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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下進士楊墩上言于政院曰: "雖無告狀人, 若繼後的實則依他例繼後事, 判付于此公事可也。"【其上言曰: "兄楊蕃守以臣之子繼後事, 告狀後未及閱實, 而身故。 前者, 遂安君 償(𧭢)等以一邊父母俱歿矢, 亦上言, 特蒙繼後, 請依此例, 繼後。"】 仍傳曰: "繼絶祀, 乃貴賤所重也。 以此上言者, 常常有之, 必以《大典》言: ‘兩家父, 同命立之。’ 故, 如是。 予意以爲, 雖無告狀人, 繼後的實則許令繼後事, 若一議定, 禮曹自可據此爲公事, 而上言者, 亦不爲紛擾。 其以此意, 議于合坐事, 招政府郞官言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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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楊蕃守수以臣之子繼後事, 告狀後未及閱實, 而身故。 前者, 遂安君 償(𧭢)等以一邊父母俱歿矢시, 亦上言, 特蒙繼後-> 兄楊蕃妻처以臣之子繼後事, 告狀後未及閱實, 而身故。 前者, 遂安君 償(𧭢)等以一邊父母俱歿人인, 亦上言, 特蒙繼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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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燕石) 유언호(兪彥鎬)생년1730년(영조 6)몰년1796년(정조 20)자사경(士京)호칙지헌(則止軒)본관기계(杞溪)시호충문(忠文)특기사항윤봉구(尹鳳九)의 문인. 노론(老論) 준론(峻論). 정조(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
燕石册七 / 墓碣銘 / 雙梅堂楊公墓碣銘
湖南之淳昌。有瑞龍祠。祠。一鄕之賢者楊氏三世與焉。其一雙梅堂。諱士敏。字仲訥也。公南原人。系出高麗知郡事敬文。更九世。大提學以時。直提學首生。最顯。直學早亡。其妻李氏負遺孤南走。以全其節。子孫仍家于淳昌。後三轉而爲縣令子瞻。於公高祖也。曾祖培。與其弟墩。隱德不仕。幷享于瑞龍。祖公俊。兵曹正郞。父洪。司僕副正。母順興安氏。引儀克諴其考也。公爲人端實簡重。識高而行敦。飭躬以禮。出言無僞。平生致力。秪在人倫日用之常。副正公鱞居十五年。不畜㜎侍。人或勸之則曰。我有子孝。使我安其服食寢處。奉先接賓。無不如我志。安用妾御。伯兄夙嬰奇疾。無適嗣。家人願擇羣弟之子以爲子則曰。吾病廢。惟賢弟是賴。失病所在。凡養生事亡。一以委之。代我子職。我雖無子。父母則有子。與其子弟之子。曷若以父母之子爲父母後乎。旣而兄卒。公勉承宗事。奉其嫂惟謹。事無小大。不裁於嫂則不敢行。及嫂歿。弗忍以其兄。祔食屬兄之庶子。尸其祀。當析産。均施曲當。有人所不及者。勸兩弟從師爲學。其論知行義欲之分。精深切當。可驗其心得躬行。不以口耳爲也。平居矜持。無遽色慢容。斤斤禮律之內。以身爲䂓度。故子弟興焉。鄕黨信之。所居有湖山之勝。當階手植雙梅。因以自號。時與會心人。絃琴觴酒。婆娑燕嬉。蒼顔皓髮。宛若山澤之臞。望之翛然也。噫。公含章自貞。不求聞達。竟以布衣終。然其孝悌化于家。忠信孚于人。慶祿施于子孫。宜乎其世享俎豆。以式一邦之士也。公生于嘉靖辛卯。卒于萬曆己丑。葬在郡東瑞龍洞負亥之原。前後配金氏梁氏。生七男五女。男時省生員,時惕,時鼎文都事,時益生員,時命,時順,時敬。女李允男,房德驊,南恪生員,金宣察訪,鄭聖敏妻。後三男一女。梁氏出。孫曰汝栢參奉,汝春,汝栝,汝橚,汝筠,汝筍,汝楫司議,汝植,汝欖,汝楗,汝楷,汝晳,汝相,汝檖,汝機武科,汝篁。曾孫曰賢擧,賓擧,鵬擧,雲擧參奉,振擧,禹擧,文擧贈承旨,憲擧,善擧,德擧,八擧,載擧,君擧,乕擧。玄孫不盡錄。而世基進士。鼎基邃經學。配享于公。來孫進士會榮,鎭禹。俱以文行有重名。昆孫夢寅。亦登文科。可見其源深而流長也。會榮,曾孫得煕。步行七百里。求予銘。銘曰。
有皠者梅。在彼中庭。君子以之。素履之貞。禔身淑後。懿厥典刑。歿而祭社。三世惟馨。勿踐勿伐。猗鄕先生。
연석 책7 / 묘갈명(墓碣銘) / 쌍매당 양공 묘갈명〔雙梅堂楊公墓碣銘〕
호남(湖南) 순창(淳昌)에 서룡사(瑞龍祠)가 있다. 사당은 한 고을의 어진 이를 모신 곳으로, 양씨(楊氏) 삼대가 배향되어 있다. 그중 한 사람인 쌍매당(雙梅堂)의 휘는 사민(士敏)이고, 자는 중눌(仲訥)이다.
공의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선계가 고려 지군사(知郡事) 경문(敬文)에게서 나왔다. 9대를 지나 대제학 이시(以時)와 직제학 수생(首生)이 제일 현달하였다. 직제학이 일찍 별세하자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남은 고아를 업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그 정절(貞節)을 온전히 하였고, 자손들이 계속 순창에 거주하였다. 3대를 내려와 현령(縣令)을 지낸 자첨(子瞻)은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 배(培)는 아우 돈(墩)과 함께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서룡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조부 공준(公俊)은 병조 정랑을 지내고, 아버지 홍(洪)은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을 지냈다. 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니 인의(引儀) 안극함(安克諴)이 그 부친이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진실되며 간결하고 중후하였다. 식견이 높고 행실이 돈후하여 예(禮)로써 몸을 단속하였고, 말을 할 때 거짓이 없었으며, 평생 힘을 쏟은 것은 단지 인륜과 일상생활의 상도(常道)에 있었다. 부정공(副正公)이 부인을 잃고 홀로 지낸 15년 동안 소실(小室)을 두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혹 권유하면 이르기를 “나에게 효성스러운 아들이 있어, 나에게 그 옷ㆍ음식ㆍ잠자리를 편안하게 해 주고, 조상을 받들고 손님을 접대함이 내 뜻과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첩의 시중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큰형이 일찍이 기이한 병에 걸린 데다 대를 이을 적자가 없어, 집안사람들이 동생들의 아들 중에서 골라서 후사로 삼기를 바랐는데, 이르기를 “내가 병으로 폐인이 되었는데 오직 어진 동생 덕분에 몸에 병이 있는지조차 잊어버렸고, 살아 계신 분을 봉양하고 돌아가신 분을 섬기는 모든 일을 일체 맡아 내 자식 된 직분을 대신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 비록 아들이 없지만 부모님께서는 아들이 있으니 아우의 아들을 자식으로 삼기보다는 차라리 부모님의 아들로 부모님 후사를 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형이 죽었는데 공이 힘써 종중의 일을 이어 맡았다. 그 형수를 받드는 데 오직 삼가서, 큰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형수에게 재가를 받지 않으면 감히 행하지 않았다. 형수가 죽자 차마 자기 형을 부식(祔食)할 수 없어 형의 서자(庶子)에게 맡겨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재산을 나눌 때에 똑같이 합당하게 나누어 남들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으며, 두 동생에게 스승을 좇아 배우도록 권면하였다.
그 지식과 실천, 의리와 사욕의 구분을 논할 적에 정밀하고 타당하여,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소 행하여 구이(口耳)로 하지 않음을 증험할 수 있었다. 평소 몸가짐을 엄중히 하여 당황한 기색이나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예법 내에서 밝게 살펴 몸소 법도가 되었다. 때문에 자제들이 흥기하였고, 향당(鄕黨)에서 신뢰하였다.
살던 곳에 호산(湖山)의 좋은 경치가 있었는데, 섬돌 가에 직접 매화나무 두 그루를 심고서 이를 자호(自號)로 삼았다. 때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거문고를 타고 술 마시며 너울너울 춤추며 즐겼다. 백발의 늙은 모습이 마치 산택(山澤)의 야윈 신선과 흡사하여 바라보면 초탈한 듯하였다. 아, 공은 아름다움을 감추고 스스로 정도를 지켜 알려지고 현달하기를 구하지 않아 결국 포의(布衣)로 생을 마쳤다. 그렇지만 그의 효성과 공경으로 집안이 교화되고 충성과 신의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았으며 경사와 복록을 자손에게 끼쳤으니, 대대로 제수를 올려 한 나라 선비들의 본보기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공은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에 태어나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에 별세하였다. 군(郡)의 동쪽 서룡동(瑞龍洞) 해좌(亥坐 남동남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전배(前配) 김씨(金氏)와 후배(後配) 양씨(梁氏)가 7남 5녀를 낳았다. 아들은 생원(生員) 시성(時省), 시척(時惕), 문과에 급제하고 도사(都事)를 지낸 시정(時鼎), 생원 시익(時益), 시명(時命), 시순(時順), 시경(時敬)이고, 딸은 이윤남(李允男)ㆍ방덕화(房德驊)ㆍ생원 남각(南恪)ㆍ찰방 김선(金宣)ㆍ정성민(鄭聖敏)의 처인데, 뒤의 세 아들과 딸 하나는 양씨 소생이다.
손자는 참봉 여백(汝栢), 여춘(汝春), 여괄(汝栝), 여숙(汝橚), 여균(汝筠), 여순(汝筍), 사의(司議) 여즙(汝楫), 여식(汝植), 여람(汝欖), 여건(汝楗), 여해(汝楷), 여석(汝晳), 여상(汝相), 여수(汝檖), 무과에 급제한 여기(汝機), 여황(汝篁)이다. 증손은 현거(賢擧), 빈거(賓擧), 붕거(鵬擧), 참봉 운거(雲擧), 진거(振擧), 우거(禹擧), 승지에 추증된 문거(文擧), 헌거(憲擧), 선거(善擧), 덕거(德擧), 팔거(八擧), 재거(載擧), 군거(君擧), 호거(乕擧)이다. 현손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나, 진사 세기(世基)와 경학에 정통한 정기(鼎基)가 공을 배향하였고, 내손(來孫) 진사 회영(會榮)과 진우(鎭禹)는 모두 문학과 행실로 명성이 높았으며, 곤손(昆孫) 몽인(夢寅, 1695~?)도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그 근원이 깊어 흐름이 길게 이어짐을 알 수 있다. 회영의 증손인 득희(得煕)가 700리 길을 걸어와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흰 매화 / 有皠者梅
저 뜨락 안에 있으니 / 在彼中庭
군자가 이를 본받아 / 君子以之
평소의 행실 곧았네 / 素履之貞
몸을 편안히 하여 후손 맑게 하니 / 禔身淑後
그 법도 아름다웠고 / 懿厥典刑
죽어서 사당에 배향되었으니 / 歿而祭社
삼대가 향기롭도다 / 三世惟馨
밟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 勿踐勿伐
아 향선생이시니라 / 猗鄕先生
| 李有謙 | 1586 | 1663 | 牛峯 | 受益 | 晩悔 |
| 楊培 | 14?? | 15?? | 南原 | 而厚 | 龜巖 |
| 楊墩 | 1461 | 1532 | 南原 | 君厚, 亨叔 | 梅堂 |
| 楊士敏 | 1531 | 1589 | 南原 | 仲訥 | 雙梅堂 |
광산김씨대종중
작성자 최고관리자 24-08-27 00:08 조회501회 댓글0건
●소암(小巖) 김정언(金廷彦) 행장
小巖公行狀 / 後孫 秉來 謹撰
公의 諱는 廷彦이요 字는 公美요 諱는 小巖이다.
麗朝末葉에 文肅公 諱周이 있고 四傳하여 大司憲公 諱 德龍에 이르러 羅州에 始居하였고 應教公 諱 孝忠이 公의 曾高祖가 된다.
考의 諱는 軾이요 號는 酒隱이니 己卯에 同州進士十一人으로 더불어 趙靜菴先生을 疏救하였다.
公이 弘治癸丑(1493,성종24)에 出生하여 氣像이 偉大하고 精神이 清淑하며 庭訓을 服承하고 文章이 早詣하여 經傳을 博通하고 金河西 麟厚와 金誠齊 若默으로 더불어 尹氏의 門에 婭遊하여 道學이 並稱하고 契好가 甚篤하니 時人이 尹氏東床三龍이라 稱하고 義理의 學問을 講究하여 後進生徒가 날로 많으니 當世에 河西 誠齋 小巖公으로 三先生이라 稱하였다.
丙子(1516,중종11)에 生員에 오르고 乙卯(1555,명종10)七月二十九日에 卒하니 羅州榮山面向榮山大峙坐原에 安葬하다.
配는 驪州尹氏니 甲寅生이요 壬寅十二月二十五日에 卒하였고 父는 縣監 任衡이요 祖는 判官 建華이다。
墓는 雙封이요 三男五女가 있으니 長男은 深이니 宣務郎이요 次는 洪이니 進士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요 女는 高閔 李紳 許續 朴士壽 楊士敏의 妻다.
公이 家庭에서 先君에게 靜庵의 學을 받고 河西와 從遊하여 寒喧堂 道를 들어 德器가 成就하니 淵源의 所在를 이로 미루어 알만하다. 그러나 世代가 너무 久遠하고 兵火를 많이 겪어 文獻이 無微하니 애석한 일이다.
김정언(金廷彦)
[생원]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1위(61/100)
| UCI | G002+AKS-KHF_13AE40C815C5B8U9999X0 |
| 자(字) | 공미(公美) |
| 본인본관 | 광산(光山) |
| 거주지 | 나주(羅州) |
|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 부모구존 | ○○하(○○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金○○)
[출전] 『정덕11년병자식생원진사방(正德十一年丙子式生員進士榜)』(개인)
| 楊應秀 | 1700 | 1767 | 南原 | 季達 | 白水, 學古齋 |
[주-D001] 호남(湖南) …… 있다 : 서룡사는 지계서원(芝溪書院)으로, 1788년(정조12) 순창 유림들의 공의(公議)에 의해 구암(龜巖) 양배(楊培, 1586~1663), 쌍매당(雙梅堂) 양사민(楊士敏, 1531~1589),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 1700~176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01년 양배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구암정(龜巖亭)을 세웠으나 서원은 재건하지 않아, 지계서원 터만 남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주-D002] 직제학이 …… 하였고 : 1379년(우왕5)에 양수생(楊首生)이 죽은 뒤에 가족들에게 재가를 종용받은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며 남원 교룡산 아래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씨가 남원에 내려와 자리를 잡자마자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운봉으로 쳐들어오자 아들 양사보(楊思輔)를 데리고 순창군 동계면으로 이주하여 가문을 이었다. 양사보는 조선 태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함평 현감을 지냈다. 1467년(세조13) 나라에서는 이씨에게 정려를 내려 주었는데, 현재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남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주-D003] 부식(祔食) : 이른바 ‘종조부식(從祖祔食)’으로 할아버지를 따라서 제삿밥을 함께 받아먹는다는 뜻으로, 망자(亡者)를 조묘(祖廟)에 합제(合祭)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서자는 성인이 되기 전에 일찍 죽은 자기의 자식이나 후사를 두지 못한 자를 제사 지내지 못한다. 그러한 자들은 종가(宗家)의 조묘에 합제한다.[庶子不祭殤與無後者, 殤與無後者, 從祖祔食.]”라는 말이 나온다.[주-D004] 구이(口耳) : 구이지학(口耳之學)의 준말로, 천박한 공부를 뜻한다. 《순자》 〈권학(勸學)〉에 “소인이 배우는 것을 보면, 귀로 들어왔다가 금방 입으로 나가 버리고 만다.[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D005] 밝게 살펴 : 원문의 ‘근근(斤斤)’은 《시경》 〈집경(執競)〉에 나오는 말로, “저 성왕과 강왕으로부터 문득 사방을 소유하시니 그 밝게 살피셨다.[自彼成康, 奄有四方, 斤斤其明.]” 하였는데, 모전(毛傳)에서는 “‘근근’은 밝게 살피는 것이다.[斤斤, 明察也.]”라고 하였다.[주-D006] 산택(山澤)의 야윈 신선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천자에게 아뢰기를 “산택 사이에 거주했다고 전해지는 역대 신선들은 형용이 몹시 파리하니, 이것은 제왕이 바라는 신선이 아닙니다.[列仙之傳居山澤間, 形容甚癯, 此非帝王之仙意也.]”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전하여 모습이 야윈 은자를 가리킨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주-D007] 아름다움을 …… 지켜 : 《주역》 〈곤괘(坤卦) 육삼(六三)〉에서 온 말이다. 함장(含章)은 사람의 내면에 품은 미덕(美德), 또는 안으로 미덕을 품고 이를 외부에 나타내지 않는 것을 뜻한다.[주-D008] 제수를 올려 : 원문의 ‘조두(俎豆)’는 제사의 제물을 담는 그릇으로, 조는 고기를 올려놓는 궤이고 두는 포를 담는 기구이다. 여기에서는 양사민이 서룡사에 배향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주-D009] 문과에 급제하고 : 양시정은 1601년(선조34)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624년(인조2)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仁祖 2年 甲子 式年試》[주-D010] 몽인(夢寅)도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 양몽인(梁夢寅, 1695~?)의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즙(士楫)이다. 양진거의 증손이다. 양몽인은 1735년(영조11) 2등 2위로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5년 뒤인 1740년 증광시에서 병과 24위로 급제하였다. 《國朝 司馬榜目 英祖 11年 乙卯 增廣試》 《國朝 文科榜目 英祖 16年 敬身 增廣試》
| 양몽인(梁夢寅, 1695~?)의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즙(士楫)이다. ㅡ>양몽인(楊夢寅, 1695~?) *양몽인(楊夢寅) [생원] 영조(英祖) 11년(173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2등(二等) 2위(7/100) 양몽인(楊夢寅) [문과] 영조(英祖) 16년(1740) 경신(庚申) 대증광시(大增廣試) 병과(丙科) 24위(34/51) 자(字) 사즙(士楫) 생년 을해(乙亥) 1695년 (숙종 21) 합격연령 46세 본인본관 남원(南原) 거주지 순창(淳昌)【補】(주1) |
[주-D011] 그 …… 이어짐 : 백거이(白居易)의 〈해주자사 배군부인 이씨 묘지명(海州刺史裴君夫人李氏墓志銘)〉에 “근원이 먼 자는 흐름이 길며 뿌리가 깊은 자는 가지가 무성하다.[夫源遠者流長, 根深者枝茂.]”라고 한 말이 보인다.[주-D012] 회영의 증손인 득희(得煕) : 양회영(1681~1767)의 본관은 남원, 자는 원득(元得), 호는 삼성재(三省齋)이다. 양문거의 손자이며, 양이기(楊履基)의 아들이다. 양회영은 1747년 6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양득희는 양회영의 손자인 양세후(楊世垕)의 아들로,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心石齋集 卷28 同中樞楊公墓表, 韓國文集叢刊 續143集》[주-D013] 몸을 편안히 하여 : 원문의 ‘禔身’은 ‘修身’과 같은 말이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수신〉에 “혹자가 묻기를 ‘선비가 어떻게 해야 몸을 평안히 할 수 있습니까?[士何如斯可以禔身?]’ 하니, ‘마음속이 크고 깊으며 외면이 엄숙하고 법도가 있으면 몸을 평안히 할 수 있다.[其爲中也弘深, 其爲外也肅括, 則可以禔身.]’ 했다.”라고 하였다.[주-D014] 삼대(三代)가 향기롭도다 : 《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아름다운 향기가 널리 퍼지는 것과 같아서 신명을 감동시키게 마련이다. 기장과 같은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이 바로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으로, 양배(楊培), 양사민, 양응수 3대가 서룡사에 배향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주-D015] 밟지도 …… 말라 : 《시경》 〈감당(甘棠)〉에 “무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이 초막으로 삼았던 곳이다.[蔽䒥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원래 이 시는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때의 명재상인 소공(召公)이 지방을 순행하며 정사를 베풀 적에 감당나무 아래에서 쉬어 갔으므로 백성들이 소공의 선정을 사모하여 소공이 쉬어 간 나무도 차마 손상하지 못함을 읊은 것으로, 수령의 선정(善政)을 말할 때 쓰이는 고사이나, 여기에서는 서룡사에 배향된 양사민의 행실을 길이 기려야 함을 말한 것이다.[주-D016] 향선생(鄕先生) : 옛날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로 내려온 중대부(中大夫)를 태사(太師)로 삼고 치사한 사(士)를 소사(少師)로 삼아, 향학(鄕學)에서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고 이들을 ‘향선생’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들이 죽으면 서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였다. 《儀禮 士冠禮》 보통 향대부(鄕大夫)였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고을의 노인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고을의 어른으로, ‘쌍매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 양성에 주력했던 양사민을 가리킨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강지혜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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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龜巖) 양배(楊培, 1586~1663), 쌍매당(雙梅堂) 양사민(楊士敏),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 1700~1767)의ㅡ>구암(龜巖) 양배(楊培, 14??~15??), 쌍매당(雙梅堂) 양사민(楊士敏, 1531~1589),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 1700~1767)의
*양사민의 증조 양배는 양돈의 형인데 양돈<楊墩, 1461~1532 南原 君厚, 亨叔 梅堂>이 1461년생이고 양사민이 1531년생이니 주석의 양배 생졸은 오류이다. 이는 같이 모신 이유겸<李有謙 1586 1663 牛峯 受益 晩悔>의 생졸과 같으니 착란이 있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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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집(忍齋集) 홍섬(洪暹)생년1504년(연산군 10)몰년1585년(선조 18)자퇴지(退之)호인재(忍齋), 눌암(訥菴)본관남양(南陽)시호경헌(景憲)특기사항조광조(趙光祖)의 문인. 이황(李滉)과 교유
忍齋先生文集卷之三 / 碑誌 / 有明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洪公墓碣銘 幷序
洪氏出南陽。顯于麗季。搢紳相繼。遂爲望族。有諱德義。官至工曹典書。其孫諱益生。卒官同知中樞院事。寔生水軍節度使諱貴海。節度使生承旨諱泂。娶漢川府院君趙溫之孫司藝衷孫之女。生三子。我先君文僖公爲第二。其季則叔父也。叔父諱彥光。字君夏。生于成化甲辰。年十七。喪我祖考。執喪盡禮。甲子。燕山主追罪曩時名流。禍罹吾門。叔父與先君俱謫海島。丙寅。中廟中興。悉宥無辜。公旣放還。專心學業。丁卯(1507,중종2)。中進士。癸酉。執政者惜公才器。薦爲獻陵參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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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돈(楊墩)
[진사]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위(31/100)
| UCI | G002+AKS-KHF_12C591B3C8FFFFU9999X0 |
| 자(字) | 숙형(叔亨) |
| 본인본관 | 남원(南原) |
| 거주지 | 순창(淳昌) |
|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 전력 | 유학(幼學) |
| 부모구존 | ○○하(○○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양자유(楊子由)[文]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금산군수(行錦山郡守)
[출전] 『정덕2년정묘9월초7일사마방목(正德二年丁卯九月初七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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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양돈(楊墩)
[진사] 성종(成宗) 8년(147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등(○等) ○○위(99/100)
[인물요약]
| UCI | G002+AKS-KHF_12C591B3C8FFFFB1461X0 |
| 자(字) | 군후(君厚) |
| 호(號) | 매당(梅堂) |
| 생년 | 신사(辛巳) 1461년 (세조 7) |
| 합격연령 | 17세 |
| 본인본관 | 남원(南原) |
| 거주지 | 상(未詳) |
|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 부모구존 | ○○하(○○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양자첨(楊子瞻)
[처부(妻父)]
성명 : 정승순(鄭承順)【補】(주1)
본관 : 광주(光州)【補】
[안항(鴈行)]
형(兄) : 양배(楊培)
제(弟) : 양균(楊均)
제(弟) : 양감(楊堪)【補】(주2)
| [주 1] | 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남원양씨]편(699쪽)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 |
| [주 2] | 안항 : 『씨족원류(氏族源流)』 [남원양씨]편(699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
[출전]
『옥천사마안(玉川司馬案)』(1922, 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448]) [본조(本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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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73권, 성종 15년 12월 1일 갑인 3/4 기사 /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최중손·김옥보·이귀존·원승·이난손·안계종·정흥례 등의 고신을 돌려주게 하다
○傳旨吏、兵曹, 還給崔仲孫、金玉寶、李貴存、元昇、李彎孫、安繼宗、鄭興禮、趙貴孫、李仲賢、劉金於、夫介、洪德中、崔得雨、表成美、金仲元、白長守、徐仲生、李繼根、安孝之、趙瑗、崔得淳、楊子瞻、郭敬義、金哲松、鄭之裔、尹碩、安生、河漢祚、金潤德、曺孝元、金舍介、金世守、徐仲江、崔孝貞、尹仁甫、洪哲孫、鄭孝孫、鄭克儉、金巨知、姜渭興、全水山、李培根、金孝末告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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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91권, 성종 17년 5월 2일 병오 5/7 기사 / 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이극돈이 복명하고 안동의 토속과 사민의 실시를 청하니 이를 따르다
○全羅道賑恤使李克墩來復命。 仍啓曰: "興德縣監楊子瞻庸劣無比, 出糴賑民, 盡委下吏, 吏多營私, 懜無所知, 請罷黜。"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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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전집(河西全集) 김인후(金麟厚)생년1510년(중종 5)몰년1560년(명종 15)자후지(厚之)호하서(河西), 담재(湛齋)본관울산(蔚山)시호문정(文正)특기사항김안국(金安國)의 문인
河西先生全集卷之十 / 七言律詩 / 世梅堂 進士楊墩之堂
繞堂高下幾株梅。累世君家手自栽。面目氷霜孤竹聖。筋骸鐵石怪松魁。黃昏影裡吟魂爽。翠羽聲中醉山人。休向後生煩詰果。不應枝幹帶塵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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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西先生全集卷之七 / 七言絶句 / 吹白雲居士赤城韻
聞說江邊好事翁。白雲題詠揭船中。只今爛却沙頭月。夢裏滄波擧眼空。好事翁。指伴仙亭主人楊公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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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吹白雲居士赤城韻ㅡ>차次白雲居士赤城韻
*원문이미지는 취이나 次의 形似오자로 보인다. 원문교감필요
*石川先生詩集卷之七 / 七言絶句 / 次白雲居士韻
*頤齋遺藁卷之二十三 / 傳 / 故處士龜巖楊公,進士梅堂楊公合傳
有白雲居士爲賦赤城詩。金文靖和之曰聞說江邊好事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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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戲答楊廷秀問訊《이소(離騷)》〉
昔誦離騷夜扣舷(석송리소야구현) 옛날에 읽던 이소(離騷)가 밤에 뱃전을 두드리는데
江湖滿地水浮天(강호만지수부천) 강과 호수가 땅에 가득차니 물이 하늘에 떠있네.
只今擁鼻寒窗底(지금옹비한창저) 다만 지금 차가운 창가 아래서 콧소리를 내니
爛却沙頭月一船(난각사두월일선) 모래 위의 달빛에 배 한척이 빛날 뿐이네.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은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임금 재위 기간의 문신이며, 서예가였다. 이 작품은 주희
(朱熹)의 〈戲答楊廷秀問訊《이소(離騷)》〉 두 수(二首) 가운데 하나를 쓴 것이다. (昔誦離騷夜扣舷,江湖滿地水浮天;只今擁鼻寒窗底,爛却沙頭月一船) 이 글씨는 그의 행초서 중에서 큰 글씨로, 윤순의 큰 글씨 행초서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자료적 가치가 높다. 윤순은 17세기 후반 이후의 많은 서예가들과 마찬가지로 필법의 목표를 왕희지(王羲之)에 두었으며, 또한 중국의 육조시대 서풍(書風) 조선 풍으로 을 만들어 가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唐), 송(宋), 명대(明代)의 글씨의 특징을 두루 취하였으며, 특히 명대의 서풍을 자신의 글씨에 깊이 반영하였다. 윤순의 글씨에서 중국 서예가의 흔적과 영향을 찾는다면 북송(北宋)의 미불(米?, 1051-1107)과 명의 문징명(文徵明, 1470-1559), 그리고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을 들 수 있다.
이들 서예가들처럼 날카롭고 가늘고 긴 필치의 구사를 윤순 또한 자신의 글씨에서 보여주고 있고, 이런 특징들이 글씨를 보다 세련되고 감각 있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
(윗 글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져온 글임을 밝힙니다.)
[출처] <열하일기>관내정사(7월 25일) - 그런데 지금 여기에 있는 여러 필적들은 그것과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작성자 배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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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
Kanripo 漢籍リポジトリ : KR4h0143 御選宋金元明四朝詩-清-聖祖玄燁
戲答楊庭秀問訊離騷之句
昔誦離騷夜扣舷江湖滿地水浮天只今擁鼻寒窗底爛却沙頭月一船佛法不怕爛/却禪家語也
觀書有感二首
半畆方塘一鑑開天光雲影共徘徊問渠那得清如許為有源頭活水来
昨夜江邊春水生䝉衝巨艦一毛輕向来枉費推移力此日中流自在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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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済宗 国泰寺派-開山 慈雲妙意 및 국태사파 법맥
[출처] 臨済宗 国泰寺派-開山 慈雲妙意 및 국태사파 법맥|작성자 byunsdd
隆興黃龍無門慧開禪師
[0044b17] 杭州梁渚人。族姓梁。參月林觀禪師。觀令看無字話。經六年。迥無入處。乃奮志自誓曰。若去睡眠。爛却我身。每至困時。廊下行道。以頭向露柱磕。一日在法座邊。忽聞齋鼓聲有省。述偈曰。青天白日一聲雷。大地羣生眼豁開。萬象森羅齊稽首。須彌[跳-兆+孛]跳舞三臺。次日入室。欲通所得。觀遽曰。何處見神見鬼了也。師便喝。觀亦喝。師又喝。自此機用脗合○湻祐六年。奉旨開山護國仁皇寺。上堂。若人識得心。大地無寸土。古人恁麼道。黃龍即不然。若人識得心。大地盡是土○上堂。是非長短耳邊風。切莫於中覓異同。要得八風吹不動。放教心地等閒空。慈受老人。只解順水張帆。不能逆風把舵。黃龍又且不然。是非都去了。是非裏薦取。何故聻。幾度黑風翻大浪。未曾聞道釣舟傾○師晚年倦於槌拂。庵居西湖之上。參學者猶眾。理宗召入選德殿說法。祈雨感應。勑賜金襴法衣佛眼之號(萬壽觀嗣)。
[출처] 臨済宗 国泰寺派-開山 慈雲妙意 및 국태사파 법맥|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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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佛(碧巖錄은 第九六則 趙州三轉語다.)
[출처] 金佛(碧巖錄은 第九六則 趙州三轉語다.)|작성자 혜심
【說話】예로부터 叢林에서 啇量하는 이가 매우 많았으나 거론할 만하지 못한 것은 제외하고 이제 근접한 것 두 가지만 든 뒤에 바른 正意을 밝히겠다. 泥佛이란 진흙이 많으면 부처도 크니 점점 더하는 부처[加加佛]요, 木佛이란 점점 감소하는 부처[減減佛]며, 金佛이란 단번에 주조하야 단박에 이루어지는 부처[一鑄便成佛]다. 이 해석에 두 가지가 있다.
一, 泥佛은 成德의 뜻[義]이니 더하고 더하야 더할 것이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요, 木佛은 斷障義이니 덜고 덜어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며, 金佛은 닦거나 끊음에 떨어지지 않고[不落修斷] 一時에 頓成하는 것이다. 이는 成佛䡄則에 준하야 말한 것이다. 不度水不度火不度爐란 겁내고 꺼리는 곳[所畏憚處]이 있다는 뜻이다. 眞佛內裏坐란 本源自性天眞佛이다.
二, 泥佛은 천 파도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이니[千波競起] 普賢의 자리[床榻]요, 木佛은 평등한 맑은 허공[一亘淸空]이니 文殊의 境界며, 金佛은 毘盧遮那無作果體다. 水는 淸凉義이니 文殊의 지혜[智]요, 不度란 普賢行이 文殊의 智에 비하면 한편으로는[一場] 동떨어진바가 있다[懡㦬]는 뜻이다. 火는 매우 盛하다는 뜻[閙熱義]이니 普賢의 行이요, 不度란 文殊智가 普賢行에 비하면 한편으로는 동떨어진바가 있다는 뜻이다. 爐는 祖師의 풀무[鞴]요, 不度란 毘盧遮那無作果體가 祖師鞴에 비하면 한편으로는 동떨어진바가 있다는 뜻이다. 眞佛內裏坐란 本源自性天眞佛이 衆生心內에 앉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해석도 아직 미흡한 데[未穩處]가 있고, 또 趙州의 뜻도 아니다. 金佛이란 金은 西에 屬하야 죽음[肅殺]을 주관하니[主] 이는 體句요, 木佛이란 木은 東에 屬하야 生長을 주관하니 이는 用句며, 泥佛이란 泥는 中에 屬하야 뭇 공덕의 근본[衆德之本]이니 이는 中間句다. 不度爐不度火不度水란 碧巖云 『金佛이 용광로를 건넌다면 녹아버릴 것이요, 木佛이 불을 건넌다면 타 버릴 것이며, 泥佛이 물을 건넌다면 흩어져버릴 것이다.』라고 했다. 즉 낱낱이 모두 動하지 말라[莫動着]는 뜻이다. 眞佛內裏坐란 三佛外에 따로 眞佛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곧 眞佛이 三佛內裏에 앉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不度爐不度火不度水」라 했다면 곧 그 뜻이 이미 나타난 것인데, 달리 그리 말한 것(眞佛内裏坐)이 군소리[落草] 같기 때문에 碧巖云 『이 一句(眞佛内裏坐)는 매우[忒殺] 허술하다[郞當].』고 했다. 또 云 『雪竇는 저 末後一句(眞佛内裏坐)가 치부를 드러냈다[漏透(漏逗)] 하여 싫어했다. 그 까닭에 삭제해버리고 다만 三句[三佛]만을 頌한 것이다.』라고 했다. 雪竇가 이렇게 頌한 것은 非但 저 末後一句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第三句[末後]의 泥佛을 先頌한 뜻 또한 없지 않으니 자세히 살펴야 옳다. 碧巖云 『雪竇의 一百則頌古가 모두 計較葛藤이나 오직 이 三頌만은 實로[直下] 衲僧의 氣魄[氣息]이 있다. 다만 이 頌이 쉽지는 않으나[不妨難會] 그대들이 만약 이 三頌을 透過한다면 네가 工夫를 마쳤다[罷叅] 허락하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趙州가 雪竇만 못하다는 것인가. 雪竇의 그런 말이 趙州의 뜻을 붙들어 일으켰다[扶起]는 뜻이다.
●丹霞의 上堂에서 末後의 泥佛이 金木之中 사이에 있으니[攝在] 그 까닭이 무엇인가. 肯定한 것인가, 否定한 것인가. 落落圓音美復美라 한 것은 추켜 올린[推尊] 말인 듯하다. 뒤에 獨坐枯木(根)石頭上云云이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白雲의 示衆에서 圓通(白雲)……出氣란 三百六十骨節(十二劑骨頭)云云한 것이 가히 숨통을 틔워[出氣] 준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여러분이 이렇게 알면 되려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出氣 하지 않음이 되려 옳다[返是]는 것이다. 須知海嶽云云이란 四海五湖가 모두 王의 德化[化]로 돌아가고, 乾坤大地가 吉人을 害[陷]하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는 眞佛을 가리킨 것이다. 그렇다면 出氣하지 않은 것 같으나 이것이 바로 出氣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三佛即是眞佛이요, 眞佛即是三佛임을 밝힌 것이다.
●天童의 小叅은 金佛不度爐地의 時節이 眞佛屋裏坐라는 것이다. 그런즉 木佛과 泥佛 역시 그렇다.
●牧庵의 上堂은 사람들이 趙州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三佛쪽으로만 쏠릴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說話】古叢林啇量甚衆 其餘不足擧着 今擧一二近似者然後 以現正意 泥佛者 泥多佛大加加佛也 木佛者 減減佛也 金佛者 一鑄便成佛也 此釋有二種義 一泥佛成德義 益之又益 以至於無所益也 木佛斷障義 損之又損 以至於無所損也 金佛不落修斷 一時頓成也 此約成佛䡄則言之 爾不度水不度火不度爐者 有所畏憚處也 眞佛內裏坐者 本源自性天眞佛也 二泥佛 千波競起普賢床榻也 木佛 一亘淸空文殊境界也 金佛 毘盧遮那無作果體也 水淸凉義 文殊智 不度者 普賢行 於文殊智 一場懡㦬也 火閙熱義 普賢行 不度者 文殊智 於普賢行 一場懡㦬也 爐祖師鞴 不度者 毘盧遮那無作果體 於祖師鞴 一場懡㦬也 眞佛內裏坐者 本源自性天眞佛 坐於衆生心內也 然此釋有未穩處 亦非趙州意 金佛者 金屬西 主肅殺是體句 木佛者 木屬東 主生長 是用句 泥佛者 泥屬中 衆德之本 是中間句 不度爐不度火不度水者 碧巖云 金佛若度爐 融却了 木佛若度火 燒却了 泥佛若度水 爛却了 則一一莫動着也 眞佛內裏坐者 非三佛外 別取眞佛也 則眞佛坐着三佛內裏也 然上旣不度爐不度火不度水 則其意已現特地伊麽道 似乎落草 故碧巖云 這一句語忒殺郞當 又云雪竇嫌他末後一句漏透 所以削去 只頌三佛 雪竇伊麽道 非但嫌他末後一句 先頌末後泥佛意 亦有在直須子細 始得 碧巖云 雪竇一百則頌古 皆計較葛藤 唯此三頌 直下有衲僧氣息 只是這頌也 不妨難會 你若透此三頌 便許你罷叅 然則趙州不如雪竇耶 雪竇伊麽道 乃扶起趙州意也
丹霞 末後泥佛 攝在金木之中 其故何也 是肎耶 不肎耶 落落圓音美復美 則似是推尊也 下云獨坐枯木石頭上云云 是此意也
白雲 圓通至出氣者 三百六十骨節云云 則可謂是出氣也 諸人伊麽會則又却不是 然則返是未出氣也 須知海嶽云云者 四海五湖皆歸王化 乾坤大地不陷吉人 此指眞佛 然則似不能出氣 此正是出氣 伊麽道明三佛即是眞佛 眞佛即是三佛也
天童 金佛不度爐地時節 眞佛屋裏坐也 然則木佛泥佛亦然
牧庵 恐諸人不會趙州意 只向三佛着倒故也
[출처] 金佛(碧巖錄은 第九六則 趙州三轉語다.)|작성자 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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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집(泉齋集) 신필흠(申弼欽)생년1806년(순조 6)몰년1866년(고종 3)자백한(伯翰)호천재(泉齋)본관평산(平山)특기사항유휘문(柳徽文)의 문인. 유치명(柳致明), 이정실(李廷實), 김대진(金岱鎭), 권연하(權璉夏) 등과 교유
泉齋先生文集卷之四 / 書 / 答金孟實雅誦疑問
戲答楊廷秀問訊離騷之句二首。此二首詩意。全未曉解。
按誠齋戲問先生楚辭解詩有二絶。其一絶曰註易箋詩解魯論。一帆徑度浴沂天。無端又被湘累喚。去看西川競渡船。西川競渡船。是大耳三藏。與慧墨忠國師問答語。故先生亦戲用佛家爛卻語以答之。其意若曰少時醉歌離騷。意氣豪壯。而今於寒牕擁鼻。爲洛下書生詠。追思舊日扣舷誦騷之興。已成陳迹云爾。陳迹貼爛卻字。月一船又用古詩笑指蘆花月一船。 其二絶曰霜後枯林無可羹。飢吟長作候蟲聲。藏神上訴天應泣。支賜江蘺與杜蘅。蓋以先生晩歲。盡解諸經。無可更解。迤作楚辭註。如霜林無作羹之物。故賜以楚人之江蘺杜蘅。聊爲充飢之用。和詩春到寒汀百草生之句。所以答霜後枯林無可羹而戲反其語也。其以馬蹄香爲靈均作杜蘅者。據原註杜蘅一名馬蹄香。而本草辨僞藥云細辛則杜蘅。是相似而亂眞者也。魏志云相似而亂眞者。蛇床似蘼蕪。細辛似杜蘅。 先生嘗答鄭子上書曰病中不敢勞心看經書。閒取楚辭遮眼。亦便有無限合整理處。因思古人是費多少心思。做此文字。只隔一手。一手謂作者之手。 便無人理會。深可歎息云云。蓋前後說楚辭。如王逸洪興祖輩皆失其志趣要歸。如望舒,飛廉,飄風,雲霓之屬。託言神靈護衛之意。初無善惡之分。而解者以飄風雲霓爲小人。月爲淸白之臣。風爲號令之象。皆無義理。又如東皇,太一,雲中君諸篇之因彼事神之誠。以寓愛君之忠者。尤爲明白懇切。而說者汩亂其正意。有不可枚擧。則所謂細辛之亂杜蘅也。先生之爲此解。一洗舊註之謬而直發靈均心事。則此所謂以馬蹄香作杜蘅。而不得以僞藥亂之者也。如是宛轉推說。詩意畧可髣像。此愚陋平日之所尋常思量而未敢自信。今因高明之問及而悉陳無隱。須一爲評隲其可否如何。獨其不甘強借三峯面。終不可強解。或者以爲華山有三峰而面目相似。此亦疑似之類。故曰不甘強借。其說似有理。然無證之言。未必其信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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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죽 주머니 안에 숨은 본성
어떠한 물건도 굳건할 수 없거늘, 하물며 꿈틀대는 이 가죽 주머니이랴. 형체 있는 것은 모두 무너지지만, 허공이 썩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구나.
無物能牢, 何況蠢玆皮袋; 有形皆壞, 不聞爛却虛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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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 제11권 / 서(書) / 강명보에게 답한 편지 기사년(1629, 인조7)
풍류공자(風流公子)와 더불어 수석(水石) 사이에서 가야금을 뜯고 휘파람을 불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바, 부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는 몸에 열이 아직 남아 있어서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겠으며, 피곤하고 나른한 증세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제 시험 삼아 말을 타고 사천(沙川)에 가 보았는데, 이미 기운이 떨어져 피곤함을 감내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먼 길을 가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본디 성주(城主)와 만나기로 약속하지 않았으니, 어찌 서로 속이는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말로 겁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몹시도 우습고 우습습니다. 기운이 완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려서 바깥출입을 할 것입니다. 산꽃이 다 떨어졌지만 마음에 둘 겨를이 없습니다. 주 부자(朱夫子)의 시에 이르기를, “지금 차가운 창 아래에서 코 가리고 있는데, 모래톱에 비친 달빛 배 안에 찬란하네.〔只今擁鼻寒窓底 爛却沙頭月一船〕” 하였는데, 이 역시 몸에 병이 들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행히 서로 간에 재촉하지 않는다면 아주 좋겠습니다. 최계승(崔季升)도 올 수 없다고 하니, 탄식스럽습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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頤齋遺藁卷之二十三 / 傳 / 故處士龜巖楊公,進士梅堂楊公合傳
龜巖楊公諱培字而厚。南原人。自高麗知郡事敬文。八傳至集賢殿大提學知申事以時。恭愍癸巳魁生員。乙未文科。爲人愨信。從牧隱李公穡游。受許可甚重。見徐氏居正勝覽。其稻花豆葉一詩。見徐氏東文選及明會稽吳明濟征倭時所編朝鮮詩選。是生集賢殿直提學首生。禑丙辰中生員文科。在松京早卒。妻李氏年幼有遺腹。父母欲奪志。旣生子思輔。從一婢負而逃。幷夫舅紅牌自隨。至南原夫家鄕庄。轉上飛鴻峙。西望擇地。得淳昌龜尾里居焉。鞠子中進士官縣監。其盛年苦節。與同時恩津宋進士克己妻柳氏。光山金檢閱問妻許氏。幷稱三烈婦。用能革羅麗更二之醜。啓祖宗敦五之盛。而惠莊王旌閭封墓。繼以李文正縡立傳。盛矣哉。又傳判官淵。至生員縣令子瞻。以孝友淸白著。娶府尹順興安知歸女。亦有閨範。是公父母也。公自幼與弟墩。服庭訓崇孝悌。以曾子溫公爲法。推之睦婣任恤。靡不用極。餘力學文。蔚有重望。南秋江孝溫爲金榮叔記鑑亭。稱昆季才士。以賀其得友。燕山戊午甲子士禍再作。尤絶意科宦。語及時事。輒慷慨烏邑。卽里西鍾湖上得一洞。消搖沈冥。若將終身。時昆季幷自號散人。則洞之名散人始此。有東西二石巖屹立江心。摠名釣臺。而兄東弟西。各占其一。刻東曰培巖。西曰墩巖。葢混名樵牧。與漁子爭隈。而不慍於不知也。是于家乘郡誌尙可徵者。惟公生卒無紀。惜哉。妻直長密陽朴仲愚女。莊憲王作樂名臣判書堧孫也。與公上下葬于礪山新陽洞。一子公俊丁卯生員。庚辰文科佐郞。孫洪庚子生員。文科府使。曾孫士選。有庶裔。世傳恭謹。士敏將仕郞號雙梅堂。孝友自律。慕柳文節希春盧文孝禛學問。士獻進士。其後移益山。士衡稍移龜南里築暎霞亭。亦號漁隱。早游柳盧二門。己卯生員。戊子文科佐郞知製敎體察從事官。至郡守。壬辰之亂。與柳學諭彭老,梁學官大樸,李正郞大胤,崔正字尙重及三從弟判官希迪。大募兵粮。共推高忠烈敬命爲左道義將。貽書方伯李洸。責以大義。丁酉又與丁牧使焰邊參奉士貞糾義再擧。錄宣武從勳。贈都承旨。當宁丁未。追享于郡東華山祠。公子孫今百餘人。始鄕人以公里有龜巖。故因以號之。非公所自稱也。當宁戊申。士林並享公昆季于瑞龍祠。
양사형(楊士衡)
| UCI | G002+AKS-KHF_13C591C0ACD615B1547X0 |
| 자(字) | 계평(季平) |
| 호(號) | 영하정(暎霞亭)【補】(주1) |
| 생년 | 정미(丁未) 1547년 (명종 2) |
| 졸년 | 기해(己亥)(주2)【補】 1599년 (선조 32) |
| 향년 | 53세 |
| 합격연령 | 42세 |
| 본인본관 | 남원(南原) |
| 거주지 | 순창(淳昌)【補】(주3) |
[관련정보]
[이력사항]
| 선발인원 | 34명 [甲3・乙7・丙24] |
| 전력 | 생원(生員) |
| 관직 | 병조정랑(兵曹正郞) |
| 타과 |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16위 |
| 부모구존 | 영감하(永感下)(주4)【補】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양홍(楊洪)[文]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선산도호부사(行善山都護府使)(주5)【補】
[조부(祖父)]
성명 : 양공준(楊公俊)[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양배(楊培)
[외조부(外祖父)]
성명 : 안극함(安克諴)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최영(崔穎)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양사선(楊士選)【補】
형(兄) : 양사민(楊士敏)【補】
형(兄) : 양사헌(楊士獻)[進]【補】(주6)
[출전]『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梅堂楊公諱墩字叔亨。改君厚。龜巖之弟也。初叔父子由惠莊王乙酉進士。戊子文科。康靖王辛卯以藝文館檢閱。轉奉敎移正言持平掌令執義。兼記注侍講官知製敎。出郡守有聲績。無子以公爲後。公自幼從伯氏服庭訓。孝弟旣篤。百行咸備。餘力爲學。爲南秋江孝溫所推。燕山政亂。絶意名塗。自放湖山。如鐘湖散人洞。寔昆季俱遯之所。而江心二釣臺東曰培巖西曰墩巖。各自斥名。甘混樵牧者。其微旨可見也。恭僖王改玉。公乃以丁卯就試中進士。若將乘運彙征。而猶且囂囂肰不改其初。其殆先見於己卯歟。公晩歲自淳昌移南原阿山防。爲近執義公衣履之藏也。素慕林君復風韻。植萬梅實庭。呼以梅兄。以寓長枕之戀。因號梅堂。又就下流數里許菉豆梁上。築光霽亭。葢濂溪之朝暮遇也。日消搖觴咏。爰有金文靖麟厚,張沙村經世諸賢記以詩。一世高之。惜公生年失傳。以壬辰卒。葬于本坊甘隱山南。妻通德郞光州鄭承順女。有婦德母儀。三子長公健次公佅。授四山監役不仕。季公信。公健孫希迪。壬辰倭亂募義官判官。公佅還居淳昌卜華山之西赤城江上。築伴仙亭。扁其軒曰世梅。如晉山姜氏故事。有白雲居士爲賦赤城詩。金文靖和之曰聞說江邊好事翁。白雲題咏揭船中。只今爛卻沙頭月。夢裏滄波擧眼空。自註翁指伴仙主人也。先後又有蘇陽谷世讓,林石川億齡,白岐峯光弘,鄭郡守希濂,林觀海檜並爲之有詩。其子沆有文行重望。早廢公車。作餐霞亭于赤城下流。亦伴仙遺趣也。子士秀號華隱。簡亢少許可。不一跡公門。只誦邵子四不出故語。修先亭揭諸賢詩。傳至今不衰。多其力也。當宁戊申。公與伯氏幷享于瑞龍祠。
越松外史黃胤錫曰。余自童時。已聞二楊公名德之懿。稍長又得家乘及郡誌。講服之熟。重信一門之多賢。何其偉也。原二公志節見識。不以遇昏而無傳。不以際明而有耀。使夫百世之下。猶知有楊氏二難。斯已難矣。况觀人之法。必於所與。秋江翁東國所謂生六臣之一也。得其一言。不亦尤難。而公昆季居肰得之。俾其友亦得得友之賀。只此一言。其爲重也何啻尺蔡拱璧。宜其子孫之承士林之仰。愈久愈光。雖以若余之亡能爲役。猶得有所據而申之。嗚呼。石室金匱有修隱逸之傳者。其尙曰夫夫也非誣者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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頤齋遺藁卷之二十三 / 傳 / 故四山監役伴仙亭楊公傳
楊公諱公佅字彦衡。南原人。譜自高麗知郡事敬文。八傳至大提學以時。魁生員文科。愨信能詩。見牧隱李公穡集徐居正東文選輿地勝覽及明會稽吳明濟萬曆東征所輯朝鮮詩選。是生直提學首生。生員文科。在松京早卒。妻李氏盛年守志。負閔腹子思輔。幷夫舅紅牌。南走南原鄕庄。卜淳昌龜尾里止焉。鞠子成進士縣監。世祖命旌閭封丘。李文正縡銘之。歷判官淵有執義子由。進士文科薦檢閱至執義。取兄縣令子瞻次子墩子之。墩孝悌文學名于世。爲南秋江孝溫所重。燕山政亂。與本生兄龜巖培。俱遯世游鍾湖散人洞。得江心二釣臺。刻東曰培巖西曰墩巖。各自斥名。若將終身。中宗反正。以丁卯中進士而終不改初服。殆先見己卯云。晩居南原阿山里。爲邇所後父墓。植梅樹滿庭。自號梅堂。有孤山風致。又慕周元公胷襟。築光霽亭。娶將仕郞光州鄭承順女。擧三子。其仲卽公也。以燕山壬戌生。溫厚端莊。簡默寡喜怒。尤孝悌剛明。事父母養志物無方。叱咜不及狗馬。閨門斬斬如也。推諸睦婣任卹。各以其道。燕笑歡治。威儀棣棣。而鄕里有訟。輒一言折之。不爽豪芒。訟者自服。不就官。或乃望其門徑去。公旣夙謝功令。用小學自律。又以訓子姪不倦。常曰士之立身。先行而後文可也。晩歸淳昌卜郡東華山稍西赤城江重淵之上。築伴仙亭。漁釣自放。侑以觴詠。有白雲居士者爲賦赤城一絶。金文靖麟厚和之曰。聞說江邊好事翁。白雲題詠揭船中。只今爛郤沙頭月。夢裏滄波擧眼空。自註好事翁指伴仙主人也。于是一世高之。稱公曰伴仙亭。又慕先梅堂家風。裁梅林繞屋。用韓氏世柳姜氏世梅故事。自號世梅堂。先後有金文靖及林石川億齡蘇贊成世讓白歧峯光弘鄭持平希濂林觀海檜諸公幷賦詩記之。有以公隱德尉薦者。授四山監役不就。郡守以朝令採鄕議。將復擧以賢良。公力辭曰。一命已是分外。此又奚爲。郡守爲之改容。恒語門族曰吾家自勝國汔今科宦。莫非先李妣苦節餘慶。如我謏謭。方自視欿肰。恐爲人笑。其平生高厲多此類。自是雖累擧不一擧。而終若不聞也者。用能不慍不懼不易不拔。視羔鴈鍾駟。一切付諸浮雲。則區區家人之作業。鄕里之閒言。又安有非義而干者乎。明宗庚申考終于家。壽五十九。葬祔父墓。子沆中宗戊子生。世濟文行。有志節見識。廢擧業。構餐霞亭于華山下妓巖之側。詩酒自娛。諸賢亦多與酬唱者。宣祖癸巳卒。葬亭後。子士秀忠順衛。明宗乙卯生。號華隱。簡亢少許可。人咸敬畏。亦謝科不一蹐公門。常誦邵子四不出故語。修伴仙亭復揭諸公詩。仁祖庚辰卒。葬郡東昌新驛後。爰有四子。伯時幹宣祖丁丑生。孤潔寡合。文行備焉。每茶酒論時事。忼慨突兀。其言大而密。高而切。觀聽竦肰。惜累擧不中。光海辛酉嘗一赴京中覆試。見大北三昌一隊囑賂曲徑。折試卷不復出。自以世守世梅軒。故自號梅隱。仲時茂。叔時泰。季時復。詵詵無忝。仍累世可紀。今公八代孫堉。亦有文無成。實梅隱玄孫而肖者也。
越松外史黃胤錫曰。楊氏之門。何其文獻之多也。又何交游淵源之盛也。若公者。使得益廣所與。先己卯而從乎趙文正。先乙巳而從乎金文敬。則公之聲光事業。不亦㬥著當世乎。而乃斂肰退肰。山焉水焉。有不以一名博者。嗚呼。己卯乙巳之際。宏儒碩彦。豈不項背相望。而其實未及而禍已隨者。亦已不貲。則公之終身不出。葢有以也。不肰何以見君子。余嘗一再過華山赤城間。見巖秀壑流。已俯仰公遺躅。而今復得諸家乘若郡誌。恍肰曠世謦欬。而後公三世。亦灼乎可書。高山仰止。嘻其遠矣。豈易與不知者道哉。肰公所以爲公。又不專在幽貞。有欲知公。其試求諸小學則幾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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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집(秋江集) 남효온(南孝溫)생년1454년(단종 2)몰년1492년(성종 23)자백공(伯恭)호추강거사(秋江居士), 행우(杏雨)본관의령(宜寧)시호문청(文淸)특기사항김종직(金宗直)의 문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 등과 교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秋江先生文集卷之四 / 記 / 鑑亭記
| 성종 | 22 | 1491 | 신해 | 弘治 | 4 | 38 | 湖南地方을 유람하다. ○ 礪山에서 〈鑑亭記〉, 潭陽에서 〈潭陽鄕校寶上記〉, 長興에서 〈釣臺記〉를 짓다. |
水之爲物。善鑑萬類。而姸醜自形。故聞過勇遷之士喜之。居天下最下。而物莫與爭。故謙退守雌之人愛之。故聖如孔子。而稱其智。賢如老君。而取其下。余之服此訓也久矣。弘治紀元之四年二月。余向湖南。越月之壬戌。適到礪山。宿於溪翁榮叔之溪上小亭。榮叔請其名。名其溪曰鑑溪。名其亭曰鑑亭。嗚呼。取義於鑑之一字。榮叔味之哉。夫山也陸也原也隰也。不爲不多矣。而必於水構其亭。其意可知已。榮叔。強記篤行之士。坐於斯玩於斯。其有思乎。看水之鑑姸也。則思吾心善端之發見也。致曲之。看水之鑑醜也。則思吾心引物而舍去也。收復之。看水之鑑大也。思吾之長才而益培之。看水之鑑小也。思吾之偏短而益廣之。至於事事物物莫不皆然。則小自夫婦居室之間。大而至於聖人天地之所不能盡。禮儀三百。威儀三千。優優大哉於吾心之鑑中矣。然則資水之功大矣哉。榮叔姓金氏。本慶州世家。高祖月城君諱需。爲東方文獻大族。祖諱閔姜。喜誨後進。余嘗受業。寬裕博厚長者也。仁者必有後。所以有榮叔也。考諱繼田。早歿。母驪興閔氏。晨昏致奠。執婦道不倦。主上卽位之三年辛卯。旌其門。榮叔少孤。習見家訓。養孀母頗遵禮。則大爲鄕中搢紳輩所推服。初居恩津。後居礪山。妻鄕也。距宅二里許小溪上構艸亭。藏書講道。日與文學之士。逍遙其上。掬手而頮面。臨流而濯纓。朝朝暮暮。吟詠其間。期以此終老云。所與從遊相善者楊氏。培其名。亦才士也。余見亭之東北有曠地。余問之。榮叔曰。將以種竹也。嗚呼。竹所以資君子之貞也。又見西北有曠地。余問之。榮叔曰。將以種菊也。嗚呼。菊所以助君子之節也。又見東南有鑿池功未半者。余問之。榮叔曰。將以種蓮種蓴也。嗚呼。蓮所以取中通外直也。蓴所以取養老供賓也。士生斯世。若不得知遇聖明。澤施一世。則榮叔此志亦可尙也。漢之仲長統。唐之李愿是已。秋江居士南孝溫。記。
추강집 제4권 / 기(記) / 감정기(鑑亭記)
물의 성질은 만물을 잘 비추어서 곱고 더러움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허물을 듣고서 용감하게 고치는 선비가 이를 좋아하고, 천하의 가장 낮은 데 처하여 다른 물건과 다툼이 없기 때문에 겸손히 물러나서 부드러움을 지키는 사람이 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공자 같은 성인도 물을 지혜롭다 일컬었고, 노자 같은 현인도 그 낮추는 덕을 취하였으니, 내가 이러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지 오래다.
홍치(弘治) 기원후 4년(1491, 성종22) 2월에 내가 호남으로 향하여 3월 임술일에 마침 여산(礪山)에 도착하여 계옹(溪翁) 영숙(榮淑)의 시냇가 작은 정자에서 묵었다. 영숙이 이름을 지어 달라 청하기에 시내 이름을 감계(鑑溪)라 하고 정자 이름을 감정(鑑亭)이라 하였다.
오호라! 거울〔鑑〕 한 글자에서 취한 뜻을 영숙은 음미해야 하리라. 대저 산과 육지와 언덕과 습지가 적지 아니하건만 반드시 물이 있는 곳에다 정자를 지었으니, 그 뜻을 알 수 있겠다. 영숙은 기억력이 뛰어나고 행실이 돈독한 선비이니, 여기에 앉고 여기서 완미함에 생각함이 있지 않겠는가. 물이 고운 것을 비추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의 선한 단서가 발현된 것을 극진히 확충하기를 생각하고, 물이 더러운 것을 비추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이 외물에 이끌려 잃어버린 것을 거두어들여 회복하기를 생각하고, 물이 큰 것을 비추는 것을 보면 나의 장점과 재주를 더욱 배양하기를 생각하고, 물이 작은 것을 비추는 것을 보면 나의 편벽됨과 단점을 더욱 넓히기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에 이르러서도 다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다면, 작게는 부부가 집안에 거처하는 사이로부터 크게는 성인과 천지도 다할 수 없는 데 이르기까지 예의(禮儀) 3백 조목과 위의(威儀) 3천 조목이 내 마음의 거울 가운데에서 넉넉하고 크게 갖추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물의 공에 힘입음이 크지 않겠는가.
영숙의 성은 김씨이니, 본래 경주(慶州)의 세가(世家)이다. 고조부는 월성군(月城君) 휘(諱) 수(需)이니, 동방에 문헌을 갖춘 대족(大族)이 되었다. 조부는 휘가 민강(閔姜)이니, 후진을 교회(敎誨)하기를 좋아하였다. 내가 일찍이 가르침을 받았는데, 관유(寬裕)하고 박후(博厚)한 장자(長者)였다. 어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는 법이라서 영숙이 있게 된 것이다. 고(考)는 휘가 계전(繼田)이니,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니, 아침저녁으로 치전(致奠)하며 부도(婦道)를 한결같이 행하자, 주상 즉위 3년 신묘년(1471)에 정문(旌門)을 내렸다.
영숙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으나 집안의 가르침을 익히 보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자못 예법을 따랐으므로, 크게 향중(鄕中) 선비들의 추중을 받았다. 처음 은진(恩津)에 살다가 뒤에 여산에 살았으니,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2리쯤 떨어진 작은 시냇가에다 초정(艸亭)을 지어 책을 갈무리하고 도를 강론하며 날마다 문학하는 선비와 더불어 그 위에서 소요하였다. 손에 물을 움켜서 낯을 씻고 시냇물에 임하여 갓끈을 빨며 아침마다 저녁마다 그 사이에서 읊조리며 이로써 노년을 마칠 기약을 하였다. 서로 사이좋게 종유(從遊)하는 사람 양씨(楊氏)는 이름이 배(培)이니, 또한 재주 있는 선비이다.
내가 정자 동북쪽에 넓은 땅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영숙이 말하기를 “대나무를 심으려고 한다.” 하였다. 오호라! 대나무는 군자의 정절(貞節)을 도와주는 것이다. 또 서북쪽에 넓은 땅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영숙이 말하기를 “국화를 심으려고 한다.” 하였다. 오호라! 국화는 군자의 절개를 도와주는 것이다. 또 동남쪽에 반쯤 파다 둔 연못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영숙이 말하기를 “연(蓮)을 심고 순무를 심으려고 한다.” 하였다. 오호라! 연은 속이 통하고 밖이 곧은 모습을 취하는 것이며, 순무는 노인을 봉양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뜻을 취하는 것이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명(聖明)한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한 세상에 은택을 베풀지 못할 바에야 영숙의 이러한 뜻은 또한 숭상할 만한 것이니, 한나라의 중장통(仲長統)과 당나라의 이원(李愿)이 이러한 사람이리라.
추강거사(秋江居士) 남효온(南孝溫)은 기(記)하노라.
[주-D001] 공자……일컬었고 : 공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하였다. 《論語 雍也》[주-D002] 노자……취하였으니 : 노자가 말하기를 “최상의 선은 물과 같으니,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하였다. 《老子 8章》[주-D003] 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주-D004] 중장통(仲長統) : 후한(後漢) 때의 사람이다. 항상 말하기를 “무릇 제왕을 따라 노니는 사람은 입신양명하려고 하는 것이나 이름이 항상 보존되지는 못한다. 인생은 죽기 쉬우니 한가롭게 놀고 자유롭게 지내면서 진실로 그 뜻을 스스로 즐길 뿐이다.” 하였다. 이러한 뜻을 담아 〈낙지론(樂志論)〉을 지었다. 《古文眞寶後集 卷1》[주-D005] 이원(李愿) : 당나라 때 태항산(太行山) 남쪽의 반곡(盤谷)에 은둔한 사람이다. 그에 관한 사실은 한유(韓愈)의 〈반곡으로 돌아가는 이원을 전송하는 서(序)〉에 자세하다. 《古文眞寶後集 卷4 送李愿歸盤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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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유고(旅菴遺稿) 신경준(申景濬)생년1712년(숙종 38)몰년1781년(정조 5)자순민(舜民)호여암(旅菴)본관고령(高靈)특기사항홍양호(洪良浩)와 교유
旅庵遺稿卷之四 / 記 / 散人洞記
鶉子之江。左右挾大山。屈曲行數百里。至淳郡東。爲湖曰紙。湖之左。有洞曰散人。散人則郡人楊氏也。楊氏以簪纓世族。見燕山大亡道。與弟進士隱于此。累被徵辟不就。濱江而有大巖二。楕而方。頂平可坐。南曰培巖。北曰墩巖。散人兄弟之釣磯而培墩其名也。夫隱居之士。愛其山水。必命之美名。以寓其幽思閒興。若崔孤雲之紅流玉瀑。吟風之瀨。泚筆之岩是也。古來此類甚多。識者不以是爲衒。不以是爲侈。亦不害於其隱德也。今散人直以其名名其巖。將自賤而不嫌於漁樵之徒斥以呼之。是其志深於隱也。南秋江性孤高。少許可人。而作金某鑑亭記。穪散人之才。賀金與散人友。散人之才。必有大過人者。而訪之散人後孫家。無一文字之可徵者何哉。散人之子孫。世有文獻。非散失而不能守。盖散人不之傳也。名旣爲一世之知。而必欲混而藏之。况才之蘊於內乎。於其子孫猶不傳。况他人乎。噫。散人殆將泯歟。孔子曰。作者七人矣。七人者果何時人也。其居果何地也。其姓名果誰也。其生之時。其居之地。其姓名皆不可攷。况其行果如何也。然而後世之穪美。無以異於伯夷,虞仲,柳下惠,少連之著跡甚詳者。以其有實也。散人之才與行。不可得其一二。而人到于今。指其洞曰散人。指其巖曰某之巖。過者必敬慕之。是誰使之然歟。散人之實。於此可知。是巖不泐。則散人之名。將隨而不滅。散人之隱者一時。而其不隱者無窮極矣。
여암유고 제4권 / 기(記) / 산인동기〔散人洞記〕
순자강(鶉子江)은 좌우에 큰 산을 끼고 있다. 굽이굽이 수백 리를 가다가 순창군의 동쪽에 이르러 호수가 되는데 지호(紙湖)라고 한다. 지호의 왼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산인동(散人洞)이라고 한다. 산인은 곧 순창군 사람 양씨(楊氏)다. 양씨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으로 연산군이 세도를 크게 망치는 것을 보고 진사인 동생과 함께 여기에 은거하면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강가에 큰 바위 두 개가 있는데 길쭉하면서 모가 나고 정상부분은 평평하여 앉을 수 있다. 남쪽의 것을 배암(培巖)이라 하고 북쪽의 것을 돈암(墩巖)이라 하는데, 산인 형제가 낚시터로 삼고 배(培)ㆍ돈(墩)이라고 자기들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무릇 은거하는 선비는 그 산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그윽한 생각과 한가한 흥취를 붙인다. 최고운(崔孤雲)의 홍류동(紅流洞)ㆍ분옥폭(噴玉瀑)ㆍ음풍뢰(吟風瀨)ㆍ자필암(泚筆岩)이 이런 경우다. 예로부터 이런 사례가 매우 많은데 식자들은 이것을 현학적이라거나 사치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또한 그 은둔하는 이의 덕에 해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산인이 곧장 그의 이름으로 바위를 명명한 것은 장차 스스로 천히 여기고 물고기 잡고 나무하는 무리들이 함부로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이니, 이는 그 은거하고자 하는 뜻이 깊었기 때문이다.
남추강(南秋江)은 성품이 고고해서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거늘 김 아무개를 위해 〈감정기(鑑亭記)〉를 지으면서 산인의 재주를 칭송하며 김씨와 산인의 우정을 축하했다. 산인의 재주에는 틀림없이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인의 후손가를 방문해 보아도 징험할 만한 시문이 하나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산인의 자손들은 대대로 문헌의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산인의 시문을 후손이 잃어버려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대개 산인이 시문을 전하지 않은 것이다. 명성이 이미 한 시대에 알려졌어도 기어이 세상에 섞여 살며 감추려 했을 것이거늘 더구나 재주를 내면에 갈무리한 경우이겠는가? 자손들에게도 전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으랴.
아, 산인은 장차 민멸되고 말 것인가. 공자는 말하기를 “은거한 이가 일곱이다.”라고 했는데 일곱 사람은 과연 어느 시대 사람이고, 그들이 살았던 곳은 과연 어디이며, 성명은 과연 무엇인가. 살았던 시대와 살았던 곳, 성명을 모두 살펴볼 길이 없는데 하물며 그 행적이야 과연 어떻겠는가. 그러나 후세의 찬송이 백이(伯夷)와 우중(虞仲), 유하혜(柳下惠), 소련(少連)처럼 행적이 뚜렷한 사람들과 별다름이 없는 것은 실제 그러한 행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인의 재주와 행실은 그 한두 가지조차 얻을 수 없으나 사람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골짜기를 가리켜 산인동이라 하고 그 바위를 가리켜 아무개의 바위라고 한다. 지나는 사람도 반드시 공경하고 사모하니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 산인의 행실을 이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바위가 마멸되지 않는 한 산인의 이름도 따라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산인은 비록 한 시대에 은둔하였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은 끝이 없을 것이다.
[주-D001] 순자강(鶉子江) : 전북 남원 대강면과 전남 곡성 입면, 그리고 옥과면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섬진강의 일부 하천이다.[주-D002] 양씨(楊氏) : 양배(楊培)ㆍ양돈(楊墩) 형제 가운데 형인 양배를 가리킨다. 연산군 시대의 무오ㆍ갑자 두 사화를 겪은 후 벼슬을 단념하고 동생인 양돈과 함께 고기를 낚으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頤齋遺藁 卷23 梅堂慕亭二楊公小傳》[주-D003] 남추강(南秋江)은 …… 축하했다 : 김 아무개는 김영숙(金榮叔)이다. 〈감정기〉는 남효온(南孝溫)이 그를 위해 써준 글인데, 그 가운데 “서로 사이좋게 종유하는 사람 양씨는 이름이 배이니, 또한 재주 있는 선비이다.[所與從遊相善者楊氏, 培其名, 亦才士也.]”라는 구절이 있다. 《秋江集 卷4》[주-D004] 은거한 이가 일곱이다 : 공자가 은거하는 일에 대해 말하면서 이 말을 하였는데, 그 일곱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論語 憲問》[주-D005] 우중(虞仲) : 주(周)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의 둘째 아들이다. 형 태백은 막내 계력(季歷)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는 동생 우중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달아났다. 공자는 이런 행동을 두고 “몸가짐이 청렴결백 하였고, 세상을 저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았다.[身中淸, 廢中權.]”라고 하여 칭찬했다. 《論語 微子》[주-D006] 유하혜(柳下惠) :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유하혜는 성인으로서 온화한 분이고, 공자는 성인으로서 시중(時中)하신 분이다.[柳下惠, 聖之和者也; 孔子, 聖之時者也.]”라고 평가하고 있다.[주-D007] 소련(少連) : 공자가 거론한 7인의 일민(逸民) 중 한 사람이다.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서 말하기를 “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 했다. 사흘 동안 게을리하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았으며 한 해 동안 슬퍼하고 삼 년 동안 초췌하였다.[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라고 했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장안영 안동교 이덕현 (공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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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집(淵齋集) 송병선(宋秉璿)생년1836년(헌종 2)몰년1905년(고종 42)자화옥(華玉)호연재(淵齋), 동방일사(東方一士)본관은진(恩津)소자구범(九範)시호문충(文忠)
淵齋先生文集卷之二十七 / 記 / 龜巖亭記
玉川治東一舍。龜嶽磅礴蜿蜒。紙湖涵泓逶迤。流爲灘曰萬壽。萬壽之上。三峯特出。翺翔若拱揖。下有巖曰藥盤陀。可坐百許人。荷浦晴沙。玉峯明月。玲瓏奪人目。赬桐數十樹。夏秋之交。爛若錦繡。香聞數里。於是乎有亭。昉於今戊戌春。訖于庚子秋。
| 고종 | 35 | 1898 | 무술 | 光武 | 2 | 63 | 3월, 湖南 지방을 유람하다. ○ 9월, 錦山에 가서 龍江書堂에서 가르치다. ○ 10월, 〈繼開論〉을 짓다. |
| 고종 | 36 | 1899 | 기해 | 光武 | 3 | 64 | 3월, 安陰의 名勝을 구경하다. ○ 7월, 李容元, 金鶴鎭과 함께 樂英堂에서 강의를 열다. ○ 11월, 〈警世說〉을 짓다. |
| 고종 | 37 | 1900 | 경자 | 光武 | 4 | 65 | 3월, 杞菊亭에서 족친들과 會講하다. ○ 6월, 「東鑑綱目」을 편찬하다. |
其下是津。樵採漁商。陸續往來者。望之若雲表衆香城。儘靈境也。夫其山水之剩麗如是。則有亭固宜。然曷爲古未有而今始有也。在昔燕山戊午。楊公培。見名流殆盡。遂與弟墩。托跡江湖。累徵不起。稱之曰散人。濱江南北。二㨊巖對峙。兄弟相望而釣。故各以其名。名其巖。所謂兄弟巖者也。世遠年邈。文獻無徵。雖不能詳其蹟。名被于地。人到于今稱之。則公之爲何如人。槩可想矣。執此而擬諸古人。其殆徐孺子郭林宗之流歟。是以鄕人俎豆於芝溪上矣。迨其撤享。楊氏諸族。私相謀議。以成此亭。而謂之龜巖者。蓋其洞口有一石龜。不暇雕琢而天成者。公取之爲號。故遂以公號名其亭。謁余文者。瑗永,弼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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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석재집(心石齋集) 송병순(宋秉珣)생년1839년(헌종 5)몰년1912년자동옥(東玉), 구홍(九洪)호심석재(心石齋)본관은진(恩津)특기사항송달수(宋達洙), 송근수(宋近洙), 이세연(李世淵)의 문인
心石齋先生文集卷之三 / 詩○七言律 / 次玉川龜巖亭韻
玉川龜巖亭。卽龜巖楊公兄弟藏修之所也。後孫爰玉 瑗永 以題詠詩示余求和。
蕭灑亭臨萬壽汀。駟車豈換此居停。聯棣隱蹤誰不愛。雙巖名字尙留馨。荷浦沙明宜釣艤。玉峯月潔訝仙扃。流風更問散人洞。可礪貪汙俗子聽。
[주-D001] 玉川 : 저본에는 없다. 저본의 원목차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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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준(楊公俊)
[생원]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59위(89/100)
| UCI | G002+AKS-KHF_13C591ACF5C900U9999X0 |
| 자(字) | 언경(彦卿) |
| 졸년 | 을유(乙酉)(주1)【補】 1525년 (중종 20) |
| 본인본관 | 남원(南原) |
| 거주지 | 순창(淳昌) |
[관련정보]
[이력사항]
|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 전력 | 유학(幼學) |
| 타과 | 1520년(중종 15) 경진(庚辰) 별시(別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8위 |
| 부모구존 | ○○하(○○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양배(楊培)
관직 : 충순위(忠順衛)
[처부(妻父)]
성명 : 장충보(張忠輔)[文]【補】(주2)
본관 : 덕수(德水)【補】
| [주 1] | 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 |
| [주 2] | 처부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
[출전] 『정덕2년정묘춘증광사마방목(正德二年丁卯春增廣司馬榜目)』(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고)349.16 사마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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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준(楊公俊)
| UCI | G002+AKS-KHF_13C591ACF5C900U9999X0 |
| 자(字) | 언경(彦卿) |
| 생년 | 1484(성종 15) |
| 졸년 | 1525(중종 20) |
| 시대 | 조선전기 |
| 본관 | 남원(南原) |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 [문과] 중종(中宗) 15년(1520) 경진(庚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8위(11/11) |
| [생원]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59위(89/100) |
[상세내용]
1484년(성종 15)∼1525년(중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언경(彦卿).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전라북도 순창(淳昌) 구미(龜尾)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구암(龜巖) 양배(楊培)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0년(중종 15)에 문과별시(文科別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호조좌랑(戶曹佐郞), 병조좌랑 겸 춘추관(兵曹佐郞兼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지냈으나, 42세로 일찍 죽었다.
그의 진사시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문과합격증인 홍패(紅牌)는 잘 보존되어 보물 72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옥천지
국조방목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집필자]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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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준(楊公俊)
[문과] 중종(中宗) 15년(1520) 경진(庚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8위(11/11)
| UCI | G002+AKS-KHF_13C591ACF5C900U9999X0 |
| 자(字) | 언경(彦卿) |
| 졸년 | 을유(乙酉)(주1)【補】 1525년 (중종 20) |
| 본인본관 | 남원(南原) |
| 거주지 | 순창(淳昌)【補】(주2) |
[관련정보]
[이력사항]
| 선발인원 | 11명 [甲1・乙2・丙8] |
| 전력 | 성균생원(成均生員)(주3) |
| 관직 | 호조좌랑(戶曹佐郞) |
| 문과시제 | 책문(策問) |
| 타과 |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三等) 59위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양배(楊培)
[조부(祖父)] 성명 : 양자첨(楊子瞻)
[증조부(曾祖父)] 성명 : 양연(楊淵)
[외조부(外祖父)]
성명 : 박중우(朴仲愚)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장충보(張忠輔)[文]
본관 : 덕수(德水)【補】
[가족과거] 자(子) : 양홍(楊洪)[文]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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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개성에서 남편의 과거 합격증을 안고 내려온 이씨 부인>
| GC05900007 |
| 高麗末開城-男便-科擧合格證-李氏婦人 |
| 역사/전통 시대 |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
| 고려/고려 후기 |
| 김형준 |
[개성에서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다]
1760년 편찬된 『옥천 군지(玉川郡誌)』 경신판(庚辰版) 열부 이씨전(烈婦李氏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직제학(直提學) 양수생(楊首生)의 부인으로 이씨가 임신 중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의 부모는 젊어서 과부(寡婦)가 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이씨의 뜻과 상관없이 재가(再嫁)를 시키려 하였으나, 이씨는 죽음으로 항거하고 아들을 낳으매 겨우 몇 년을 지나 또 강제로 시집보내려 하니 이씨는 몰래 비복(婢僕)들 서너 명과 아기를 업고 남편의 홍패(紅牌)와 대제학(大提學)인 시부(媤父)의 홍패를 간직하여 남쪽으로 양씨의 옛터인 남원부 교룡산 아래로 내려왔다. 얼마 안 되어 아지발도(阿只拔都)의 난을 만나 비홍치(飛鴻峙)에 올라 본군(本郡) 무량산(無量山) 쪽을 보고 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임을 알고 가시를 헤치고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구미촌(龜尾村)이다.”
양수생은 고려 말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그리고 대제학이었던 양이시(楊以時)가 아버지이다. 이씨 부인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과거 합격증인 홍패를 가슴에 안고서 개성에서 남원까지 내려왔다. 양이시는 1355년(공민왕 4), 양수생은 1376년(우왕 2) 문과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377년 양이시, 양수생 부자는 모두 사망한다. 이는 고려말의 정변과 관련되어 보이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이씨 부인은 임신 중에 남편과 사별하였고, 이씨 부인이 내려온 뒤 얼마 안 되어 남원 운봉에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은 뒤에 친정 부모는 개가를 적극 권유하였으나, 이씨 부인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하자 아기를 업고 시복들을 데리고 남원으로 낙향하였다. 고려 말에는 부녀자들의 개가가 매우 자유로웠기에 친정에서는 나이 젊은 딸이 평생을 과부로 살아갈 처지가 안타까워 개가를 권유하였던 것이다.
이씨 부인은 개가를 권유하는 친정 부모에게 아뢰기를 “다행히 아들을 낳는다면 양씨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아기를 낳은 뒤에 시집을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득하였다. 아들을 낳은 뒤 다시 개가를 종용하자 다시 이씨 부인이 아뢰기를 “아이가 젖을 떼지 아니하였는데 제가 지금 시집을 간다면 이 아이가 제대로 자랄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은 양씨의 뒤를 잇게 하였는데 제가 어찌 뒤를 끊게 하겠습니까.”라며 아이가 자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다시 아이가 밥을 먹고 말을 하게 되자 이씨 부인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며 죽음을 무릅쓰고 개가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부모의 강압에 견디지 못한 이씨 부인은 아이를 데리고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시댁이 있는 남원으로 내려왔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흘러도 오로지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온갖 고생을 겪고 남원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씨 부인의 시댁은 남원부 교룡산 아래에 있었다. 이씨 부인은 아지발도 난 발발 전에, 추정하건대 1379년이나 1380년에 남원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순창군 지역 사학자인 양상화는 양이시가 파주에서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주에서 임진강을 이용하여 개성까지 뱃길로 왕래하는 데 훨씬 용이하였다고 한다. 양이시의 묘소가 파주 파평산 아래 돌고개 근처에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자손만대 누릴 복록의 땅을 찾아 나서다]
운봉에서 9월에 발발한 아지발도 난의 아지발도는 왜적의 적장이었다. 이 왜적들은 봄에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군산 진포를 공격해 왔고, 최무선 장군이 화포를 이용하여 섬멸하자 패잔병들이 도망쳐서 옥천·성주를 거쳐 함양에 이르렀고, 다시 북상하기 위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남원 운봉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함양 사람을 모두 죽이고 운봉에 불을 지르고 인월에 주둔해 있으면서, 말을 배불리 먹여 북쪽으로 진격한다고 떠드니 나라 안팎이 크게 놀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우왕은 젊은 장수인 이성계(李成桂)를 운봉에 급파하였고 이성계는 운봉을 뛰어넘고 황산으로 내달려 정봉에 올라가서 형편을 살펴보고는 날쌘 군사들을 앞뒤로 호응하여 적을 공격하니 10배가 넘는 아지발도의 적군들을 모두 무찔렀다. 이 전쟁을 황산 대첩이라 하였다. 이씨 부인은 이부 종사(二夫從事)를 거절하고 양수생의 아들 양사보(楊思輔)를 등에 업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과거 합격증을 가슴에 품고, 천리 먼 길 남원으로 내려왔다. 오로지 집안의 대를 잇고자 하는 신념으로 온갖 고통스러움을 무릅쓰고 파주에서 남원까지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정절보다는 가계를 잇고자 함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남원에 도착한 이씨 부인은 아지발도가 운봉 인월에서 사람을 죽이고 들에 불을 질러 대며 위협을 하는 상황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씨 부인은 교룡 산성에 은거하면서 성안에 우물을 파고 웅거의 채비를 차리던 중 고민 끝에 아지발도가 있는 곳과 반대편인 순창 쪽으로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산성을 내려가 옛집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보다는 새로 좋은 터를 잡아서 자손들이 오래도록 복록(福祿)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순창 군지』에 등장하듯이, 이씨 부인은 남원부 대산면에 위치한 비홍치 고갯마루에 올랐다. ‘비홍치’는 기러기를 날려 보내는 고갯마루라는 지명이다. 비홍치에 올라 사방의 산의 정기를 살피는데 서북간방(西北艮方)으로 보이는 순창 구악산(龜岳山)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저 산 아래라면 내 자손이 살 만한 곳이 있겠구나 생각하고 마술을 부렸다.
이씨 부인은 비홍치에서 버드나무 세 가지를 꺾어다가 기러기 세 마리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손으로 주물럭거려 만든 나무오리를 날려 보내는 술법은 당시 마을을 택지(擇地)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씨 부인이 첫 번째로 날려 보낸 나무오리는 순창군 적성면 운림리 농소막으로 떨어지고, 또 한 마리는 동계면 구미리(龜尾里) 녹갈암(鹿渴岩)으로 떨어지고, 또 한 마리는 인계면 마흘리에 떨어졌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세 마리의 나무 기러기를 살펴보니, 농소막 이씨 부인의 산소 자리에 내려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명감 열매 하나를 입에 물고 돌아왔으며, 구미리에 있는 녹갈암에 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입에 구슬을 한 움큼 머금고 돌아왔으며, 마흘리 팔명당 자리에 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기운은 좋은데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이를 본 이씨 부인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농소막에 내 신위지지(神位之地)를 정하면 이후에 내 자손이 적성강(赤城江) 물이 마르도록 번성할 것이요, 마흘리는 대명당(大明堂)이기는 하나 그 자손에서 불상사가 있을 것이니 자손에 허갈이 난 내가 어찌 부귀만을 취할 것인가 하고, 구미리 녹갈암 터는 내 자손이 백세(百歲) 되도록 복록을 누릴 곳이니 그곳이 가히 내가 살터로다 하며, 곧바로 그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녹갈암 일대에는 정기가 서려 있고 그 자리에는 이미 오두막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주인을 만나서 “이 터는 내 것이니 비워 달라.”라고 하였으나 주인은 좀처럼 듣지 않고 말하기를 “이 터가 내 것이 아님은 사실이나 따로 주인이 있는 땅이니 댁도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택지법은 고려 시대에 사찰의 터를 택할 때 쓰는 술법이었다. 이씨 부인의 택지에 따라 실제 농소막에는 이씨 부인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구미리는 자손들이 복록을 누릴 생거지지(生居之地)가 되었으며, 마흘리는 인계면의 대명당으로 최고의 길지(吉地)가 되었다. 이씨 부인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땅보다 자손들이 백세 되도록 복록을 누릴 구미리의 녹갈암 아래에 터를 잡은 것이다. 유복자를 안고 온 이씨 부인은 자손을 번창시켜야 한다는 큰 뜻을 갖고 택지를 한 것이다. 현재도 녹갈암 아래가 남원 양씨(南原楊氏)의 종택(宗宅)이 들어 서 있다.
[열부 이씨는 고려 시대 전형의 마을을 가꾸다]
마침내 이씨 부인은 동계면 구미리 녹갈암 아래에 둥지를 틀었다. 녹갈암은 구미리의 주산인 무량산[구악산(龜岳山)]에서 내려온 지기(地氣)가 뭉쳐 있는 곳이다. 그 기운이 남원 양씨의 종택을 이루게 되었다. 다른 마을은 대체로 남자들이 입향조로 이름을 올리지만, 구미리는 아들 양사보를 안고 들어온 이씨 부인이 입향조이다.
그는 가장 먼저 우물을 팠는데, 후세에 이씨 부인이 판 샘이라 하여 ‘대모(大母) 샘’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그는 무량산 중턱에 독서암(讀書庵)을 짓고 양사보가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양사보가 자라면서 사냥을 즐기고 학업을 게을리 하니 이씨는 자결을 하려고 밥을 물리치고 얼굴을 무릅쓰고 누워서 아들을 매우 나무라니 아들 양사보가 크게 깨달아 학문에 나가 대학자가 되어서 함평 현감까지 지냈다.
이씨 부인이 아들 양사보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학문에 정진하여 문과 급제자가 많이 나오도록 힘썼다. 구미리 마을 앞에는 한일 자 형의 안산이 있는데, 그곳에 칠성 바위가 있다. 이 칠성 바위에는 북두칠성이 조각되어 있다. 북두칠성은 과거 급제를 관장하는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조선 시대 선비 계층에 널리 신앙된 문형(文衡)의 신(神)이었다. 구미리의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하기에 앞서서 칠성 바위를 찾아 합격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녹갈암 아래 터를 잡은 영향인지 칠성 바위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조선 후기 구미리에서는 과거 급제자가 30여 명이 배출될 정도였다. 30여 명에는 생원 진사 합격자가 18명, 문과 급제자가 12명에 이르렀다. 이토록 한 마을에서 과거 급제자가 30여 명 배출되었으니 남원 양씨는 순창에서 문벌지족으로 권세가 창대해 갔다.
또한 구미리에는 돌 거북이가 마을 입구에 놓여 있다. 구미리의 지명이 이 마을거북에서 나왔다. 자연석으로 된 이 거북은 거북의 꼬리가 마을로 향하게 놓여 있기에 ‘구미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마을 앞에 놓인 돌거북은 구미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재물이 약하다 하여 마을에 재물이 모이도록 조성해 놓은 것이다. 거북의 머리는 마을 밖의 취암사(鷲巖寺)를 향하여 취암사의 재물을 먹고, 구미리에 똥을 싸 달라는 의미에서 꼬리를 마을로 향하게 놓아두었던 것이다. 재물 손실을 입은 취암사 승려들이 화가 나서 나무망치를 들고 구미리를 찾아와서 거북 머리를 내리쳤더니 적성강 변 연못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도 구미리의 돌거북 머리는 잘린 모습으로 놓여 있다.
돌거북과 함께 마을 입구에 수구막이 선돌을 세웠다. 마을의 지기가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의 수구에 선돌 2기를 세우고 숲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후손들이 편안하게 복록을 누릴 수 있도록 풍수 비보(裨補) 장치까지 해놓은 것이다. 구미리는 고려 시대 전통 마을이 어떠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모범적인 씨족 마을이다. 전통 마을은 대체로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에 조성된 곳이 많지만, 구미리는 전란과 관계없이 가문과 후손의 번창을 위하여 자손만대 복록을 누릴 땅을 택지한, 고려 시대 택지법으로 조성된 곳이다.
[600여 년 역사를 가진 전통 마을을 이루다]
이씨 부인은 정절을 지키고 자손을 번창시켜 일약 문벌지족으로 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세조 대왕께서 그 정절을 아름답게 여겨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명하였다. 구미리 마을 입구에 이씨 부인에게 내린 정려가 위치하고 있다. 이씨 부인은 가문의 전통을 지키려 남편과 시아버지의 홍패를 가슴에 품고 남원까지 내려왔으며, 친정 부모의 간곡한 부탁인 개가를 뿌리치고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는 정조 관념과 자손을 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순창의 남원 양씨가 대대로 번창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효자 열부의 정려는 부모 봉양이 우선적인 가치 기준이지만, 동계면 구미리의 이씨 부인은 정절과 자손 번창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려를 받은 특이한 사례이다.
구미리는 이씨 부인이 택지한 이래 자손들이 번성하여 6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원 양씨 집성촌으로 터를 지켜 내고 있다. 순창 지역의 대표 성씨를 ‘신설양(申薛楊)’이라고 부른다. 고령 신씨(高靈申氏), 옥천 설씨(玉川薛氏)[순창 설씨], 남원 양씨가 순창의 3대 성씨라는 것이다. 또한 이씨 부인이 가슴에 품고 내려온 과거 합격증 홍패는 고려 시대의 과거 제도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남원 양씨 종중 문서 일괄로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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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
| GC05900828 |
| 南原楊氏宗中文書一括 |
| 남원 양씨 종중 문서 |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 문헌/문서 |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249[효자동 2가 900] |
| 박노석 |
[상세정보]
| 1981년 7월 15일 |
| 2021년 11월 19일 -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 보물 재지정 |
| 국립 전주 박물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249[효자동 2가 900] |
| 고문서 |
| 남원 양씨[양이시|양수생|양공준|양홍|양시성 등] |
| 과거 합격증|발령 교지|소지 |
| 남원 양씨 |
| 보물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구미 마을 남원 양씨(南原楊氏) 종중에 전해 오는 고문서.
[개설]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南原楊氏宗中文書一括)은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홍패(紅牌) 2매와 교지(敎旨) 5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국립 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 중 양이시 급제 홍패는 붉은색의 두꺼운 순한지에 붓글씨로 기록하였는데, 가로 34㎝, 세로 64㎝로 조선 시대의 교지에 비하여 약간 규격이 작은 것으로 보인다. 양수생 급제 홍패는 붉은색 한지에 붓글씨로 쓴 것인데, 가로 34㎝, 세로 65㎝이다.
[구성/내용]
1. 양이시 급제 홍패
양이시(楊以時)[?~1377]는 1353년(공민왕 2) 생원과에 장원 급제하고, 2년 뒤인 1355년(공민왕 4) 동진사(同進士)의 문과 제22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때의 급제자 합격증은 조선조의 교지와 달리 ‘왕명(王命)’이라고 하였다. 이 홍패(紅牌)를 작성한 사람은 당시 중서성 좌우사도사(中書省左右司都事)를 지낸 익산 부원군(益山府院君) 이공수(李公遂)[1308~1366]와 보문각 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寶文閣大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 안보(安輔)[1302~1357]이다. 뒤에 양이시는 집현전 대제학 지신사(集賢殿大提學知申事)의 직에 올랐는데, 덕행이 있고 시문에도 뛰어나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그의 덕행과 문장을 찬양하였다고 한다.
2. 양수생 급제 홍패
양수생(楊首生)[?~1379] 급제 홍패는 1376년에 종사랑 장복 직장(從仕郞掌服直長)으로 있던 양수생이 문과 을방(文科乙榜)에 2등으로 합격함으로써 왕명으로 받은 합격증이다. 양수생은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까지 올랐다. 이 홍패를 작성한 사람은 당시의 시험관인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 한수(韓脩)[1333∼1384]와 정당문학 우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지서연사(正堂文學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知書筵事) 홍중선(洪仲宣)[?~1379]이다.
3. 기타
이 외에 양공준(楊公俊)[1484~1525]이 1508년(중종 3) 생원시에 입격하고 받은 백패(白牌)와 1520년(중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 그의 아들인 양홍(楊洪)[1508~1564]이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 1559년(명종 14) 양홍을 청도 군수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사령 교지, 양시성(楊時省)[1556~?]이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입격하고 받은 백패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의 홍패, 백패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양이시 급제 홍패와 양수생 급제 홍패는 조선 시대의 합격 증서에 교지라 쓴 것과는 달리 왕명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시험관의 관직, 성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문서의 형식 및 고려 시대 과거(科擧) 제도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지식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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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순창양씨 '남원양(楊)'씨를 빛나게 한 집’. [휘양관(輝楊館)'과 '만수탄 종호8경'을 알아보니] 순창 동계 구미마을에 보물 등 다양한 문화재 전시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4. 4. 30. 18:19
'휘양관'은 지난해 10월에 개관, ''남원양(楊)'씨를 빛나게 한 집'으로, 동계 구미마을과 관련된 문화재, 유적, 역사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옥전시관이다. '우리 동네 작은 박물관 휘양관(輝楊館)' 현판 휘호 낙인은 동호 양상배라고 쓰였다. 26일 양청문 대한명인 현판서각장(대한명인 635호 대한명인회 전북지회 부회장)과 이곳을 방문했다. 편집자
순창군 동계면에 자리한 구미마을은 해발 580m 무량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거북바위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입구에 거북 모양의 약수만 보아도 친근한 마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구미마을은 고려시대 강릉김씨가 이주한 터에 이태조가 즉위한 후 남원양씨가 새로 마을 터를 닦은 곳으로, 이후 600여 년간 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마을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꼬리가 마을로 향해 있어 ‘구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입구엔 보호수와 ‘귀화정’이라 불리는 정자가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잠시 쉬어갈 수 있다. 대제학 양이시(楊以時)의 오언절구 한시 ‘제 평릉역정’이 걸려 있어 마을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편액은 양상배 서예가가 글씨를 쓰고, 양청문 서각작가가 은행나무 행자목에 글씨를 새겼다.
고려말 공민왕 때 대제학을 지낸 양이시는 평릉역 정자에 올라 당시 혼란스럽던 나라를 걱정하면서 시를 지었다.
제 평릉역정(題 平陵驛亭)
벼꽃은 바람결에 희어지고
콩꼬투리는 비온 뒤에 푸르다
만물은 제자리를 얻었는데
나는 시냇가 정자에서 노래하네
도화풍제백(稻花風除白)
두협우여청(豆莢雨餘靑)
물물득기소(物物得基所)
아가계상정(我歌溪上亭)
귀화정 아래엔 ‘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 비각이 있으며, 비각 옆에 ‘열부숙인이씨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1377년 남편 양수생이 세상을 떠나자, 숙인이씨는 개가를 거절하고, 유복자 양사보를 등에 업고 시댁인 남원까지 천리 길을 내려갔다.
그녀의 부모는 당시 풍습대로 수년에 걸쳐 개가를 권유했지만, 그녀는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열부 숙인이씨 정려는 조선 세조 때 남편을 잃고 네 자녀를 홀로 키우며 가난을 이겨낸 열녀인 숙인 이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숙인이씨의 행실은 세조의 귀에 들어가, 1467년 정려를 받았는데요, 정려는 충효를 닦은 사람에게 내려주는 칭호로, 당시에는 주로 부모를 봉양한 효자 열부에게만 내려졌던 터라 더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동네 작은 박물관 ‘휘양관’ 안내판이 보인다. 지난 10월 개관한 휘양관은 지상 1층 규모로 조성됐다.
동계 구미마을과 관련된 문화재, 유적, 역사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옥 전시관이다.
무량산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더욱 멋스러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휘양관’이라는 이름처럼 햇빛을 받아 더 빛이 난다.
양상춘 안내자는 "고즈넉한 풍경이 함께하는 구미리 한옥예촌 전시관은 남원 양씨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면서 "순창을 찾는 많은 분이 방문해 구미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남원양씨의 뿌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고 했다.
구미마을은 순창군에 남아있는 남원양씨의 집성촌이다. 고려시대부터 남원양씨가 정착하여 살아온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남원양씨의 거주지 중 가장 큰 마을로 성장했다. 1960년대 구미초등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학생 모두가 남원양씨로 전국에서 유일한 씨족 학교로 알려졌다. 장수마을로도 알려진 구미마을의 마을의 역사와 변화 모습도 사진 자료로 살펴볼 수 있다.
돈암이 위치한 만수탄은 순창군 내의 섬진강 구간에서 가장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전시관에 소개된 '만수탄 종호8경'을 읽어보면 그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순창 군민들은 순창지역 섬진강 구간을 적성강(赤城江)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취암산 동쪽, 무량산 아래를 흐르는 적성강 지역을 특별히 만수탄(萬水灘)이라 했다.
이 일대는 섬진강 물줄기가 호남정맥을 넘나들며 빚어낸 기암괴석으로 섬진강 구간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무량산 너머로 벌동산(옛 취암산ㆍ587m)과 마주하며 북으로 용궐산(647.6m), 동으로 무량산(587.0m)이 에워싼 곳에 투구 모양의 돌섬들이 형성되어 있는 바, 이 일대 소(沼)를 ‘종호(鍾湖)’라 한다. 종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향유하고 풍류를 누린 대표적 인물이 초로(楚老) 양운거(楊雲擧ㆍ1613∼1672)였다. 그는 남원양씨 구미리 입향조인 양사보(楊思輔)의 9대손으로 조선시대 효종 때 사람이다. 산수를 사랑해 구미리 만수탄에서 지북까지 모두 9개의 정자를 세운 부호였다. 종호정(鍾湖亭)이라고도 불리는 육로정(六老亭)을 짓고 시주(詩酒)를 즐겼다.
‘종호’ 바위글씨와 취암산(현재 벌동산) 자락에 ‘석문’ 바위글씨를 새겼으며, ‘종호바위 위에 술을 부어 놓고 마신 거사’로 알려져 있다. 국가에서 큰 부자에게 주는 칭호인 참봉 칭호를 들었던 인물로 '현종실록'에 흉년이 들자 쌀 수백 석을 내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함께 노닐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남원 사람들인 양진당(養眞堂) 하만리(河萬里), 최휘지(崔徽之)와 최유지(崔攸之) 형제, 유동연(柳東淵)과 유동달(柳東達) 형제였다. 이들을 여섯 명의 노선(老仙), 즉 육로(六老)라 불렀다. 양운거가 지었다는 9개의 정자는 소멸되었지만 '종호팔경운'(鍾湖八景韻ㆍ종호팔경 시 운자를 따서 짓다)이라는 시가 있어 옛 만수탄 종호의 경관과 풍류객들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종호팔경운'은 9편의 칠언절구로서 종호의 목가적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육로(六老) 일원이었던 하만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그 후손들이 1911년에 간행한 시문집 '양진당유고(養眞堂遺稿)'에 실려 있다.
제1경은 '호중석서(湖中石嶼)'이다. 이는 '호수 안의 돌섬'을 말한다.
땅은 종호(鍾湖)를 숨겨두고 주인을 기다리는데
하늘이 돌섬을 만들어 놓으니 낚싯줄 드리우기 좋네
그대는 육로암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는가
물이 넘실거려 모래로 갈아도 물에 갈리지 않네
제1경은 강물 한가운데 배치된 풍류의 공간인 돌섬(石嶼ㆍ석서)들을 노래하고 있다. ‘종호암’(鍾湖巖)과 ‘육로암’(六老巖), ‘조대’(釣臺)라 새겨진 바위들이 펼쳐진다.
제2경은 암상와준(巖上窪樽)으로, '바위 위 웅덩이 술통(巖上窪樽)'이다.
하늘이 기이한 바위를 쪼아 술통을 만들었으니
병 같기도 하고 사발 같기도 하고 또 동이 같기도 하네
다만 아홉 웅덩이로 하여금 길이 마르지 않게 한다면
남들 비록 다음 산으로 갈지라도 나는 홀로 남아 있겠네
바위 위 ‘술을 담는 독’, 바위 모서리에 구준암(九樽巖)이란 글씨가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이는 ‘아홉 개의 술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바위에 형성된 다수의 돌개구멍에서 유래된 같다.
양운거는 이 바위 위에서 벗들과 술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술 주전자가 너무 작아 거듭 술을 채워야 하는 것이 번거로워 바위 웅덩이에 술을 가득 채우고, 술로 목을 축여가며 시를 주고받으며 읊었다고 한다.
제3경은 '영축귀운(靈驚歸雲)'으로, '영취봉의 돌아가는 구름(靈驚歸雲)'이다,
집 뒤에는 취봉이 우뚝 솟아 있고
하늘가를 돌아보니 푸른 연꽃이 피었네
구름이 와서 장맛비 된다 한들 상관 않는
무심한 듯 태연한 네 모습을 사랑하노라
‘영험한 취암산을 돌아오는 구름’을 노래하고 있다. 취암산은 종호암 전면에 펼쳐진 산으로 만수탄을 중심으로 동서로 무량산과 대응하고 있다. 현재 명칭은 벌동산이다.
제4경은 '향로조일(香爐朝日)'로, '향로봉의 아침 해'를 말한다.
동쪽 봉우리에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를 통과하니
따뜻한 기운이 왕성해 큰 산과 같네
주인은 술에 취해 아침 잠을 편히 자고
늦게 일어나 아이 불러 낚싯대를 드리우네
제5경은 '석문낙엽(石門落葉)'으로 '석문의 낙엽(石門落葉)'을 말한다.
산길 험한 곳에 돌로 문을 만들었고
늙은 회화나무는 구불구불 몇 년 된 뿌리인가?
가을 바람에 잎이 떨어져 다니는 자취를 덮으니
물의 근원을 다시 찾을 적에 헤맬까 미리 염려하네
제6경은 '탁탄수압'(濯灘睡鴨)'으로 '갓끈 씻는 여울에 졸고 있는 오리'를 말한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 바닥까지 맑고
강에 임하여 바로 적합한 곳이면 내 갓끈을 씻으리
아이에게 크게 노래하지 말라고 말을 전하는 것은
물가 모래톱에서 오리 놀랄까 두렵기 때문일세
제7경은 '전교목적(前郊牧笛)'이니 '앞들의 목동 피리소리'를 말한다.
비 온 뒤 강물 흐르는 교외에는 작은 풀이 푸르고
목동의 피리는 새로운 소리를 연주하네
말등이 소등의 편안함만 못하니
은거하는 선인이 도를 깨달으면 이러한 한가한 심정이리.
제8경은 '고사신종(古寺晨鐘)'이니 옛 절의 청아한 새벽 종소리다.
절은 아득히 푸른 하늘에 가깝고
만 길 낭떠러지라 길이 통하지 못하네
늙은 스님 참선에 들었으니 누가 보리오
맑은 새벽에 오직 예불 종소리만 들리누나
옛 절에서 들리는 새벽 종소리를 노래하고 있다. 만수탄 인근에 있었던 취암사 또는 불암사의 타종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만수탄 종호 일원에서 확인되는 바위글씨는 모두 9점이다. 첫 번째 종호 바위글씨는 구미리에서 육로정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병풍처럼 서있는 석벽(石壁)에 있다.
‘종호(鍾湖)’라는 대형 바위글씨 이외에 ‘종호화수계(鐘湖花樹稧)’라 적고 총 10명의 남원양씨 회원명이 나열되어 있다. 한편에는 '국판노미 처양복례 종부익사처(국판노미의 아내 양복례가 남편을 따라 빠 져죽은 곳)'이라 새겨져 있다. 종호 바위 글씨 두 번째는 현재 '육로정(六老亭)'이란 편액을 단 종호암에 종호1 글씨와 거의 같은 크기로 횡서되어 있다.
네 번째는 돌섬에서 100여 m 상류에 형성된 응회암에 종서로 새겨진 구준암(九樽巖ㆍ9개의 술통)이란 글씨다. 다섯 번째 ‘조대(釣臺ㆍ낚시질하는 곳)’라고 쓴 글씨다. 여섯 번째는 ‘육로암(六老巖)’이고, 일곱 번째는 ‘금암(琴巖)’라는 글씨다. 탄금(거문고와 가야금) 풍류가 행해졌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종호암에서 직선거리로 1.6㎞, 북서쪽 적성 석산리 방향으로 내려오면 자연석에 ‘석문(石門)’이란 바위 글씨가 새겨 있다. 아홉 번째 종호팔경 제6경 강 건너 바위 위에 ‘산인동(散人洞)’이란 바위글씨가 종서와 횡서로 중복해 새겨져 있다.
이중 ‘종호’ 바위글씨는 ‘종호(鍾湖)’ 또는 ‘종호(鐘湖)’라는 다른 한자로 새긴 것을 볼 수 있는데, 후자(鐘)는 종을 뜻하는 반면에 전자(鍾)는 손잡이 없는 금속제 술잔을 의미한다.
‘종호’라는 지명의 유래는 '시객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종소리처럼 메아리친다'는 의미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육로 모임에서 풍류를 주도했던 양운거가 돌섬 밖에서 시주(詩酒)에 필요한 물품을 수급하기 위한 신호수단으로 종(鐘)을 이용했던 연유로 ‘종호’라 불리었다는 견해도 있다.
휘양관(輝楊館)엔 남원양씨 집성촌 이야기와 열부 숙인부인 이씨 정려비 탁본, 남원 양씨 문중과 관련된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16세기에 발간된 남원양씨 최초 족보를 비롯해 영조 28년 족보, 조선세조 13년인 1467년에 작성된 열부 숙인이씨 정려 기록도 살펴볼 수 있다. 남원양씨 최초 족보는 남원 양씨의 시조인 양백의 후손들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조선시대 양씨 가문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에는 국가보물 7점(홍패 2점, 교지 5점)과 전북유형문화재 등 다양한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보물 제725호로 지정된 홍패 2점과 교지 5점은 조선시대 남원양씨의 공로를 인정받은 문서로, 남원양씨 가문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관 내부에 구미마을을 소개한 책자가 비치되어 있어 잠시 읽어볼 수 있다. 귀미마을은 고려시대부터 남원양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시대에는 남원양씨의 거주지 중 가장 큰 마을로 성장했다.
조선 세조 때 남원양씨의 후손인 양성지가 마을에 정착, 마을을 발전시킨 이야기까지, 마을의 역사와 문화가 한 권의 책자에 담겨 있다.
| 梁誠之 | 1415 | 1482 | 南原 | 純夫 | 訥齋, 松坡, 誠齋 | 文襄 | 南原君 |
현재 구미마을은 100여 가구의 남원양씨가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동제를 지내고, 음력 9월 9일엔 열부 이씨 정려비를 참배하는 증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휘양관의 우측으로는 남원양씨의 종중 사당인 ‘귀문각’이 자리하고 있다. 귀문각에는 남원양씨의 종중 문서와 유물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아직도 마을의 남원 양씨 후손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귀문각에 보관되어 있는 홍패는 고려 공민왕과 무왕 때의 양이시와 양수생 부자가 과거에 급제하여 받은 문서로 고려 후기의 공문서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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