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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홍익학당] 윤홍식의 대승기신론 강의 1강(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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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소보다 시간이 짧죠. 2시간 2시간 안에 해야 되죠. 나눠드린 4장을 나눠드린 4장이 지금 대승기신론의 가장 이제 서문 격입니다. 서론이에요. 앞에 이제 논의가 시작되기 직전 대승 우리 대승기신론이라는 책에서는 이런 걸 다룰 겁니다. 하는 내용들이 나오는데요. 그 내용들을 이제 그 자료를 보면서 하나씩 설명 드릴게요. 제가 주역 강의를 했고 화엄경 강의를 했는데요. 대승기신론이랑 이렇게 화엄경이랑 만나도 참 재밌습니다. 둘 다 불교 내의 주역 같은 책들이에요. 이 대승기신론은 특히나 마음의 마음을 가지고 가장 정밀하게 분석한 책입니다. 마음이 어떤 구조로 생겼고 이 마음이 왜 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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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고 사는 이 마음. 먼 마음이 아니고요.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하는 그 마음이 진리 덩어리고 그 마음에서 진리를 정확히 배우면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 불보살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구조를 분석하고 마음의 유식학의 모든 이론들을 다 안에 끌어와서 담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5식 6식 7식 8식까지를 다 분석하면서 그 하나씩 식을 정화시키면서 우리가 어떻게 성스러워져가는지 1지보살에서는요 6식이 정화돼야 1지보살에 들어갑니다. 이제 6식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제압할 정도가 돼야 1지보살에 들어가고 7식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아집이 제압될 정도가 되면 이게 대승기신론에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7식이 제압되면은 7지보살이 됩니다. 마지막에 8식에 남아 있는 묵은 때를 다 벗기면 12지가 되는데요 대승기신론은 12지 체계입니다. 화엄경은 10지 체계, 대승기신론은 12지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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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 체계와 10지 체계 차이 혹시 제 강의 또 처음 들으신 분은 안 계실 텐데 혹시 구분하자면 10지 체계는요 보살은 무조건 1지에서 10지 있다는 게 불교 공통이고요. 요 1지 이전에 이제 또 닦는 행위가 있고 10지 이후에 그럼 어떻게 되냐? 10지도 아집 중간에 7지가 있는데요. 1지에서는 견성을 합니다. 7지에서는 아집이 떨어져요.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훼방 놓지 않을 정도 돼요. 여러분이 육바라밀 하는데 육바라밀을 실천하는데 아집이 방해하지 않을 정도가 돼요. 10지 되면은 그럼 무지가 떨어져야 되잖아요. 무지와 아집 2대 그거니까. 그래서 견성이라는 것도 실체론 아공을 알고 법공, 내가 본래 공하다. 에고가 본래 텅 비었다는 걸 알고 법공은 이 만법이 본래 공하다는 걸 아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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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법이 공하다는 걸 아는 거고요. 에고라는 거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무상한 거고 진정한 참나가 따로 있다는 걸 아는 게 아공. 대승에 와서의 아공이에요. 소승에서는 참날 얘기 안 하고 내가 에고라고 알고 있던 생각 감정 오감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거라는 것까지 아는 게 아공이고 대승에서는 그게 이제 참나의 각성과 연결되죠. 그런데 아공은 아집하고 연결돼 있고 법공은 무지랑 연결돼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1지에서 견성은요 정말 이렇게 내가 갖고 있는 돌 안에 옥이 들어있다는 걸 명확히 아는 정도지 돌을 다 이 옥을 가리고 있는 돌들을 털어낸 건 아니에요. 업장을 그래서 아공법공을 깨쳤다고 해도요. 1지 견성 때 지금 아집이 다 날아가고 법집이 다 날아간 게 아니에요. 무지는 법집이라 그래요. 어떤 법에 대한 집착 이 현상하는 모든 존재가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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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법에 대해서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고 나 밖에 있다고 느끼고 있고 내가 그 법의 정보를 정확히 몰라요. 법집이 깨진다는 건요 엄청난 얘기인데 전지전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법집이 깨지면 여러분 앞에 있는 컵을 봐도 컵의 삼성이 보일 거고 이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우주의 뭔 원리가 이걸 만들고 있는지 우주 전체의 인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 알아야 법집이 깨진 거예요. 인간으로서 법집이 깨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10지에서 끝내버립니다. 법집을 깬다는 거는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그 10지 위에서 화엄경에서는 불지가 있다고 말을 하지만 이 불지는 사실은 인격적이지 않고 비로자나불이라는 존재로 남습니다. 그런데 12지 체계에서는요 뭔가 불편하거든요. 법집까지 깨고 끝내자는 이론이 12지 이론이에요. 원래 10지에서 끝났는데 화엄경이 그 이후에 이제 학설들이 나올 때 유식학에서 더 보강한 게 뭐냐 하면요 12지 가자 하는 거죠. 10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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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중간에 11지를 거쳐서 12지까지 가자. 그럼 12지에서 확실한 건 뭐냐? 법집이 완전히 날아갔다는 거. 법집이 날아갔기 때문에 아집도 다시는 일어날 싹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법집이 무지기 때문에요 무지가 남아 있는 한 다시 아집이 올라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집이 여전히 작동해요. 그러니까 10지도 여전히 무지랑 아집은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무지를 완전히 박살낸 그래서 따라서 아집까지 박살난 12지를 설정하는 겁니다. 11지는 뭐냐? 11지는요 법집과 아집의 이 번뇌들 있죠. 이 2종 번뇌를 완전히 없앴다는 거고요. 같은 거예요. 12지는 완전히 없앴더니 보리와 열반, 지혜와 열반이 전지전능한 힘을 완전히 갖게 됐다는 거예요. 지혜를 얻었다. 번뇌를 없앴다. 동전의 앞뒤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입니다. 이걸 구분해가지고요. 11지에서 몇 겁을 지낸 다음에 12지가 되고 하는 이론은요 엉터리 이론이에요. 왜냐면 경전을 만들다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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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거예요. 원래 이 이론 자체가 어디서 왔냐면 초기 불경에 이미 있었어요. 초기 불경에 부처님이 마지막 삼매에 들 때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는 삼매에 드는데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드는데요 원효 스님의 금강삼매경에 대한 논문도요 이 금강삼매를 주제로 하는데 금강삼매는 누가 드는 거냐면요 이제 마지막 해탈을 앞두고 드는 거기 때문에 초기불교에는 10지 11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그대로 가져온 거예요. 뭐냐면 마지막 삼매에 들 사람이 이제 10지죠. 10지가 금강삼매에 들면 어떻게 될까요? 금강삼매는요 모든 번뇌를 잃어버리는 삼매예요. 그래서 다이아 같은 삼매예요. 완전히 모든 번뇌가 없어져요. 그러면 금강삼매 지나서 금강반야를 얻겠죠. 그게 뭐냐면 이게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는 무상정등정각이라는 최고의 깨달음이다 석가모님께서 얻으셨다고 하는. 초기 불교의 묘사가 이래요. 석가모니께서 마지막에 든 삼매가 금강삼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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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금강산매에서 번뇌가 없어지고 나니까 무상정등정각이 환하게 드러났다는 건데 이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요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의 영향입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가져와가지고 10지에서, 원래 화엄경은 10지에서 끝내버리는데 12지까지 가려면 마지막 번뇌를 다 없애야 되니까 10지 이후에 금강삼매를 얻는 과정을 설정해서 여기가 11지가 되고 금강삼매를 지나서 금강반야를 얻으면 이게 12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지금 여기랑 똑같죠. 똑같은데 직전이죠. 동전의 앞뒤예요 사실은. 직전이라고 하지만요 그걸 시간적으로 구분할 수 있나요? 번뇌가 싹 사라지면 즉 구름이 다 걷혔다는 뜻(금강삼매)이고 이건 태양이 드러났다는 뜻(금강반야)이거든요. 구름이 완벽히 걷혔다. 태양이 완벽히 드러났다. 시간으로 말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이거(11지)를 등각(等覺)의 자리라고 합니다. 부처님하고 평등한 깨달음의 자리 즉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는 뜻도 되고요. 그거랑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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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동등하다는 뜻도 되고. 그래서 등각. 그럼 이거(12지)를 굳이 구분하려니까 신묘한 깨달음의 자리에서 묘각(妙覺). 뭔가 여긴 더 자유자재하고 여긴 아집 동등하다는 의미만 있지 자유롭다는 말을 안 씀으로써 분명히 똑같은 자리인데 미묘하게 구분을 하고 있는 거예요. 동등한 깨달음. 신묘한 깨달음. 근데 이 등각이라는 말을 조심하셔야 되는 게 11지를 쓸 때 이제 12지랑 동등한 깨달음으로 많이 푸시는데 실제 등각이라는 이름은요 무상정등정각에서 온 말이에요. 이 말 자체도 이미 깨달았던 완벽한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등각. 무상(無上) 위가 없는, 정등(正等) 올바른, 정각(正覺) 올바른 깨달음. 그래서 이걸 등정각(等正覺)이라고도 하고 등각(等覺)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원래 등각이라는 말은요 12지의 경지를 말하는 건데 나중에 굳이 11지 12지를 나눠야 하니까 이런 단어들을 써가지고 억지로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이 12지 체계는요 이렇게 복잡하게 초기 불교 이론들을 가져다가 만든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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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완벽하게 법집까지 끝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인간이 완벽히 끝내야지 뭔가 화엄경처럼 법집이 아직 뭔가 법집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론을 끝내버리면 찝찝하지 않냐? 여래가 덜 되지 않냐? 라는 이론 때문에 나온 겁니다. 근데 현실성으로는 화엄경이 맞죠. 왜냐 지금 이거는요 아주 공상적인 이론이에요. 왜 그러냐면요 지금 이 법집이 사라진 존재는 그럼 어떤 존재일까요? 아집 법집이 사라진 존재는 개체성이 없어진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수행하셔서 개체성이 없어지는데 그다음 설명이 이제 모순을 일으키는 게요 원하면 언제든지 개체성을 갖고 나타나요. 그래서 중생들을 월인천강(月印千江) 여러분이 달처럼 존재하다가 우주 곳곳에서 여러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동시에 천억 군데 나타나서 중생을 다 도와주고도 사라져버리는. 이미 인간이 아닌 거예요. 이 진정한 법집이 사라진 존재가 우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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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하는 건요 신이 하는 거랑 지금 똑같아요. 타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경지. 인간을 완벽하게 신화시켜버리고 끝납니다. 그래서 이거는 너무 이상화된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화엄경에서 10지까지 가는 게 저는 맞다고 본다는 이유가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 이 12지 체계는요 완벽하게 끝을 이상적인 경지에서 끝내고 싶은 인간의 열망이 저는 만들어냈다고 봐요. 왜냐? 초기 불교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전지전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이렇게 설정한 게 아니었어요 금강삼매경이. 그냥 번뇌를 다 없앴다는 거였어요. 그게 전지전능을 꼭 의미하지는 않았어요. 즉 무슨 말이냐면 7지 정도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금강삼매는 한 7지 들어갈 때 정도 얘기라고요. 그냥 번뇌를 끝장내는 정도. 아집의 번뇌, 번뇌 중에 아집의 번뇌.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전지전능하다는 걸 강조하다 보니까 진정한 전지를 이루는 삼매로서 금강삼매가 자리하게 됐습니다. 좀 어려운 얘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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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한 번씩 또 들으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제가 이런 얘기는 어디서 안 하니까 제가 해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법집을 끝냈다는 건요 여러분이 이런 거예요. 제가 이런 비유 드리잖아요.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의 차이는 화엄경은 여러분이 게임을 하는 이유가 만렙, 그 게임 안에서 궁극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라면 대승기신론에서 말한 12지는요 만렙 찍고 뭐가 되냐면요 게임 관리자가 돼버리는, 게임에서 나와 버려요. 그런데 원하면 언제든지 게임에 들어가서 게임에 관여할 수 있는, 어딘가에서 아이템이 없어서 울고 있는 친구한테 황금옷을 입고 나타나서 아이템 주고 바로 사라질 수 있는. 근데 그 게임 안에서 노는 존재가 아닌 거예요 이미. 이해되세요? 대승기신론에서 그리고 있는 궁극의 경지는요 12지는 이미 인간이 아니에요. 그냥 도(道)예요. 그런데 신하고 인간의 되게 어떤 중간적인 모습인데 인간은 이미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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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안 올 거 아니에요. 근데 이 존재는 원하면 언제든지 인간의 모습으로 가서 도와줘요. 그럼 분명히 개체성이 살아있다는 얘기죠. 그러면서 모순된 말을 합니다. “아미타불이 몇 겁 전에 성불을 했고 전생에 누구였고..” 그러면 개체성이 없어야 되는데 아미타불이 과거 이력이 다 있어요. 뭔가 좀 이상하죠. 개체성이 분명히 남아 있는데. 모순에 빠지게 돼요. 개체성이 남아있으면 10지가 돼버리고 개체성을 초월하면 신이 돼버리는데 비로자나불 불교 내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비로자나불인데 그래서 화엄경은 비로자나불하고 이 10지를 구분하는데 그래서 10지는 10지고 비로자나불은 비로자나불이라서 “10지는 인간으로서 최고 경지지 비로자나불의 경지랑은 또 다르다”라고 분명히 구분을 하는데 이거를 “인간으로서 왜 이 비로자나불 못 되느냐?” 하고 된다고 해버리고 나니까 모순에 빠져요. 개체성이 어떨 땐 있다가 어떨 땐 없다가 그래서 이렇게 이런 모순에 빠지는데 그런 걸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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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하시고. 그래서 저는 어떻게 이해하냐면요 제가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10지까지, 인간에 왜 그러냐면 인간의 오온 오온은 에고잖아요 이 대자대비 지혜와 자비와 이 능력을요 이 현상계 구현하려면 오온이 반드시 필요한데 오온은 에고라고 하는 겁니다. 에고가 있어야 돼요. 에고가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뭐로 지혜를 표현합니까? 생각을 하지 못하시면 뭐로 여러분이 지혜를 정리하셔 중생한테 가르쳐줄 겁니까? 그래서 손발이 없으면 어떻게 중생한테 뭔가 나누고 베풀고 하겠습니까? 이 오온이 있어야 된다는 게 반야심경이래 대승불교의 기본 철학인데 오온은 유지하고 싶고 개체성은 없애고 싶으니까 약간 그 이상한 철학이 나왔다는 거죠 저는. 그래서 실체를 들여다보면 애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 생각하시기에 부처님이요 극락에 딱 앉아 계시다가 중생이 어디서 부르는 소리 들으면 도와주러 가신다 그러면 그건 개체성이 있는 거예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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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지보살이지 대승기신론이 말한 12지가 아니에요.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12지는요 개체성이 분명히 사라졌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모순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대승기신론에서나 능가경에서 12지를 주장하는 경전들이 그러면서도 부처님은 저기 극락세계의 연화, 색구경천(色究竟天)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계시다 그래요. 모순에 빠지죠. 기독교에서 빠지는 모순이랑 똑같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 우리 안에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저기 어디 옥좌에 앉아 계시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럼 개체성이 있는데 개체성 있는 존재가 어떻게 온 우주를 경영하죠? 티끌 하나까지. 이런 모순에 빠지는데요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모순을 정확히 지적해 드리면 화엄경이 현실에 맞고 대승기신론에서 그러면 10 11 12지는 어떻게 비로자나 그대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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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러려면 오온이 없어야 돼요. 그래야만 온 우주를 티끌 안에까지 들어가서 알아차리시죠 여러분이. 이해되세요? 티끌 하나까지도 다 알아차리고 계셔야 돼요. 지금 동시에 온 우주를 한눈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인간은 내 몸을 통해서 내 오온을 통해서 우주를 알아차립니다. 그게 10지고 비로자나불과의 차이예요. 근데 대승 기 신론에서 마지막에 12지로 끝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온 우주를 알아차린 신이 지금 없나요?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사실 부족한 거는 손발을 가지고 있고 우주의 로고스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얘기해 줄 에고를 지닌 신성이 부족한 거지 신이 없어서 우주가 이런 거 아니거든요. 신이 없다면요 우주의 카르마가 집행이 안 돼야죠. 지금 카르마가 냉정하게 집행이 되고 있다는 건 비로자나불이 원만하게 우주를 운영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굳이 공부해서 개체성을 없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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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다는 거는요 뭔가 모순된 게 있어요. 그런데 왜 이해는 되는 게 왜 그러냐? 완벽한 경지를 목표로 하고 싶다는 거죠. 그렇다면요 저는 이 12지를 어떻게 이해할 거냐? 비로자나불을 의인화해서 우리가 설명하고 있다고 받아들이시는 게 좋다는 겁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건 10지까지고 12지의 세계 얘기는요 신을 인격화해서 우리가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저 영역은. 어떻게 이 한 인간이 한 개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온 우주의 인과의 집행을 동시에 알아차릴 수가 있어요? 불가능해요. 여러분의 에고를 완벽하게 포기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요 이미 그런 신은 우주에 있거든요. 이게 모순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안에 참나가 사실은 이 우주의 신인데 여러분이 완벽한 참나로만 존재하겠다는 발상은요 이 대승의 체계에서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뭐라고 했냐면 오온이 본래 공한데 공한 오온을 어떻게 없애느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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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이 본래 청정한데 청정한 오온과 왜 싸우고 계신가? 즉 오온을 부정하지 말라고 한 이상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은 이 청정한 오온을 갖고 있는 영역은 여전히 10지란 거에요. 비로자나불은 그런 오온 너머에 있는 그냥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참나의 총합이에요. 그렇게 이해하시는 게 나아요. 그런데 거기에 도달하겠다고 한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하느냐?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 12지는요 영원한 인간의 이상으로서 우리한테 의미가 있어요. 즉 참나가 그대로 인격화된다면 저런 모습일 거라는 건요 우리한테 계속해서 10지도 끝없이 공부해야 되거든요. 즉 이상으로서 우리한테 의미가 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완벽한 인간의 모델이라는 건요 우리를 끝없이 또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서 작용한다고 보시면 저는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12지에 대한 묘사는 너무 좀 과장된 면이 있다는 거. 막말로 대승기신론 쓰신 분이 12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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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말인지 아시겠어요? 12지가 와서 책 쓰고 가실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오셔도 10지가 오시지 12지가 온다, 12지가 온다는 건요 개체성을 가져야 되는데 문제가 생겨요. 모순에 빠져버려요. 그러니까 가끔 신성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속에서 인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분이 진짜로 개성을 가지고 있고 전생이 있고 후생이 있는 존재로 구체화돼버린다면 이미 그건 개체성이 돼버리기 때문에 이론상 10지지 절대 12지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앞으로 대승기신론 논리가 나가는 과정에서 법집이 완전히 박살나서 그 존재가 어떻게 된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너무 신비할 뿐이에요. 게임하던 사람이 아니라 이젠 관리자로 변해서 게임을 전체를 보고 있다가 이게요 인간의 의지로 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아미타불이 대승계신록에서 묘사하는 부처의 모습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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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연하좌의 색구경천 우주 제일 꼭대기 하늘에 극락에 색구경천에 앉아 계시다가 인간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갈까 말까 하다가 도와줄까 하고 인연이 있으니 가보자 이렇게 상상하신다면 그건 10지예요. 대승기신론에서 뭐라고 묘사하냐면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사람 마음 안에 이미 나타나버립니다 내 모습이. 이미 인간이 아닌 거 아시겠어요? 12지 경지는요 의도를 내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신이고요 우주의 공이고 인간들이 그 사람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냥 이미 여기 나타나 있다는 거예요. 이미 인간이 아니죠. 아미타불이나 이런 부처에 대한 묘사가 대승기신론에서랑 화엄경에서랑은 많이 다릅니다. 그걸 좀 이해하셔야 됩니다. 섞인 부분도 있어요. 화엄경에서도요 비로자나불이 도 닦아서 됐다든가 이렇게 중간적인 발언은 나옵니다마는 그래도 화엄경은 끝까지 화엄경의 제일 핵심이 되는 10지경에서는요 10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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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겠다는 의도가 분명하고 불지랑 10지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그것도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아주 어려운 얘기를 제가 해드렸는데 제가 화엄경 강의하던 거랑은 구분하고 보셔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이렇게 어렵게 해놔서 이제 저를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여러분도 좀 힘드시더라도. 그래서 인간이 성장하는 게 1지 7지 10지 이렇게 크게 3단계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대행스님 같은 분이 대행스님이 이걸 다 가보셨다는 게 아니라 대행스님도 이 이론을 아세요. 그러니까 세 번 죽어야 된다. 한 번 죽어야 견성을 하고 두 번 죽어야 아집이 사라지죠. 중생과 나를 하나로 보게 되고 세 번 죽어야 중생과 하나로 구르게 된다 그러는데 이건 전지전능한 경지를 얘기해요. 그래서 그분이 자기 경지를 어디라고 생각하시고 얘기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론들이 원래 다 여기에 근거한 겁니다. 왜냐 여기서 무지 아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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깰 참나를 찾고 아집을 깨고 10지 11지 12지 가면 무지를 박살내요. 이해되시죠? 이게 지금 대승불교의 모든 기본 공통인데 그 안에서 차이가 나는 게 이제 12지를 설정하느냐 안 하느냐? 10지에서 끝내느냐 12지까지 가느냐? 대승기신론은 12지까지 가는 체계입니다. 완벽한 인간이 진짜 신성한 존재가 돼서 참나 자체가 됐는데 참나와의 차이는 필요에 따라서 인간의 모습을 자유롭게 취한다는 거, 그 차이만 있어요. 이게요 이것도 대승불교에서 처음 나온 것 같죠? 아니에요. 초기 불교에도 다 있어요. 초기 불교 공부하신 분들이 모순에 빠지는 게 있어요. 석가모니가 분명히 열반에 드셨죠.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셨으면 열반은요 “니들은 고생해라 난 간다” 하고 간 자리거든요. 열반에 든 분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기에 문제가 생겨요. 이론상은 돌아올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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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분명히 신앙을 해보고 수행을 하면은 앉아서 수행하는 사람한테 석가모니가 나타난단 말이에요. 들다고 하면 “ 가모니 부처님 부처님” 하면 초기 불교 저기 공부하는 지금 남방불교 가보셔도 “붓도 붓도” 해가지고 부처를 자꾸 빕니다. 그럼 부처님이 나와서 도와주기도 한단 말이죠. 그럼 이 존재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문제가 생겨요. 열반에 들었는데 나타난단 말이에요. 사실은 자기 마음이 만든 것일 확률이 크죠. 근데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건 부처님이 가끔은 나타나신다고 보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그 이론들이 지금 대승기신론에 잔뜩 모여서 12지의 경지를 묘사할 때 완전히 사라졌는데 개체성이, 가끔 필요할 때 우리가 중생이 부르면 탁 나타나서 도와주고 사라져 버린다는 거예요. 그런 존재로 12지가 묘사된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게임을 열심히 하다가 게임 세계 안에서 고수면 만나볼 수라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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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에요. 사라져버린 존재예요. “그 친구는 게임 만렙 하고 요즘은 이제 게임 관리한대 사라져버렸대.” 그러니까 이 게임판에서 사라진 거예요. “그럼 언제 만나?” “너가 아마 아이템이 떨어져서 울고 있을 때 간절히 빌면 나타나서 뭐 하나 주고 가실 거야.” 게임하는 존재가 아니죠. 이미 밖의 존재가 돼버려요. 12지는 밖의 존재를 말하는 거예요. 10지는 안의 존재예요. 안에서 최고의 고수로서 중생들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존재. 제가 항상 말하는 건 10지가 지금 부족한 거지 우리가 마음속으로 빌 때 나타나서 가끔 도와주는 그런 존재는요 그냥 신성을 우리 마음이 인격처럼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거 가지고 이걸 입증한다는 건 모호한 얘기죠. 이런 이런 종교 현상이 이론화된 게 지금 에 대승불교 체계에서 12지가 그 경지입니다. 그러니까 묘사할 때 보면 이상해요. 어떨 때는 인간으로 묘사하기도 그건 분명히 10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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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전지전능하게 또 신비한 작용들을 일으킨다고. 내가 이렇게 하면 와서 도와준다고도 하고. 절에 가 보시면 이런 말도 합니다. “부처님의 석가모니의 위신력으로 티끌 하나도 존재합니다.” 그러면 석가모니가 들으시기에도 되게 이상한 얘기일 거예요. “내가 먼지 하나까지 다 들어가서 그걸 조정하고 있다고?” 석가모니를 12지로 격상시키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초기 불교에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석가모니는 나의 아집을 다 벗은 존재지 전지전능해졌다고 하시지 않아요. 이해되세요? 아집을 다 벗었다. 그럼 대승불교 이론상은 7지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요 7지 이상에 관심이 없어요. 고통을 없애느냐 번뇌를 없애느냐만 관심이 있지 우주의 모든 인과를 다 꿰뚫어 알아가지고 그걸 다 조정한다? 그걸 깨는 대표적인 예가 초기 불경에 부처님이 “밖에 비 오냐?”고 물어보시는 게 나와요. “밖에 비 오냐?” 그러면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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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세요? 법집을 다 깬 분이 지금 비 오는지 안 오는지를 제자한테 물어봐야 되겠습니까? “밖에 비 오냐?” 인간적이죠. 즉 뭐냐면 그런 이 얘기가요 진지하게 거론이 됐어요. “과연 석가모니는 왜 물었을까? 비가 오는지 왜 모르셨을까?” 대승불교분들한테 이게 고민이 된 거예요. 전지하다고 다 해놨는데 실제 역사의 석가모니랑 안 맞는 거예요 이론이. 이해되세요? 그럼 그런 모순들이 이렇게 일어납니다. 이게 이거는 이제 녹화가 돼 있으니까 나중에 혹시라도 좀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이 혼란스럽다. 그럴 때는 이 자료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 볼게요.
[들어가며
마명馬鳴보살(100∼160?의 저작으로 전해오는 “대승기신론”의 산스크리트)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중국 양梁나라 때의 진제眞諦(449∼569)의번역본과 실차난타實叉難陀(652∼710)의 번역본이 전해온다. 본서는 이 진제역을 중심으로 하되 실차난타역을 참고하였다.]
대승기신론 마명보살의 저작으로 전해오는데요. 마명보살은 지금 기원후 한 2세기 분이죠. 그런데 이때 이때의 사상 흐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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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이 지금 나올 때가 아니라 이때는요 한참 유식학이니 유식학이 한참 연구되기 시작하고 막 할 때예요. 그러니까 아직 이 뭐냐면 모순이 빠지는 게요 대승기신론은 유식학과, 유식학이 뭐냐 하면요 유식학이 “만법은 의식의 작용이다.” 유식학이 있고 반야, 반야부 계통이 뭐냐면 여기가 공성(空性)입니다. 반야심경 생각하시면 돼요. “일체 공하다”라고만 논리를 끌고 나가는 파랑 유식학은요 어떻게 내 의식이 변해가지고, 지금 보세요, 여러분 의식이 변해서 지금 저로 만들어져 있죠. 여러분 마음에 제가 나타나 있죠. 여러분 의식이 변해서 이런 겁니다. 여러분의 오감의 작용이에요. 여러분 마음에 지금 떠오른 저는요 저 자체가 아니라 여러분 뇌 조작이라고요. 제가 보낸 신호를 여러분 내가 받아서 재해석해서 보고 계신 거예요. 제가 여러분 눈을 뚫고 들어가서 여러분 머릿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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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할 수가 없어요. 망막은 전기 신호만 받잖아요. 전기로 신호를 보내서 뇌에서 재구성해서 지금 저를 이렇게 재구성해서 보고 계신 거예요. 이해되세요? 뇌의 작용이지만 더 들어가면요 뇌는 마음의 도구일 뿐이죠. 마음의 작용이에요. 여러분 마음에서 저를 지금 상을 띄워서 보고 계시다고요. 여러분 마음이 어쩌다가 왜 저로 변했을까요? 이렇게 접근해야 돼요. 유식학을 연구하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연구하려면요 일체는 내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어떻게 저런 상이 떴을까? 어떻게 이런 감정이 떠올랐을까? 어떻게 이런 생각이 생겨났을까? 이런 오감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이 감촉들이 어떻게 내 마음에 나타났을까? 이걸 연구하는 겁니다. 결국 이 모든 건 내 마음의 현상일 뿐이라는 거예요. 내 마음 밖에 있는 걸 우리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안다고 하는 건 다 여러분 마음 안에 지금 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에 상으로 떠 있는 것들이에요. 그걸 가지고 여러분은 세계를 산다고 사는데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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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영원히 윤회를 하시는 동안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밖에 못 봐요. 이거는 그냥 받아들이셔야 돼요. 여러분 마음 밖에 있는 걸 여러분이 알 도리가 없어요. 파리가 파리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못 보지 밖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이해되세요? 영원히 파리로 윤회한다면 파리한테 다른 세계가 있을까요? 자기가 보는 그 세계만 있겠죠. 인간은요 인간한테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요거밖에는 지금 못 봅니다. 못 느낍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법유식(萬法唯識) 만법은 내 의식의 작용, 이게 일체유심(一切唯心) 일체는 내 마음의 작용, 이게 같은 말입니다. 일체는 내 마음에 변형된 모습일 뿐이에요. 다 마음의 작용이에요. 모든 현상은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걸 연구한 게요 서양 철학에서 이걸 아신 분들이 후설이라고 정신 현상학을 주장하신 분이요 일체 현상은 내 마음의 현상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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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알아야 대승불교를 아실 수가 있어요. 지금 지금 이 내용들을 제가 늘 얘기하는 건데요 아공법공 구공 하는 게. 여러분이 나라고 여기시는 거 그게 뭡니까? 생각, 여기서 나는요 생각 감정 오감에 그 에고를 말해요. 그 에고도 실체가 있나요? 없어요. 참나의 작용이에요. 법공, 에고만 그러나요? 생각 감정 오감을 이루는 것들이 뭡니까? 그게 사실은 법이에요. 그래서 같은 말입니다 법공은. 생각이니 감정이니 오감이니 하는 모든 내가 느끼는 일체 세계의 요소들 이거밖에 없어요 법이라는 것도. 이걸 묶어서 나라고 여기는 그 나라는 그 생각도 공하다는 거고 그 나를 이루는 요소들 자체도 사실은 공하다는 겁니다. 그럼 이 공하다는 건 뭐냐? 그래서 이게 구공(具空) 모두 공하다. 이공(二空)이라고도 해요. 모두 공하다. 그럼 공이 뭐냐? 참나입니다 대승에서는.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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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그래서 대승의 이론을 한마디로 만법 “만법이 본래 공하다.” 없다가 아니에요. “만법이 다 참나의 작용이다.” 어떻게 종합했냐면 이걸로 종합했어요. 유식학은 “우주의 모든 현상은 내 의식의 작용”이라고 주장했고, 반야부는 이 “내 마음의 본질은 공하다”고 주장했으니까 합치면 뭐가 돼요? 본질은 공한데 공에서 모든 이 참나와 공에서 모든 현상이 일어났으니까 이것도 똑같이 공하다는 거죠. 이게 다 반야부에도 있고 유식학에도 있어요. 그거를 이제 뭐로 꿰느냐? 한마음으로 꿰어요 대승불교에서. 한마음(一心) 이걸 합쳐서 “우리의 참된 영원한 마음자리다.” 여기가 여래장(如來藏)이고 여래가 감추어진 거니까 여래의 씨알입니다. 불성(佛性)이라는 뜻이에요. 여래장 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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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眞如) 법신(法身). 이게 힌두교의 아트만하고 다르네 같네 하시는데 똑같아요. 조금도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학설이 어긋나실 겁니다. 힌두교도 이해 못하시게 되고 불교도 안 맞게 돼요. 원효 스님이요 아트만 아트만 사상만 나오면 막 깹니다. 아트만. 아트만. 얘네들은 상일주재(常一主宰) “영원하고 한결 같은 어떤 주재자(主宰者)가 내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걸 아트만이라고 하는데 아트만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신아(神我)라 그래요. 신령한 내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아를 무조건 깨요. 그다음에 이 여래장과 이 불성만 나오면 원효 스님 똑같이 상주불멸 영원하고 머물러 있고 뭡니까? 그럼. 그러면 그러니까 우리 건 되고 남의 건 안 된다는 것밖에. 왜 이렇게 까는지 아세요? 힌두교 그러면은 상일주재를 뭐로 생각하냐면 신아(神我)를 에고로 생각해요. 힌두교는 에고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우리 불교에서는 에고라는 거는 헛되다고 이미 텅 비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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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냈다. 고로 힌두교는 틀렸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공적영지니 여래장이니 불성이니 진여니 법신이니 하는 건 뭐냐? 법신은 상주불멸 한 거다. 영원하고 영원히 변치 않으면서 이 법계에 항상 머무는 거다. 설명이 묘하죠. 여기서 이상하게 조합하신 분들이 제일 저를 욕하시는 분들인데요. 지식으로 종합해 버리신 분들. “아! 그렇구나. 상주불멸한 건 없구나. 없는 거를 상주불멸이라고 하는구나.” 저도 이해 못할 어떤 경지에 가버리셨어요. 그래서 제가 뭔 말하면 “그거는 영원하게 봤으니까 아트만이다.” 그럼 그쪽도 했는데요? “그건 그런 뜻이 아니다.” 이해되세요? 이런 식으로 도망가시면서 자기도 해탈 못하고 남도 해탈 못하게 다 막아냅니다. 오늘 아침에도 외국에서 누가 전화를 하셔가지고 저한테 전화한 게 아니고 저희 스태프분한테 전화를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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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으셨는데 “왜 그렇게 해박하냐?” 뭐 어쩌라고요? 그래서 “왜 이렇게 해박하냐? 해박하면 가짜 아니냐? 나이도 젊은데 어떻게 그렇게 아느냐? 게송은 뭐 깨달았을 때 시는 지었느냐?” 뭘 결국 그 괜한 괜히 그 험한 얘기나 듣고 전화를 끊었는데요. 그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외국에서 굳이 그거 전화해서 욕하고 싶으셨는지 모르겠는데 못 견디겠나 봐요. 제가 이렇게 떠드는 걸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럼 안 들으시면 되는데 굳이 들으시면서 화를 내시다가 못 참고 전화하신 것 같은데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왜 왜 그렇게 우리가 지금 심각한지 대승기신론을 읽으시면요 도가요 멀리 있는 게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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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 마음이 도라는 거를 처음부터 얘기하고 시작해요. 선불교는요 대승기신론에 이런 배경이 없으면요 완전히 산으로 갑니다. 6조 스님이 인용하는 게 대승기신론이에요. 6조 스님이 6조단경에서도 “무념이 종지다” 이런 말 다 대승기신론에서 나온 거예요. “일체가 본래 형상이 없다” 이런 얘기 다 대승기신론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대승기신론 그러면 교종(敎宗), 경을 공부하는 건 교종, 우린 선불교 화두 견성 뭐 이런 얘기밖에 안 합니다. 이해되세요? 지극히 천박한 이론을 가지고 견성만 하면 다 터질 거라고 기다리는데 사실 교리를 모르니까 뭐가 옳은지 몰라요. 화두가 터지면 뭐가 오는지 알고 화두를 하고 있지 않다고요. 상상 속에서 해요. “엄청난 게 올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 견성이 와도 여러분이 인정을 못해요. 이거 말고. 이건 꼭 고아원에서요 “우리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올 것이다.” 나중에 아버지가 데리러 왔는데 막노동하시는 분이에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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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아버지 아닙니다.” 이러실 거예요. 기다렸던 아버지가 아닌 거예요. 이런 현상이 똑같이 지금 선방에서 일어납니다. 견성을 했는데 제가 봤을 땐 견성을 했는데도 부정해요 본인이. “아! 그거 아니고 백천 불보살이 막 나타나는 엄청난 경지가 있을 것이다. 천개의 태양이 비추고.” 막 이제 본인이 더 잘 알아요. “그럼 본인이 견성하셨나요?” “아니 나는 안 했는데 뭐가 견성인지는 알아.” 막 이러면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지금. 팜플렛 보고는. 이해되세요? 그 팜플렛에 제가 강조합니다. 분명히 써있어야 돼요. “이거는 실물과 실제품과 분명히 다를 수 있습니다.” 과장해놨죠. 색도 더 이쁘게 칠해놓고 뭐라도 더. 제가 책을 팔아도 훨씬 더 이쁘게 한 거를 걸지 누가. 그래서 공부하고 싶게 하려고 막 이렇게 멋있게 얘기해 놓은 것들이 다 상상이 돼가지고 “그거 아니면은 견성 안 했다”라고 생각하면 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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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면서요 제대로 된 바이블을 보시면서 모든 화두선에서 이런 참선 염불선 뭐든지 좋습니다. 염불선에도 이 대승기신론이 되게 중요한데 염불선을 한 단락을 할애해서 염불선의 원리를 설명하고 염불선도 권장해줘요. “아미타불 뵈러 갈 수 있다” 희망을 주면서 “그거 해도 똑같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이 대승기신론 하나가 모든 참선의 바이블이에요 실제로는. 이걸 보시면 원만해지는데 선불교 서적만 보면 부분적 자명함에 빠져요. 대승기신론을 보면 원만한 자명함을 얻게 되는데 그 차이입니다. 다만 하나 주의하실 거는 아무튼 대승기신론은 12지에서 끝내려고 하기 때문에 너무 고원(高遠)한 경지를 마지막에 궁극으로 제시한다는 거. 그거 빼고는요 지금 상종(相宗)과 공종(空宗)을 하나로 꿰면서 일심(一心) 사상으로 한마음, 이 한마음이 그냥 우리의 평상시의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평상심이 도다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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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평상심이 우리의 그냥 오욕칠정의 평상심은 아니에요. 그렇죠. 평소에도 늘 있는 그 자리라는 거죠. 지금 울고 웃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마음이 평상심이고 그게 참나입니다. 그 나라는 놈. “울고 웃는 그 마음이 평상심이다” 해버리면 개념이 너무 커지고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체가 본래 공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근데 지금 뭔가 참나를 찾으려고 가르쳐주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그럼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고 울고 웃고 보고 듣고 느끼게 하는 그 주체 자리가 있어요. 근데 그건 평상심이에요. 왜냐하면 평소에 늘 그 마음으로 살아가시니까요. 지금 제 얘기 강의 뭐로 듣고 계시나요? 참나요. 그게 평상심이에요. 그게 한마음이에요. 생각 감정 오감 이전의 그 마음. 그 한마음에서 생각 감정 오감이 다 나와요. 만법이 사실은 이 일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만법이 일심의 작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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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이 변해서 지금 색깔도 되고 소리도 되고 냄새도 되고 다 해가지고 여러분 마음에 상이 떠가지고 여러분의 마음을 그리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일체가 유심(唯心)인지 아는 사람은요 다른 거 연구할 게 하나도 없고 지금 내 마음을 연구하자는 게 핵심이고 대승의 모든 원리는 어디서 나오냐면요 내 마음을 정확히 알고 쓰자는 것뿐이에요. 불교는 좋은 게요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접근해요. 기독교나 이런 철학들, 희랍 철학이나 유교는 다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접근합니다. 즉 우주의 존재가 어떻게 신으로부터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생겼을까? 불교나 힌두교 철학들은요 인식론적으로 접근해요. “어떻게 우리는 이 세계를 인식하고 있을까?”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존재론적인 얘기가 아니에요. 마음이 지금 실제로 컵을 만들어냈다는 게 아니고요 이 컵이 어떻게 여러분 마음 안에 현상이 됐냐는 거죠. 인식이 됐냐는 거죠. 이해되세요? 관점이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면요 저 우주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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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나가야 됩니다. 근데 이 우주는 내가 어떻게 아나요? 불교나 힌두교적 관점이 좋은 게요 내가 제일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에서 시작해서 우주를 풀어나가요. “나는 어떻게 이 우주를 느끼고 있지? 잠잘 때는 우주가 없었는데 깼더니 우주가 나타났다. 이 우주는 어떻게 내 마음에서 현상화되고 있지?” 이런 측면에서 접근하니까요 훨씬 과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죠? 실제로 지금 과학자들은요 객관적인 물건이 있다고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하는데요 더 엄밀히 말하면 더 과학적인 얘기는요. 그 물건마저도 사실은 너 마음의 작용이라는 이게 더 과학적인 얘기예요. 이해되세요? 우리는 그런데 마치 이게 객관적으로 있는 것처럼 얘기하시죠. 남도 똑같은 이걸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살아가시죠. 근데 그 가정이라는 거 아시겠어요? 솔직히 남이 어떻게 보는지 모르시죠? 남이 볼 때 여기 점 하나가 더 찍혀 보이는지 모르시죠? 다 얘기해 본 건 아니잖아요. 그냥 이거려니 하면 이건 줄 알고 살고 계시는 거지.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요 이런 불교적 접근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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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인 겁니다. 진짜 난 내 마음에 들어온 것만 갖고 분석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태어나서 우주에서 수많은 걸 봤는데 엄밀하게 봤더니 결국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현상이더라. 객관적인 게 없다는 게 아니라 나는 내 마음에 일어나는 것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더라. 이게 어떻게 내 마음 안에서 현상화 되는지 이걸 알아야겠다.” 이게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깨치는 거예요. 원효가 해골 물 먹고 깨쳤다는 것도 이거예요. 일체가 해골인지 모르고 맛있게 천국의 마음으로 물을 먹었는데 아침에 해골을 보니까 지옥이 펼쳐지죠 마음에. 마음이 그렇게 표현하는 걸 보고 단순히 “마음먹기 나름이구나” 이걸 깨치신 게 아니라 일반인은 “마음먹기 나름이구나. 열심히 살자” 이게 아니고요 원효는 그걸 깨친 게 아니고 거기서 이걸 깨쳐버린 거예요. “일체가 마음이 만드는구나” 하는 걸... 원효가 그 해골물 이야기는요 그건 단순한 얘기고요. 거기서 원효가 깨졌다는 건요 그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해골물 사건을 정확히 이해를 잘 못합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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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제가 나중에 꼭 설명 드릴게요. 원효 스님에 대해서도 분명히 제가 한번 해드릴게요. 워낙 우리나라에서 내놓을 만한 그런 큰 보살이시니까 제가 보살불교를 주장하려면 원효 스님을 주장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분은 스님도 거부하고 거사로 내려오셨기 때문에. 내려왔다는 개념도 웃기지만 본인이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아주 아주 미천한 백성이다” 하는 식으로 소성거사라고 이름을 붙이고 내려오셨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서. 그래서 그게 진짜 보살도다 하고 그분은 거사(居士)로 불리길 원했단 말이죠. 스님으로 불리길 원치 않고. 이런 거 배워야 됩니다. 이런 분을 제가 꼭 설명해 드릴 텐데 그분이 결국 깨달은 것도요 대승기신론 이거 연구하셨거든요 그분도. 여기 나온 깨달음을 얻으신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그분 위대한, 그분은 7지 넘으셨다고 보거든요. 그런 보살이 나옵니다. 그래서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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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할게요. 들어가면 해야죠 그래도. 아무튼 마명보살(馬鳴菩薩)의 저작으로 전해오는데 이런 내용을 대승기신론이 담고 있다고 보면요 좀 더 후대 저작으로 봐야 맞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근데 저자는 마명보살로 돼 있는 거 보니까 이건 후대에 누가 지어놓고 마명으로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이분이 워낙 유명한 분이라 이렇게 봅니다마는 그런 거 보면요 대승불교 경전들은요 저자가 다 불확실해요. 누구 부처님이 얘기했다고 둘러대버리고 그러니까 이분들은요 제가 볼 때는 진짜 보살들이세요. 이거 한 편 제가 이런 거한 편 쓰면요 제 이름을 막 앞뒤로 다 박아놓겠어요. 누가 썼다. 누가 썼다. 윤홍식의 대승기신론 뭐 이런다든가. 이것 가지고도 누가 욕하는 분이 있더라고요. “윤홍식의 수심결 강의는 아상에 사로잡히다니” 막 이러면서. 그분도 본인 돈 한 오륙백 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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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보면요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책이 팔릴지도 모르겠고 “이름이나 알리자” 하고 박았는데요. 아무튼 얘기가 잠깐 딴 데로 샜는데 아무튼 이분들이 이름을 안 알려요. 왜냐하면 위대한 글로 보이고 싶었던 거예요. 이거는 다 뒤에 후대인들이 쓴 겁니다. 그런데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석가모니 말 아니면 “다 후대인 말이야. 그럼 가짜구만.” 그게 잘못된 거예요. 석가모니보다 더 저는 위대한 철학들이라고 봐요. 대승불교 철학이 훨씬 위대하다고 저는 봅니다. 열반에 들어가서 끝내자는 철학보다요 이 중생계에 남아서 영원히 중생을 성장시키자는 이론이요 저는 더 고귀하다고 보기 때문에요. “그럼 넌 석가모니를 안 따르는 거냐?” 그분은 그분대로 존경하지만 대승불교는요 대승불교대로 존중합니다. 물론 그분들은 화가 날 수 있어요. 왜 그러면 “대승불교 사람들이 따로 장사를 하지 왜 석가모니를 앞에다 걸고 장사를 했을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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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을 가지실 수는 있지만 그것도 석가모니를 높이려는 의도였지 그분들이 뭉개려고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좋게 해석 주십사 하는 거죠. 그리고 그러니까 이제 사실 원 저자가 뭔지 누군지 잘 모르는 책입니다. 그리고 심지어요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어요. 심지어 그래서 중국에서 위찬(僞纂), 중국에서 누가 “가짜로 만든 경전이다. 위경(僞經)이다”라는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저는 아니라고 보는 게 양나라 때 진제가 번역한 게 있고요. 실차난타라는 분이 번역한 신역 구역과 신역이 있는데 두 번역본을 가지고 보면요 이 두 번역본을 충돌시키면요 원문이 어땠으리라는 게 보여요. 그럼 만약에 이게 중국에서 나온 경이면요 두 번역본이 존재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두 번역본이 틀려요. 틀리면서도 오묘하게 어떤 하나의 원본이 있을 거라는 걸 보여줘요. 그래서 그렇게 주장한 학자들이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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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인도어로 된 게 없다는 이유만으로 중국 거라고 보는 건 아니라고 보고요. 저는 이 두 번역본을 다 교감해가지고 제가 번역을 한 겁니다. 그래서 제 대승기신론 강의는 진제 역을 저본으로 삼되 내용에서는 진제 역을 다 따른 게 아니고요 신역 새로운 번역본을 참고해가지고 원문이 이랬으리라는 걸 추정해서 제가 번역을 합니다. 그래서 좀 기존 번역이랑 좀 다를 수 있어요. 전 아무튼 뭔가 하나를 해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하고 싶지 대충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께 최대한 살아있는 대승기신론을 전해드릴게요. 그래서 본서는 이 진제 역을 중심으로 하되 실차난타 역을 참고하였습니다.
[중관파의 ‘공종空宗’과 유식파의 ‘상종相宗’을 종합하여 이들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아우르는 ‘한마음’(一心)의 ‘성종性宗’을 주장한 경전이다. 원효의 일심一心을 통한 화쟁(和諍) 사상의 바탕이 됨.]
중관파의 공종과 유식파의 상종을 종합하여 이들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아우르는 한마음의 성종(性宗)을 주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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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입니다. 이거 이제 결론을 내려 볼까요. 이게 상종(相宗)이고 이게 공종(空宗)이면, 일심(一心)은 뭘 주장하는지 아십니까? 모든 게 그냥 한마음 불성의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여래장(如來藏)의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성종(性宗)입니다. 일심의 성종. 이해되시죠.그래서 이 공종을 뭐라고 하냐면요 한 마음의 심진여문(心眞如門), 한 마음에 진여의 영역. 상종은요? 한 마음의 생멸하는 부분. 이렇게 끝내버려요. 그래서 여러분 이름은 대승기신론 다 아신 거예요. 한 마음 안에 진여문과 생멸문이 동시에 있다 하는 게 화쟁(和諍)이에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한마음만 알면 되는 거다. 한 마음에 텅 빈 부분이 있고 한마음이 생멸하는 부분이 있다. 이게 뭡니까? 아주 간단해요. 여러분 지금 마음이 그대로 진리고 여러분 마음에 텅 빈 부분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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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감정 오감을 일으키는 중에도 여전히 생각 감정 오감에 물들지 않으면서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 텅 빈 영역, 그게 여러분 마음의 진리 가장 알짬이죠.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거기에 바탕을 두고. 나는 나라는 게 심진여문이면요 나라는 그 자체, 거기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슬프다 나는 본다 듣는다 이렇게 마음이 현상화되는 거는 심생멸문(心生滅門)입니다. 그런데 마구잡이로 생멸하지 않아요. 인연대로 생멸합니다. 인연법대로. 이해되시죠? 밥을 많이 먹은 사람이 배가 고프고 밥을 안 먹은 사람이 배부르지 않아요. 밥 많이 먹으니까 배가 부르죠. 생멸하는 현상들, 즉 여러분 마음 안에 이 나타나는 현상들이 일정한 법칙대로 굴러간다는 걸 아시는 게 중요해요. 인연법도요 밖에서 찾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 마음 안에 나타난 그 현상들이 현상화 되는 방식이 인과 공식이고 인연법(因緣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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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세요? 이 관점으로 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관점으로 보면 여러분 마음에 나타나는 이 현상들이 일정한 질서대로 움직이죠. 마구잡이로 생멸하지 않아요. 이 펜이 여기 나타났다가 여기 나타났다가 하지 않죠? 여기 놔뒀으면 여기 있죠. 일정한 공식대로 움직인다고요. 여러분 마음, 내 마음에 나타나는 거면 내 마음대로 배치도 바꿔볼 수 있어야 되지 않나요? 안 그래요 주관적인 영역이 아니에요. 내 마음에 현상화되고 있지만 객관성이 있어요. 그게 인과 공식이고 인연법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제 재해석돼요. 인연법도 사실은 우리 마음의 표상하는 어떤 방식일 뿐이에요. 공식. 표상할 때 마음의 어떤 표상들이 떠오를 때 일정한 룰에 따라 떠올라요. 제가 이렇게 머리를 잘라버리면 이놈이 짧아진 대로 있지 다시 길어지지 않죠. 왜 여러분 마음의 작용인데 왜 이게 왔다 갔다 안 할까요? 객관적, 객관 세계에는 공식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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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대로 표상(表象)이 됩니다. 그래서 심생멸문을 다른 말로 심생멸인연(心生滅因緣) 그래요. 인연대로 생멸하지 마음대로 생멸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마음을 안다는 건요 여러분 마음의 참나의 영역을 안다는 것도 중요하고요 여러분 마음이 현상화되는 공식을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해요. 무슨 방식으로 인연이 펼쳐지는지?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선한 결과 악한 결을 구분하셔야 돼요. 결국에는 카르마의 제일 핵심은 선과 악입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냈을 때 이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조작했을 때 선한 방향으로 바뀌는지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어떨 때는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악의 방향으로 또 가기도 하거든요. 어떨 때는 선이 되고 어떨 때는 악이 되는지? 이 인연법을 모르시면 여러분도 똑같이 일심이 있고 평상심이 있다고 하지만 마음을 잘 쓰시는 게 아니고 대승의 길을 따르시는 게 아니에요. 대승의 삶을 사신다는 건요 마음을 건강하게 써가지고 나와 나 모두를 이롭게 하는 길로 계속 가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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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만이 대승의 길을 이해하시는 겁니다. 근데 대승(大乘)의 길을 알려면 뭘 하셔야 돼요? 심진여론(心眞如論)과 심생멸론(心生滅論)만 아시면 돼요. 이게 다예요. 마음으로 모든 도를 설명하는 방식이 탁월하지 않습니까? 이 내용을요 더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5분만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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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윤홍식의 대승기신론 강의 1강(50:20)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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