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해외 컬렉션 출장을 떠나기 전, 편집부의 여러 선배들은 컬렉션 출장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스탠딩 티켓으로 자리에 앉는 법, 꼭 가봐야 할 밀라노의 핫 플레이스, 볼 만한 전시회 정보부터 출장 가방을 싸는 노하우까지 유용한 정보들이 제공됐는데, 그 중에는 동양인은 키가 작아서 초라해 보이니 반드시 하이힐을 가져가라는 충고도 들어 있었다. 평소 플랫 슈즈를 즐겨 신는데다 168cm 조금 넘는 작지 않은 키를 과신한 나는 선배들의 충고를 무시한 채 새로 산 앞코가 뾰족한 골드 플랫 슈즈와 발레리나 슈즈를 챙겨 밀라노로 떠났다. 그러나 막상 컬렉션장에 도착하니 금발머리 에디터들은 마치 모델인 듯 다리가 길었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한 뼘은 됨직한 플랫폼 슈즈를 신고 있어 그들의 가슴과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 백설공주를 바라보는 난장이의 기분이 이랬을까 싶은 나는 결국 절대 신을 것 같지 않던 플랫폼 슈즈를 덜컥 사들이고 말았다. 플랫폼 슈즈에 발을 넣고 거울 앞에 서서 보니 전체적인 실루엣이 길어져 훨씬 옷 태가 나는 듯했다. “내 다리가 이렇게 길어 보일 수도 있구나…”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플랫폼 슈즈에 크롭트 팬츠, 프린트 톱, 밀리터리 재킷과 빅백을 매치하고 평소보다 12cm 위쪽의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까지 뒷목이 뻣뻣하도록 올려다보던 금발머리 에디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니 주눅들지 않아 좋고, 발바닥 밑에도 굽이 있어 비슷한 높이의 스틸레토 힐에 비해 발도 훨씬 덜 아팠다. 게다가 좌석이 없어 뒷줄에 서 있어야 하는 쇼에서도 별 무리 없이 모델의 발끝까지 잘 보이는 장점까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발바닥은 불이라도 붙은 듯이 화끈대고, 무거운 나무 굽 때문에 발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고통의 절정은 교통체증 때문에 꼼짝하지 않는 차에서 내려 구찌 컬렉션장을 향해 세 블록을 뛰어가는 10분 동안 찾아왔는데, 플랫폼 슈즈를 유행시킨 디자이너들을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른다. 그날 밤, 12시간 이상 플랫폼 슈즈에 갇혔던 두 달은 밤새도록 저렸고 그 후로 며칠간 허리 통증에 시달렸지만, 그날 이후로 종종 문제의 그 플랫폼 슈즈를 꺼내 신곤 한다. 길어진 실루엣 덕분에 슬림해 보이기까지 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잊을 수 없기도 하거니와 크롭트 팬츠나 미니스커트, 여성스러운 원피스에까지 플랫폼 슈즈만큼 잘 어울리는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캣워크에 등장한 모델들의 발에 신겨져 있던 존재감 있는 플랫폼 슈즈를 잊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플랫폼 슈즈에는 잠깐의 고통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강력한 포스가 있다는 것이다. 슈 홀릭을 자처하는 한 선배의 말대로 젤리 패드를 신발 바닥에 깔고 나니 발바닥 통증은 한결 덜해졌고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를 유연하게 걷는 요령과 플랫폼 슈즈를 신고 뛰는 방법을 터득했다.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발끝에 걸려 있는 플랫폼 슈즈는 당분간 애인보다 사랑스러운 "잇 아이템"으로 내 옆을 지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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