. 상호연기하면서. 재밌죠. 이런 것처럼 그 연기 속에서 움직여 오다 보니까 형이상학이 필요할 때가 되니까 대승이라는 어마어마한 형이상학 체계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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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때는 뭐가 나와요? 대승열반경에서 뭐라고 주장했죠?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진아가 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과거에는 왜 부정하셨나요?” “그때는 그 브라만 외도들이 아트만을 잘 모르고 써서 부정했지 나도 원래 아트만 있다고 하고 싶었다. 이제 때가 됐다. 아트만 인정한다. 진아 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 진아 있다는 말은 틀렸나요? 맞나요? 여기서 2가지 여러분 생각하셔야 됩니다. 부처님이 초기 쓰시던 방편하고는 안 맞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아닌 건 아닙니다. 이해되시죠? 사실 우파니샤드도 연기의 세계에 해당되는 변화하는 모든 것들을 이원성의 세계를, 주객을 부정한 뒤에 남는 순수의식이 대상화되지 않는 순수의식 영원한 순수의식이 아트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럼 애초에 우파니샤드 견해는 틀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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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았나요? 맞았어요. 부처님의 방편과 달랐던 거예요. 부처님은 그 방식을 쓰고 싶지 않으셨던 거예요. 그리고 대승불교는 다시 우파니샤드 식 방법까지 쓰게 된 거예요. 틀렸다 맞았다라고 쉽게 단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방식에는 어긋나지만 진리에 어긋난 건 아닌 거예요. 여기까지 입장 이해되세요? 그래서 대승불교 안에서는 참나라고 말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대승불교 신자시면서 참나 아트만 하면 화들짝 하시면 지금 소승불교 믿고 계신 거예요. 뭔가 지금 잘못 다니고 계신 거예요 종단을. 이해되시죠. 특히나 참나·주인공 찾으라는 게 선불교고 선불교의 대표가 태고종 조계종입니다. 태고 스님도 다 임제종(臨濟宗) 선불교의 중국에서 면허증 따오신 분이고, 조계종도 조계 육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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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는 이 선불교의 맥을 잇고 있는 분 정통맥들을. 다 임제종 출신들이에요. 어때요? 그럼 이분들은요 대놓고 주인공·참나 그 자리 찾던 분들이에요. 이렇게 지금 1시간 정도 제가 떠들었는데 1시간 이해하신 게 지금 불교에 대한 몇 십 년 어디서 들으신 것보다 나을 거예요. 부처님은 왜 그러셨고 요즘 스님들은 왜 그러는지 이해되세요? 10분 쉬고 다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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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초기불교 특강] 2500년 만에 밝혀지는 열반과 무아의 실체 1강(47:36)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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