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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으로서의 황진이
◇황진이가 기생이 된 까닭은?
황진이는 16세기에 활동한 우리 나라의 이름 있는 기생이다.
그녀는 개성에서 살던 황진사의 첩의 딸로 태어났다. 호는 명월이었다.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수려한 용모에 서예와 가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그 소문이 각지에 퍼졌고 또 많은 일화도 남겼다.
황진이가 15세 무렵에 한동네에 살던 총각이 그녀를 짝사랑하던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대문앞에 이르자 말뚝처림 굳어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죽은 총각의 친구가 이를 황진이에게 알이자 황진이는 소복단장을 하고 달려나가 자기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 주었는데 그 제서야 상여가 움직이더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 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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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서의 황진이
◇황진이가 남기고 간 아름다운 시조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당시의 왕족이던 이벽계수를 넌지시 희롱하기 위하여 지은 시조이다.
벽계수는 황진이가 이 시조를 읊는 소리를 듣고 놀라 말에서 떨어졌고..
사랑의 포로가 된 것으로 해서 유명한 작품이다.
중의법을 사용하여 '벽계수'는 푸른 물과 사람을,
'명월'은 밝은 달과 황진이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황진이의 기명은 명월이다.
황진이는 재색을 겸비한 여인으로서..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고명한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벽계수 이혼원은 형 주계군 이심원과 함께 효령대군의 증손이다.
이들 형제는 연산군 갑자사화 때에 모두 살해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성종 말년경으로 추정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누구를 사모하여 지은 시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녀로서 애절하고 호색적인 면을 아스라히 나타내 주고 있다.
임과의 사랑의 시간을 연장하겠다는 상사 연정을 읊은 노래이며..
관능적인 향락을 숨김없이 드러낸 작품으로서, 멀리 고려 속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허리를 : 한가운데를.
춘풍이불 : 봄바람처럼 향긋하고 포근한 이불
서리서리 : 긴 끈을 서리어 놓은 모양.
어른님 : 정든 임
어저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정이란 그 대상이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그리워 지는 법이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이 시조는 고려속요 '가시리'와 김소월 '진달래꽃'을 매개하고 있다.
어저 : 아!
그릴 줄을 : 그리워할 줄을
이시랴 : 있으랴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임을 애태우며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 '임'은 황진이의 재능을 가장 잘 이해하였고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일컬어지던 화담 서경덕이다
앞의 두 시조는 기약 없는 남성을 기다리는 여심을 읊조린 시조이나..
이 시조는 어딘지 모르게 애타게 기다리는 여성의 심리를 잘 묘사하였다.
윌침삼경 : 달이 기운 한밤중
뜻 : '기척, 흔적'의 뜻
추풍 : 가을 바람에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기생으로서 세상이 허무한 것을 자탄하는 탄식조의 시조이다.
황진이의 스승이었던 화담 서경덕의 사상이 크게 스민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인걸은 서화담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우러 예어 가는고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뜻을 청산에 비유하여,
신의와 지조를 나타낸 반면 흐르는 물에 비유한 임의 정은 변절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종장에 가서는 청산도 녹수도 일체가 되는 조화의 묘를 기하였다.
애이불상이라는 말이 이런 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조의 자세와 인품이 대범함이 이 한 수의 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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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있는 여자로서의 황진이
◇황진이가 왜 신화적 조명을 받았을까?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
원칙의 불의 속에서 태어나 관원 남성들의 노리개 거리로 존재한 해어화인 진이가..
왜 이렇게 유명하고 신화적 조명까지 받아왔는가? 그 원리는 간단하다.
당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장은 기방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육감적인 한에 있어서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은..
그런 전설을 불러일으킨 진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초월 해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 한몫을 진이의 전설을 부연한 문인과 소설가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 재상 송순, 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 이언방..
재상 소세양 등이 있고, 망신한 이로 지족선사가 있고..
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과 이덕형, 유몽인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호 임제는 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지족선사와의 일화
지족 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고 존경하였다. 그래서 진이는 지족 선사를 택했다.
하얗게 소복한 채 지족선사를 찾아갔다.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지족선사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 속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당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수양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 보살'을 되뇌이며 열심히 불도만을 닦았다.
풍경소리도 그치고 밤은 깊어갔다. 이젠 할 말이 없었다.
진이의 몸가짐만이 등불 아래서 고요히 흔들릴 뿐이였다.
지족 선사는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비에 젖은 홍시같은 살결을 훔쳐보며 선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30년 면벽도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된 것이였다.
열반의 세계에 귀의하려던 지족선사는 오욕이 끊는 육체의 야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한 진이는 암자를 빠져나왔다.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버리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다.
송도 거리의 반광인,반걸인이 되고 만 것이였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소록, 조야휘언에서 황진이가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망치게 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을 찌른 애닯은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서경덕과의 일화
서경덕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격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농락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날 화단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황진이가 별안간 복통을 일으켜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펴주었다.
자기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연방 서경덕의 통태를 살폈으나 일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서경덕은 웃목에 조그마한 포대기를 얌전히 개켜놓고 단정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의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황진이는 자기의 부질없는 연극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진이입니다."
" 이 비록 아름다운 선학이나 또한 진지이니라." 서경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서화담은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까지 산 당대의 석학이였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에만 전념하였다.
황진이도 서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었다. 진랑이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가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 하였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기다려도 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귄가 하노라..
진랑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 부드러운 음성을 보고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진이는 문 밖에 와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님을 속여 월침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없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도 절절할 수 있을까?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 .....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였다.
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과 황진이의 서경덕에 대한 연정은 마음속에다 깊이 간직해두었던 것이였다.
잎지는 소리는 서경덕에게는 환청으로 들려왔고,진이에게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였다.
자연의 이치를 서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화담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명월은 자기 자신을 청산에 비기고 서경덕을 녹수에 비겼다.
녹수는 없고 청산만 남은 것이였다. 물 없는 청산이다.이 무슨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 없다. 꼭이 서화담의 죽음을 한탄하여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청춘 시절에 흠모했던 인물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생 무상을 노래한 것이리라.
◇벽계수와의 일화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른 황진이의 시조 한 수가 전해져내려오고 있다.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한번 진랑이를 보면 빠져버리나 나는 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쫒아버리겠다.'
이렇게 호언 장담하고 벽계수는 송도로 내려왔다. 왕가의 귀족답게 벽계수는 의젓하고 냉정했다.
찬바람이 휙 돌고 매정스러우리만큼 까다로왔다.
그는 가을밤 송도를 구경하기 위하여 나귀를 만월대로 몰았다. 진이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래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 그만 나귀 등에서 떨어졌다.
진랑이 웃으며 이는 명사가 아니고 한낮 풍류랑이라하고는 즉시 돌아가버렸다.
벽계수의 양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못난 벽계수야,
인생은 한번 가면 그만인데 천하의 명기 명월이가 무르녹아 있으니..
어찌하여 나와 즐길 줄 모르고 가려고 하느냐. 함께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양반 계급에 대한 지독한 풍자와 야유가 담겨있다. 양반 계급을 우습게 본 것이다.
여기서 남자를 흐르는 물에 비유하고 공산에 뜬 명월을 자기로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남존 여비의 시대에 더구나 양반 계급이 극심한 때에 기생인 자기를 명월로 비기고..
종친의 한 사람을 산골물로 비유했다는 것은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인으로서의 자존심,미인으로서의 자존심일 것이다.
사회적 신분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때 느끼는 여자의 분노가 이 시에서 저절로 배어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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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만의 개성
◇황진이의 부채
우리나라의 풍습에 단선은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사용했고..
접선은 남자들이 외출할 때 들고 다녀 접선을 '쥘부채'라고도 하였다.
곧 의관을 모두 갖추고 가장 마지막에 부채를 들어야 비로소 외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단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다가 찬 바람이나 먼지를 막기도 하고..
만나서 거북한 상대라도 부딪치게 될 것 같으면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레 부채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또 시조나 가곡이라도 한곡 하려면 부채로 장단을 맞추거나 펼쳤다 접었다 해가며..
풍류와 멋을 즐기고, 호신용으로도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선비들에게 애용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한때는 부채 사용에도 법도가 있어 접는 부채 가운데 큰 것은 신분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만 사용했고..
작은 것일지라도 접는 부채는 여자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생과 무당에게는 허용하여 직업의 필요상 허락해 준 적도 있었다.
또한 부채에 옻칠한 것을 선호하였기에 옻이 귀한 때에는 국가에서 필요한 칠선 외에는..
옻칠한 부채의 사용을 금한 적도 있었다.
조선 말기에 선면을 색깔있는 종이나 천으로 하고..
변죽을 나전이나 화각, 대모 등을 붙여 화려하게 만든 것은 주로 기녀들이 쓰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단선을 크게 만들어 지금이 1m쯤 되게 하고 자루를 길 게 하여..
자루 중간에 고리를 달아 끈을 묶은 것도 있다.
이것을 천장에 매달고 자루 끝에도 고리를 달아 길게 끈을 늘어뜨려 잡아당겼다 놓았다 하면..
부채가 천장에서 왔다 갔다 하여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마루나 방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시원하게 하는 것이니..
대개는 하인이 줄을 잡아당겨 시원하게 하는 것이지만 혼자서 직접 움직일 수 있게도 하였다.
◇황진이의 전모
자루 없는 우산 모양으로, 테두리에 14~16개의 살을 대고 한지를 바른 뒤 기름에 절여 만든다.
가장자리에는 부·귀·수·복 글자를 나비무늬와 함께 그렸고, 전모살 한가운데에는 태극을 그렸다.
오복을 빌기 위해 박쥐무늬를 8개 그리기도 했다.
안쪽에는 쓰기에 편하도록 머리에 맞춘 테가 있으며..
머리테 양쪽에 길게 끈을 달아 턱 밑에서 매어 늘어뜨리도록 했다.
주로 멋내기를 좋아하는 기녀들이 바깥나들이를 하거나 말을 탈 때 썼고..
사대부 집안의 부녀들이 사용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가례도감의궤에 실린 행렬도에 의녀와 기행나인들이 전모를 쓴 모습이 그려져 있어..
궁중에서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