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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혈무록
검궁인 저
제1권
책머리에 부쳐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영원한 숙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관계는 곧 세계사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시대를 막론하고 전사(戰史)는 이런 이분법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곧 전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무협소설은 이러한 인류의 투쟁심리를 흥미롭게 표출해준다는 의미에서 대리만족을 얻게 해 주는 가장 적합한 소설 장르일 것이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부수거나 정복해야 한다. 정복당한 자들은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증오심을 불태운다. 끊임없는 윤회(輪廻)의 사슬 속에 인간은 부침하게 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게 된다.
정가(政街)에서는 여하한의 사정(私情)도 용납되지 않는다. 비정한 조직의 논리 속에 오직 이기기 위한 정략(政略)만이 존재한다. 이를 위한 책략이나 함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림계의 군웅할거(群雄割據)는 숱한 면모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단순한 흥미 이상의 어떤 의미를 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는 텅 빈 바둑판의 화점에 돌 하나를 놓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일구게 된다. 이제 어떤 국면(局面)을 그려나가게 될 것인가? 대마 사냥이 성공하면 원하는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나, 실패하면 반대로 돌을 던져야만 한다.
반면 독자는 국외자(局外者)로서 좀더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독제제현들은 좀더 행복한 위치에 놓여있는 분들일 것이다.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배상.
삼막(三幕)의 장(章)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난세(亂世)를 타고 난 희대의 영웅인가, 아니면 난세를 만든 고금절후의 간웅(奸雄)인가?
여기 천하를 뒤흔들게 할 무림계의 피비린내나는 음모의 막이 하나 준비되고 있다.
중원천하를 정복한 왕조(王朝)를 따르는 자들과, 그것을 뒤집으려는 충의인들이 어우러져 음모와 지략, 투혼을 불사를 수밖에 없는 혈한의 막.
이제 그 막을 열어본다.
제1막(一幕) 무인봉작방(武人封爵榜)의 장(章)
철목이(鐵穆耳).
이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대원제국(大元帝國)이 중원에 군림한 이래 제이대의 황제인 대칸(大汗)이 된 인물이다.
그는 달리 티무르칸이라고도 불린다.
지금 그는 완성된 제국의 보좌(寶座) 위에 앉아 있다.
이 제국의 영화와 군림천하의 절대지력은 그의 선황이자 조부인 세조 쿠빌라이칸이 이룩한 것이다.
철목이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쿠빌라이칸이 제국을 일으켰을 때, 그는 몽고의 광활한 고원에서 끊임없는 대초원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존경하는 쿠빌라이칸이 죽은 이후, 그는 대장군(大將軍) 바얀의 옹위로 대원제국의 제이대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런 그의 머릿 속에는 온통 쿠빌라이칸의 이념과 용맹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몽고의 초원 부족을 최초로 통일한 징기스칸 이래로, 가장 용맹하고 지략이 넘치는 칸은 바로 몽고를 더욱 장성케 하고 마침내 중원을 정복하여 대원을 일으킨 세조 쿠빌라이다.
그래서 더욱 철목이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쿠빌라이에 대한 존경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대장군 바얀을 불렀다. 그리고 대원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바얀에게 한 가지 엄청난 대계를 지시했다.
그 날 이후, 철목이가 세운 대계로 인해 엄청난 피바람이 중원 전역은 물론 무림천하를 온통 뒤흔들게 할 줄이야!
<바얀은 들으라. 짐이 칙령(勅令)을 내리노라. 그대는 짐을 대신하여 전 중원의 무림인들에게 무인봉작방(武人封爵榜)의 칙령을 전달하라, 또한 그에 따른 시행을 완벽하게 준비하도록.>
무인봉작방.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천하에 가장 강한 무인들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작위(爵位)를 내리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오대작위(五大爵位)를 무공서열에 따라 내림으로써 그들을 무림의 귀족으로 선포하도록.>
무림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무림인들에게 작위를 내리다니!
관(官)을 경시하며, 벼슬 따위는 초개처럼 여기는 무림인들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에게 작위를, 그것도 황제의 칙령으로 내린다는 것은 중원 무림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황당하기만한 일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면서도 즉각 시행되었다.
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사람은 재물의 탐욕으로 죽듯이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하던 무림인들도 어느 사이엔가 서로 다투어 무인봉작방의 작위에 오르기를 희망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서로가 피를 흘리며 다투게 되었다.
명예(名譽).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오대작위는 무공이 강한 순서로 매겨지는 것이다. 누가, 어떤 작위에 오르느냐가 무림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침내 강호를 혈풍으로 몰아넣으며 무인봉작방의 작위가 하나 둘, 무인들에게 씌워지게 되었으니 뜻있는 지사들은 이 사실에 피를 토하며 개탄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오랑캐에게 중원의 강토를 내준 것만 해도 원통한 일이거늘 또다시 오랑캐의 작위를 받으며 상잔하는 현실을 통탄하는 것이었다.
음모(陰謀).
이것이 바로 철목이 티무르칸의 치밀한 대음모였다. 대원의 기틀을 반석에 올리기 위해 그가 구상한 무인봉작방.
과연 그는 그것으로 강호의 무인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반목하게 하는데 성공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천하를 움직이는 오직 하나의 막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제2막(二幕)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장(章)
환몽표홀루(幻夢飄忽樓).
이 시대 최고의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환몽표홀루를 모른다면 이미 그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특히 그가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환몽표홀루(幻夢飄忽樓).
사실 그것은 흔하게 중원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하나의 다루(茶樓)에 불과한 것이다.
차를 파는 다루, 그러나 이곳은 천하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곳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이곳에서 차 대신 무림인들에게는 꿈에도 바라는 불세출의 영약(靈藥)들을 조제하여 팔기 때문이다.
희대의 영약을 탄 차.
그 차 한 잔을 마시게 되면 하룻밤 사이에 평범한 무림인이 일약 희대의 고수로 변신하게 된다. 이런 믿을 수 없는 사실은 벌써 꽤 오래 전부터 무림에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환몽표홀루를 다녀온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수로 변신한 것을 보게 되었다.
천하영약들의 보고(寶庫).
그럼 그곳에서는 대체 어떤 영약들이 판매되는가?
광한경장옥액(廣寒瓊醬玉液).
천부현진(天府玄眞).
지극속단수유즙(地極續斷茱萸汁).
범령자단밀유(梵靈紫檀密乳).
만년삼왕모(萬年蔘王母).
공청석유(孔淸石乳).
천년자련실(千年紫蓮實).
.......
하나같이 무림인들이라면 목숨을 바쳐가면서라도 얻으려 하는 불세의 기약(奇藥)들이다. 이들은 설사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 복용하더라도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는 천고의 기약들이었다. 그런데 그 기약들이 환몽표홀루에 무더기로, 아니 거의 무한정하게 비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림인들을 미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가자, 환몽표홀루로!
- 그곳에 가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다.
- 처자(妻子)를 팔아서라도 그곳에 가겠다. 한 가지 영약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희대의 고수가 될 것이다!
- 흐흐흐, 영약을 먹은 후 꿈에도 그리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
환몽표홀루.......
그곳은 무림인들의 이상향이 되었다.
핍박받고 설움받던 약자(弱者)들에게는 희망이요, 힘이 없어 복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구원의 장소요, 야망은 있으되 능력이 부족한 위인에게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말이다.
그러나 환몽표홀루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 입루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 요건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자격을 심사하는 입루심인(入樓審人)들이 있었다.
이른바 북두구신정(北斗九神鼎).
아홉 명의 입루심인은 무림의 절대신처럼 부상되었다. 자격에 따라 영약의 등급을 결정하여 주는 아홉 명의 희대의 기인들.
그들에 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하나같이 최고의 현자들이며, 가공할 무예를 소유한 기인이라는 것만이 무림에 알려진 전부였다.
환몽표홀루.
무림 최고의 불가사의...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3막(三幕) 전능혈전부(全能血戰賦)의 장(章)
전능혈전부(全能血戰賦).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무학에 우선하는 이름이었다.
고금 이래로 존재해 온 무학은 대체 몇만 종(種)이나 되는가? 그 숫자를 세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고금 이래의 절기가 세월이 흘러 내려오면서 명멸했고, 빛나는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이 다섯 글자가 가리키는 것만큼 완벽한 무학은 단언코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패도지학(絶代覇道之學).
이는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누구나가 죽음을 불사하고 얻으려는 것이다.
절대무학에 대한 유혹은 죽음보다 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절대무학을 익혀 천하제일인이 되려는 꿈은 누대를 내려오면서 모든 무림인들이 갈망하던 것이다.
- 전능혈전부(全能血戰賦).
천지가 개벽한 이래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 거기에서 파생한 싸움의 패인(敗因) 또는 승인(勝因), 공과(功果), 득실(得失)에 관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수록한 지침서가 있다면 그것은 곧 천하절대의 승자요, 강자가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늘 위에 하늘이 있듯이,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것이고 어느 시대에나 절대적인 강자는 영속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여 영속적인 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천하제일의 불사인(不死人)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고금 이래의 무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전능혈전부는 무(武)의 시작이며 끝이다. 또한 탄생이자 종말이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무림천하의 운명은 오직 전능혈전부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전능혈전부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고래로 이어 내려오는 무수한 절학(絶學)들.......
그 어떤 무학이든 결점은 있게 마련이며 또한 그것을 익히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애초의 무학보다 강할 수도, 또는 약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절대의 무공이란 없다. 전능혈전부는 세상 무학을 망라했다. 또한 최고의 무학은 오직 초식이나 신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무학(經驗武學)에 있다고 했다.
수많은 싸움을 치룬 자만이 본능적인 무학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 체득해야만 한다. 이론으로는 설명이나 전수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능혈전부는 이 모든 경험무학(經驗武學)과 이론무학(理論武學)을 수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전능혈전부를 얻으면 무학의 대도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는가? 어리석은 무인(武人)이여. 그대들이 왜 백 년을 고련해도 초극지경에 도달하지 못하는가를? 무학은 격식(格式)이 아니라 영감(靈感)에서 오는 것이다. 비급 안의 낡아빠진 도해(圖解)나 구결(口訣)에 따라 억지로 손발을 맞추려 하기 때문에 영원히 초극경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본서(本書)는 형식이나 특정무학을 말하지 않는다. 절대지학은 오직 영감에 의해서만 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전능혈전부의 첫 장 첫 머리에 적혀 있다는 글이다.
전설의 대기인 한백사(寒伯斯)가 남겼다는 한 권의 책.
과연 그것은 마지막 천기가 세워놓은 세 번째의 문이며, 천하를 움직이게 할 힘의 원천이 될 것인가?
세 개의 막(幕)은 열렸다.
이제 천하는 움직여야 한다. 폭풍의 눈은 점차 소용돌이치고 있다.
첫댓글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