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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핵발전소 건설 의사결정과정의 국민주권침해
― 헌법을 건너뛴 결정, 이제 헌법 앞에 세운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들어가며 — 10년이 지나도 물음은 그대로다
2016년 필자는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지 『국토계획』에 「핵발전소 위험과 국민주권」을 실으면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진 바 있다.1 핵발전소의 설치와 관련하여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이행된 적이 없고, 행정부를 제외한 다른 헌법기관이 그 설치와 운영에 직접 관여한 일도 없으며, 오로지 임기제 대통령과 그 산하 행정부만이 그 '위험'을 다루고 있다 — 이 상황이 올바른 것인가.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정권이 두 차례 바뀌었고, 탈원전과 친원전이 번갈아 국정과제가 되었으며, SMR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위 물음에 대한 제도적 답은 단 한 줄도 마련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2026년 7월 정부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반도체·AI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를 이유로 신규 원전과 SMR을 추가 증설하겠다고 밝히면서 "전문가 의견과 국민 공론화 과정을 거쳐" 반영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 그 공론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누가 어떤 절차로 정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법에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의 취지는 단순하다. 핵발전소 증설 여부를 다투기 전에, 그 결정을 누가 어떤 절차로 내리는가를 먼저 헌법 앞에 세우자는 것이다. 증설의 옳고 그름은 그 다음 질문이다.
이 글은 2026년 8월 헌법소원 검토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을 바탕으로, 토론을 맡은 방승주 교수(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검토의견을 반영하여 다시 정리한 것이다.2 헌법학자의 검토를 거치면서 논증의 어느 부분이 서고 어느 부분이 서기 어려운지가 분명해졌고, 그 결과가 이 글의 5절과 6절에 담겼다.
1절. 실체 — 이름은 '기본계획', 실질은 '확정'
정부는 2025년 2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신규 대형원전 2기(2.8GW, APR1400)와 SMR 1기(0.7GW)를 확정했다. 준공목표까지 각각 2037년, 2038년, 2035~36년으로 못 박혔다. 남은 절차는 부지 선정뿐이었고, 그마저 2026년 상반기에 영덕과 기장으로 신속히 정해졌다.
여기서 첫 번째 헌법적 이상징후가 드러난다. 통상 '기본계획'이란 하위 실행계획에 방향과 지침을 제시하는 상위문서다. 구체적 수량과 사양은 아래 단계에서 확정되는 것이 행정계획 법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정반대다. 몇 기를, 어떤 노형으로, 언제까지 지을 것인지 — 이 사업의 본질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기본'계획 단계에서 이미 종결된다.
이 어긋남은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개입할 수 있는 시점을 구조적으로 소거하는 장치다. 기본계획 단계에서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속 처분 단계에서는 "이미 상위계획에서 정해졌다"는 이유로 개입이 차단된다. 주권자는 언제나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자리에 서 있게 된다.
2절. 구조 — 전기사업법 제25조, 심의와 보고의 비대칭
이 어긋남은 우연이 아니라 법 조문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전기사업법 제25조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의 확정절차에서 전력정책심의회에는 '심의'를 거치도록 하면서(제2항),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는 '보고'하도록(제5항) 정해 놓았다.
심의와 보고는 다른 말이다. 심의는 승인하거나 조건을 달거나 되돌려 보낼 수 있는 권한이다. 보고는 통보를 받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원전을 몇 기 지을지, 어떤 위험을 국토에 심을지를 실제로 승인하는 기관은 어디인가. 국회가 아니다. 정부 내부에 설치된 자문기구, 전력정책심의회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조차 통보문을 받아드는 자리에 앉아 있고, 국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공청회 한 번이 전부다.
그 공청회마저 안전하지 않다. 제25조 제2항 단서는 일정한 사유가 있으면 공청회를 열지 않아도 된다고 정하고, 시행령 제15조 제2항은 그 사유를 이렇게 규정한다. 이해관계자 등의 방해로 공청회가 개최되지 못한 횟수가 2회 이상인 경우, 그리고 공청회가 개최되었으나 이해관계자 등의 방해로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경우.
이 조항의 구조를 뒤집어 읽으면 문제가 드러난다. 계획에 반대하는 주민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면 창구가 공청회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반대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면, 바로 그 행위가 창구를 닫는 법적 요건이 된다. 두 차례 무산되면 세 번째는 열리지 않고, 한 차례 파행되면 그것으로 끝난다. 남는 것은 일간신문과 부처 홈페이지에 계획을 게재하고 의견을 받는 절차다. 공청회가 마주 앉아 묻고 답하는 자리라면 게재는 알리고 접수하는 절차다. 법은 전자를 원칙으로 삼았으나, 반대가 격렬할수록 후자로 대체되도록 설계해 두었다.
생략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열린 공청회라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 공청회는 실무소위원회의 검토와 정부안이 완성된 뒤에 열린다. 원자로의 기수와 용량, 노형과 준공 연도가 이미 적힌 문서를 놓고 의견을 듣는 자리다. 제출된 의견을 어떻게 처리하고 반영 여부를 어떻게 알릴 것인지에 관한 규정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계획이 확정된 뒤에는 공청회를 거쳤다는 사실이 남아, 이후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사용된다.
그 결과 절차는 기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조용히 참석해 의견을 내면 그 의견은 반영 여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강하게 반대하면 그것이 절차 생략의 요건이 된다. 어느 쪽으로 행동하든 국민의 영향력은 생기지 않고, 정부의 정당성은 두 경우 모두 확보된다. 의견을 제출할 권리는 그 의견이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에만 권리다. 거쳤다는 사실만이 남아 결정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절차는 국민의 절차적 권리를 실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소진시키는 장치다.
여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시행령 제15조의2는 착공·준공 기간을 2년의 범위에서 조정하거나 전기설비별 용량을 20퍼센트의 범위에서 변경하는 것을 '경미한 사항'으로 보아 절차를 면제한다. 1.4기가와트급 원자로에서 20퍼센트는 280메가와트다. 계획은 뒤에서 보듯 허가의 기준이 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확정된 뒤에도 상당한 폭으로 절차 없이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입법의 실수라 부를 수는 없다. 법이 처음부터 이렇게 짜여 있었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지만, 전기사업법은 그 권력이 국민에게 되돌아갈 문을 애초에 좁게 만들어 놓았다.
3절. 씨줄과 날줄 — 국민주권 결여의 전면성
2016년 논문에서 필자는 핵발전소 위험을 두 축으로 교차 분석한 바 있다. 이 틀은 지금도 유효하며, 오히려 사태가 악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날줄(실체적 상황)은 승인·입지 → 운영·감시 → 해체·폐기 → 재난대처이고, 씨줄(권력주체)은 행정부 / 국회 / 지방정부 / 국제협력이다. 이 격자의 모든 칸을 채워보면 결론은 하나로 수렴한다. 한국만이 유독 행정부 하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아래 표에서 확인할 것은 각국이 원전을 택했는가 버렸는가가 아니다. 그 결정을 누가 내렸는가이다. 결론이 찬성이든 반대이든, 주권자에게 물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특히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구조적 모순은 이 책 5장과 8장의 필자인 이정윤이 오래전부터 지적해온 바다. 핵연료 제조·정비·설계·운영·규제·연구개발이 저마다 독점체계에 놓여 있고, 원자력진흥위원장인 총리 산하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편성되어 실질적으로 '진흥에 의해 안전이 관리되는' 구조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스스로 감시하는 모순이다.
요컨대 국민주권의 결여는 어느 한 단계의 흠결이 아니라 전 단계에 걸친 전면적 공백이다. 헌법소원의 대상을 개별 처분이 아니라 의사결정구조 자체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절. 헌법적 논증 — 다섯 개의 축
1.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와 과소보호금지원칙 (제10조·제34조 제6항)
논증의 출발점을 여기에 둔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실제로 문을 열어둔 통로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2024년 8월 기후위기 헌법소원에서 탄소중립기본법의 해당 조항에 헌법불합치를 선언했다. 결정의 취지를 정확히 옮길 필요가 있다. 헌재는 2030년 감축목표의 수준 자체가 과소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가 위헌으로 본 것은 2031년 이후의 감축목표를 법률에 정해두지 않았고 시행령에 위임하지도 않았다는 점, 곧 미래 기간에 대한 보호의 틀이 법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법의 공백이었다.
이 결정이 갖는 무게를 방승주 교수는 비교법적으로 짚어준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같은 기후소송에서 '제한유사적 사전효과'라는 개념을 동원해 기본권 침해를 인정했을 뿐 국가의 기본권보호의무 위반은 확인하지 않았다. 기본권보호의무의 심사기준인 과소보호금지원칙은 입법자가 필요한 조치를 전혀 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것이어서 위헌 확인에 이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헌재는 다른 길을 갔다. 확성기소음 기준 사건이라는 흔치 않은 선례를 인용하면서 보호의무 위반을 정면으로 확인한 것이다.3
즉 우리 헌법질서에서는 '법이 정해두지 않은 공백'이 그 자체로 기본권 보호의무 위반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이미 내려져 있다. 문은 열려 있다. 남은 문제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가이며, 그것이 이 글이 다투려는 지점이다.
본 사건에서 '보호조치'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리적 안전설비가 아니다. 결정절차 자체다. 위험의 크기에 상응하는 숙의절차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 곧 보호의무의 과소이행이다.
2. 국민주권 원리 (제1조 제2항)
핵 위험은 초국경적이고 초세대적이다. 남한 전역이 26기 안팎의 핵발전소로부터 300~500km 범위 안에 있어, 후쿠시마급 사고가 나면 전 국토가 방사능에 오염된다. 이는 통상적 행정재량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립 자체에 관한 근본결정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국민으로부터의 주권'에서 파생된 통치권에 불과하다. 통치권자가 주권자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결정을 행정부 독자적으로 내리는 것은 국민주권 원리에 반한다.
3. 의회유보와 포괄위임금지 (제40조·제75조)
국민의 생명·안전과 직결된 결정은 국회가 법률로 정해야 한다. 방승주 교수는 이 원칙을 두 층으로 정리한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입법사항은 형식적 입법자인 국회가 반드시 스스로 정해야 하며 위임 자체가 금지된다. 이것이 헌법 제40조와 법치국가원리에서 도출되는 의회유보의 원칙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사항을 위임할 때에도 포괄적으로 해서는 안 되고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해야 하며, 그 판단기준은 국민 누구나 무엇이 위임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인가에 있다.4
이 잣대를 원전 관련 법제에 대어보면 기이한 구조가 드러난다. 전기사업법 제7조 제5항 제6호는 발전사업 허가기준을 대통령령에 위임한다. 그에 따라 전기사업법 시행령 제4조 제3항 제3호는 그 기준의 하나로 "법 제25조에 따른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부합할 것"을 규정한다. 그리고 같은 조 제4항은 그 세부기준을 다시 장관의 고시에 넘긴다.
사슬을 끝까지 따라가 보자. 법률에서 시행령으로, 시행령에서 계획으로, 계획에서 고시로 결정권이 내려가는 동안 국민의 대표기관이 관여하는 지점은 단 한 곳도 없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행정부이고, 그 계획을 기준으로 허가를 내주는 것도 행정부다. 행정부가 스스로 만든 계획이 스스로 내주는 허가의 법적 근거가 되는 자기참조의 고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함의가 있다. 정부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이 법적 구속력 없는 행정계획에 불과하다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시행령이 그 계획을 허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이상, 계획은 이미 개별 사업의 허용 여부를 좌우하는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구속력이 없다는 계획이 관문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사안에서 다투어야 할 것은 위임의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원자로를 몇 기, 어떤 노형으로, 어디에 지을 것인가는 애초에 위임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입법자가 스스로 정해야 할 본질적 사항이다.
4. 적법절차원칙 (제12조)
헌법재판소는 공권력에 의한 국민의 생명·자유·재산의 침해는 합리적이고 정당한 법률에 의거하여 정당한 절차를 밟은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판시해왔다. 앞의 2절에서 본 공청회의 구조 — 결정이 확정된 뒤에 열리고, 응답할 의무가 없으며, 반대가 격렬하면 생략되는 절차 — 는 적법절차의 최소 요건조차 충족하지 못한다. SMR 특구 지정 과정에서 '알 권리'와 '의견제출권'이 마련되지 않은 것도 같은 문제다.
5. 과잉금지원칙과 수단의 정당성 (제37조 제2항)
국가가 국민의 생명권을 제한할 때는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수단이 필요최소한이어야 한다. 사전배려의 원리는 당장 닥친 구체적 위험이 아니더라도 장차 발생할 수 있는 장기적·잠재적 위험에 대하여 국가가 미리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기술적 불확실성이 클수록 안전절차를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업운전 실적이 없는 SMR에 대해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은 이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더구나 수단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사실적 전제가 이미 바뀌었다. 태양광 보급의 급증, 전고체 배터리의 상용화 공정 진입, 분산형 전력망의 구축, V2G의 제도화, 영농형 태양광의 진전 — 이 책의 2부와 3부가 다룬 변화들이다. 대안이 없던 시대의 논리로 대안이 생긴 시대의 결정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5절. 넘어야 할 관문 — 헌법학자의 검토가 알려준 것
이 논증을 헌법소원으로 옮기려면 본안에 이르기 전에 여러 관문을 지나야 한다. 세미나에서 방승주 교수가 지적한 것들을 정리해 둔다. 반대편의 반론을 미리 아는 것은 논증을 약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1. 무엇을 심판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먼저 공권력의 '행사'가 문제인지 '불행사'가 문제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전자라면 국민의 기본권을 과잉하게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후자라면 국가가 보호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심사기준이 다르고 인용 가능성도 다르다.
행정계획이 공권력의 행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헌법재판소 판례가 인정한다. 1994년 서울대학교 입시요강 사건과 1999년 지방공무원시험시행계획 사건이 그 예다. 다만 어떤 계획이 이미 존재하는 법령의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공지하는 데 그치고 새로이 국민의 권리·의무 관계에 변동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공권력의 행사가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판례의 태도다.5
그렇다면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어느 쪽인가. 앞의 4절에서 본 자기참조의 고리가 여기서 다시 쓰인다. 시행령이 이 계획을 발전사업 허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이상, 계획은 법령의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개별 사업의 허용 여부를 좌우하는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편 불행사를 다투는 길에는 다른 벽이 있다. 입법부작위를 다투려면 헌법에서 유래하는 작위의무가, 행정부작위를 다투려면 헌법이나 법률에서 유래하는 작위의무가 인정되어야 한다. 방 교수는 많은 사건이 바로 이 단계에서 각하된다고 지적한다. 공론화 절차를 거칠 작위의무가 헌법이나 법률에 있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그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부작위를 다투는 청구는 각하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양동작전이다. 어떤 공권력의 행사가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하게 이루어진 경우 이를 행사로 다툴 것인지 불행사로 다툴 것인지가 불확실한 사안이 적지 않은데, 이럴 때는 주위적으로 공권력의 행사를, 예비적·보충적으로 불행사를 심판대상으로 삼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다.6 본 청구도 이 방식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2. 통치행위론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에너지 정책은 고도의 정치적 결정이므로 헌법재판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반론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 반론은 이미 판례로 정리되어 있다. 금융실명제를 위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통치권자의 고도의 정치적 결정에 해당하는 내용이라도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다면 위헌 여부의 심사 대상이 된다고 판시했고, 이 입장은 2025년 탄핵결정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7
3. 진짜 벽은 입법형성의 자유다
적법요건을 통과하더라도 본안에서 만나는 벽이 있다. 입법형성의 자유다.
원전을 유지할 것인가 폐기할 것인가는 국민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과학적 예측도 일의적이지 않은 영역이다. 이런 영역에서는 민주적으로 정당화된 입법자가 의회의 절차와 공개적 토론을 거쳐 결론을 내리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원리이며, 헌법재판소는 그러한 입법자적 결정에 넓은 형성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확립된 태도다. 방 교수는 이 점을 들어 본안에서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지적은 정면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받는 방법은 다투는 대상을 정확히 좁히는 것이다.
형성의 자유가 넓게 인정되는 것은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다. 원전을 늘릴 것인가 줄일 것인가, 어떤 에너지 구성을 택할 것인가 — 이것은 입법자의 몫이 맞다. 이 글은 그것을 다투지 않는다.
이 글이 다투는 것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방 교수 자신이 형성의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를 밝히고 있다. 국민의 생명이나 건강이 중대하게 제한될 수 있어 기본권 제한이 중대한 경우, 그리고 헌법이 구체적으로 입법의무를 부과한 경우에는 형성의 자유가 그만큼 축소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대의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면서 국회의 입법과 행정입법과 함께 '국민 공론화 과정'을 그 구성요소로 든다.
바로 여기에 이 청구의 자리가 있다. 공론화가 대의민주주의가 결론에 이르는 정당한 경로의 하나라면, 그 경로가 무엇인지를 법이 전혀 정해두지 않은 상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국가가 전기를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공급할 것인지는 입법자의 형성의 자유에 속하지만, 그 결정에 이르는 절차를 아예 만들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
4. 미래세대의 청구인적격
미래세대 역시 원전으로부터 생명권과 건강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면 청구인적격을 인정하는 데 미래세대라 하여 달리 볼 수 없다는 것이 방 교수의 견해다. 2024년 기후 헌법소원에서도 태아와 영유아의 청구인적격이 인정된 바 있다. 다만 전력수급기본계획이나 전기사업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본권을 현재 침해하고 있는지를 논증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는 단서가 붙는다.8
덧붙이면 한 가지 쟁점은 이미 해소되었다. 재외국민의 국민투표권을 제한한 국민투표법 조항이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고도 오래 방치되어 있었으나, 2026년 3월 개정으로 재외국민도 국민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6절. 청구의 요체 — 헌법재판소에 무엇을 구하는가
앞의 검토를 거쳐 이 글이 헌법재판소에 구하는 것은 하나로 좁혀진다. 국가적 위험을 수반하는 에너지 설비의 설치를 결정할 때 거쳐야 할 숙의절차의 최소기준을 법으로 정하라는 것이다.
정부가 예고한 '공론화'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처럼 추첨으로 뽑은 시민들이 양쪽 정보를 고르게 받고 석 달 가까이 숙의하는 절차가 될지, 아니면 한 달짜리 요식행위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법이 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입법 공백이 본 청구의 표적이다.
최소기준에 담겨야 할 것은 네 가지다. 숙의에 주어지는 기간, 찬반 양측 정보의 균형 있는 제공, 참여자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방식, 그리고 결과를 어떻게 처리하고 그 수용 여부를 어떻게 공개할 것인가. 이 넷이 없으면 '공론화'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시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말잔치로 그친다.
두 절차를 나란히 놓으면 무엇이 빠져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이미 한 번 해본 것을 법으로 정해두자는 것이다.
7절. 그 다음의 상상 — 기명 국민투표와 시민의회
여기서부터는 헌법소원에서 구하는 바가 아니라 입법정책의 제안이다. 두 가지를 구분해 두는 데는 이유가 있다.
헌법 제72조는 국가의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인지를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로 정하고 있다. 조문이 분명히 말하듯 이는 대통령의 재량이며, 어떤 사항이 아무리 중대하더라도 회부 여부는 재량의 영역이라는 것이 헌법학의 일반적 이해다. 과거 수도이전 사건에서 재량이 영으로 수축된다는 취지의 별개의견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민의회 역시 현행 헌법이 예정한 기구가 아니어서, 이를 국가의 의사결정 구조 안에 정식으로 편입하려면 개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둘을 헌법소원의 청구취지로 세우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입법자가 숙의절차의 최소기준을 마련할 때 어떤 형태를 택할 것인가는 열려 있는 문제이며, 이 글은 그 자리에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는 기명 국민투표다. 일정 수 이상의 주권자가 요청하면 대통령이 국민투표 회부 여부를 판단하고 그 결과를 밝히도록 하는 것이다. 회부를 의무지우는 것이 아니라 요청을 접수하고 응답할 의무를 두는 것이므로 제72조의 재량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리고 투표를 한다면 이름을 걸고 하자는 것이 제안의 핵심이다. 아메리카 이로쿼이 연방에는 어떤 중대한 결정이든 일곱 세대 뒤에 미칠 영향을 헤아려 정하라는 '7세대 법칙'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다. 조상의 이름과 행적을 대대로 적어 남기는 족보 문화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책임을 남긴다는 뜻이다. 수만 년이 걸린 결정이라면 적어도 그것을 택한 세대가 누구였는지는 기록에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므로 기명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으로 하면 된다.
둘째는 추첨으로 구성하는 시민의회다. 아일랜드와 프랑스가 이미 해본 방식이다. 이는 국회를 대신하는 결정기구가 아니라, 숙의의 결과를 국회와 정부가 의무적으로 검토하고 그 수용 여부를 공개적으로 밝히도록 하는 자문·권고 기구다. 대의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제가 다루지 못하는 시간대를 보완하는 축이다.
5년 임기의 대통령도, 4년 임기의 국회의원도 수십만 년의 위험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 대리권력이 아무리 성실해도 대리는 대리일 뿐이다. 되돌릴 수 없고 국토 전역에 미치는 결정은 주권자 자신이 들여다볼 때 비로소 온전한 정당성을 얻는다. 다만 그 길에 이르려면 먼저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절차를 먼저 구하고, 그다음을 제안으로 남긴다.
맺으며
법정은 두 개의 얼굴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국회를 통보 대상으로, 국민을 구경꾼으로 세워 둔 이 법을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헌법 제1조 제2항이 처음부터 명한 대로 권력의 문을 다시 주권자 쪽으로 열어젖힐 것인지.
핵발전소를 늘릴 것인가 줄일 것인가는 그다음 질문이다. 먼저 답해야 할 것은, 수십만 년의 위험을 이 땅에 심는 결정을 대체 누가 지고 갈 것인가이다. 그 책임은 다음 정권도, 관료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 당대의 국민에게 있다.
집주인에게 묻지 않고 지은 집은, 아무리 튼튼해도 그 집이 아니다. 헌법을 건너뛴 원전추진은, 이제 헌법 앞에 서야 한다.
주
1. 이원영, 「핵발전소 위험과 국민주권 — 국토안전을 위한 대응체제의 모색」, 『국토계획』 제51권 제3호,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2016.6.
2. 방승주, 「이원영 교수의 원전 헌법소원 청구서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 헌법소원 검토 세미나 토론문, 20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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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이 글에서 인용하는 방 교수의 견해는 모두 이 토론문에 따른다. 인용은 필자가 다투는 논점과 관련된 범위에 한정했으며, 원전 정책 자체에 관한 그의 견해가 필자와 같지 않다는 점을 밝혀 둔다.
3. 헌법재판소 2024.8.29. 기후위기 헌법소원 헌법불합치 결정.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기후보호법 결정과의 비교는 위 방승주 토론문.
4. 헌법 제40조, 제75조, 제95조. 포괄위임금지원칙의 판단기준에 관하여는 위 방승주 토론문.
5. 헌법재판소 1992.10.1. 92헌마68등(서울대학교 입시요강), 헌법재판소 1999년 지방공무원시험시행계획 관련 결정. 상세는 위 방승주 토론문.
6. 위 방승주 토론문.
7. 헌법재판소 1996.2.29. 93헌마186(긴급재정경제명령). 상세는 위 방승주 토론문.
8. 위 방승주 토론문.
9. 이원영, 「원전 딜레마, AI시대에 맞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민들레, 2026.2.22. / 「'원전 확대' 정해놓고 공론화…국민주권 위배 아닌가」, 민들레, 2026.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