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ouard Manet 1832∼1883 에두아르 마네
프랑스 화가. 파리 출생. 회화 전체의 역사로 볼 때 , 어떤 화가도 마네 만큼 발표하는 작품마다 야유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들랔로와, 졸라, 말라르메, 드가, 모네등과 같은 거장들에게 그만큼 지지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마네처럼 그림에 의해서뿐 아니라 인물 그 자신 때문에 그토록 매력을 끄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1832년 1뭘 23일, 에두아르 마네는 파리의 프티 조귀스탱가(현재의 보나파르트가)에서 오귀스트마네와 운제느 데질레 풀니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법무성의 고급 관리였고, 어머니는 스웨덴 주재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었다. 마네 가는 상당히 유복한 중산 계급에 속했으며 루이 필립의7월 왕정 아래서 교양있고 전형적인 부르조아 생활을 했다. 때마침 이 시기는 영국보다 반세기 늦게 산업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부르조아의 청춘 시대」에 해당되며, 시대 문화가 시민적인 성격을 뚜렷이 띠기 시작한 무렵이다. 그런데 1832년이라는 해는 드라크르와가 모르네 백작 일행에 참가하여 모로코 여행을 꾀하고, 한편으로는 도미에가 루이 필립을 공격하여「가르강튀아 사건」을 일으켜, 생트 펠라즈 람옥에 감금된 해이다.
이윽고 드라크르와는 아프리카의 인상을 바탕으로 화려 분방한 색채의 세계를 쌓아 올리고, 출옥 후의 도미에는 시민생활의 묘사에 전념하게 된다. 낭만주의의 꽃이 피고, 사실주의가 싹이 트는 것을 함께 맞이한 것이 1830년대이다.아버지는 물론 장남을 법률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에두아르는 국민 학교 때부터 학업에는 몹시 싫중을 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그림으로 돌리는 데 있어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외삼촌인 에드몽 에두아르 풀니에였다고 한다. 이 외삼촌은 포병 장교이면서도 그림을 좋아했는데, 자주 마네 가를 찾아와서 조카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한편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상심한 아버지는 친구가 경영하는 롤랭 학원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그곳에서 에두아르는 평생의 친구가 될 같은 나이의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난다. 프루스트는 그 뒤 1881년에 간베타 내각의 미술 장관이 된 사람이며, 오늘날 우리가 마네에 관해서 알고 있는 전기적 사실은 그 대부분을 그의 회상기 「에두아르 마네」(1913년)에 힘입고 있다. 두 소년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즐겼으며, 또한 외삼촌과 동반하여 루브르를 자주 방문했다. 그 무렵 루브르에서 특히 사람의 시선을 끈 것은 1838년에 루이 필립 왕이 창설한 「스폐인 미술관」이다. 나폴레옹에 의한 스페인 전쟁을 단서로 하여 프랑스에서는 스페인 취미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의 문예로서는 위고의 「에르나니」와 메리메의 「카르멘」이 발표되었으며, 그것들과 호응하는 것처럼 500점이나 되는 스페인 회화가 루브르에 수장되었다. 카탈로그에 의하면 그 가운데에는 19점의 벨라스케스, 9점의 그레코, 8점의 고야, 25점의 리베라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는데, 당시는 작가의귀속에 극히 관대했으므로 모든 것을 진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소년 마네는 강렬한 스페인회화에 도취되어 연필로 스케치를 하곤 했다. 이것은 그의 예술 형성에 지우기 어려운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화가 지망을 허락하지 않아서 17세 때 남아메리카 항로의 선원견습생이 되었다. 화가가 되려는 그와 법률가로 키우려는 아버지와의 의견 차이는 마침내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결심하게 하였으나, 입학시험에 2번이나 실패하였다. 그 동안에 1848년의 2월 혁명이 일어나, 7월 왕정은 무너지고 제2 공화 정치가 탄생했다. 이윽고 새 정부의 방침으로, 해병 지망자는 반년 동안 배를 타는 경험을 쌓으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자 바다를 사랑하는 마네는 크게 기뻐하며 응모했다. 1849년 2월, 그가 견습 수병으로 타게 된 범선 르 아브르에 구아델루프호는 오랜 항해를 한 후 남아메리카의 리오데자네이로에 닿아 이곳에서 2개월을 지냈다.
「날마다 하늘과 물, 언제까지나 같은 것만 보이니 얼빠진 노릇입니다.」라고 한탄하는 편지를 썼던 그도 원색적인 남국 풍경, 식민지적인 화려함과 비참한 정경이 한데 있는 일과 흑인 노예군 등 미지의 세계에 접촉하자 강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여행의 추억을 많은 사생첩에 담아 6월에 파리로 돌아왔을 때,바야흐로 청년기를 맞이한 마네의 마음 속에는 남이 범할 수 없는 불기의 정신이 자라고 있었다. 이미 해군 사관이 될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도 마침내 굴복하여 아들을 토마 쿠투르의 아틀리에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위대한 색채화가에 대한 취향을 이어받고 하프톤을 배제하고 밝음과 어두움을 대담하게 대비하는 표현기법을 배우며 그곳에서 6년간 머물렀다. 에두아르 마네가 평생에 단 한 번 이른바 「스승」으로 모시고 직접 그림을 배운 화가는 토마 쿠투르이다. 당시의 쿠투르는 2년 전의 살롱에 <퇴폐기의 로마 인>을 출품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아직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히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인기였다. 다비드의 계승자이자 화단의 원로인 그로 남작이 이전에 그에게 「이와 같은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간다면, 자네는 프랑스의 티치아노가 될 거야.」라고 한 말을, 그는 미술 학생들 앞에서 곧잘 되풀이하곤 했다. 그후 마네는 쿠투르의 아틀리에에서 6년 동안을 보내게 되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점차 멀어진다. 그도 당시의 미술 학생들처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또한 네덜란드 파와 스폐인파를 연구했으나, 기법 습득의 목적이 스승과 동료와는 달랐다. 이미 이 시기부터 마네에겐 그림 기법이란 스승에게 성공을 안겨 준 역사화의 제작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호흡하는 현대 생활의 표현에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감수성은 어느 사이에 역사화가에게 배우면서도 역사화가라고 불리는 일에 최대의 모욕을 느끼는 방향으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목적과 취미의 차이는 이를테면 쿠투르와의 다음과 같은 충돌로 나타난다.
어느 날, 마네는 교실에서 나부를 이상화하여 그리는 평상시의 방법을 무시하고, 모델에게 옷을 입혀 될 수 있는 대로 자연스러운 포우즈를 취하게 하여 그리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쿠투르가 들어왔다. 한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서 있더니, 꽥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누가 이런 바보 짓을 했는가 ?" 「저여요.」 하고 마네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스승은 연민과 경멸하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아, 자넨가? 당장 나가란 말이야. 자네는 자네 시대의 도미에밖에 되지 못할 게야.」
위에 말한 그로의 찬사와 그리고 뒤의 도미에의-또한 마네의-영광을 생각한다면, 이 말은 꽤 함축성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신구 두 파의 교체기에 있어서 구파의 보수적인 예술관과 미래에 관한 기묘한 착오와 통찰이 집약적으로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쿠투르는 신고전주의의 예술 이론에 의해 제작하고 있었다. 이 이론은 18세기 이래의 「이상미」의 미학에 입각하는 것이며, 그 입장에서 본다면 본래 눈제 보이지 않고 현상의 저쪽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미의 추구야말로 예술의 참 목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이상미」에 가까와지기 위해서는 이 지상에서 이것을 가장 잘 반영한 전례-고대 그리이스의 예술-를 본뜨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고대 그리이스의 예술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르네상스의 예술을 모범으로 받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나부를 그리는 데 있어서도 모델의 개별성이나 우연성을 사상하고, 이상적인 형식미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모델에게 옷을 입히고 그녀의 일상성 그대로를 포착한다는 것은 마땅히 지양 되어야 한다. 시대의 동향에 맹목적인 이런 종류의 형식주의가 얼마만큼 예술의 내용을 빈약하게 만들어 버리고, 또 전례의 모방이 얼마나 빠르게 아카데미즘을 낳게 하는가는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만약 「프랑스의 티치아노」라고 칭찬받은 쿠투르가 티치아노의 나체 표현에서 「이상미」의현현(顯現)만을 인정하고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착오를 범하는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실 티치아노의 풍염한 비너스 상은 전형으로 받들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나,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서 나부를 「이상미」에서 해방시키고 현실의 생기에 접촉시킨 화가는 다름아닌 티치아노였다. 그는 중세 이래의 초월적 ·추상적인 나부, 흑은 신(新)플라톤주의의 복잡한 관념의 무거운 짐으로 여윈 나부를, 이탈리아의 여름철의 뜨거운 관능에 숨쉬는 여체로 변모시켰다. 티치아노가 생명에 빛나는 형태를 창조한 데 대해, 신고전주의자는 본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생명에서 형태만을 빼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실로 상징적인 것은 도미에가 나부나 미녀를 한 번도 그리지 않았다는 일이다. 그가 그리는주제는 파리와 그 시민들의 생활에 한정되어 있다. 종교, 신화, 역사 등 지금까지의 관전(출토) 화가의주제를 다루지 않고 센강변 서민가에 있는 흥행장, 3등차 등 낡은 회화관에서 본다면,풍속화라는 저급의 장르만이 그의 레파토리였다. -거기에 포함된 고독한 탐구의 성과와 자유롭고 대담한 회화적 포름의 창조를 아는 사람은 드라크르와 등을 예외로 하고 거의 없었다. 도미에는 현실에 끌려살아 움직이는 인간 세계에서 미를 발견한 셈인데, 이러한 제작 태도는 도미에 한 개인의 취미를 넘어서서, 19세기 중엽의 시민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 예술 전반의 동향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미보들레에르는 1846년의 살롱 평에서, 미에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과 일시적이고 특수한 것이 있다는것과, 모든 민족은 각각 자기의 미를 갖고 있으며, 우리 시대에는 우리 자신의 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지적했다. 보들레에르가 예언하고, 도미에가 실천한 이 일의 방향비야말로 참으로 마네가 계승하여발전시켜야 할 일의 방향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네는 새로 무엇을 더했는가? 그것은 뒤에서 언급하기로하겠다. 쿠투르의 경멸적 말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티치아노」란 말은 참으로 시대 정신에 뿌리박은 창조의 본질에서 본다면, 「자네 시대의 도미에」와 합치되처야만 할 말이었라. 그러므로 마네는 티치아노에게 배우기는 했지만, 그를 현대로 재생시키려고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올랭피아>로 변모시켰다. 그것이 얼마만큼 세상에 충격을 주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애 언급하기로 하겠다.마네는 순수한 파리지안이며, 그의 미술도 파리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 19세기 후반의 난숙한 파리의 문화가 그의 예술의 모태였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예술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화가로서 쿠르베를 먼저 지적한다. 쿠르베의 예술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명제는「현대의 사고에 의한 현실생활의 묘사」로 나타난다. 이는 들라크로와가 주장한「창조적인 상상력」과는 또다른 세계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에 그가 들라크로와를 비롯한 낭만주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마네는 확실히 들라크로와의「창조적인 미」나 앵그르가 거부한 이상미 역시 스스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1860년 마네는 당대에 문명이 높았고 낭만주의 예술의 옹호자-그는 특히 들라크로와를 옹호했다-인 시인 보들레르를 만났다. 후에 그 마네의 작품이「대도시의 정신적인 브르죠아, 파리의 혼의 매혹과 뉴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격찬했다. 마네 스스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말한 것과 보들레르의 낭만주의에 대한 논의를 살펴 보면 그들 사이의 융화가 보다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보들레르는 회화가「주제의 선택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낭만주의는 빈틈 없는 제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이에 대해서 마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미라고 해서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시대의 모든 것이 전연 쓸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도 변화한다는 것을 말할 뿐이고, 다시말해서 아름다움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에 의해서, 또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현대라는 시대 가운데 이 시대 특유의 것을 보고 표현하자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은 없다. 그렇다고 옛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아니지만…… 」
그는 근대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자각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미적 감정의 객관화나 이상미의 추구가 아닌 일상생활의 미-그에게 있어서는 시민정신의 발랄함, 신선함이지만-를 표현하려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들라크로와의 작품을 열심히 모사(模寫)하였다든가 1959년 그의 작품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를 들라크로와의 추천을 받아 살롱에 출품하였다든가-결국은 낙선하고 말았지만-1863년 바지르와 함께 들라크로와를 방문하였다든가 하는 사실이 이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네는 스페인의 화풍이 과감한 대비나 대조에 의해서 선명도를 높이고 있음을 알아 차렸고 이러한 자각은 곧 그의 세계에 도입되었다. 그는 곧 감각적인 세련미를 찾아 나아 간 것이다.
53년 이탈리아를 여행, 56년 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과거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역사화가인 스승에게 반발하여 자유연구로 나아가 루브르미술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60년대의 그의 작품에는 F.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나 에스파냐회화, 특히 L.F.고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종종 보인다. 59년 《압생트를 마시는 사나이》를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하였고 61년의 살롱에서 《부모님의 초상》과 《에스파냐 가수》가 처음 입선하였으나 처음부터 이색적인 작품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낙선을 거듭하였다. 1863년은 마네에게 있어서 뿐만아니라 프랑스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해에 낭만주의의 대가 들라크로와가 사망했다는 것이 그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이른바「낙선전」의 출현과 이에 출품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등이 몰고 온 회화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변화가 그것이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으로 서서히 진행되고 있던 시민계층의「소비문화」의 표현양식으로 구체화한 것이기도 하며 성숙한 시민의식의 향락성을 노출시킨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마네는 이 시기를 전후해서「밝음」을 찾는 화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있으며 그것은 주제에 있어서나 색채에 있어서 시민생활의 밝은 면을 다루었고 문화를 향락하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863년 프랑스의 보수적인 화가들은 Salon이라 불리는 官展(정부에서 주관하는 전람회)에서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를 낙선시켰다. 그후 소란이 일어나자 당국은 심사위원들이 낙선 시킨 모든 작품들을 <낙선전>이라고 불리는 특별 전시회를 통해 전시하도록 했다. 1863년을 기점으로 하여 마네는 종대의 전통적인 어두운 화면을 벗어난 선명한 색조를 추구하여 무명의 청년화가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낙선전>은 관의 심사에 의하지 않는 최초의 전람회로서 오늘날의 <앙데팡당展(독립展)>의 효시가 되었다.
<풀밭위의 식사>에서는 두 사람의 남자와 두사람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두 남자가 완전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한 여자는 완전한 나체로 있고 또 한여자는 반쯤 벗은 상태로 있다. 이그림은 쿠르베의 중요성을 최초로 확인한 화가로서 당시의 도덕관을 침해했다.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에 대하여 선도 높은 색조의 대담한 처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그림에서 어두운 빛깔은 오직 밝은 빛깔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만 쓰여지고 있고 이와 함께 중간색이 사라져 버려 색조의 명암이 한층 더 선명하게 대비 되고 있다. 또한 화면 전체의 선도에 의한 화면의 평면적인 느낌이 강조되면서 양감과 원근의 효과가 감소된다. (과거 근대 미술은 양감과 원근을 중시함)
서양 나체화 대부분의 배경은 침실위주였다. 하지만 마네는 선명한 색조를 얻기 위하여 열려진 공간에서 여자를 나체로 그렸다.
혁신적인 작품은 63년 낙선화전(落選畵展)에 전시된 《풀밭 위의 식사:Le Dejeuner sur l’herbe》, 65년의 살롱 입선작 《올림피아:Olympia》로 일약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이 두 작품에 대한 비난은 지나쳤으나 도리어 그의 표현기법의 참신성과 밝음을 결정적으로 인상지어준 결과가 되었다. 63년 낙선전(落選展)에 출품한 《풀밭에서의 점심》은 많은 비난을 샀고, 65년의 살롱 출품작 《올랭피아》도 물의를 빚었다. 이 두 작품에는 나체의 여인이 그려져 있는데, 육체가 빈약한 평탄한 묘사법 때문에 좋지 않은 평을 받았고, 또 님프·비너스·오달리스크 같은 신화적·이국적 세계의 나부(裸婦)가 아닌 현실세계의 나부를 그렸다는 것이 비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들 작품은 C.조르조네와 V.티치아노의 작품에서 발상된 것이지만, 과거의 작품이 지닌 몽상적 분위기는 배제되고 현대성이 강하게 표출되었다.이 사건 이래 화단과 문단 일부에서 열렬한 지지자를 얻었고, 자신을 경모(敬慕)하는 C.피사로, C.모네, A.시슬레 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그 후에 대두될 인상주의에의 길을 여는 기연(機緣)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아카데미즘의 공인을 기다려, 인상파그룹의 전람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대단히 꺼렸으나 한때는 인상파기법을 채용하여 제작한 적도 있다. 1863년 4월 27일자 일간지『라 프레스』에서 폴·생트 빅토르의 <튈르리에의 음악회>에 대한「소음이 고막을 터치게 하는 그림이다. 또한 그의 풍부한 색채감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평은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지않았다. 그는 쌀롱에 정식으로입성하여 그들과정면으로 대항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과 그를 야유하고, ㄱ를 파렴치한처럼 보았지만 그는 결ㅋ 주눅드는법도 없었고 항상 거만하리라 만큼 자신에 넘쳐 있었다.
1866년 <피리부는 소년>이 살롱에 낙선되자 에밀·졸라는 예리한 논법으로 살롱 심사위원들에게 대단한 항의를 제출하고 마네의 예술세계를 정식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졸라를 비롯한 많은 리얼리즘 계통과 자연주의 계통의 화가와 작가들이 모였다. 그들은 바티뇰 구역에 있는 카페·게르보와에 모여 관전과 관습에 대한 새로운 예술운동을 일으켰다. 매주 금요일, 그 곳에는 마네와 졸라를 필두로 세잔, 피사로, 르노와르, 모네, 시슬리, 베르트·모리소, 판틴 라투르 등이 모였었고 비평가 데오도르 뒤레가 그들을 위해서 봉사했었다. 이는 마네의 밝고 눈부신 톤으로 이루어지는 혁신적인 기법에 젊은세대의 예술가들이 너무나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모임은 1870년 보불전쟁을 전후해서 해체되었으나 1874년 이른바 인상파 제1회 전시회의 효시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네와 인상주의의 연계는 1868년 베르트·모리소를 알면서부터 맺어진다. 베르트·모리소는 1874년 마네의 아우 유젠느와 결혼한 여인이다. 모리소는 마네를 평하여「에두아르는 스스로 한 작품 한 작품 씩 묘사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실과 예민한 감수성이 그의 작품에 어떠한 매혹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확실히 모리소의 스승에 대한 판단은 적어도 마네가 인상주의에로 나아가는 과정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스스로의 시대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마네의 신조이며, 50년대 이후 친교를 맺은 시인 C.P.보들레르의 <현대생활의 영웅성>에도 영향을 받았다.네덜란드의 소도시 자르트 봄맬의 처녀 피아니스트며, 당시 마네 가에 음악 교사로 와 있던 수잔느 렌호크와의 연애이다. 사랑은 급속도로 진행하여, 1852년 1월에 수잔느는 남자 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근엄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해결책으로서 마네는 대부가 되어, 아기를 수잔느와 코에라라는 가공의 인물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꾸미고 레옹 코에라 에두아르=렌호프라 부르게했다. -마네가 수잔느와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10년쯤 지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63년의 일이다. -이 사건은 마네의 개인 생활에 커다란 변동을 가져왔지만 그 무렵 조국 프랑스 자체도 커다란 변동을 가져왔지만 그 무렵 조국 프랑스 자체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는중 이었다. 1848년의 선거에서 갑자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대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가 보수적 부르조아의 지원을 얻어 의뢰를 장악하고, 마침내는 쿠데타를 감행하여 1852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로서 제위에 올라, 제 2 제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 뒤 1870년의 보불전쟁으로 실각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의 제정기가 계속되는데, 이것은 마네의 활동기의 전반에 해당되며, 그의 예술과 생활에 갖가지 명암을 가져오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스페인의 귀족 몬티포 백작의 차녀 우제니를 황비로 맞아들였는데, 이 아름다운 황비 아래서의 프랑스 궁정은 한없는 매력으로써 유럽의 모우드의 중심이 되어 갔다. 퐁텐블로와 콤피에뉴 궁전에서는 낮이나 밤이나 화려한 무도회와 향연이 베풀어졌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파리의 시가지 구획을 오스만의 대규모적인 개장 공사로 아름답게 정비하고, 이윽고 1855년의 만국 박람회에 의해 제 2 제정의 위용을 더한층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곁들여 말한다면, 이 만국 박람회 때 <화가의 아틀리에>와 <오르낭의 매장>을 출품하려다가 거부당한 쿠르베는, 이것과 대항하기 위해 몽테뉴 거리에 자그마한 가건물을 짓고, 40점의 닥품을 전시하여 「레알리슴」전을 열었다. 그 때 그는 전람회 카탈로그에서, 「우리 시대의 풍속, 관념, 전망을 내 견해에 의해 표현한다. 」고 말했는데, 전통의 속박을 끊고 현실적으로 자기 눈에 비친 사실을 「내 견해에 의해」 확실히 나타낸다는 제작 태도의 확립은, 도미에의 태도와 함께 근대 화가의 자세를 결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베르트 모리조는 마네의 애재자이며, 인상파 운동에 참가한 유일한 여류 화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1860년대 후반에 마네가 살롱에서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잇달은 스캔들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을 때, 팡탕=라투르의 소개로 마네의 제자가 되었다. 뒷날 마네의 동생 우제느와 결혼했다. 이 초상은 마네 예술이 갖는 순수한 회화성과 자발적 성격을 가장 잘 전해 주는 작례일 것이다. 쭉쭉 뻗는 시원스러운 붓이 베르트의 표정을 재빨리 포착했으며, 모든 것이 생생하게 숨쉬고 있다. 얼굴의 피부색과 두 눈동자의 검정색과의 대비로 증폭되어 우아한 조화를 만들어 낸다. 이전에 스페인에서 배운 검정색의 효과는 바야흐로 마네 자신의 것이 되어 세련된 파리지안의 감각으로 바뀌어져 있다.
60년대 후반 E.졸라를 비롯해 마네를 옹호하는 비평가가 나타났고 나중에 인상파를 형성하는 젊은 화가와 비평가들이 모여들자 그는 새로운 예술의 지도자적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70년대에는 밝은 색채로 필촉분할(筆觸分割) 수법을 써서 인상파의 영향을 비쳤으나 인상파전에는 한번도 참가하지 않고, 살롱에 계속해서 출품하였다. 만년에 다리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정물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파스텔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최후의 대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으로 <현대생활의 영웅성>을 멋지게 표현하였다. 마네의 그림에 종종 나타나는 쌀쌀함과 인간 상호의 차가움은 주제에 대한 무관심이나 의미 작용의 말살, 조형성의 중요시라고도 풀이되며 조형 요소의 자립성을 강조한 순수회화의 탄생을 마네에게서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1868년 여름부터 마네에게서는 블로뉴를 배경으로 새롭고 자유로운 색채의 추구가 전개된다. 이 시기에 그는 다른 모든 인상주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부세화(浮世畵 )에도 영향을 받으면서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는데 이는 1868년에 제작된 <에밀·졸라의 초상>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1872년부터 아르장퇴유에서 모네와 같이 인상주의적 빛을 추구한 그는 그러나 1874년 4월에 개최된 인상파 제1회전 참가를 거부하고 있다. 이는 드가의 간청 때문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경제적인 도움은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제에 있어서 빛나는 도시생활을 취급한 마네는 회화에 광선의 효과를 도입한 바르비종 화파에서 프레네리즘에로 옮아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색채의 미가 결국 광선의 이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라는 인상주의의 원리는 사실 마네에서 먼저 이루어 졌다. 그러나 1860년대 그의 세계를 결정적으로 규정 지운 스페인 풍과 쿠르베풍의 사실주의는 버려지지 않았고 빛을 강조하면서도 고유색의 신선미를 강조함으로서 인상주의의 비약을 거부한 것이다. 자유롭게 창달한선, 벨라스케스 및 고야 이후에는 유래가 없는 세련된 색감각, 심오한 발뢰르의 지식 등 마네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화가로서 다방면의 소재를 마음대로 다루었으며 티치아노와 고야의 뒤를이어 검정색의 광휘를 마음껏 발휘하게한 화가이기도 했다. 마네는 이러한 논재응ㄹ 꺼려했으나 , 그의 작품은 그가 일생동안 고수해온 <순수회화>- 한획한획의 붓이나 한점 한점의 빛깔은 , 그것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보다 그자체가 예술에 이어서 는 제일의적인 현실이라는 신념에대한 집념이었다. 그는 회화적인 구조자체가 관람자들에게 멀어져버리지난 않을까하여 자기의 모델들의 표현적 ,상징적 내용들으 걸러내버리는데 신경을 다. 그는 새로운미술을 선언했다 이캔버스는 창이아니라, 작은 평면적인 색면에서 만들어진 스크린이다.
1880년을 전후하여 마네는 류마티스로 고통을 받고 여러차례 치료를 받았다. 그동안 그는 드가와의 약속으로 인상파 전시회에 계속 불참했고 오히려 살롱에 출품했으며 레죵·드느르 상을 타는 등 관전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모네 등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계속 도와왔다. 마네는 드가의 조언으로 말년에 파스텔화를 시작했고 보행의 곤란을 받으면서도 <프랑스 미술전>에 참가하는 등 대단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그의 친우이자 마네 세계의 충실한 옹호자인 에밀·졸라는 1884년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에두아르 마네가 죽은 다음날 돌연 예찬의 소리가 일어났다. 모든 신문은 한 사람의 위대한 화가의 죽음을 알려주고 머리를 숙였다.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들, 졸면서 농담을 하던 사람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관 속에 들어가서야 겨우 승리를 획득한 이 거장에게 찬사를 올렸다. 처음부터 그의 성의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승리가 뼈아프다. 왜? 역사는 돌이켜진다. 대중의 어리석음은 조상(彫像)을 건립하기에 앞서 이미 당시의 사람을 죽였지만 우리가 이미 15년 전에 말한 것을 그들은 이제야 되풀이하는 것이다.
친구의 영구차를 따라 묘지에까지 가며 우리들은 슬펐다. 이제야 나오는 때 늦은 예찬은 친구의 손에 닿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제 그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되려 하고 있다. 이 화가의 중요한 걸작들을 모은 전시회가 경건하게 이루어지고 당국은 미술학교의 홀을 제공해 주었다. 감사할 만한 자유주의적 처사이다. 왜냐하면 마네가 전통이라는 성역에 들면 분개하는 돌대가리들이 아직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작품이 줄지어 있다. 판단은 미래에 내려질 것이다. 나는 금세기 후반의 화가 가운데 제1급의 자리 하나가 결정적으로 그의 것이될 그러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멕시코의 맥시밀리안 황제의 처형:L’Execution de Maximilien》(1867)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Le Bar Folies-Berg뢳e》(82) 등 유화의 걸작을 남기고 51세의 생애를 파리에서 마쳤다.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는 유례 없는 화가였다. 1883년 4월에 대수술을 받은 그는 그해 4월 30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네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성과는 더욱 높아졌고 회고전이 마련되기도 했다.
마네 manet
1832년 1월 23일 파리에서 출생. 아버지는 법무부의 고급관료였으며 어머니는 스톡홀름 주 재 외교관의 딸이었다. 1833년 남동생 으젠느 출생. 1835년 남동생 귀스타브 출생. 1838년 1840년까지 보지라르에 있는 프왈루 학교에 맡겨짐. 1844년 롤랭 학교에 입학. 그곳에서 앙토냉 프루스트와 사귀게 됨. 학창시절 동안 그는 이친구와 외삼촌 푸르니에 육군대령과 함께 박물관에 드나든다. 1848년 롤랭 학교를 떠남.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실패. 리오로 가는 훈련선 '아브르'와 '과델루프'호에 승선. 그곳에서 승무원들을 매혹시키는 풍자화들을 제작함. 1849년 두 달 동안 리오에 머무름. 또 한번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낙방. 가족들은 그가 화가의 길을 걷는 것을 허락함. 수잔 린호프는 자기 형제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함. 1850년 토마 쿠튀르의 제자 자격으로 루브르 박물관의 모사화가 명부에 등록함. 9월에 쿠 튀르의 화실에 들어감. 1851년 쿠데타가 일어나자, 친구 프루스트와 함께 구경하러 거리로 나감. 쿠튀르의 화실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루이 나폴레옹의 희생자들이 있는 몽마르트르 묘지에 감. 1852년 린호프라고 불리는 레옹 에두아르 코엘라 출생. 그는 수잔의 사생아이며, 에두아르 마네의 아들로 추정됨. 계속해서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사화를 제작. 암스테르담의 릭스 미술관을 방문. 1853년 카셀, 드레스덴, 프라하, 빈, 뮌헨 등을 방문. 도보로 노르망디를 여행. 그 후에 동 생 으젠느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 베네치아에서 에밀 올리비에를 만남.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 1855년 노트르담 드 로레트 거리에 있는 들라크르와의 화실로 그를 찾아감. 1856년 쿠튀르의 화실을 떠남. 동물화가 발르르와 백작과 함께 라브와지에 거리에 있는 화 실에 정착. 1857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팡탱 라투르를 만남. 루브르 박물관의 걸작품들을 계속 모사함. 으젠느 브뤼네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 1858년 황실도서관의 판화 보관실 명부에 등록. 1859년 들라크르와의 의견서가 있었지만 살롱에서 〈압생트마시는 사람〉이 낙선됨. 라브 와지에 거리의 화실을 떠나 빅트와르 거리로 감. 화가의 자격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모사화가로 등록. 드가를 만남. 1860년 화실에서 자신을 도와주던 소년이 목을 매어 자살한 채로 발견되자 화실을 떠남. (보들레르의 「라 코르드」에 영감을 줌) 수잔, 레옹과 함께 두에 거리에 정착한 후 바티뇰에 있는 아파트를 구함. 1861년 살롱에 〈마네 부부〉, 〈스페인 가수〉를 출품, 기요 거리 81번지에 화실을 마련. 마르티네 화랑에 〈독서하는 사람〉, 〈버찌를 든 소년〉, 〈스페인 가수〉를 전시. 생 페테르스부르에서 〈놀란 물의 요정〉을 선보임. 1862년 브라크몽, 용킨트, 팡탱, 스티븐스, 슈발리에, 르그로, 리보 등과 함께 에칭 작가단체를 결성. 토르토니 카페를 자주 찾음. 스페인 무용수들을 그림. 부친 사망. 빅토린느 뫼랑을 만남. 1863년 마르티네 화랑에서 그림을 전시. 〈롤라 드 발랑스〉에서 아스트뤽의 세레나데를 그림으로 표현함. 「낙선자 전시회」개최됨. 들라크르와의 장례식. 홀란드의 잘트 보멜에서 수잔 린호프와 결혼. 1864년 〈들라크르와를 찬양함〉을 위해 포즈를 취함. 살롱에 〈투우 이야기〉와 〈그리스 도의 죽음과 천사들〉을 전시함. 바티뇰 대로 34번지에 있는 아파트에 정착. 1865년 왕립 아카데미에서 낙선했던 〈모욕당하는 그리스도〉와 〈올랭피아〉를 보들레르의 중개로 살롱에 전시. 바드 카페를 자주 찾음. 스페인을 방문. 사르트에서 여름을 보냄. 당시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림. 1866년 살롱에서 〈피리부는 소년〉과 〈비극 배우〉가 모두 낙선. 세잔느와 모네를 만남. 보르도에서 전시회에 출품. 게르브와 카페를 자주 찾음. 가족과 함께 생 페테르스부르 거리 49번지에 정착. 1867년 졸라가 마네에 대한 비판적인 전기를 출간. 샹 드 마르스 근처에서 개인전을 갖기 로 결심. 앙토냉 프루스트와 함께 며칠 동안 트루빌에서 머무름. 보들레르의 장례식에 감. 1868년 졸라가 자신의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취함. 가족과 함께 불로뉴에서 휴식을 취함. 팔기 위해 런던에 감. 아브르에서 〈죽은 사람〉이 상패를 받음. 런던의 카페에서 강베타를 만남. 팡탱 덕택으로 모리조 자매를 만남. 1869년 에바 곤살레스가 그의 제자 겸 모델이 됨. 살롱에 〈발코니〉〈화실에서의 점심식 사〉출품.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낙선. 불로뉴에 있는 포크스톤 호텔에서 가족이 휴가를 보냄. 1870년 뒤랑티와 함께 뒤엘이 기사를 씀. 바질르?위해 포즈를 취함. 살롱에 〈음악교 습〉과 〈에바 곤살레스〉출품. 그의 가족은 올로롱 생 마리로 가고, 그는 국가근위대의 포병으로 지원. 1871년 올로롱 생 마리, 보르도, 아르카숑, 투르에 감. 혁명정부의 예술위원회에 선출됨. 5 월말에 파리에 도착. 강베타를 모델로 삼는 것을 포기. 불로뉴에서 가족과 함께 지냄. 그 후 쇠약해짐. 1872년 뒤랑 뤼엘이 그의 작품 스물네 점을 사들임. 살롱에 〈케사르지 호와 알라바마호의 전투〉출품. 라 누벨 아텐느를 자주 찾음. 린호프와 함께 프란스 할스 미술관과 릭스 미술관을 방문. 생 페테르스부르 거리에 화실 마련. 1873년 살롱에 〈시원한 맥주〉와 〈휴식〉출품. 가족과 함께 베르크 쉬르 메르 근처에 있 는 에타플로 감. 파리로 돌아옴. 말라르메를 만남. 바젠느 원수의 소송에 참가. 바리톤 가수 포르가 작품 다섯 점을 구입. 1874년 살롱에서 〈철도〉와 수채화 〈폴리치넬라〉는 입선하지만 〈제비들〉과 〈파리 오 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는 낙선.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전시할 것을 거부. 으젠느 마네 와 베르트 모리조가 결혼함. 1875년 살롱에 〈아르장퇴유〉를 전시. 런던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가 아내와 티소와 함 께 베니치아를 여행함. 1876년 살롱의 심사위원회에서 〈빨래〉와 〈화가〉를 낙선시킴. 그때 대중에게 자신의 화 실을 공개하기로 결심. 아내와 함께 몽제롱에 있는 에르네 호쉐데의 집에 거처함. 1877년 살롱에 〈햄릿 역의 포르〉를 선보임. 〈나나〉가 낙선됨. 자신의 친구들인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 카퓌신느 거리에 있는 지루 화랑에서 〈나나〉를 전시. 1878년 만국박람회장 밖에서 개인전을 열고자 함. 자신의 가족과 함께 생 페테르스부르 거 리 39번지에 정착. 암스테르담 거리 70번지에 자신의 화실 마련. 1879년 암스테르담 거리에 화실을 마련. 새로운 파리 시청의 장식을 기획. 〈배에서〉와〈온실〉을 전시. 조지 무어와 여류 성악가 에밀 앙부르를 만남. 졸라와 사이가 나빠짐. 벨뷔에서 치료. 1880년 〈현대생활〉을 지방에서 전시. 살롱에 〈앙토냉 프루스트〉와 〈라튈르 아저씨네〉출품. 벨뷔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물치료를 받음. 브장송과 마르세유에서 전시. 1881년 살롱에 〈페르튀세〉와 〈앙리 로쉬포르〉(훈장받음)출품. 베르사유에서 치료받음. 앙토냉 프루스트는 순수미술학교 교장이 되고, 마네는 레지옹 도뇌르의 오등수훈자가 된다. 1882년 건강상태가 악화됨. 살롱에 〈폴리 베르제르 술집〉출품. 뤼에이에 체류. 유언으 로 뒤레를 유언집행자로 지명. 수잔을 포괄수유자로 지명하고, 그녀 다음으로 레옹린호프를 지명함. 1883년 순수미술학교에서 〈카페 콩세르의 모퉁이〉를 전시. 프랑시 페유드가 그에게 세밀 화 교습을 함. 4월 20일 왼쪽 다리 절단. 4월 30일 사망. 팟시 묘지에 묻힘.
피리부는 소년, 에두아르 마네, 1866년, 캔버스에 유채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수평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
거리의 여가수, 에두아르 마네, 1862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던 마네는 카페에서 나오는 거리의 여가수를 보았다. 순간 예술적 가능성을 포착한 마네는 그녀에게 다가가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도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른 모델을 통해 그가 보았던 포즈를 만들어 냈다. 마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서도 얼마든지 예술적인 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걸작은 당시의 아카데믹한 인습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발코니, 에두아르 마네, 1868년, 캔버스에 유채
머리에 꽃장식을 하고 양산을 든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이 부인의 음악친구이며 인상파 화가인 베르뜨 모리조, 남자는 화가인 기르메, 어둠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작품속의 네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스페인 무희 롤라 드 발랑스, 에두아르 마네, 1862년, 캔버스에 유채, 123 x 92cm
이 작품은 <스페인 발레>에 등장했던 롤라 멜레아라는 무용수를 그린 것이다. 그녀는 마드리드 왕립극장의 마리아노 캄푸르비 무용단의 수석 무용수였으며, 세칭 롤라 드 발랑스라고도 불렸다. 마네는 이 여인을 통해 당시 스페인 사람의 전통적인 모습을 표현하려 했으며, 고야의 <알바 공작 부인>을 본떠 작품을 제작했다. 이 스페인 여인에게서 착상을 얻은 보들레르는 마네를 위해 사행시를 지었고, 그의 유명한 시집 『악의 꽃』에 수록하게 된다.
여인의 스커트는 빨간색, 검은색, 노란색, 녹색 등의 원색으로 대담하게 채색되었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팔과 다리는 상아색으로 부드럽게 칠해졌다. 이 상아색은 어둡게 처리된 배경과 스커트의 현란함으로 인해 보는 위치에 따라 신비감과 미묘함을 주고 있다.
1861년 살롱전에서 <스페인 가수>로 첫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마네는, 계속 스페인 풍이 유행하자 1862년 이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형태나 음영을 중요시했던 전통적인 채색법에 어긋난다며 평론가들에게 "잡탕 칠"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낙선되고 만다.
에밀졸라의 초상 에두아르 마네 1867년 캔버스에 유채
36세가 된 마네가 28세의 에밀 졸라를 그린 초상화인데, 당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고민하는 마네를 백방으로 옹호해 준 졸라에의 보은과 우정의 표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지적인 정열과 불퇴전의 의지이며, 이러한 졸라의 인상 속에 고마움과 사심 없는 우정, 즉 정성을 쏟은 점이 이 초상화의 포인트다.
졸라가 여덟 번이나 와서 포즈를 취한 곳은 마네의 아틀리에인데 도,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벽에 는 그의 작품 <올랭피아>의 사진과 벨라스 케즈의 <바커스의 승리> 모사도(模寫宜),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가 걸려 있어, 마네의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책 읽는 자세를 실물 크기로, 상의(上衣)를 검정 단색으로 처리, 인품을 강조했는데 살롱에서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뛸르리의 음악회, 에두아르 마네, 1862년, 캔버스에 유채
뛸르리 궁전의 정원에서 벌어진 호젓한 음악감상 모임에서 마네의 친구들인 파리의 신사, 숙녀들이 정겹게 모여있는 광경을 그린 이 작품은 야외에서 풍경이나 인물을 직접 대상으로 그려본 하나의 시험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연의 볕살을 표현하기 위해 무척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왼쪽에 짝안경을 쓰고있는 이의 뒤쪽에 있는 이가 마네 자신이다.
풀밭위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 1863년, 캔버스에 유채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연출로 인해 1863년 낙선작 전시회에 출품되자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다. 정작 마네 자신은 겉으로만 근엄한 척하며 규범 속에 묶여 사는 당시 사회전반의 상황을 꼬집는 한편, 나무가 우거진 풀밭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강렬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했던 신념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존의 회화가 정확한 데생과 완벽한 색의 재현에 충실한 것에 반해, 여기에서는 명암의 강렬한 대비와 빛에 의해서 사물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화면의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즉 빛을 받는 나부의 여인, 벗어놓은 옷가지와 과일바구니, 그리고 뒷부분의 웅크린 여인과 그 주위의 밝음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면서 우거진 나무로 만들어진 어두움과 대치하고 있다. 어두운 부분에서의 사물의 형태는 간결하게 처리되고 있고, 반면에 빛을 받는 얼굴이나 손, 정물 등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가 빛을 주제로서 표현하려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 인물들의 포즈와 구성이 마네의 창작이 아니라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제작한 동판화 작품 '팔리스의 심판'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마네의 작품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인상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미술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고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불로뉴 항의 달빛, 에두아르 마네, 1869년, 캔버스에 유채, 82 x 101cm
한때 선원이 되려고 했던 마네는 견습 선원의 자격으로 브라질 등지로 나가는 외항선을 타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마네는 자신이 동경하였던 바다와 항구를 소재로 삼았다. 마네는 1869년 여름, 불로뉴 항에 머물면서 이 그림을 그렸는데, 항구의 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밤 풍경을 직접 그렸다.
밤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세부가 어둠 속에 묻히기 때문에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네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시각적인 탐구를 위하여 이러한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네가 달밤에 포착하고자 한 것은 형태나 양감, 원근법이 아닌 달빛이 자아내는 효과였다. 만월이 비추는 부둣가는 밤이 깊지 않은 새벽녘이나 저녁 무렵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싸여 있는 선박들과 인물들, 그리고 달빛을 환하게 받은 지면, 음영의 대조가 강렬하기까지 하다. 과감하게 생략된 데생과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의 분명한 대조, 그 결과 그림은 평면적으로, 미완성된 듯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과거 미술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종래의 화가들이 중간 색조를 꼼꼼하게 단계별로 칠하면서 명암을 표현하고, 3차원적인 형태감을 중시하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회화 기법이다.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 데 초점을 둔 이 그림은 모네의 <해돋이, 인상>에 앞서 빛과 자연 대상을 진지하게 탐구한 작품이다. 두 작품은 항구와 배, 빛이라는 모티프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느낌을 잡아내고자 한 시도 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제1회 인상주의전이 1874년에 열렸던 것을 생각할 때, 1869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인상주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 1882년, 캔버스에 유채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중앙의 우울한 표정을 지닌 젊은 여인과 그 옆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 실크 모자를 쓴 남자 등의 배치가 재미있다. 우울에 젖어 있는 여인과 서로 공유하기를 꺼리는 배경의 화려함은 마네의 근대적이고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을 드러낸다.
생라자르역, 에두아르 마네, 1873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시내를 철마(鐵馬)가 달리던 1830년 대 말, 철도를 둘러싼 여러 정경들이 새 시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모티브로 채택됐다.
방금 철책 너머로 연기를 남긴 채 사라진 기차를, 곱게 차려 입은 소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책을 든 부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목 언저리와 부인의 얼굴이 감미로운 해조를 이루고, 소녀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옷과 부인의 검은 옷이 대조되면서 상이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읽게 하고 있다.
마네는 이 회화 언어(繪畵言語)로 이별을 그린 모양이다. 구시대(舊時代)와 새 시대의 이별을- 이 작품이 <철도에서>라는 제목으로 1874년의 살롱에 출품되자 찬반 양론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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