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 차 례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작가 소개 작가는 영국의 엘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이다. 1960년 <데드 마스크(Death Mask>로 데뷔하여 '일류 본보기'라 고 격찬을 받은 그녀는 계속해서 걸작들만 발표했다. <죽음과 즐거운 여자>는 그녀의 세 번째 작품이며, 최고 걸작에 속한다. 그녀는 영국 작가이면서 미국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다. 그녀의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제 1 장 도미니크 펠스가 처음으로 키티 노리스를 보았을 때, 그녀는 남색 나일론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양손에 은빛 샌들을 들고는 보트 클럽 테라스의 굵은 난간에서 맨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코마번 레가타(보트 경주)가 벌어진 이튿날 밤, 시즌이 한창일 때 클럽 댄스 파티에서 그런 곡예에 버금가는 댄스를 보는 것은 별로 희귀한 일도 아니다 -- 대개 그런 무용수는 남성이었지만 말이다. 그날은 또한 레슬리 아마이저의 결혼 첫날밤이기도 했다. 하기야 도미니크로서는 그런 것은 알지도 못했지만. 비록 알았다고 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매주 가야 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피아노 레슨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맑게 개인 포근한 밤이었기에, 그는 버스를 타지 않고 1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코마퍼드까지 강변도로를 따라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거리를 벗어난 언저리에서 길은 클럽 하우스 바로 곁을 스치고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밴드의 음악소리가 주위에 넘쳐 흐르고 시끄러운 사람들의 말소리가 거기에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 3미터 높이에 있는 테라스의 난간 곁에는 화사한 옷차림을 한 키티가 8cm 가량의 홀쪽한 굽과 거미줄 같은 가는 끈이 달린, 구두라고 하기에는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물건을 손에 들고, 양팔을 활짝 벌린 채 춤을 추고 있었다. 몇몇 남자들이 엉뚱한 짓은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곧이어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춤을 멈추게 하기 위해 테라스 위의 테이블을 누비며 급히 달려왔다. 그중의 하나가 너무 정신없이 달려온 바람에 잔이 수북한 쟁반을 받쳐든 보이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마실 것이 왕창 날아간 곳 근처에서 당황하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키티는 모른 척 춤을 계속 추었다. 테이블 위 램프의 빛이 살짝 열린 입술로 혀끝을 약간 빼문 개구쟁이 어린애와도 같은 얼굴을 희게 비치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그녀처럼 즐거운 빛을 발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리에 문뜩 떠오른 생각은 약간은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저 사람들이 10시도 채 되기 전에 저렇게 들떠 떠들고 있다면 새벽 1시쯤에는 도대체 어떤 꼴이 될까?" 하고. 하지만 그런 소년다운 우월감에서 나오는 반항적인 감정은 곧 호기심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그는 1년 반 전부터 부모 몰래 담배를 피워 보았지만, 그 맛을 알지 못한 채 담배에 대한 신기한 느낌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코올이 대신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저렇게 즐거운 듯 마시는 것이니까 아마도 그 맛이 기가 막힐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여러모로 상상을 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어른에 대해서 질투심 같은 것까지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기묘한 춤도 술좌석의 구경거리 중 하나가 틀림없겠지. 도미니크는 그렇게 떠들썩한 사람들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 반면에 야릇한 호기심이 일어나 파티 광경을 훔쳐보기 위해 테라스의 그늘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빨려들어가듯 키티를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이 그의 시야에서 부옇게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소란의 중심이기는 했으나, 그녀 자신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뭔가 가까이 가기 어려운, 신성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아마도 그녀가 끝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보통의 키였지만 후리후리한 몸매였기 때문에 키가 커 보였다. 더구나 어두운 감색 하늘을 배경으로 그의 머리 위에서 춤추고 있었으므로 한결 더 커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팔다리는 실제로는 불테리어(불독과 테리어의 잡종개)처럼 강인하고 건강하고, 얼굴도 검게 탄 편이었으나, 그때는 투명할 정도로 희고 푸른 기가 감돌았다. 그녀 주위의 모든 것은 그녀의 몸과 마찬가지로 투명한 환상의 구름 속을 헤엄치고 있었으나, 그 환영의 소용돌이 속 한복판에는 키티가 -- 하나의 현실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아래쪽 어둠 속에서 그녀가 굴러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청년 하나가 희고 검은 얼룩 무늬의 까치 모양 난간 쪽으로 달려와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그녀는 슬쩍 몸을 빼어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그 순간, 그녀의 스커트가 꽃처럼 활짝 펴지며 그녀의 몸을 감고 돌아갔다. 황홀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도미니크의 눈에 길고 늘씬한 다리가 매끄럽고 흰 허벅지 언저리까지 보였다. 그는 당황해서 눈길을 돌렸으나, 다시 그것 이상 재빠르게 원래의 위치로 얼굴을 돌렸다. 그가 거기에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그녀조차도 모를 것이다...... "키티, 떨어지겠어, 바보 같으니라고!" 뒤로 몸을 빼어 피하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머리 위의 청년이 겁먹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갑자기 날카롭고 반항적인 소리를 지르며 한쪽 샌들을 놀라서 들어올린 도미니크의 손으로 던졌다. 이 소우주 속에는 남보랏빛 구름 그늘에 숨어 있는 확고한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하찮은 물건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생생하고 현대적인 6인치대의 발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도미니크는 마치 그것이 무진장한 마법의 보화라도 간직된 것인 양 공손히 앞으로 받들고 서 있었다. 그는 그저 멍해져서 머리 위의 소음이 딱 멈춘 것도 잠시 동안은 깨닫지 못했다. 마침내 눈을 들어 보니 나무로 된 난간에서 몸을 내밀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서넛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중에서 하나의 얼굴밖에는 의미가 없었다. 다른 얼굴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시간의 낭비였던 것이다. "어머, 미안. 다치지는 않았나요? 나는 그런 곳에 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만 집어던졌는데......용서해 주세요." 하고 키티가 말했다. 맑고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다소 당혹스런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무척 정중한 투였기에, 아까까지의 그녀의 방만한 행동 이상으로 그를 당황하게 했다. 의외로 그녀에게선 술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자 마치 예의바른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과를 한 것이다. 아까까지의 들뜬 태도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길게 늘어뜨린 부드럽고 엷은 갈색 머릿결 그늘에서 어딘지 모르게 애조를 띤, 큼직한 자줏빛 눈이 찬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상대방이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미니크는 많은 어른들과 마주했을 때, 상대방의 얼굴에 그의 연령적인 미숙을 의식한, 자못 관대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여러 번 보아 왔다. 하지만 키티는 마치 동년배의 대등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공손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엉뚱한 말 같은 것밖에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긴장을 풀어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격심한 자기혐오감에 빠졌다. 그는 얼굴이 달아올라 귀밑까지 빨개졌다. 곧장 집으로 갔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밤의 어두움이 보다 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실실 웃는 것이 못 견디게 역겨워, 꺼져 버리라고 고함을 치고 싶었다. "다시 던져 줄래요? 걱정 말아요, 쉽게 받을 수 있으니까." 하고 키티가 말했다. 그는 신중히 거리를 재고는, 그녀가 뻗은 팔 속으로 샌들을 사뿐히 던져 올렸다. 그녀는 그것을 엉겅퀴의 관모처럼 허공에서 가볍게 받아, 손을 흔든 건지 절을 한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몸짓으로 샌들을 받쳐들어 그것을 그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것을 신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이 이 작은 사건의 끝이었다. 청년 하나가 그녀의 등에 팔을 두르고는 그녀를 댄스 홀 쪽으로 인도해 갔다 --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미련섞인, 그리고 용서를 비는 듯한 눈길을 흘끔 보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저항 없는 소년의 평화를 무참히 짓밟은 것을 사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굴곡이 뚜렷한, 온화하고 갸름한 얼굴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아래에서 우유빛으로 빛나고, 오랑캐꽃색의 눈망울은 어둡게 가라앉아 우수의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도미니크는 그렇게 서글픈 표정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몇 개월 동안이나 그의 생활을 헝클어뜨려 놓았다. 그 학기의 성적은 수석에서 5번째로 떨어졌으며 그 해 겨울의 럭비 시합에서도 그의 플레이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는 키티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비록 악의는 없더라도 그의 인생을 절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 모른다. 하물며 부모는 더욱 그러했다. 어머니도 결국 여자여서, 만일 어떤 여자에 관한 관심을 털어놓는다면 아들을 빼앗긴 심정이 될 것이었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남성인데다가 그에게는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할 만한 젊음과 용모를 갖추고 있다. 또한, 비록 부모에게 상의를 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미니크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4살의 사랑은 전혀 이해력이 없는 나이 그것만큼이나 더욱 강렬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그 갑작스러운 경험에 견딜 만한 정상적인 적응력을 지니고 있었다. 식욕은 늘기는 했어도 줄지는 않았다. 잠도 잘 잤다. 자기의 신변에 일어난 일에 대해 불안하게 마음을 설레면서도 그것을 즐기고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 그 첫사랑의 여자를 만났을 무렵에는 학교 성적은 수석으로 올라가고, 스포츠 카를 동경했으며, 운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곧 모터사이클을 사달라고 아버지를 졸라댔다. 키티의 모습조차 어느덧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알아보는 일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녀는 그냥 키티이며, 우수에 잠긴 미인......이미 어렴풋해진 추억이었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9월 마지막 주, 헌혈봉사대의 기동대가 코마번 고등학교로 가을의 정기적인 출장을 나왔을 때였다. 도미니크는 방과후 럭비 연습을 하고, 샤워를 끝내고는 역사 숙제를 하기 위해 도서실에서 한 시간 가량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뒷문 쪽으로 갔을 때는 이미 저녁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체육관 옆에 헌혈봉사대의 자동차가 세워져 있고, 간호사가 기구와 장부를 한 아름 안고 뒷문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행사는 매년 4회에 걸쳐 이루어지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일 그때 검붉은 커먼 기어 한 대가 체육관 곁을 돌아 병원차 뒤의 좁은 공간에 주차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커먼 기어의 멋진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런 멋진 차를 가진 사람이 누굴까 하는 호기심에서 소로브레드(영국 말과 아라비아 말을 교배한 경주용 말)처럼 단정한 차체에 도취되어 문이 열렸을 때도 눈길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차조차 빛을 잃었다. 한 여인이 길고 우아한 다리를 내밀면서 밖으로 나와 체육관 입구 쪽을 향하여 콘크리트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자기가 과연 환영을 받을 만한 존재인지를 살피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음을 멈추었다 -- 그 여자는 키티였다. 비록 그것이 해질 무렵이든, 또는 대낮이거나 캄캄한 밤중이었다고 해도 도미니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15개월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녀는 잠시 모습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그녀와 관계가 없는 주위의 모든 것을 도미니크의 눈에서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곁에 서 있는 병원차나,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체육관의 밝은 창이나, 채혈용의 여러 가지 기구들이 갑자기 격렬한 현실감을 띠고 도미니크를 몰아세웠다 -- 키티가 헌혈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빨리 집에 돌아가 남은 숙제를 해야 했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간신히 걸음을 옮기기는 했으나, 발은 교문 쪽이 아니라 체육관을 향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가 타려고 했던 버스는 이미 떠났기 때문에, 다음 버스까지는 25분을 기다려야 했다. 또한, 이대로 그 자리를 떠나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거니와, 그의 머리 위에 높이 3미터짜리의 테라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과 1파인트 분량의 혈액을 기증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안으로 들어가 그녀와 나란히 있을 수 있다. 더구나 헌혈이라면 훌륭한 구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 비록 정규 헌혈자의 명단이 작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의 헌혈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회사업에 좀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지도 몰라."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더구나 아버지가 그런 지위에 있으니까, 아버지의 명예도 될 수 있지." 어쨌든 기회는 지금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악마가 노골적으로 그를 충동질했다. 그녀는 직접 운전을 하고 왔으므로 아직은 혼자지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전용 버스로 헌혈지원자들이 한 떼로 몰려온다면 네놈이 그녀에게 가까이 갈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악마는 짓궂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공연히 1파인트의 피만 손해보는 것이다 -- 사회봉사를 위한 자기희생을 가장한 가면으로......하지만, 그는 그런 내면적인 갈등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이 이미 체육관의 스윙 도어를 밀고 홀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녀는 벽을 등지고 나란히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약간 멋적은 표정이었다. 타이트한 스커트에 짧고 보기 좋은 짙은 녹색 저지천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미끈한 다리는 아름답게 햇볕에 그을려,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매끄러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므로 나일론 스타킹을 신고 있는 건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가 들어가자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 든든히 여기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우유색의 긴 머리칼이 그녀의 볼 위에서 사르륵 흔들리더니, "안녕." 하고 약간은 부끄러운 듯,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같은 헌혈자로서의 친근감에서 나온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멋적은 웃음을 띠고서, 창틀에 교과서와 노트 묶음을 올려놓고는 그녀에게서 약간 거리를 둔 의자에 가서 걸터앉았다. 키티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좀 이른 것 같네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나 봐요. 이런 일로 기다려야 하다니. 이런 곳에 처음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도미니크는 약간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대답했다. "나도 처음이랍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곧 그는 자기가 오해를 했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이따금 남을 위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답니다. 하지만 별 재주가 있어야 말이죠. 그러나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면 쉬울 것 같더군요. 그쪽도 그런 양심적인 동기에서 왔겠죠?" 그녀는 입가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꽤나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도미니크는 햇빛을 받아 얼음이 녹듯, 굳었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마음이 움직였나 봅니다." 그는 멋적은 웃음으로 말을 얼버무리며 말했다. "학교에서 돌아가려던 참에 여기에 헌혈봉사대 차가 서 있는 게 보여서요. 왜 그런지 헌혈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실은 우리 아버지가 경찰관이거든요. 그래서 -- " "어머, 그래요?" 키티가 감동적인 투로 말했다. 큼직한 눈이 더욱 크게 휘둥그래졌다. 그 눈동자는 정확히 말해서 오랑캐꽃색이 아니라, 그보다는 약간 갈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 형사예요." 도미니크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는, 필요 이상의 말을 한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형사라고 하면 듣기는 좋으나, 군(郡) 경찰 범죄수사관의 일상생활은 권태로움밖에 없었다. "어머!" 키티는 존경과 횐희가 뒤섞인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난 더욱 그쪽과 친해져야겠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요? 주말에는 여기저기에 교통이 제한되고, 시내 중심에서 1마일 이내는 모두가 노상주차가 금지되잖아요? 당장에라도 교통위반으로 걸릴 것만 같아 겁이 난다고요." 그녀는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농담이 지나쳤나? 하지만 왜 이런 수다를 떠는지 이해를 해야 해요. 실은 곧 피를 뽑힌다는 것이 게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하여간 술병마개를 따는 것처럼 당할 테니 좋은 기분은 아니잖아요?" "나도 속으로는 무서워요." 도미니크가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 자신은 피를 뽑는다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단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그렇게 대답했기 때문에 그녀가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적인 기지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상냥스러운 표정을 의아하다는 듯이 짓더니 곧 생긋 웃었다. "어머, 그렇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쪽이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네요. 만일 내가 혈액검사를 하기 위해 귓불을 딸 때 비명을 지른다면, 그쪽도 마찬가지로 비명을 질러 줄 건가요? 그러면 겁쟁이는 나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위로가 될 거예요, 틀림없이." "아니, 내가 먼저 비명을 지를지도 모릅니다." 도미니크는 환희와 당혹감으로 가슴이 부듯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안쪽의 문이 활짝 열리며, 약간 뚱뚱한 간호사가 홀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서 말했다. "어머나, 이렇게 일찍 두 분이나 기다리고 계시네! 고맙기도 해라." 간호사답지 않은 호들갑스럽고도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결심이 서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미라서." 키티는 웃음을 십어삼키듯이 말을 받았다. "그래요? 그럼, 시작합시다. 들어오세요." 두 사람은 나란히 희생양을 기다리는 제단으로 들어갔다. 좁은 조립식 침대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젊은 간호사 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테이블을 앞에 놓고 장부를 뒤적이던 나이든 간호사가 테없는 안경 너머로 그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서 오세요. 성함은?" 그녀는 활발하게 그렇게 말하다가 키티를 알아보더니, "아, 알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명단에 있는 이름 한 개를 체크했다. "당신 같은 젊은 분이 앞장서 주시니 고맙네요." 그 간호사의 태도로 보아, 키티는 상당한 명문집 딸이라는 짐작이 갔다. 생각해 보니 커먼 기어를 타고 다닐 만한 여성이 그렇게 흔할 수는 없다. 그 나이든 간호사가 단 한 번이라도 이름을 말해 주면 좋을 텐데......그가 명단의 이름을 거꾸로나마 읽으려고 몸을 내밀었을 때, 엷은 하늘빛의 눈이 반짝 빛나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이름은?" 도미니크는 이름을 댔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짐작한 바를 재빨리 확인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학생 이름은 여기에 실려 있지 않은데? 예약을 하지 않았지?" 그녀는 그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딱딱하게 살피는 듯하던 표정이 갑자기 관대하게 웃는 얼굴로 변했다. "네, 그냥 지나가다가 -- "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나무라듯 손가락을 들이대고, 묘하게도 친밀하고 단호한 투로 말했다. "학생은 아직 18살도 되지 않았잖아? 규칙을 몰라요?" "난 이미 16살이라고요."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곧장 그의 나이를 알아보고는, 마치 길에서 호외 돌리는 사람처럼 큰소리로 떠들어댄 것이 얄미웠다. 그녀는 18살이라는 나이를 젖비린내가 난다는 투로 말했으므로, 16살은 마치 갓난아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불과 1주일 전에 만 16살이 되었을 뿐이라는 숨겨진 사실이 그의 입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겁나는 여자는 그를 한번 보기만 하고서도 그런 사실을 밝혀냈으니, 그것으로 또 한 번 그를 몰아세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나는 16살부터 60살까지로 생각했는데." 하고 그는 어리벙벙한 투로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18살부터 65살까지야. 네 마음가짐은 기특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의 피를 뽑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 않아. 성장에 지장이 있으니까. 자, 집에 가서 2년 뒤에나 와요. 단, 그때도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젊은 간호사가 낄낄 웃었다. 키티조차도 윤기나는 긴 머리칼에 가려진 저쪽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를 비웃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굴욕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헌혈의 최소 나이가 16살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전에는 16살로 알았는데?"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 안됐네.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18살이었어. 하지만 뭐 기분나빠 할 것 없어 -- 어리다는 건 조만간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그는 이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키티는 침대 위에서 간호사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풀이 죽어 문 쪽으로 걸어가는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도미니크는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녀에게 작별의 인사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키티가 그의 등뒤에서 호소하듯 말을 걸었다. "그냥 가지 말아요! 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차로 바래다 줄께!" 어린아이가 응석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일부러 그에게 응석을 부려, 그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굴욕감을 거두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발길을 돌린 그의 눈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그녀가 생각한 것이 적중한 것이다. "이리로 와서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을래요? 피뽑는 걸 잊고 싶으니까." 그녀가 그렇게까지 채혈에 겁을 먹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키티와 같은 여성에게는 그런 독선이 허용되어도 좋았다. "원하신다면 그러지요." 그는 다소 자신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수간호사 같은 나이먹은 간호사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렇게 협조적인 아이를 쫓아내는 것도 뭣하니까." 도미니크는 당신 같은 여자야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행동은 잠깐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는 뼈저린 모욕이었다. 하지만 키티가 불러주었으므로 이미 그까짓 수간호사의 말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 이리로 와요." 젊은 간호사가 키티의 침대 곁에 의자를 끌어다 놓으며 말했다. "여기에 앉아 말동무 해드려요. 이따가 맛있는 홍차를 갖다 드릴 테니." 도미니크는 의자에 앉았다. 키티는 점차 자기의 피로 채워져 가는 병에서 애써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녀가 정말로 피를 뽑는 것에 겁을 집어먹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 성싶었다. 그녀는 킥킥 웃음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간호사의 모습이 뒤로 돌아갔을 때 재빨리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사람들이 내 피를 말릴 생각인가 봐요." 이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확 뒤바뀌었다.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웠으며, 각기 맡은 일로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간호사들이 다소 과장되게 생각해서 그녀를 죽이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마음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이끌려 웃음을 띄우면서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정말 16살부터는 헌혈을 해도 되는 나이로 알고 있었습니다." "알 만해요. 나는 나이 제한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일리는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내가 직접 보기가 겁이 나는데." 그 역시 그걸 확인해 보는 것은 꺼림칙했다. 그녀의 상아색 팔에서 그녀의 피가 천천히 빨려 나간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조금 남은 것 같습니다." 그는 건성으로 말했다. "아, 이제 끝난 모양입니다. 홍차를 갖고 오는군요." 그 홍차는 대단히 진하고 단데다가, 연유를 넣어 탁한 적갈색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만 남자 키티는 상체를 일으켜 새롭게 붕대를 감은 팔을 갑갑한 듯 구부리고서 찻잔을 입으로 갖고 가 한 모금 맛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이렇게 단 건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은 금방 피를 뽑은 뒤니까 이런 게 몸에 좋지 않을까요? 기운을 복돋우기 위해서." "난 전혀 내 몸에서 무엇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키티는 의외라는 듯이 붕대를 보고 나서, "저 병에 든 것이 대체 뭔지 이상할 정도예요. 그쪽은 혹시 맥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고 그의 멍해진 시선을 알아차리고서 급히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더욱더 당혹감을 느끼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티라는 여자를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사실 그는 그녀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녀가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것과, 전에 보트 클럽의 테라스에서 목격한,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뿐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인사가 늦었지만, 내 이름은 키티 노리스. 별로 대단한 이름은 아니지만, 노리스 맥주의 딸이랍니다." 마치 자기 자신은 벌써 익숙해졌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의심스러울지도 모를, 타고난 가벼운 신체적 결함을 설명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 그러세요?" 도미니크는 일단 그렇게 대꾸를 하고는, 갑자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도대체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이다. 맥주회사의 여자상속인인 캐서린 노리스라면 자주 지방신문의 사교란에 오르내리고 있으니만큼, 가끔은 그녀의 사진을 보았을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사진들은 그녀를 충실하게 촬영한 것이 못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야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곧 알아보았을 텐데......아마이저스 에일사(社)의 독점판매조직 외에, 이 군(郡)의 술집 간판 중 거의 3분의 1은 그녀의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마이저스의 아들과 약혼했다는 소문도 들은 것 같은데......? 도미니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그가 신문 스크랩을 만드는 습관에 지방 사교계의 결혼이나 약혼 같은 기사는 들어 있지 않았고, 또 두 회사의 합병이 어떤 사정으로 유산되었다는 보도도 그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사실만으로 충분했고, 그 전후 사정 같은 건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멍청해서 몰랐습니다. 나는 도미니크 펠스라고 합니다." 그는 어른스럽게 말했다. "자, 건배해요, 도미니크!" 그녀는 그 달착지근한 홍차 잔을 들어올렸다. "그전에는 헌혈한 다음에 기운을 차리게 하기 위해 스타우트(영국제 검은 맥주)를 마시게 했다나 봐요. 셸레이 아저씨에게서 들은 적이 있거든요. 어쩐지 속은 것 같네." "그건 노리스의 스타우트가 아닌가요?" 도미니크가 엉거주춤하게 농담을 해봤다. 그런데 그게 대성공을 거두어, 그녀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어머, 세상에! 두손들었어요." 그녀는 박차듯 침대에서 내려와 손목 근처까지 흘러내린 붕대를 거칠게 풀어 내동댕이쳤다. 그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며 이젠 됐다고 중얼거렸다. 전용 버스가 도착하고, 헌혈 지원자들이 줄을 이어 교정에 내려서고 있었다. 9월달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밤의 장막은 벌써 짙어져 있었고, 더구나 건조한 냉기가 주위에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커먼 기어에 올라타고는 아마 열심히 -- 하지만 무관심하게 -- 손을 흔들고 자기 갈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혼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에 흔들리며 집으로 가게 되겠지. 그리고는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키티는 차에 올라타자 운전석에서 손을 뻗어, 반대쪽 문을 열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모시면 되지요?" 그녀는 그녀의 호의를 어찌하면 될지 잠시 망설였다. 혹시 그녀에게 실례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꼴깍 침을 삼켰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은 바로 저기에 있는걸요." "어머나, 정류장에서 먹고 자고 하나 봐?" 키티는 일부러 딴전을 폈다. "아니, 거기서 버스를 타는 겁니다." "자, 어서 타고, 집주소를 말해 줘요. 그렇게 서 있기만 하니, 내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투네. 이런 차 타본 적 없어요?" 그는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플라스틱 커버를 씌운 시트에서 금빛 구름이 -- 영광의 구름이 -- 피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옆에 앉은 여인은 천상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차는 너무나 훌륭했다. 키티는 시동을 걸고서 관목 쪽으로 후진을 했다. 전용 버스가 앞을 막고 서 있어서 그대로는 차를 돌릴 수가 없었다. 관목 숲이 차 뒤쪽의 어둠 속에 검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진등을 켜고서 공간의 넓이를 확인한 다음, 도미니크의 활기 넘치는 자부심과 그녀에 대한 기대에 응하듯 단숨에 차를 돌려, 전용 버스 뒤를 스치듯 빠져 나와서는 화살처럼 교문 쪽을 바라보고 달렸다. 차는 하워드 가(街)를 질주하다가 교통신호 앞에서 속도를 늦추었다. "그쪽 주소 가르쳐 주지 않을 거예요?" 키티가 말했다. 그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억제하기 어려운 기쁨에서 굳은 혀놀림으로 자기 집 주소를 말했다. "코마퍼드는 곧장 가면 별로 멀지도 않겠네. 우리 돌아가기로 해요." 그녀는 방향지시등을 켜고서, 아름다운 손짓으로 뒤차로 하여금 앞으로 가라고 신호를 했다. 그 차의 운전사는 커먼 기어의 뒷바퀴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큰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던 도미니크는 키티에게 편든다는 생각에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키티는 알겠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늘 그렇다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후진등을 껐다. "난 늘 이 모양이야. 이번에 차를 살 때는 자동점멸장치가 달린 걸로 사야지. 그쪽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요. 나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늘 조심해요. 기억력이 둔한 편은 아닌데도, 자동차에 대한 거라면 묘하게도 늘 잘 잊거든. 후진등만 그러는 게 아니고, 휘발유도 그래요. 휘발유를 떨어뜨린 적이 일년에 몇 번이나 있는지는 부끄러워 이야기도 못할 지경이라고요." "휘발유 표시기가 달려 있을 텐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계기판 위를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아, 그건 예비 탱크의 표시기예요. 나는 그걸로 바뀌었을 때 정확히 1갤런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붉은 등이 켜져도 안심을 하거든요." "그게 뭐 나쁩니까?" 도미니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장단점이 있지요. 먼 거리를 갈 때는 확실히 도움이 돼요 -- 다음 주유소까지 어느 정도의 거리가 되는지는 모르더라도 기름이 떨어지면 예비 탱크의 것을 쓰다가, 처음 나타나는 주유소에서 꼭 탱크를 채우게 되니까. 하지만 쇼핑이나 다른 일로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예비 탱크로 전환되고서도 여기저기에 얼마든지 주유소가 있으니까 안심을 해버린다니까요. 그러다가 그만 하이 가(街) 한복판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거나, 골프장으로 가는 산속에서 서버리곤 하는 거예요. 여러 번 애를 먹고도 버릇을 고치지 못해 나 스스로도 정나미가 떨어진답니다. 그전 차에는 휘발유 표시기가 달려 있었지만, 그때부터 통 그걸 보는 걸 잊곤 해서 표시기 같은 거 있으나마나예요. 정말 그러고도 차를 몰고 다니니......" "하지만 운전은 아주 잘하시는데요." 도미니크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의 자학적인 말투가 굳게 닫혔던 그의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어머, 정말?" "정말입니다. 운전이 능숙하세요." "어머 -- 그런가? 하여간 듣기 좋으네. 이런 차 좋아하나요?" 차에 관해서라면 그가 좋아하는 화제이기도 했고, 더구나 키티의 차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는 갑자기 말수가 늘었다. 그들은 코마퍼드까지 가면서 여러 가지 스포츠 카에 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모두 이야기했다. 마침내 그녀가 그의 집 앞에서 차를 세웠을 때, 그는 눈에 익은 주위의 풍경을 알아보고는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그녀와 지낸 즐겁고 자유스러웠던 얼마 동안의 시간이 마치 한 순간의 꿈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난 작은 기적을 감사해야 했다. 그는 허전한 마음으로 천천히 차에서 내려, 이 굉장한 체험을 시시하게 끝내지 않기 위한 그럴듯한 말을 생각하면서 그녀의 창가에 엉거주춤 섰다. "일부러 바래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감사를 해야지 -- 그쪽과 함께 드라이브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으니까. 그쪽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피도 나누어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걸요." "기분상한 일은 없습니까?" 고작 그런 말이 나왔다. 키티의 옷소매에 붕대의 실오라기가 한 가닥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에 끼고서 창밖으로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미도 없이 웃었다. "아주 좋은 기분. 혹시 나 혈압이 높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피를 뽑으니 아주 개운해졌거든요." 잠시 이야기가 끊어졌다. 엷은 레이스의 커튼이 쳐진 창으로부터 불빛이 새어나와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비치고 있었다. 눈이나 이마는 어두운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꼭 다문 입술, 그 양끝으로 야무지게 패인 작은 골, 얼마나 촉촉하고 야무진 입매인가. 그건 아주 똑똑하고, 그러면서도 상처받기 쉬운, 슬픈 그림자가 드리운 입이기도 했다. 그 입매가 천천히 흐트러지며 작별의 미소로 바뀌는 것을 보기만 하고도 도미니크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환희의 핵이 불덩어리처럼 커졌다. "그럼, 조심해 가십시오." "안녕. 다음 헌혈 때 또 만나요." 키티는 쾌활하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눈썹 위에 대고서 손을 흔들려고 한 것인지 고개를 까딱하려고 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몸짓을 남기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은 채 차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맥박이 귓속에서 우레처럼 쿵쾅거리고, 치통보다도 예리하고 격한 무엇인가가 가슴속을 치밀고 올라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녀가 예고한 것보다도 빨리, 또한 판이한 상황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때 문제가 된 피는 그의 피도, 그녀의 피도 아니었으며 -- 또한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른 뒤였다. |
첫댓글 기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