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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묵상의 힘
본문 : 시편 1:1-3
요즈음 믿음과 관련된 주제를 좀 더 이해하려고 네빌고다드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이해를 하고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 내가 그런 삶을 살았을까? 왜? 내가 그런 실수를 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어렸을 때 자라가는 과정 중에서 그런 영향을 받았고, 그런 영향이 결국 그런 삶을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의 중요성에 대하여 우리들이 자주 듣는 말로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좋은 환경 속에서 살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의 행실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데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음란함이 극에 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그런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며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결국 멸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환경이 나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에 대한 해결책이 오늘의 말씀에 나와 있다고 봅니다.
(시 1:1, 개정)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개정)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편 1절에는 잘못된 환경에 대하여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
복있는 사람은 "이런 잘못된 환경에 머물지 아니하고 좋은 환경에 머문다"고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된 환경은 말씀을 묵상하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묵상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법을 묵상할 때 복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까?
묵상에 대해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그의 책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로이 힉스 박사의 정의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이 힉스 박사는 구약 성경의 ‘묵상하다(meditate)’라는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 중얼중얼 거리다(mutter)’라는 뜻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내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케네스 해긴,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말씀』 97-100)
빌 존슨 목사님은 “예수의 권세를 땅에 풀어놓아라”는 책에서 묵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묵상’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에는 ‘신음하며 끙끙댐, 으르렁거림, 언명, 숙고, 중얼거림’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빌 존슨, 「예수의 권세를 땅에 풀어놓아라」, 김유태 옮김, 쉐키나 출판사, pp.89-91)
케네스 코플랜드는 365일 묵상집에서 묵상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성경적인 묵상이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특별한 몇 구절의 말씀을 숙고하며 의식 속에서 그 말씀을 당신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반복하여 그 말씀이 당신의 의식에 영원히 새겨지게 하는 것이다.
(케네스·글로리아 코플랜드 『365일 묵상집 7·8월 믿음에서 믿음으로』 오소희 옮김. 2015년. 사랑의 메시지 출판사, 8월 11일)
“묵상”의 히브리 원어는 “하가(hagah)”인데 원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하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신음하다, 슬퍼하다, 으르렁거리다, 말하다, 속삭이다, 중얼거리다, 명상(묵상)하다, 숙고하다’ 를 의미한다.”
이런 사전의 정의와 여러 주의 종들의 글들을 참고하여 묵상에 대하여 정리하자면,
1.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명상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며 의식 속에서 그 말씀을 당신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반복하여 그 말씀이 당신의 의식에 영원히 새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3.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중얼중얼 거리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로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땅에서 장수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장수에 대한 말씀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시 91:16)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엡 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건강에 대한 말씀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행복에 대한 말씀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삼상 2:7-8)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더 나은 삶을 꿈을 꾸며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꿈을 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변화는 반드시 될 것이고, 여러분의 꿈과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꿈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지 못하고 원수 마귀의 공격과 속임수에 짓눌려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에 짓눌리고, 죄책감에 짓눌리고, 무능함에 짓눌리고, 잘못된 가치관에 짓눌려서 자신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고 능력이 없다고 절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이런 절망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 좋은 삶을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치유받는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유받은 모습을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다가가서 믿음의 손을 내밀어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이 여인이 예수님의 도우심에 대하여 꿈을 갖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예수님께 도움받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도와주실 것을 믿고 꿈을 꾸고, 우리들의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상하는 것과 꿈을 꾸는 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서 꿈을 꾸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아쉬워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시편 81편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 81:10, 개정)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시 81:11, 개정)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상하며 꿈을 꾸며 행동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0:37, 개정)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창 30:38, 개정)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창 30:39, 개정)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상하며 꿈을 가졌습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내게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의 꿈에 응답하셔서 그 꿈대로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취했던 행동들이 믿음의 행동이었다는 증거를 옥스퍼드 원어대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편 나무가지의 알록달록한 색깔과 무늬에 영향을 받아 반점을 지니거나 알록 달록한 색깔을 띤 종자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축이 수태될 때 어미의 심리 상태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표현이나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없는 일이다.
따라서 야곱은 우성에 해당하는 순백의 양과 순흑의 염소로부터 (32절 참조) 얼룩 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열성의 변종(變種)을 수태시키기 위해 얼룩 무늬의 나무가지 앞으로 가축떼를 인도하였으나 이러한 방법으로 변종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옥스포드 원어대전 창 30:39 주석)
한마디로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에 응답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런 믿음의 행동을 꿈꾸고 행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묵상은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하여 줍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오직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결단도 하였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잘못된 행동을 마음에 아무런 부담도 없이 꾸준히 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의 빛이 임하면 우리들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제가 춘천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는 일이 생겼습니다.
(고후 9:10, 개정)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잘은 모르겠지만 수십 번 이상 이 구절을 읽고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깨달음 없이 성경을 읽고 넘어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는 이 구절을 보면서 제가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무엇을 발견하셨나요?
그날 저녁에 저에게 다가운 깨달음은 “씨”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심는 자에게 먹을 양식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심을 수 있는 씨를 주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별로 심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여유가 있으면 헌금을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서 헌금은 “내 삶의 여유와 관계없이 하나님께 열심히 심어야 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 오랄 로버츠 목사님이 쓰신 “씨앗 신앙의 기적”이란 책이 서점에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이 책의 주제가 바로 하나님께 씨앗을 심는 것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이처럼 묵상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묵상과 관련된 말씀 중에 여호수아 1장 8절이 있습니다.
(수 1:8, 개정)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장 8절 말씀에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다 지켜 행하면 우리들의 삶이 평탄하고 형통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된다고 하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언가를 행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고 정복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볼 때 우리는 이 말씀 안에 우리들이 믿음으로 꿈을 꾸며, 정복하고 다스리게 되는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꿈을 꾸어야 할 것입니다.
2025년 여러분이 정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다스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꿈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지위가 달라지고, 신분의 상승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묵상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묵상”이라는 단어를 찾아 볼려고 컴퓨터에서 성구검색을 해보니까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묵상이란 단어가 개역개정에는 5구절이 체크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이렇게 적었나 싶어서 개역성경에서 검색을 했더니 총 22구절이 검색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싶어서 개역성경에서 묵상으로 번역된 내용이 개역개정에서는 “읊조리다”는 말로 번역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묵상이란 읊조린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묵상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는 삶을 살라는 말로 설명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릴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들의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부르고 나아간다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런 묵상을 통하여 삶을 변화시켰던 간증들을 통하여 묵상의 힘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찰스 캡스목사님이 쓰신 『혀의 창조적 능력을 사용하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기도는 환경을 잊는 도전적인 경험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이 분명한 때에도 나는 풍부하며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신났습니다.
내가 온통 부족할 때에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생기는 일마다 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너무너무 잘못 되는 것 같을 때는 “나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말씀을 고백하다가 중단하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나는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 것은 바로 지금까지 내려온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성경이 사실이며 그것은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괜찮다. 그것이 너의 일부가 될 때까지 말씀이 말하는 바를 그냥 계속 말하거라. 그러면 그것이 너에게 사실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고백했습니다.
“나는 풍부하며 아무 부족함이 없다. 나의 하나님이 내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그것이 내 영 안에서 형성되어 나의 일부가 될 때까지 계속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믿음의 영역 안으로 내가 들어간 것을 깨달았습니다.
(찰스 캡스 『혀의 창조적 능력을 사용하라』 오태용 옮김. 베다니출판사, pp. 116-118.)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서 공급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을 간증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묵상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이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묵상은 원하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합니다.
묵상이란 것은 우리들의 현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우리들의 미래를 꿈꾸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것에 대한 간증들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일화에도 나오고 조용기 목사님의 일화에도 나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상담을 청했던 어머니는 아들의 문제로 찾아왔고, 조용기 목사님에게 찾아왔던 어머니는 딸의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두 분 목사님이 상담을 청했던 두 어머니에게 처방했던 내용이 동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찾아왔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어떤 큰 도시의 순복음 실업인 대회에서, 오후에 가르치는 시간이 끝나고 한 여성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해긴 목사님, 목사님께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내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무슨 일인지 알고 싶군요.”
한 어머니의 부탁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아들은 열다섯 살인데요. 저는 남편과 사별했고, 아들에게 도대체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들을 교회에 데리고 갈 수도 없습니다. 아이는 불량배들과 어울리는데, 그 애들이 마약을 할까봐 걱정이에요. 아들은 새벽 3시나 4시까지 밖에 나가 있습니다. 저는 밤마다 뜬눈으로 아이가 감옥에 잡혔다는 전화가 올까봐 기다리고 있답니다.”
나는 그녀가 아들의 나쁜 상황에 대해 더 말하기 전에 그녀를 제지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약속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그 말에 놀랐습니다.
“약속해 주지 않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부인. 약속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아드님을 위해 절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녀가 말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우선, 제가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부인께서 잘못된 믿음과 말을 통해 저의 기도를 무효화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인께서 아드님에게 너는 아무것도 안 될 거고 소년원과 감방에서 인생이 끝장날 거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더라도 아드님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그녀의 눈이 커졌습니다. “제가 우리 애한테 그렇게 말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말의 산물
내가 말했습니다. “아드님이 그 엉망인 삶 가운데 머물도록 하려면, 부인께서 아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말의 산물입니다. 자녀들도 말의 산물입니다. 말이 아이로 하여금 훈육을 사랑하게 합니다. 말이 아이로 하여금 교회에 가고 싶게 하거나, 아니면 계속 교회 밖에 있게 할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여성이 물었습니다.
“우선 부인께서는 그 동안 너무 오래 부정적인 말을 하셨는데, 이제 아드님도 나이가 들만큼 들었으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아드님은 당신이 뭔가 말하거나 말하려고 할 때 분노할 겁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아이에게 설교하지 마시고, 잔소리도 하지 마십시오.”
나는 계속 말했습니다. “두 번째는, 당신의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십시오. 심지어 아들의 행방을 모를 때에도 집에서 ‘나는 내 아들을 믿음으로 감싼다’라고 말하십시오. 당신은 지금까지 아드님을 의심으로 감싸왔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아드님을 감싸주십시오. 처음에는 심령에서 믿어지지 않더라도, 입 밖으로 말해 내십시오. 일단 그것이 심령에 새겨지면 당신은 믿기 시작하게 될 겁니다.
‘나는 내 아들이 소년원에 가게 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내 아들이 교도소에 갈 거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가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믿는다. 나는 아들을 믿는다.’라고 말하고, 그 믿는 바를 말하십시오.”
그녀가 말했습니다. “노력해 볼게요.”
“그건 역사하지 않을 거에요. 노력해서는(try) 역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인께서 그렇게 하신다면(do) 역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회는 8월에 있었습니다. 순복음 남성 실업인들은 14개월 후인 이듬해 10월에 그 도시에서 또 대회를 개회하였고, 나는 돌아와서 다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후 집회 후에, 한 여성이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해긴 목사님, 저 기억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저는 매우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정말 기억이 안나네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오, 일 년 전 여기에 오셨을 때를 기억해 보세요, 제가 아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드렸을 때 그렇게 못해주겠다고 하셔서 제가 충격을 받았었잖아요?”
좋은 보고
그 여인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이 말씀해 주신 것들이 역사하고 있어요! 사실 보기에는 역사할 것 같지가 않았어요. 제 아들은 더 심해졌답니다. 그래도 계속 입을 닫고 있기란 평생 가장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러나 저는 매일 밤낮으로 ‘나는 믿음과 사랑으로 내 아들을 감싼다. 나는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믿는다. 나는 아들의 삶의 모든 것들이 올바르게 전개될 것을 믿는다. 나는 내 아들이 소년원에 가지 않을 것을 믿는다’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아들이 어울리는 패거리를 보면서, 제 머리는 아들이 소년원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저는 ‘내 아들은 소년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들이 감방에서 인생을 끝내지 않을 것을 믿는다’라고 심령으로부터 말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의 일 년 동안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아들은 거의 밤새도록 밖에 나가 있다가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대개는 낮잠을 자곤 했지만, 그날은 일어나 식탁으로 와서 밥을 먹으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 엄마랑 같이 주일학교 가야겠어.’”
그녀가 말했습니다. “저는 태연한 척하면서 말했죠. ‘얘야, 넌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었어. 좀 더 쉬어야지.’”(예전에는 교회에 가라고 심하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냐, 가고 싶어.”
그녀가 말했습니다. “뭐, 너한테 달린 거긴 한데, 너 몇 시간밖에 못 잤잖아.”
아들이 말했습니다. “가고 싶다니까요.” 그리고 그 아들은 주일 학교에 가서 예배가 진행 될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부인이 내게 말했습니다.“다음 주일 아침에는 아이가 새벽 4시까지 밖에 있었는데도, 아침을 먹으려고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엄마, 오늘 엄마랑 주일학교 가야겠어.”
그녀가 말했습니다. “얘, 너 어젯밤에 늦게까지 밖에 있었잖아. 너는 쉬어야 돼.”
아들이 말했습니다. “맞아, 그래도 갈 수 있어. 갈 거야.”
그녀의 아들은 주일 학교에 가서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거기서 머물렀고, 그 날 저녁에 그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같이 교회에 또 가요.” 저녁 예배가 끝날 무렵 영접 초청이 있었고, 그 젊은이는 강단으로 나가서 구원받았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아들
그녀는 내게 말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우리 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요. 전에는 마귀를 위해 바깥으로만 맴돌고 있었던 것과 꼭 같이 지금은 하나님을 위해 내내 바깥에 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어요! 우리 아이는 설교자가 될 거에요! 그는 완전히 새로운(brand-new) 아이가 되었고, 저는 완전히 새로운 아들을 얻었어요!”
그녀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또 말씀드릴게 있는데요. 제 아들도 완전히 새로운 엄마를 얻었답니다.”
이 여인은 구원받았고 성령 충만을 받았으며 순복음 교회에 수년간 출석하던 사람이었지만, 그 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과거에 생각하던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저를 꼬집어보면서 ‘이게 정말 내가 맞나?’하고 말한답니다. 예전에 저는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하고, 또 걱정했어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좋아진 것을 느낀답니다. 마치 소녀 같은 느낌이에요. 힘과 활력과 생기가 생겼어요.”
이 부인이 올바른 것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 말은 그녀를 위해 역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그대로 되리라”
(케네스 E. 해긴 · 케네스 해긴 Jr 『가족을 섬기는 법』 김진호 옮김, 믿음의 말씀사, pp. 41-48.)
이번에는 조용기 목사님의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변화된 딸의 모습을 그리며 기도하는 어머니
어느 날, 한 50대쯤 되어 보이는 부인이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울먹이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은 완전히 패가 망신했습니다.”
“눈물을 그치시고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하고 내가 말했습니다.
저희 집엔 아들은 여럿인데, 딸은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그 애가 글쎄, 히피족처럼 되어서 제 아버지 친구나 제 오빠 친구와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이 댄스홀에서 저 댄스홀로 전전하고 있습니다. 그 애는 우리 집안의 망신거리입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남편은 사무실에 나갈 수도 없고. 아들들은 창피해서 죽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남편과 아들들마저 집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저는 온갖 방법을 다해 봤지만 안됩니다. 심지어 그 딸을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기도 했습니다. 조 목사님, 저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그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하나님께서 왜 자매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지를 분명히 알겠습니다. 자매님은 그동안 항상 잘못된 청사진을 하나님께 제시하셨습니다. 자매님은 딸의 행동 때문에 항상 딸을 창녀처럼 생각하고 계셨지요? 하나님께 딸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면서도 자매님은 언제나 딸을 부정적이고 자매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짓만 하는 나쁜 딸로 생각하고 계셨지요?”
“네, 그래요. 그러나 그 애는 사실 창녀나 다름없어요.”
“그렇지만 진정으로 부인께서 딸이 변하는 걸 보고 싶으면 지금과 전혀 다른 마음의 청사진을 하나님께 제시해야 합니다. 자매님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지금의 딸의 영상을 깨끗이 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딸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딸의 모습을 새로 그리셔야 합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애는 더럽고 추하며 천박해요.”
나는 그 부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용서해야 된다고 권면했습니다.
“자매님.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자, 딸의 모습을 새로 그립시다. 여기 무릎을 꿇으세요. 저도 당신과 함께 무릎을 꿇겠어요.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 발 앞에 나아갑시다. 두 손을 드세요.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기시고 피 흘리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바로 자매님의 딸 때문입니다. 딸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에 두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딸의 변화될 모습을 쳐다보십시오. 자매님은 딸이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받고 깨끗하게 되어 성령 충만 받아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 안 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온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 홀리신 것입니다. 자매님은 이제 예수님이 흘리신 용서의 보혈로 딸이 영원히 새롭게 된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까?”
“네,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하고 그 부인은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딸을 다르게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딸에 대한 저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정말 장하십니다! 지금부터 자매님의 딸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립시다. 그런 다음 새롭게 변화된 딸의 분명한 그림을 날마다 마음속에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간직하십시오. 바로 그 모습은 성령께서 보시는 모습이기 때문에 자매님의 딸은 그대로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비전은 바로 성령과 대화하는 언어입니다. 딸이 깨끗하게 되고 거듭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긍정적인 비전입니다. 그 모습이 성령께서 지금 자매님의 딸을 바라보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도 믿음으로 성령께서 보시는 그대로 딸의 그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시고 변화시킨 그 딸의 모습을 지금 바라봅니다. 성령이시여,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잉태케 하신 새 이미지와 새 비전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넘치게 역사하시옵소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그 비전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옵소서.”
그 부인은 나의 사무실에서 나갈 때 얼굴에 더 이상 슬픈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밝은 미소를 띠기까지 했습니다. 변화된 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가슴에 품게 되자, 더 이상 낙심하고 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아름다운 숙녀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 왔습니다.
“자매님 반가워요. 이 숙녀는 누구죠?” 하고 묻자, 부인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목사님, 얘가 바로 제 딸이 예요.”
“그래요? 그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나요?”
“예, 물론이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어요.”
그러면서 부인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 딸은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호텔에서 한 남자와 동침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문득 자신의 모습이 정말 추하고 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매우 불행하다고 느끼자 불현듯 집에 돌아가고 싶은 미음이 솟구쳤으나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집에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한 번만 더 가 보자. 만약 이번에도 날 내쫓으면, 그때는 우리 가족과는 마지막이 되겠지.’
그녀는 집으로 가서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마침 그녀의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러 나왔는데 딸을 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햇살처럼 환해졌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반갑게 맞이하며, "어서 오너라. 내 딸아!”하고 목을 껴안았습니다. 딸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에 감격하여 어머니 품에 안겨 울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성령의 언어로 변화된 딸의 모습을 그리며 기도했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딸은 어머니와 함께 두세 달 동안 교회에 잘 출석하였습니다. 그녀는 설교를 듣고서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또한 변화된 그녀에게 훌륭한 남편을 주셔서 이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이미지에 우리의 생각과 말을 맞추었을 때,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변화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어머니는 성령께서 보여 주신 대로 자신의 딸이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딸이 구원받고 성령 충만받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믿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비전과 꿈이 성취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비전과 꿈을 잉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주시는 이러한 비전과 꿈은 다름아닌 성령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이미 응답된 그림을 보여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삶과 환경에 이미 역사하셔서 그것을 변화시켜 구원의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관여 하시는 한 그 일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비전과 꿈은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보시는 대로 여러분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이 4차원의 영적 세계에 사는 삶입니다. 이 어머니처럼 기도가 실제 응답으로 나타날 때까지 성령께서 주신 계시의 즐거움으로 생활하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삶입니다.
그 딸은 이제 가정에서는 세 자녀를 둔 착실한 주부요, 교회에서는 아주 믿음 좋고 가장 열심히 전도하는 구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그녀의 어머니가 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성령의 이미지로 바꾸어서 4차원의 성령의 법칙을 적용한 결과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이 4차원의 법칙을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용기 『4차원의 영적세계』 서울: 서울말씀사, 1996. pp. 77-81.)
우리는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없는 것이지만 있는 것처럼 부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께서 상담을 할 때 두 어머니 모두에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것을 가르쳤고 그대로 했을 때 두 어머니의 아들과 딸이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섯째로, 묵상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씻고 지키게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살아왔을까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시험과 고난을 다 극복하고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병자들을 길거리에 눕혀둘 정도로 엄청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베드로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행 5:15, 개정)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눅 22:31, 개정)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2, 개정)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간구를 힘입어서 시험을 잘 극복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왕 역시 시험을 받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했었지만 다시 돌이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삼손도 여인의 유혹을 못이겨 타락했었지만 그의 고난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으며 믿음을 회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이 뒤로 물러갔다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말씀의 힘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우리들의 영이 양식을 섭취하듯이 힘을 얻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만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과 그들 안에서 은혜가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금식하며 기도원을 다녀온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금식을 몇일을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하나님의 은혜로 제 마음이 굉장히 순수하고 깨끗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제가 당구장에 혼자 가게 되었는데 당구장 주인이 한 사람을 붙여주어서 같이 당구를 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시간을 보내고 당구 치는 것이 좋아서 칠뿐이었는데 그때 함께 치던 사람이 저를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납니다. “사람이 악의가 없어서 당구칠 맛이 안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은 제 기억에도 굉장히 순수하고 깨끗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매체들을 통하여 많은 것을 듣고, 보면서 저의 마음이 많이 더러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처럼 오락가락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붙들려서 점점 더 거룩해져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날마다 그 믿음이 자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날마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세상에서 방황하고 다시 주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름대로 신령한 목사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날인가 그 목사님이 저를 만나시면서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린 후에 영적으로 많이 고생을 했습니다.”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을 하였기에 저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꺼릴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쯤 제가 이성적인 면에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제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 여자들 가슴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신경을 안쓰려고 하는데 자꾸 눈길이 가서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것이 참 불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과 저의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그분의 경험담을 제게 말하여 자신도 어느 목사님에게 이런 것을 배웠다고 하면서 회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 죄를 자백하고
둘째 예수의 보혈로 씻어 달라고 구하고
셋째 성령의 불로 소멸해 달라고 구하고
넷째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아멘.
이 기도를 마음에 기억하고 있다가 그런 유혹이 다가오면 입술로 음란한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달라고 구하고,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성령의 불로 소멸해 달라고 구하고, 그런 악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나는 모든 죄에 대하여 정결하고 깨끗하게 된 것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후 그 목사님과 만나서 기도를 해도 이제는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의 죄성이 그 목사님이 보기에도 소멸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묵상하는 삶은 우리들 자신을 세속으로 부터 지켜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죄된 생각들이 다가올 때 우리는 그 생각을 회개하고, 그런 생각을 집어넣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부정적인 생각을 집어넣는 마귀의 역사를 향하여,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함으로 부정적이고 불순종적인 생각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
묵상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말씀만을 생각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으며 그 뜻이 우리들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선포하는 삶입니다. 묵상의 사전적인 정의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묵상하는 삶은 "으르렁거리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의 삶에는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첫째로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둘째로 묵상은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하여 줍니다.
셋째로 묵상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넷째로 묵상은 원하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합니다.
다섯째로 묵상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씻고 지키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말씀처럼 우리들의 길이 평탄케 되고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2025년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통하여 환경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 자신을 정결케하여 더욱 거룩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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