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상)
지은이 : 펄벅
작가소개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남. 중국 선교사로 파견된 부모님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성장함. 1910년(18세) 유럽 여행을 거쳐 모국으로 돌아가 버지니아 주(州) 랜돌프 매이콘 여자 대학에 입학. 1917년(25세) 선교사 존 로싱 벅 씨와 중국에서 결혼. 1923년(31세) 평론을 쓰기 시작 <중국에 있어서의 미(美)>를 <액틀란트>지 1월호에 발표. 1930년(38세) 남경에서 <大地>를 집필. <동쪽바람. 서쪽바람>을 출판함. 1931년(39세) <大地> 출판. 1932년(40세) <大地>로 퓰리처상을 수상. <젊은 혁명가> <아들들> 출판. 1934년(42세) <어머니> 출판. 미국에서 영주할 결심으로 귀국. <멀고 가까움(단편집)> 출판. 1937년(46세) 3월 노벨 문학상 수상. <諸神들>, <자랑스런 마음> 출판. 1963년(71세) 한국을 소재로 한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 출판. 1973년(81세) 3월 6일에 영면. 펜실베니아 버그스에 묻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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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王龍)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그는 칙칙한 휘장으로 둘러싸인 침대 위에서 문득 잠을 깼을 때, 기분이 왜 다른 날과 다른가에 대해 얼핏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건넌방에서 늙은 아버지의 목쉰 기침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것을 빼고는 대체적으로, 집안은 고요했다. 평소와 같이 왕룽은 그 늙은 아버지의 목쉰 기침 소리를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렇다고 그는 침대에서 재빨리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 기침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서 마침내 건넌방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왕룽은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날 아침은 그렇게 오래도록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금방 일어나 침댓가에 둘러쳐진 휘장을 밀어젖혔다. 아직 어둠침침한 새벽이었다. 네모난 봉창의 떨어진 종이 사이로 청동빛 하늘이 내다보였다. 그는 그 떨어진 종이를 뜯어버리면서 중얼거렸다. "이젠, 봄이니까 이런 건 소용 없어." 이 집이 오늘만은 좀 깨끗하게 보였으면, 그렇지만 이렇게 입 밖에 내기에는 어쩐지 부끄러운 노릇이다. 봉창 구멍은 간신히 주먹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그는 손을 내밀어서 창 밖의 공기를 가늠해 보았다. 샛바람이 동쪽에서 부드럽게 살갗을 스쳤다. 비를 품은 샛바람이다. 좋은 징조였다. 농작물이 비를 기다린 지는 꽤 여러 날 되었다. 이 샛바람이 2,3 일만 계속되면 비가 내릴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극히 고마운 일이다. 놋빛 같은 해가 이대로 계속 내리 쬔다면 밀 이삭이 잘 익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걱정스레 말했던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하느님이 오늘은 특히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 같다. 이제 풍년이 들 것이다. 그는 푸른 바지를 주섬주섬 입으면서 가운뎃방으로 건너가서 같은 빛깔로 된 무명 허리끈을 매었다. 그는 항상 세수를 할 때까지 웃옷을 입지 않았다. 몸채에 달아 지은 부엌에 들어가려고 할 때 마주보고 서 있는 어두침침한 외양간에서 소가 머리를 내밀고 그 둔중한 목청을 돋우어 울었다. 부엌은 몸채와 같이 밭의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아 올리고 밀짚으로 이은 것이었다. 그 부엌 안에는 그의 조부가 젊었을 때에 만든 부뚜막이 오랫동안의 불 기운으로 까맣게 그을러 있고 그 위에는 깊숙하고 둥그런 가마솥이 박혀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항아리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가마솥에 반쯤 부었다. 물이 매우 귀하므로 헤프게 쓸 수 없어서 그는 몇 번 주저하다가 마침내 결심이라도 한 듯 항아리를 들어서 물을 전부 가마솥에 부었다. 오늘만은 목욕을 하자. 어머니 무릎에 안겨 있던 그때 이후론 그의 알몸을 본 사람이 없었는데, 이날 만은 그 알몸뚱이를 보이는 것이니 깨끗이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부뚜막 뒤로 돌아가서 마른 나뭇잎을 한 줌 쥐고 한쪽편에 세워 둔 나뭇가지와 함께 이파리 하나도 헤프지 않게 조심하여 아궁이에 쌓아 넣고 오래 묵은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불은 짚에 옮고 다시 나무에 옮아 타시 시작했다. 이렇게 불을 지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6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매일 아침 그가 이렇게 불을 지폈다. 그리고 끓인 물을 찻잔에 따라서 늙은 아버지 방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침을 하면서 봉당에 있는 신을 찾고 있다. 이 6년 동안 매일 아침 이 늙은이는 아침의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따뜻한 물을 가져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제 여자가 왕룽의 집에 들어오는 것이다. 왕룽은 내일부터는 여름이나 겨울에도 늦잠을 잘 수 있다. 이제는 그도 침대에 누워서 아버지처럼 따뜻한 물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풍년이라면 그 따뜻한 물에 차 잎사귀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5,6 년 동안에 그런 행복한 일이 한두 번이나 있었는지...... 오늘 맞이하는 아내가 늙게 되면 또 아들이 불을 지피겠지. 아내는 왕룽을 위하여 많은 자식을 낳을 것이다. 세 개의 방과 이 집안을 아이들이 온통 부산하게 뛰어다닐 것을 상상하니 왕룽은 저절로 마음이 황홀해져서 정신 잃은 사람마냥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부터는 집안이 텅 빈 것 같고 세간도 너무 많은 것 같이 느꼈었다. 집은 비좁고 식구는 많아 간혹 친척이라도 오면 거절하기가 곤란했던 것이 생각났다. 특히 많은 아이를 낳은 삼촌 같은 사람은 항상 왕룽의 집으로 들어올 틈을 벼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단 두 사람이 단출하게 살면서 이렇게 큰 방을 쓰는 사람은 없는데...... 왜 부자끼리 함께 못 잔대? 젊은 사람의 온기로 늙은이 기침도 낫는 법인데......"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내 침실은 내 손자들을 위해서 잡아 두었다. 이제 곧 손자들이 이 늙은 뼈를 따뜻하게 해 주겠지." 마침내 손자가 태어날 때가 온 것이다. 얼마든지 낳을 것이다! 온 집안의 침대가 가득 차도록...... 왕룽이 이렇게 황홀한 공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을 때 아궁이 불이 사그라져서 물이 차츰 식기 시작했다. 늙은이 그림자가 부엌문 앞에 나타났다. 늙은이는 단추를 잠그지 않은 윗 옷섶을 한손으로 잡아 누르면서 쿨룩쿨룩 기침을 하고 가래를 탁 뱉고는 숨찬 듯이 헐떡거렸다. "어찌된 셈이냐? 내 속을 데울 물이 아직도 안 끓었니?" 물끄러미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던 왕룽은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왠지 부끄러워서 얼른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 "나무가 젖어서요......" 그는 솥 뒷머리에서 중얼거렸다. "날씨가 눅진해서......" 늙은이는 물이 끓을 때까지 수없이 쿨룩거렸다. 왕룽은 끓인 물을 차 그릇에 뜬 다음 솥 뒷머리 위에 있는 선반에서 잘 마른 차 잎사귀 두세 장을 차 그릇에 넣었다. 늙은이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저런 변이 있나? 차를 마신다는 건 돈을 먹는 게 아니냐?'" 하고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하고 왕룽은 씩 웃어보였다" "아무 염려 마시고 잡수세요." 늙은이는 못마땅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앙상한 손으로 찻잔을 잡은 채 찻잎이 풀려 흩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만 하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 왕룽은 언성을 높여, '차 다 식겠어요.' 하고 말했다. "응-----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뜨거운 찻물을 후루룩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어랜이가 먹을 것을 잡은 듯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왕룽이 솥의 물을 아낌없이 들통에다 퍼담아 내는 것을 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물이 그만큼 있다면 밭에 주는 것이 좋을 텐데." 늙은이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왕룽은 대답도 하지 않고 물을 다 퍼냈다. "어쩔 작정이냐?" 늙은이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설 쇤 뒤에 어디 한번이나 목욕을 했어야죠." 왕룽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장가를 가는 날이므로 목욕을 해야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하기는 거북살스러웠다. 그는 황급히 물통을 들어서 제 방으로 옮겼다. 문짝은 문틈에 잘 맞지 않아서 벌쭉 드러났다. 늙은이는 뒤뚱거리면서 가운뎃방까지 따라가 문틈에다 입을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사람에게 그따위 본을 보이면 살림을 어떻게 하니? 아침부터 차를 마시고, 물을 마구 쓰고......'" "오늘 하루 뿐이잖아요!" 왕룽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대꾸를 하고 다시, "쓰고 난 다음에는 밭에다 줄 거예요.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 늙은이는 잠잠해졌다. 왕룽은 허리띠를 풀고 옷을 벗은 다음 네모진 밝은 봉창 밑에서 수건을 물에 적시어 여위고 때가 낀 몸을 부지런히 문질렀다. 봉창으로 새어드는 햇살이 따뜻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물에 젖으니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는 더욱 빨리 몸을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에 온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가 쓰던 상자 속에서 푸른 무명으로 지은 새옷을 꺼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솜옷이 아니면 추울 것 같았지만 몸을 깨끗이 씻고 보니 헌옷을 입기가 싫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은 때도 묻고 또 군데군데 헤어져서 솜이 비죽비죽 새어 나와 있었다. 그는 처음 대하는 아내에게 그런 추한 몰골을 보이기가 싫었다. 나중엔 아내가 그런 옷을 빨아 주기도 하고 꿰매어 주기도 하겠지만 첫날밤엔 그런 옷을 입고 아내를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푸른 무명 바지저고리 위에 같은 바탕의 긴 두루마기를 입었다. 일년 중 열흘밖에 없는 명절날만 입는 두루마기였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머리를 풀고 헌 궤짝처럼 생긴 조그마한 책상 서랍에서 나무빗을 꺼내 빗질을 하기 시작했다. 늙은이는 다시 다가와서 문틈에 입을 대고 걱정스레 말했다. "오늘은 먹을 것을 아무 것도 안 줄테냐? 늙은이란 아침에 무얼 안먹으면 창자가 쓰려서 못 견디는데......'" "곧 가져갈께요." 왕룽은 더욱 빨리 머리를 검은 명주 실타래같이 땋아 올렸다. 그리고 얼른 두루마기를 벗고 변발을 뭉쳐 올리고는 들통을 들고 문 밖으로 나왔다. 실은 마음이 들떠 있어서 아침 준비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겐 옥수수 가루 죽을 끓여 드리면 될 일이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먹기 싫었다. 그는 물통을 들고 비틀비틀 마당으로 나가 땅바닥에 물을 쏟아 버리고서야 비로소 솥의 물을 다 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불을 지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아버지에 대한 울화가 왈칵 치밀었다. "저 늙은이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밖에 생각을 않거든." 그는 솥머리에서 혼잣말로 투덜거렸으나 노인은 듣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식사 준비도 이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그는 끓기 시작한 물에 옥수수 가루를 넣고 휘휘 저어서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오늘 밤엔 밥을 자실 테니까 아침은 이걸로 요기하세요." "쌀이 얼마 없을텐데......" 늙은이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가운뎃방 탁자 앞에 앉아서 긴 젓가락으로 누르스름한 죽을 저었다. "그럼 봄 명절에 조금만 쓰면 되잖아요." 늙은이는 못 들은 척하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죽만 들이켰다. 왕룽은 제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두루마기를 잘 차려 입고 변발을 길게 드리웠다. 그리고 머리와 뺨을 한번 만져보곤 이발을 할까말까 망설였다. 아직도 해는 뜨지 않았다. 돈만 있다면 색시 집에 가기 전에 넉넉히 이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허리끈에 맨 때묻은 조그마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세어 보았다. 은전 여섯 닢과 동전 두어 줌 가량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오늘 밤에 친한 이웃 사람을 청했다는 말은 안했지만 삼촌과 그의 아들인 사촌과 또 세 사람의 마을 사람을 청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대접할 수 있도록 돼지고기와 생선과 과일을 오는 길에 조금씩 사올 셈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방에서 온 죽순과 쇠고기도 사다 그가 심은 배추를 넣고 국을 끓일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름과 간장을 사고도 돈이 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발을 하게 되면 아마 쇠고기는 못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이발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하늘은 흐려 있었지만 금새 날씨가 좋아져서 태양이 멀리 하늘가의 구름을 뚫고 나타나 보리와 밀짚 위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농부인 왕룽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잊고 이삭을 살펴보았다. 아직 알은 차지 않았다. 비가 와야만 했다. 그는 공기의 감촉을 느끼며 근심스러운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도 바람도 비를 품고 있다. 그는 향을 사서 사당에 모신 지신(地神)님 앞에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는 이런 날엔 그렇게 지신에게 빌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는 밭 가운데에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회색 성벽이 보였다. 그 성벽 옆을 지나면 황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는 집이 서 있다. 거기에는 그가 아내로 맞이할 색시가 어릴 때부터 종으로 팔려와 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잣집의 종에게 장가들 바엔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왕룽은 그의 아버지에게 '저는 언제까지 장가 못 가나요?' 하고 물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참 세상 살기 어렵구나. 장가를 가자면 큰 돈이 든다. 어느 계집이나 금반지라든가 비단옷을 해 달라고 난리들이니 가난한 사람은 종을 데려올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게야."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래서 늙은이는 몸소 황부잣집에 찾아갔다. 시집 보낼 만한 나이로 이댁 종 가운데 필요없는 계집애가 있거든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늙은이가 원한 것은 아주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계집이었다. 그런데 왕룽은 예쁘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에는 불만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예쁜 아내라면 제 자신도 남들 앞에서 그럴싸하게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불평을 눈치로 알자 화를 버럭 내며 이렇게 말했다. "예쁜 아내를 얻어 어쩌겠다는 거냐? 집안 살림도 하고 자식도 낳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계집이라야지. 예쁘장하게 생겨 먹은 계집년이 그런 것을 할 줄 아느냐? 몸차림만 그럴싸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 우리 같은 가난한 살림에는 그 따위 예쁜 계집은 밥만 축낼 뿐이야. 너나 나나 농사꾼이 아니냐? 그리고 또 부잣집의 예쁜 종년으로 성한 게 있는 줄 아니? 전부 도련님이니 뭐니 하고 젊은 것들이 건드렸던 거지. 실제로는 못난 계집이 좋다. 너의 갈고리 같은 손을 부잣집 도령들 손과 비교해 보고는 좋다고 하겠니? 아무리 못난 계집이라도 음탕한 계집보단 나을 게다." 왕룽도 이와 같은 아버지의 말에는 깊이 동감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미련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곰보나 언청이는 싫어요." "잔말 말고 얻어 놓고 보자." 늙은이는 이렇게 고집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 여자는 곰보도 아니고 언청이도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들 부자는 도금한 은반지와 귀고리를 사서 황부잣집에 약혼 표시로 보냈다. 왕룽은 이 밖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겨우 오늘에서야 그 황부잣집에 가서 그 색시를 데려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어둠침침한 성문 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장수가 손수레에 물통을 싣고 다니다가 흘린 물의 냉기로 여름에도 시원했다. 언제나 이곳에는 참외 장수가 모여들어서 가게를 벌이고 참외를 쪽으로 갈라 팔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철이 일러서 참외 장수는 나와 있지 않았으며 설익은 복숭아 상자가 벽을 따라서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복숭아 장수가 목청을 돋워 가며 외쳤다. "자아, 복숭아 사려. 햇복숭아 사려. 뱃속의 겨울 독기를 몰아 내는 햇복숭아 사려." 왕룽은 생각했다. "혹시 색시가 복숭아를 좋아하면 돌아가는 길에 사 주어야지." 그러나 그는 다시 성문을 나올 때 색시가 그의 뒤를 따라 오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성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이발사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거리였다.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새벽녘에 채소를 팔기 위하여 밤부터 나와서 있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 농부들이 몇 사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몸을 웅크린 채 빈 지게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왕룽은 그들과 얼굴이 마주치면 놀림을 받을 것 같아 겁이 나서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눈길을 피해 가며 걸었다. 이 거리에는 앞에 걸상을 놓은 이발사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왕룽은 맨 끝에 놓여 있는 걸상에 앉아서 이발사를 불렀다. 곁에 있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이발사가 재빨리 달려와서 화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의 물을 유기 그릇에 따르고 친절한 말씨로 물었다. "전부 깎겠습니까?" "머리를 깎고 면도를 해 주오." "귀와 코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러면 얼마나 더 받나요?" 왕룽은 조심스레 물었다. "네 푼 받습니다." 이발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뜨거운 물에 때묻은 수건을 적셔서 짰다. "두 푼으로 합시다." "그러시면 한쪽 귀와 한쪽 코만 합니다. 어느 쪽을 해 드릴까요?" 이발사는 곁에 있는 동업자에게 얼굴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고약한 장난꾼을 만났다고 왕룽은 속으로 생각했으나 어쩐지 성안 사람들에겐 기가 죽었다. 이발사란 제일 하층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대항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당신 맘대로 하시오." 그는 이발사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이 이발사는 농담은 할지언정 그래도 호인이었기 때문에 요금을 더 받지 않고 어깨부터 등까지 기분 좋게 안마도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앞이마를 깎으면서 왕룽에게 말했다. "전부 깎아 버리면 훨씬 더 근사해 보이겠는데요. 요즘은 변발을 자르는 것이 유행입지요." 이발사의 면도날이 머리 위의 변발 있는 곳을 스치자 왕룽은 놀란 듯이 황급히 말했다. "안되오. 집에 가서 물어 봐야 하오." 이발사는 웃으면서 변발 있는 곳만 동그랗게 남겼다. 이발이 끝나자 이발사의 물 묻은 손에 돈을 치르는 순간 왕룽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돈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없다는 듯이 일어나 걸으면서 새로 깎은 머리에 시원한 바람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번 뿐이니 괜찮아." 그리고 그는 장거리로 갔다. 돼지고기 두 근을 샀다. 고기 장수가 그것을 마른 연 이파리로 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시 주저하면서 쇠고기 반 근을 더 샀다. 그 다음 우무같이 묽은 두부를 약간 사고 향촉 파는 집에 가서 향을 샀다. 그러고는 왠지 자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황부잣집으로 걸어갔다. 황부잣집 대문 앞에 도착한 그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왜 혼자 왔을까. 아버지든 삼촌이든 이웃 칭(陳) 서방이든 누구하고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큰 대문을 드나든 적이 없었다. 잔칫거리를 담은 광주리를 끼고 '색시 데리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그에겐 어색한 노릇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얼빠진 사람처럼 굳게 닫혀 있는 대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검고 육중한 널빤지로 만든 대문 곁에 돌사자가 호위를 하는 것처럼 앉아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다시 걸어나왔다. 아무래도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눈이 핑 돌면서 현기증이 났다. 우선 어디 가서 무얼 좀 먹어야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좁은 골목에 음식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전 두 푼을 탁자 위에 내어 놓고 기름때가 자르르한 행주치마를 걸친 아이에게 국수 두 그릇을 청했다. 이윽고 국수가 나오자 두 그릇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아이는 때가 묻은 손으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시원치 않게 물었다. "더 가져올까요?" 왕룽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탁자가 수두룩하니 놓여 있었다. 이 어두침침한 방안에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두세 사람이 국수를 사먹거나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다. 여기선 그의 차림이 약간 깨끗했기 때문에 제법 돈푼이나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거지가 다가서서 흥얼댔다. "점잖으신 선생님, 한푼 적선합쇼. 굶어 죽겠습니다." 왕룽은 이제껏 거지에게 적선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흡족해져서 닷푼짜리 동전 두 닢을 던져 주었다. 거지는 손톱이 새까맣게 자란 손으로 재빨리 돈을 주워 누더기 속에 집어넣었다. 왕룽은 할 일 없이 앉아 있었다. 해는 점점 높이 떠 올랐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그의 곁을 몇 번이나 오가더니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 불평스런 목소리로, "무얼 더 잡수시지 않으면 자리값을 내셔야 합니다." 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왕룽은 이 말을 듣자 당장 일어서고 싶었으나 저 크나큰 황부잣집에 가서 색시를 데려올 생각을 하니 밭에서 일할 때처럼 온몸에 땀이 흘렀다. "차를 가져오너라." 기가 꺾인 그는 마지못해 이렇게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차를 날라와서 재촉했다. "돈은요?" 왕룽은 어쩔 수 없는 듯이 허리춤을 뒤져서 동전 한 닢을 내놓았다. '도둑 같은 놈.' 하고 그는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때 오늘 저녁때 초대하려던 이웃에 사는 농부가 가게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서둘러 차를 꿀꺽 마시고 옆문으로 나갔다. 한길로 나간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어마어마한 대문을 향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벌써 한낮이 지났으므로 대문은 반쯤 열려 있고 식사를 끝낸 문지기가 대로 깎은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면서 무료하게 서 있었다. 문지기는 키가 큰 사나이로, 왼뺨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고 그 사마귀엔 검고 긴 털이 세 개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광주리를 끼고 있는 왕룽을 보고 무얼 팔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 무슨 볼 일이오?" "저어, 저는 농사짓는 왕룽입니다."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농사짓는 왕룽이 여기엔 왜 왔소?" 문지기는 매우 거만했다. 그의 주인과 같은 부자 손님에게만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제가 온 것은...... 저, 제가 온 것은......" 왕룽은 머뭇거리며 간신히 이렇게 더듬었다. "그래 무슨 볼 일로 왔어?" 문지기는 사뭇 사마귀 털을 만지작거리면서 빨리 용건만 말하라고 재촉했다. "저어, 이 댁의 색시를......" 이렇게 말하는 왕룽은 갑자기 목이 쉰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엔 식은땀이 솟아나 햇빛에 반짝였다. 문지기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큰 소리로, "아아, 그런가, 자넨가!" 하고 말했다. "오늘 신랑이 올 것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원 이렇게 광주리를 끼고 올 줄이야 누가 알 았나." "고기를 좀 사려고요." 왕룽은 변명삼아 말했다. 그리고 문지기가 안으로 데려다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지기는 태연스럽기만 했다. 문지기가 전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므로 왕룽은 초조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혼자 들어가도......?" 그러자 문지기는 깜짝 놀란 듯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리 해 보게, 자넨 영감님에게 맞아 죽을 거야." 하고 말했다. 그래도 왕룽이 아무런 눈치도 못 채는 것을 보자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돈만 쓰면 되는 도리가 있지." 왕룽은 그제서야 돈을 달라는 눈치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가난한 농군이어서......" 하고 그는 간신히 말했다. "허리춤에 무엇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좀 보세." 문지기가 말했다. 순진한 왕룽은 광주리를 돌 위에 올려 놓고 두루마기 자락을 쳐들고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낸 다음 장을 보고 남은 돈을 전부 손바닥에 털어 놓았다. 문지기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은전 한 닢과 동전 열네 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은전 이리 내." 문지기는 서슴지 않고 왕룽의 말도 듣기 전에 은전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 "신랑이오, 새신랑 왔소." 하고 외치면서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룽은 돈을 빼앗긴 것도 분했지만 또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것도 부끄럽고 싫었다. 그래도 그 문지기를 따라갈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광주리를 든 채 옆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문지기 뒤만 졸졸 따라갔다. 부잣집 문안에 이렇게 발을 들여 놓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룽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인 채 중간 뜰을 몇 개 돌아 들어갔다. "새 신랑, 새 신랑!'" 하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연달아 집안을 들썩거렸다. 그 때문에 집안 여기 저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중간뜰을 백 개나 지나온 듯 생각되었을 무렵에야 비로소 문지기도 잠잠해지고 그를 조그마한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혼자서 기다리고 서 있으니까 안으로 들어갔던 문지기가 돌아나와서 말했다. "노부인께서 자네를 보자 하시네." 왕룽은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지기는 그를 가로막고 어림없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자네는 그 광주리를 낀 채로 큰 마나님 앞에 나갈 건가. 그건 돼지고기 하고 두부가 든 게 아닌가! 자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절을 하려나?" "참...... 그렇군요." 왕룽은 당황했다. 그러나 광주리를 아무 곳에나 두었다간 도둑맞을게 뻔한 일이었다. 돼지고기가 두 근, 쇠고기가 반 근, 생선이 몇 마리이다. 이런 반찬에 욕심내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지기는 왕룽의 걱정하는 눈치를 알아차리고 업신여기는 투로 말했다. "야, 이 사람아, 그따위 고기쯤은 이런 부잣집에서 개나 줄 뿐이야." 하고 말하며 왕룽은 손에서 광주리를 빼앗아 방안으로 던져 버리고 어서 가자는 듯이 앞장을 섰다. 길고 좁은 복도를 두 사람은 걸었다. 찬란하게 조각을 한 기둥이 총총히 서 있는 복도를 가자니 왕룽이 평생 처음 보는 큰 대청이 있었다. 그의 집이 스무 개나 들어갈 만큼 넓고 천장도 높았다. 아름답게 조각한 대들보 단청에 정신을 팔고 걸어가던 왕룽은 높은 문지방에 걸려서 문지기가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엎어질 뻔했다. "노부인을 대할 땐 지금같이 공손히 엎드려 인사해야 해." 그는 무척이나 부끄러웠으나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바라보았다. 방에는 또 하나의 지붕이 있는 높은 단이 있고 아주 나이가 많은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말끔하고도 가냘픈 몸에 진주 빛깔로 짜진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옆의 낮은 탁자 위에는 아편을 태우는 담뱃대가 놓여 있었다. 노부인의 얼굴은 수없이 많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눈두덩이는 원숭이같이 움푹 파였는데 그녀는 그 까만 눈으로 왕룽을 내려다 보았다. 담뱃대를 잡고 있는 한쪽 손등은 마치 금박을 한 부처의 손 같았다. 왕룽은 무릎을 꿇고 방바닥에 엎드렸다. "일으켜 세워라.'" 노부인은 사뭇 위엄 있게 문지기에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공손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계집아이를 데리러 왔나?" "네에, 그렇습니다.'" 라고 문지기가 대신 말했다. "왜 저 사람은 자기가 말하지 않나?'" 하고 노부인은 말했다. "멍청이입니다.'" 문지기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마귀의 털을 만지작거렸다. 왕룽은 이말을 듣자 왈칵 화가 나서 문지기를 노려보았다. "저는 미천한 농사꾼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지체 높으신 마님 앞에서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노부인은 위엄 있는 얼굴로 왕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옆에서 시중드는 여종이 아편 담뱃대를 바치자 그것을 잡고 허리를 굽히면서 반색하여 빨았다. 다음 순간 노부인의 눈은 몽롱해 진 것 같았고 세상 일을 다 잊은 듯했다. 왕룽은 그대로 노부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가?'" 노부인의 음성은 갑자기 노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문지기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잠자코 있었다. "마님, 저는 색시를 데리러 왔습니다.'" 왕룽은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색시라니? 무슨 색시?'" 하고 노부인은 의아한 듯이 말했다. 노부인은 아직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여종이 몸을 굽혀 노부인 귀에다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아아, 그래, 깜박 잊었구나. 뭐, 그리 큰일은 아니니까. 자네, 오란(阿籃)을 데리러 왔군 그래. 그 애를 오늘 어떤 농가에 시집 보내기로 했지. 자네가 그 농부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오란을 불러오너라.'" 하고 노부인이 여종에게 분부했다. 이런 하찮은 문제는 얼른 처리해 버리고 고요한 이 넓은 방에서 홀로 마음껏 아편을 즐겨 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윽고 여종은 얼굴이 넓적하고 키도 약간 크며 깨끗한 무명 저고리 치마를 입은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왕룽은 여인을 얼핏 보고 재빠르게 눈을 돌렸다. 가슴이 설레었다. 이 여인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이구나! "이리 오너라.'" 하고 노부인은 아무렇게나 말했다. "이 사람이 너를 데리러 왔단다." 여인은 조용히 노부인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굽혔다. "그래, 갈 준비는 됐니?'" 하고 노부인은 물었다. "네, 됐습니다.'" 여인은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왕룽은 여인의 음성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음성이 그리 크지도 않고 또 거칠지도 않고 그저 평범하였으나 듣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고 순박하게 들렸다. 머리도 매끈하게 빗었고 옷도 말끔해 보였다. 그러나 왕룽은 그녀의 발이 전족(纏足)이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그는 노부인의 말소리에 이러한 생각들을 멈추었다. 노부인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분부했다. "이 애의 짐을 문간까지 들어다 주고, 이 두 사람을 돌아가게 해라.'" 그리고 노부인은 왕룽에게 말했다. "오란 곁에 서서 내 말을 좀 듣게.'" 왕룽이 오란과 나란히 서자 노부인은 입을 열었다. "이 오란은 열 살 때 우리 집에 와서 지금까지 지냈으니까 아마 지금 나이는 스물일 걸 세. 이 애의 양친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서 떠돌아 다닐 때 내가 사들인 애야. 나는 그 외에는 이 아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아무튼 자네가 보다시피 이렇게 몸 이 튼튼하니 무슨 일이라도 잘 할 걸세. 예쁘지는 않지만 그런 건 살아가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런 계집이란 일 없는 사람들이 탐내는 노리개에 불과해. 그리고 이 아이는 영리하지는 않지만 무슨 일이나 하라는 대로 잘하고 부지런하네. 내가 알기에는 우리 집에서 제일 부지런한 애지. 또 이 애는 언제나 부엌에만 있었으니 내 아들이나 손자들도 추근거리지 않았어. 만일 불미한 일이 있었다 해도 다른 계집종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일도 없었겠고, 또 의좋게 살라구. 손이 약간 느리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어. 내가 부처님만 안 믿는다면 언제까지나 데리고 부엌일을 시키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야. 집안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종이라면 남김없이 다들 시집 보내고 싶어." 그리고 노부인은 오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의 말에 순종하고 아들을 많이 낳아 주도록 해라. 그리고 첫 아들을 낳거든 꼭 내게 보여야 한다." "네, 마님." 오란은 공손히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왕룽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럼 가 보아라." 노부인은 조급한 모양이었다. 왕룽은 얼른 절을 하고 돌아 나왔다. 오란은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문지기는 오란의 전재산이 되는 상자를 걸머지고 그들의 뒤를 따랐으나 왕룽의 광주리를 던져 둔 방앞까지 오자 걸머진 상자를 내려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왕룽은 비로소 오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네모난 얼굴은 정직해 보였고 나지막한 검은 코는 사자코 같았다. 입은 커다란 게 메기입 같았고 실눈같이 가느다란 눈은 몽롱한 게 시골 아낙네의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든 것 같았다. 말을 하고 싶어도 묵묵히 참는 표정이다. 왕룽이 쳐다보아도 민망스러운 얼굴을 짓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아양부리는 얼굴도 아닌 순진한 모습이었다. 왕룽은 그 거무스레하고 평범한, 참을성 있어 보이는 얼굴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거무스레한 얼굴은 곰보도 아니었고 언청이도 아니며 귀에는 그가 보낸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또 손에는 그가 보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야 그는 자기가 아내가 있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꼈다. "여기에 상자와 광주리가 있어......" 하고 왕룽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란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 상자를 어깨에 얹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왕룽은 그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 "상자는 내가 질 테니 임자는 광주리를 들어." 그는 한 벌 뿐인 두루마기를 입었다는 것도 잊고 상자를 짊어졌다. 오란은 아무 말도 않고 광주리를 들었다. 왕룽은 이렇게 기묘한 차림으로 방금 전에 지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간뜰을 다시 지나갈 것을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뒷문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란은 그의 말뜻을 짐작하지 못한 듯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그제서야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평상시엔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뜰로 그를 인도하였다. 그곳은 잡초가 무성하고 연못에도 풀 덤불이 엉켜있고 오래 묵은 노송 밑에 둥근 대문이 있었다. 오란은 그 빗장을 벗기고 문을 열었다. 그들은 그 문으로 빠져 나와 큰길로 나섰다. 왕룽은 걸으면서 한두 번 오란을 들여다보았다. 오란은 그 넓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언제나 이런 길을 다닌 것처럼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성문에 다다르자 왕룽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한손으로는 어깨의 상자를 받치고 한손으로는 허리춤 안에 남아 있는 동전 두 닢을 꺼내어 설익은 복숭아 여섯 개를 샀다. "자아, 이것 먹어." 하고 왕룽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린애가 무얼 받을 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얼른 받았다. 보리밭을 따라 걸으면서 왕룽이 돌아보니 오란은 매우 소중한 물건처럼 복숭아를 베어먹고 있었다. 그러나 왕룽이 돌아다 보자 주춤하면서 우물거리던 입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복숭아를 손으로 가리었다. 그들은 사당이 있는 서쪽 밭길까지 이렇게 쭉 걸었다. 사당 높이는 사람들 키보다 낮았고 기와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 왕룽이 갈고 있는 밭은 그의 할아버지도 갈았으며, 사당도 그의 할아버지가 손수 성안에 가서 기와를 사서 손수레로 날라다가 지은 것이다. 바깥 벽에 회칠을 하고 풍년이 든 어느 해엔 마을에서 화공을 청하여 그 벽엔 산과 대숲을 그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랜 비바람으로 대숲만이 새털같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산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당에는 조그마한 그러나 엄숙한, 흙으로 만든 한쌍의 인형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 근처의 흙으로 만든 것으로 지신(地神)과 그 아내의 상(像)이었다. 지신은 붉은 종이와 금종이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었고, 남신은 듬성듬성 수염까지 붙이고 있었다. 왕룽은 아버지의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그런 색종이를 사서 정성껏 옷을 지어서 입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눈보라와 비바람이 들이치고 햇볕이 쬐어 들면 어느새 그 고운 옷은 모양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 때는 마침 새옷을 갈아입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했다. 왕룽은 그 붉고 노란빛이 찬란한 옷을 보자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그는 색시가 가지고 있는 광주리를 받아서 돼지고기 밑에 넣어 두었던 향을 조심스럽게 찾았다. 만일 그 향이 부러졌다면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그래서 매우 맘을 죄었으나 다행히 부러지지 않은 것을 보자 적이 마음이 놓였다. 그는 지신 앞에 쌓여 있는 잿더미에다 나란히 향을 꽂고 부싯돌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들은 지신 앞에 나란히 서서 향 끝이 점점 타내려 재가 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란은 그 재가 길어지자 약간 허리를 굽히고 손가락으로 재를 털고는 왕룽이 나무랄까 겁을 내는 듯 힐끗 왕룽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왕룽은 그녀의 이런 동작이 마음에 들었다. 오란도 이 향불로 두 사람이 겪어야 할 앞으로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니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향이 다 타도록 두 사람은 이렇게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 겨를에 해는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왕룽은 다시 상자를 걸머졌고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대문간에는 그의 아버지가 기울어지는 햇빛을 받으면서 서 있었다. 그는 아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로서 여자에 대한 체면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하늘에 뜬 구름에 정신이 팔린 체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구름이 초승달 왼편에 걸리면 꼭 비가 내린다. 내일 밤 안으로는 비가 오겠어." 늙은이는 왕룽이 색시 손에서 광주리를 받아드는 것을 보자 또 소리를 질렀다. "너 또 돈을 썼구나." 왕룽은 광주리를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오늘 저녁에 손님을 청했어요." 하고 간단히 대꾸했다. 그러고는 상자를 그의 방안으로 옮겨서 자기 옷상자 곁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는 이상야릇한 느낌으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늙은이가 방문 앞까지 따라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돈을 그렇게 함부로 마구 쓰다니 집안 꼴이 잘도 되겠구나." 그러나 늙은이도 속으로는 이웃 사람을 청한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다만 새 며느리에게 처음부터 낭비를 하는 버릇이 들지 않게 하려면 당분간은 이렇게 잔소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왕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광주리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란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광주리에서 반찬거리를 한 가지씩 꺼내어 부뚜막에 늘어 놓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돼지고기와 쇠고기, 그리고 생선을 사왔는데 이걸로 일곱 사람이 먹을 거야. 요리할 줄 아나?" 그는 아내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저는 황부잣집에 있을 때 계속 부엌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끼니 때마다 고기 반찬을 준비해 봤어요." 왕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사를 맡긴다는 듯이 밖으로 나와서는 손님들이 올 때까지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쾌활하고 능청맞으며 언제나 허기져 있는 듯한 삼촌과 열다섯 살 나는 장난꾸러기인 사촌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웃 농부 세 사람이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들어왔다. 그중 두 사람은 씨앗 뿌릴 때나 추수할 때에 품팔이를 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웃의 칭(陳) 서방이란 사람인데,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조그맣게 생긴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로 자리를 사양하다가 겨우 자리를 다 잡자 왕룽은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들여 오라고 했다. "음식을 쟁반에 차려 낼 테니 당신이 상에다 옮겨 가세요. 저는 남자분들 앞에 나가기가 싫어요." 여자가 이렇게 말하자 왕룽은 여간 기쁘지 않았다. 자기의 아내라서 자기에게는 거리낌 없이 대하지만 그 밖의 다른 남자에겐 얼굴을 안보이겠다는 것이 대견하기만 했다. 그는 아내가 차려 놓은 음식을 손수 손님 앞에 날라 놓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자아, 어서들 드십시오." 농담을 잘 하는 삼촌이 한마디 했다. "그래, 새색시를 우리에게 안 보이나?" 하고 말했다. 왕룽은 서슴지 않고 잘라 말했다. "금방 데려왔는데 뭘 그래요. 어디 행례나 치렀나요. 다음에 보시지요." 왕룽은 정성껏 그들을 대접했고 그들은 정신 없이 맛있게 먹어 댔다. 먹느라고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이 생선에 바른 간장을 칭찬하자 한 사람은 돼지 고기를 맛있게 구웠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왕룽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어디 음식 솜씨가 있어야죠." 그러나 속으로는 새색시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오란은 그가 사온 고기에다 설탕과 초와 약간의 술과 간장을 섞어서 양념하여 고기맛이 충분히 나게 한 것이다. 왕룽 자신도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남의 집에 가서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밤이 되어 음식을 다 먹은 손님들은 차를 마시면서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 받으며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란은 언제까지나 부엌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왕룽이 마지막 손님을 전송해 보내고 부엌으로 가 보니 오란은 외양간에 쌓아 둔 짚단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머리에는 지푸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왕룽이 깨워 일으키자 그녀는 잠결에서도 마치 자기를 때리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양손으로 낯을 가리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왕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왕룽은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오늘 아침에 그가 목욕을 하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붉은 초에 불을 붙였다. 그는 이렇게 불을 켜자 한 여자와 단둘이서 한방에 앉아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해 두었다. "이 여자는 내 색시다. 이제 일을 치러야지." 그는 묵묵히 옷을 벗었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 곁으로 가서 잠자리를 살펴보았다. 왕룽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불은 당신이 눕기 전에 꺼." 그리고 그는 자리에 누워 두터운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리고 잠든 척했다. 그러나 전신이 떨렸다. 그의 모든 신경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윽고 방이 어두워지고 여자의 몸이 점점 그의 몸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더욱 흥분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소곤대며 웃는 소리가 나자 그는 힘껏 여자의 몸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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