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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누구일까?(1)
1세기 당시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기독교가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확실한 정보를 접하지 못했다는 게 일차적인 이유였다.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안티오크(안디옥)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은(행11:26) 이들을 율법을 포기한 변절자들로 낙인찍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메시야를 따르고 있다고 강변하면서 유대인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자처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유대인처럼 사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하는 감독까지 있었다.
하지만 로마 당국자들의 눈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또 다른 종파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 당국은 이미 유대인들의 독특한 신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터라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초대 기독교 전도자들이 제국의 어느 곳을 방문하더라도 신변상의 문제를 그리 걱정하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로마 당국의 이와 같은 소극적인 관용 덕분이었다.
이처럼 안정된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박한 기대와 달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로마 당국은 이제 갓 걸음마를 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강력하게 압박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후로 한동안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기독교가 로마 당국자들에게 박해를 받을 무렵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몰아내고 공식적으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해버렸다. 물론,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인들의 적대감이 단기간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딘지 모르게 자신들과 달리 부도덕하고 신앙적으로도 경건하지 않은 부류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 까닭을 한두 가지 사건에 국한해서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로마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는 그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네로는 정말 노래를 잘 불렀을까
때는 64년 여름(64년 7월 19일)이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대규모의 화재가 로마에서 발생했다. 이 화재 때문에 수천 명이 죽었고, 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잃어야 했다. 한여름 밤에 무더위를 참아가면서 겨우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로마 시민들은 전례 없는 엄청난 화재 앞에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후 6박 7일 동안 목재 건물이 주종인 로마 시내를 강력한 불길이 휩쓸었다. 시민들은 강한 바람을 타고 재빨리 번져나가는 불길을 어쩌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가슴까지 시커멓게 타들어 갔지만 강력한 불길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방화수를 확보해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내 불길이 잦아들고 희뿌연 연기가 걷히자 불탄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해는 간단하지 않았다. 로마의 14개 구역 가운데 무려 10개 구역이 무엇 하나 제대로 건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로마 사람들은 고대의 여러 가지 유물과 신전들, 그리고 궁전은 물론 자신들의 주택과 재산이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것을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누구에게라도 몰려가서 책임을 추궁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름 창고에서 일어난 화재
당시의 로마 황제 네로(Nero Claudius, 54~68 재위)는 화재가 발생할 무렵 로마에서 약 53km가량 떨어진 안티움(Antium)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로마 황제가 한동안 자신의 궁을 비운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없었다. 해마다 여름철이 돌아오면 권력이나 재력을 갖춘 사람들이 교외의 별장에서 무더위를 피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네로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서둘러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떨치고 있는 불길을 진압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화재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난 뒤에는 민심을 얻어 볼 셈으로 수천 명의 이재민들에게 자신의 정원을 개방해서 한동안 기거할 수 있게 배려했다. 심지어 화재의 잔해와 시체를 치우는 일까지 직접 나서 지휘했다. 그런데 도시가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네로의 잔인한 음모 때문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시중에 나도는 검증되지 않은 소문에 따르면 황제 네로가 노예를 풀어서 일부러 로마에 화재를 일으켰다고 했다. 네로가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 나서 자신의 뜻대로 도시 전체를 다시 건설하려고 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 역시 전염병처럼 떠돌았다. 실제로 그는 화재가 모두 정리되자 로마의 재개발에 착수했다. 도시가 대화재 이전처럼 과밀한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건축법과 재개발 계획을 의욕적으로 제정하고 실행했다. 게다가 네로는 황제의 궁을 신축했는데, 중앙 홀의 길이가 무려 1,480미터에 달했던 이 황금주택(Domus Aurea)은 내부에 사파리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소문이 대개 그렇듯이 네로와 관련된 소문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더욱 크게 부풀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마가 불타는 동안 예술가 기질이 발동한 네로가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에서 화재를 배경으로 수금을 타고 노래했다는 그럴듯한 유언비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로마 남동부 지역의 시장에서 최초로 발생한 대화재의 원인을 그렇게까지 소상하게 규명하기란 불가능했다. 당일의 무더운 날씨, 늦게까지 술판을 벌이던 상인들, 그리고 그로 인한 부주의한 행동이 어우러지면서 어느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다는 게 사실에 더 가까웠다.
박해, 그리고 순교
네로는 험악한 민심을 의식해서 궁중 창고를 개방하고 시민들에게 크게 인심을 베풀었다. 시중의 빵 가격도 절반이나 내렸다. 하지만 그의 기대처럼 자신을 비난하는 소문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네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희생양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눈에 띈 게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였을 뿐 아니라 로마인들 사이에서 인기 없는 신흥 종교 집단이라서 간단한 상대처럼 보였다. 네로는 그들을 제물로 삼아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로마 연대기」에서 네로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이 소문을 막기 위해서 네로는 희생양을 만들어 냈고, 아주 정교하게 계획을 짜서 불량하기로 이름난 그리스도인들을 처벌했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네로는 기독교를 종교로 간주한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네로는 즉시 로마 지역에 거주하는 약 3천 명가량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십분의 일을 재판정에 세웠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스스로 방화범이라고 고백하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확실한 물증을 확보했다고 생각한 당국은 그것을 근거로 삼아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타키투스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기에 앞서 그들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일부는 가죽을 걸친 채 개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리거나 산채로 불에 타며 밤을 밝혔다. 네로는 자신의 정원을 개방해서 이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했고, 직접 서커스에 출연하기까지 했었다. … 이 모든 일 때문에 사람들은 심지어 본보기로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이들에 대해서까지 측은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박해가 한창 극성이던 시기에 로마를 떠나지 못하고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신약성서 어디를 살펴보아도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다거나 순교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90년경에 기록된 클레멘트(Clement)의 「편지」나 110년경에 안티오크의 감독을 지낸 이그나티우스(Ignatius)에 따르면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로마 가톨릭 당국이 바티칸 성당 지하에서 베드로의 묘지를 확인하려고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발굴을 시도했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바티칸으로서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베드로는 순교의 순간이 닥치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병사들에게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로마 당국은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바울 역시 체포했다. 바울은 이미 두 해 전에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는 상태였다. 교육받은 로마 시민에게 십자가의 형틀을 사용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일이라서 시민권 소지자였던 바울은 64년에 칼로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재는 바울의 순교와 관련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까닭
네로의 어이없는 박해는 나름대로 근거가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종말을 맞는 순간에 대재앙이 닥친다고 믿었다. 모르긴 해도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상징으로 간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로마 법정에서 사람들이 증언한 것처럼 방화에 관여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국이 몇 사람의 돌출적인 행동을 문제 삼아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어느 이교 작가는 로마에 화재가 일어나기 전부터 “그들의(그리스도인들의) 혐오스러움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고 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모든 역겨운 것은 동쪽으로부터 온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또 하나의 미신을 믿는 사악한 자들의 집단’으로 간주했다. 동쪽은 오늘날의 소아시아와 중동지역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째서 로마 시민들에게 그토록 인기가 없었을까?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는 그 이유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우리(그리스도인)를 비난하는 내용은 세 가지다. 무신론, 인육을 먹는 만찬, 근친상간.” 그의 지적을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신을 믿지 않는 기독교
먼저,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르는 신의 진정성을 문제 삼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유일한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진정한 신으로 간주했다. 로마인들에게는 이보다 낯설 수 없었고, 더 나아가 오만으로까지 비쳐졌을 것이다. 로마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신이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숭배하는 게 일반적인 행태였다. 어느 때는 알려지지 않은 신을 들먹이며 경배할 정도로 신앙심이 강렬했다. 또 그들은 죽은 황제들을 신으로 떠받들고 분향했다. 1차 유대 반란 전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69~96 재위) 황제가 남긴 일화에서도 그런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임종을 지키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이제야 신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하지만 로마 사람들이 우리네 전통적인 풍습처럼 전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그들은 오로지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만 제사를 지냈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적인 제사 의식을 통해서 로마제국의 신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제국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처럼 일반인들의 눈에 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지게 되면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 집단적인 박해까지 받게 될 소지가 아주 다분했다.
생소한 종교, 기독교
무엇보다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였다. 전통적으로 로마인들은 새것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새것을 고르다 실패하느니 차라리 낡았더라도 확실한 쪽을 선택하는 게 로마 시민들의 일반적인 심리였다. 로마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유대교를 용납한 것도 따지고 보면 유서가 깊다는 게 일차적인 이유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는 로마인들에게 무척 낯설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이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성전 역시 없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든지, 아니면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데 외형상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똑같이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을 통해서 시작된 유대교와 기독교는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히브리어 성서를 확고하게 믿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로 알려진 히브리어 성서를 타나크(Tanakh)라고 불렀다. 이것은 토라(Torah, 오경), 네비임(Neviim, 예언서), 케투빔(Ketuvim, 역사서)의 머리글자들을 따서 함께 조합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역시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예배하고 시편을 읽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은 거기까지였다.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결정적인 분기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인정하는가의 여부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로마인들 역시 기독교를 새로운 종교로 간주하게 되었다.
부도덕한 기독교
그리스도인들의 풍습 역시 오해에 일조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씩 포도주와 빵을 준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기념하는 사랑의 식사(애찬식)를 하면서 그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말했다. 따라서 식탁을 함께 할 기회가 없는 로마인들은 그들이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다. 이집트에서는 성관계를 맺는 파트너에게 이 말을 사용했다. 때문에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주일 예배 때 나누는 ‘평화의 키스’는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of Alexandria)가 염려하던 일이었다. “교회를 사랑 없는 키스만을 일삼는 장소라고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키스는 신비적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의심과 소문을 부르는 빌미가 되었다.”
이런 풍습만 놓고 보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수긍할 수 없는 집단이고, 전체적으로 보자면 위험한 밀교(密敎) 추종자들로 비쳐질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체 규정 역시 한몫 거들었다. 로마인들이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더라도 의구심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초대교회는 요즘과 달리 성찬식 때 세례를 받은 신자들만 참석시켰기 때문이다. 세례를 지원해도 마찬가지였다. 세례 지원자들은 정식 회원과 달리 예배를 지켜보다가 성찬식 때는 반드시 자리를 떠야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직접적인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시민들이 식인과 근친상간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치관이 다른 기독교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은 기존 질서와 상당히 달랐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끼리는 사회적 지위가 그리 문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교훈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계급이나 인종, 그리고 교육이나 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남녀가 함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만찬에 참여하고, 빈민이나 환자, 고아와 과부 그리고 죄수나 노약자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베풀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이 정치적인 이념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로마인들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를 비롯한 소외 계층을 환대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로마법상 노예는 개인적으로 상속이 가능한 재산이었다. 노예는 주인의 어떤 요구든지 마다할 수 없고, 요구에 불응하면 가축처럼 목숨을 잃어야 했다. 여성의 지위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인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해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기가 태어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유기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동의 유기는 당시 세계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었고, 아버지가 자녀에게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노예를 환영하고 여성을 대우했다.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서 양육시설까지 운영할 정도였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어긋난 행동이었다.
예루살렘의 몰락
1세기 중반 무렵 예루살렘에서는 로마인과 유대인의 관계가 악화일로였다. 50년경 예루살렘에는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관례대로 유월절을 축하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 위쪽에는 안토니아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유다 출신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 경비병이 요새에서 인파 쪽으로 “자신의 겉옷을 들고서 점잖지 않게 몸을 굽혔다. 그는 몸을 돌려서 그 자세만큼 버릇없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자신들을 모욕하는 동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다.
즉시 사람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3만 명가량의 남녀가 살해당했다. 비극적인 사건의 결과에 비하면 그 원인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비극을 예고하는 전조는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철부지 같은 경비병의 행동은 엄청난 비극의 물꼬를 튼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욕심이 초래한 비극
64년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유다의 신임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다. 플로루스의 아내 클레오파트라가 네로의 아내 포파에아와 가까이 지내면서 얻어낸 자리였다. 플로루스는 두 해에 걸쳐서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유대인들을 거침없이 모욕했다. 뿐만 아니라 전임자들보다 일찌감치 부를 거머쥐고 싶어 하던 이 신임 총독은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어들이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순례자들이 중요한 절기에 바치는 성전세를 보관하고 있는 성전 금고에 눈독을 들였다. 성전세는 예루살렘 지도층의 수입과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도시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결국 장로들 몇이 참다 못해서 플로루스 총독을 찾아가서 더 이상 성전의 재산을 빼돌리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총독은 전임자들의 매뉴얼대로 자신의 병사들을 시장에 풀어놓는 것으로 장로들의 요구에 맞불을 놓았다. 병사들의 학살과 약탈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예루살렘 거리가 속속 피로 물들었다. 그날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려 3,600명이 로마 병사들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제1차 유대 반란 전쟁(66~73)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그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로마제국에 대한 강렬한 분노가 서서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시대 이후로 줄곧 타락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느라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총독의 학정(虐政)은 그런 분위기가 타오르도록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무고한 학살을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마침내 셀롯당(혹은 열심당, Zealots)의 주도로 격렬한 폭동이 발생했다. 유대 반란군은 기세를 몰아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지역에 주둔하는 로마군 요새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로마군 수비대가 모두 궤멸 되었고 문서보관소에 있던 빚 문서들이 불에 탔다. 그리고 로마에 우호적인 대제사장 역시 살해되었다.
성전을 장악한 반란군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내던 제사를 완전히 중지시켰다.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 2세가 파병한 2천 명의 기병, 그리고 나중에는 안티오크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의 12군단까지 가세했지만 달아오른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지중해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반란의 조짐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