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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재 인간문화재 장벽응 증언<1>
장벽응(張碧應, 본명:張泰男) 스님은 1909년 1월 31일(음력, 호적:3월 9일)
경기도 파주군 장마루촌(예전:연천 땅)에서
부친 장용식(족보, 호적:장한성)과 모친 권성녀 사이에서
슬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다.
장벽응 스님의 큰형 장두남은 양주 보광사 스님이었고
둘째형 장석남은 파주 미타사 스님이었고
범패승은 아니었으며 오래전에 열반하였다 한다.
이 가문은 근방에서 알아주는 부자집이었는데
3년 흉년으로 집안이 폐농되어
부친이 장남 두남과 차남 석남을 남의 집 머슴으로,
막내 태남(장벽응)은
이북 장단의 화장사 미타암에 부목으로 들여 보냈다 한다.
화장사 근방에는 약 5∼6가구가 있었는데
태남의 부친 친구가 그 화장사의 부목으로 있었기 때문에
태남이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라 한다.
당시 태남의 나이 8세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절과 인연을 맺게 된 태남은
10세 때 삼월 삼짓날 머리 깎고 5계를 받은 뒤 사미승이 되었고
태남 나이 13세 때 부친이 작고하였다 한다.
화장사는 극락암(여승방), 죽두암(절터만 남아있었음), 미타암(여승방),
금경암, 낙가암과 같은 암자가 있었고 신도가 무척 많았다 한다.
그리고 이 화장사에는
범패, 춤, 의식을 거행하는 스님이 80여명 가량 있었는데
장벽응 스님은 당시 황청하 스님한테 범패 홋소리와 태평소를 사사했다 한다.
황청하 스님은 장벽응 스님의 나이가 10대 중반일 때 열반하였는데
장벽응 스님에게 5계를 일러준 분이 바로 황청하 스님이라 한다.
나이 차이는 장벽응 스님이 13세일 때 황청하 스님은 60대 중반이었다 한다.
장벽응 스님은 범패 짓소리는 김보성 스님에게 배웠고
이범호 스님(김보성의 스승)한테는 범패를 배운 바가 없다고 한다.
김보성 스님은 장벽응 스님보다 40세 가량 연상이고
6.25 이후로는 못보았다 한다.
장벽응 스님은 법고, 나비춤, 바라춤,
그리고 과일, 떡 등 제물상 차림법과 지화 만드는 법,
가사 짓는 방법은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한다.
취타, 염불은 화장사를 나와 서울 와서 귀동냥과 자체 연구로 습득하였다 한다.
그리고 장벽응 스님은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방생원에서
윤동화(윤만순) 스님에게 호적 염불 가락을 조금 익혔다고 한다.
장벽응 스님은 20대 중반 때 서울 응암동(?) 백련사에서 박송암 스님을 처음 만났고
이때 잠시 교류하다가 장벽응 스님은 개성으로 내려갔고
일제 말기에 황해도 성불사에서 다시 상봉하여 함께 범패를 하였다 한다.
그후 봉원사에서 본격적으로 친교를 맺었다 한다.
6.25 이후 장벽응 스님이 영산재를 함께 한 스님은
박송암을 비롯해서 이경협, 한법룡, 김운공 스님 등이라 한다.
이경협 스님은 신축생으로 현재 생존해 있다면 백살이 넘고
한법룡 스님은 갑인생으로 2001년 지금 생존시 88세이고
열반한지 20년이 넘었다 한다.
김운공 스님은 갑진생으로 2001년 지금 생존시 98세라 한다.(계속)
2001년11월15일
영산재 인간문화재 장벽응 증언<2>
장벽응 스님은 30대 때
신충근(대금), 이충선(피리), 임원식(해금 장고 호적) 등의
악사와 함께 영산재를 하였다 한다.
장벽응 스님이 화장사에서
서울 삼청동 삼각사로 옮긴 것은 31세 때라 한다.
장벽응 스님은 안채비소리는
재를 올리는 절의 의식 담당 안채비들이 부르는 소리이고
겉채비소리는 외부 초청 범패 전문 스님이
부르는 소리라고 하는 구별은 존재하지 않고
범패승이라면
안채비, 겉채비 소리 모두 다 가능하다고 한다.
안채비는 불공 소리이고
겉채비소리는 범패,
즉 홋소리와 짓소리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장벽응 스님은 1945년 8.15 광복 직전에
김포공항 길 닦는 보국대, 강화 황산도에서
길 닦는 중노동 강제 노역을 하였다 한다.
장벽응 스님은 노년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1리
문수산 자락에 자리잡은 문수사 주지를 맡았고
그 절과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산다고 하였다.
장벽응 스님은
모친이 데려다 길러온 처녀와 21세 때
화장사에서 혼인하였는데
그 처녀는 어떤 스님의 손녀딸이라 한다.
이 부인은 오래전 작고하였고
두 번째 부인 박학점(계해생)은
문수사에 몸 담고 있다 한다.
장벽응 스님은 슬하에 4남매를 두었는데
둘은 예전에 잃었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살아있다 한다.
이 가운데 아들이 스님으로서 문수사에 있다가
다른 절로 옮겼는데 안채비 불공만 조금 하고 있다 한다.
장벽응 스님은 1973년 박송암 스님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다.
장벽응 스님이 오랫동안 보관해 오던 범패 소리책은
몇해 전에 문수사 화재시 불타 없어졌다 한다.
장벽응 스님은 화장사에서부터
여러 후배 스님들에게
상주권공 등을 가르쳐 왔으나
이렇다 할 내세울 만한 제자는 많지 않다고 한다.
장벽응 스님이 1998년에
비매품으로 낸 범패 음반(김포문화원 2CD)은
1996년에 문수사 포교당에서
혼자 징치며 소리한 녹음이라고 한다.
장벽응 스님은 열반하기 몇해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1996.10.9.12:30∼13:00,1998.12.1.14:00∼15:00,1999.1.3.14:20∼15:00.장벽응 스님 증언)
* 필자는 이 대담 외에도
1997년 3월 18일 서울 신촌 봉원사에서
열린 정지광 스님 열반 49재(영산재) 휴식시간에
박송암, 장벽응, 이일응 등의 스님이 담소 나누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는데
유치원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과
순진한 대화가 오고 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끝)
2001년11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