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어진 라니안 판타지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매우 유익하여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군대의 보급-
산업혁명 이전의 보급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1. 약탈형 보급
2. 민간업자 (상인, 중간업자 등)의 보급
3. 징발형 보급
이 세가지 보급 형태 중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통제가 원할한 형태의 국가는 주로 세 번째 형태 (징발형)의 보급이 주를 이루고, 비교적 병력 규모가 적고, 중앙집권화의 진행이 덜 된 국가들은 첫 번째와 두 번 째 형태의 보급이 주를 이룹니다. 두 번째 형태인 민간업자를 통한 보급은 중앙집권 국가 든 아니던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의 보급형 이기도 합니다. 현대 국가에서도 군수품의 많은 부분을 민간업체 (혹은 군수업체)에서 공급하는 형태를 보입니다.
어쨋거나, 30년 전쟁 이전(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유럽군의 보급은 주로 약탈과 민간업자의 보급에 의존하는 형태를 보입니다. 약탈에 의존하는 보급은 군대가 지나가는 지역이 초토화 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나, 군 사령관의 입장에서 보면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없을 뿐더러, 짭짭할 부수익(약탈품)으로 군대운용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약탈형 보급의 또 다른 약점이라면, 약탈에 의지하는 군대는 대규모의 병력운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군대가 한 지역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민간업자가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방식은 중세 뿐만 아니라 근대에 와서도 널리 활용된 방식인데 이 경우 대게 상인들이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등을 타 지방이나 주위에서 구입한 다음, 군대에 판매했습니다. 대규모 군대 (수만명 급의) 에 상인을 통해 식량을 보급할 경우에는 대게 국왕이 전쟁기간 (혹은 전시 초기)에 모든 식량의 판매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내리고, 상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상인들이 공급하는 방식은 국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급체계의 유지에 필요한 관료조직을 운용하지 않아도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의 동원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 만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운용하기에는 힘들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징발을 통한 보급방식은 중세유럽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은 방법이나 근대유럽 및 중, 근대 중국 에서 많이 쓰인 방식입니다. 이 경우 국가가 방대한 양의 보급품을 징발할 수 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의 유지, 보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효율적인 징발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 방대한 규모의 관료제도가 필요하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징발제도는 보통 전쟁터에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서 식량을 모은다음 지방관의 관할 하에 보급품을 군대로 보냈습니다. 중세 영국의 경우 각 주를 담당하는 주장관이 그 지역에 할당된 보급품을 전쟁터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임무를 총괄하는 임무는 주로 학문이 뛰어난 고위 성직자들이 맞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근대유럽에서 이 보급품을 징발하는 사람들은 각 지역의 행정관들이 총괄했습니다. 예를 들어, 국왕의 재무장관 (혹은 군 보급의 책임자)이 A 라는 지역에 3000석의 식량을 B 지역까지 집결시키라고 했다고 하면, A 지역의 행정관은 3000석의 식량을 책임지고 B 지역까지 운반했습니다. 2004/01/31
아르키메데스 30년 전쟁이 끝나고 난 시점의 유럽에서는 주요 지역(주요 진격로, 전략적 요충지)에 보급창고를 만들어 두고 평상시 그 보급창고에 군수물품 및 식량을 보관해 났습니다. 로마제국의 병참제도나 중국의 병참제도도 기본적으로는 주요지역에 보급창을 만드는 방식을 널리 사용했습니다.
보급에 필요한 인원은 해당 군대가 어떠한 보급방식(약탈형, 민간업자 보급형, 징발형)에 주로 의존하는가나 해당군대의 말의 숫자, 육로를 통한 보급인가 해상로(혹은 강)을 통한 보급이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대게, 대군을 보급하려면 많은 물자를 비교적 빠른 속도로 운반이 가능한 해로를 통하는 것이 보급에 부담이 적어 보급에 필요한 인원이 줄어듭니다. 육로로 운반할 경우 운반하는 노새(혹은 말)의 식량도 필요하기 때문에 장거리를 육로로 보급할 경우 막대한 인원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국의 경우도 수십만 대군의 전쟁터가 되는 곳은 주요 강을 따라 진격로가 형성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병참부대의 비율은 군대에 따라 틀리지만 중국 수 나라의 1군은 총 2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됬는데 이 중 8천명이 병참 및 공성 부대 였습니다. 3만 병의 병사와 5천 마리의 말을 소유하고 있는 군대는 1 주일에 800톤 가량의 식량과 300톤 이상의 말 먹이가 필요한데 이를 육상로로 운반하는는 대략 2000 마리 이상의 말이 필요합니다. 2004/01/31
박재형 보급과 병참은 좀 차이가 납니다.
보급은 물자를 후방에서 전방으로 옮겨 전방의 부대가 물자를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병참은 보급에 더해서 보급선을 지키는 것도 포함 됩니다.
보급선이 길어질수록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드는 데에는 이런 이유 또한 작용합니다.
보통 전체 병력 중 반 이상이 보급부대이고 전체 병력 중 실제로 전투를 하는 병력은 1/10 정도입니다.
전방에 있는 부대만 뻔질나게 싸우다 죽어나가고 후방에서 보급선 지키는 부대는 전투 한 번 안 해 보고 전쟁이 끝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2004/02/01
클라이언트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에 그래도 역시 한번에 많은 질문을 했더니.. 꼭 원하는 자료가 올라오진 않았네요.. 더 많은 자료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자료 찾을 곳 아시면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쪽으로요..
양 웬리/에.. 수나라 군대는 보급부대까지 합하면 300여만이 넘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전투병이 100만이라는 소리죠..
아르키메데스/ 으음... 혹 각 나라(대략 근대시기의..) 의 군사관련 기구들의 자료가 있으신지요..? 그 기구들의 개황이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하고 동원할 수 있는 체계가 궁금하기때문에요..
박재형/ 음.. 보급부대가 반 이상이란 건 아무래도 근대 이후의 일인가요?
현실적으로 보급에 그정도의 병력을 돌리기는 난감할 듯 한데 말입니다..;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2004/02/02
아르키메데스 루이 14세가 즉위할 무렵 프랑스의 상비군은 7만명 안밖 정도였으나, 중앙집권의 성공, 중상주의로 부강해진 프랑스 경제, 더 효율적인 세제, 국왕의 군사 인사권 장악 등으로 프랑스는 40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대규모 동원체제를 완성하게 됩니다.
어쨋거나, 당시(루이 14세 치하)의 군사관련 기구들을 살펴보자면, 우선 그 정점에 선 국왕이 있습니다. 국왕의 아래로 국왕이 신임하는 대신들로 구성된 왕실회의(conseil de roi)가 프랑스를 운용했습니다. 이 왕실회의는 장관들과 국왕이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했습니다. 이 중 전쟁과 관련된 장관직으로 전쟁부 장관 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프랑스 군을 개혁한 틸리 와 그 아들 루브와 후작이 바로 전쟁부 장관 이었습니다. 왕실회의 아래로는 국내통치를 담당하는 내무부(conseil des depeches), 사법을 관할하는 고등법원(conseil privy), 왕국의 주요 재무를 담당하는 왕실재무부(conseil royal de finances), 비교적 사소한 지출을 담당하는 국가재무부(conseil d'etat et finances), 금전적인 문제를 중재하는 경제중재부(grande directron des finances)가 있었습니다.
이 중 군사에 관련된 조직은 전쟁부 장관을 정점으로 하는 전쟁부, 징집, 보급, 요새건설 등 군대 조직을 관할하는 내무부, 전체 국가재정 중 74퍼센트( 육군 65퍼센트, 해군 9퍼센트)에 육박하는 군사비를 관리, 지출한 왕실재정부 입니다.
이 중 군대조직의 유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게 내무부 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전국에 33명의 지방장관을 파견해 각 지방장관은 한주의 세금, 징집, 치안, 사법 등을 관할하게 했습니다. 지방장관은 능력을 인정받아 국왕으로부터 하급귀족위를 하사받은 젋은 평민출신의 인재들로 뽑았는데 이들은 타 지방 출신이며, 국왕에게만 충성했습니다. 내무부는 각 지방에 파견되는 지방장관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지방장관들은 문관 관료로 이들은 전쟁부 장관 틸리 의 개혁에 따라 군사조직에 깊은 관여를 하게 됐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전과는 달리 장군을 제외한 모든 군인은 지방장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으며, 지방장관은 장군의 군사회의에 참가해 군대의 행정, 유지, 식량조달, 요새건설, 무기공급, 의료, 규율 을 관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각 부대장이 군인의 봉급을 분배하던 것과는 달리 군인의 봉급은 지방장관이나 지방장관 아래의 군사 행정관이나, 그 지역의 유지, 해당 도시의 시장등의 감독하에 지급되게 변했습니다. 이 제도로 부대장의 공금횡령을 방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군사행정관은 정기적으로 정기적으로 군대를 사열하는 한편 기습적으로 군대를 검사해 각 부대의 병력수, 보급품등의 현황을 장관에게 직접 보고했습니다. 이 때 규정이 지켜지지 않으면 책임자를 처벌했습니다.
국왕의 군사 인사권 장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이전에는 해당 장군이 그 아래의 장교들의 인사를 관할했으나, 틸리의 개혁 이후로는 국왕이 모든 장교에 관한 인사권을 장악했습내다. 또한 전역 기간 동안만 군대에서 복무하는 대귀족 출신의 고위장교들의 근무방식도 금지돼, 부대장은 항상 부대와 함께 근무해야 한다는 법안이 상정됐습니다.
틸리는 또한 많은 병영을 신설했는데, 이전에는 군인들이 민가에서 생활하는게 보편적이었으나 점차 병영생활이 보편화하게 됩니다. 이어 그는 군인들을 위한 병원들을 지원해, 당시 프랑스 군의 의료수준은 당대 최고급이었습니다. 1666년에는 대규모 군사훈련 및 가상전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모든 머스켓 총을 표준화 하는 등 군사장비의 표준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이어 전국 곳곳에 병기창을 신설해 곡식 및 군사물자를 보관해 놓게 했습니다. 또한 부대내에 여자가 동행하는 것을 금지시켜 보급에 소요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당시의 병력수급은 원칙적으로는 지원제였으나, 강제징집도 많이 쓰였습니다. 각 주를 여러개의 군사구로 나누고 각 군사구의 행정관이 책임지고 할당된 병력을 수급했는데, 강제징집의 경우 4년 동안 복무하게 돼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