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목동(面牧洞)의 [면목]이라는 지명은 말목장 또는 목문의 소재지를 의미 하는 지명으로 마목 또는 목문·문목의 의미와 유사하고 또 목장을 앞에 두 었다는 의미로도 통할 수 있어 면목으로 바뀌었다고 전합니다.
면목동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했고, 갑오개혁 때에는 남서 두모방 전관중, 하계 면목리동으로 되었습니다.
면목동의 위치는 동쪽으로는 용마봉등 산등성이를 경계로 하여 경기도 구리시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중랑천을 경계로 동대문구 휘경동, 장안동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광진구의 중곡동과 경계하며, 북쪽은 상봉동, 망우동 등과 연접하여 있습니다. 따라서 동쪽으로는 산록을 따라 높은 지대가 많고 서쪽으로는 중랑천 연안등 저지대가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설화1(중랑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중랑천 근방에 국립여관인 송계원이 있었기 때문에 중랑천 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상봉동
유 래
상봉동(上鳳洞)은 조선시대부터 유래하는 상리, 봉황동 등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상리의 [상]자와 봉황동 등의 [봉]자를 따서 상봉리라고 붙인데 서 연유하고 중화동, 묵동, 신내동과 같이 봉화산을 끼고 있으며 대한제국 시대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에 속해 있었습니다. 1963년 1월 1일(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속하 게 되었다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중앙선 철도와 망우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동2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으므로 교통의 요지입니다.
상봉동의 동쪽은 망우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면목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중랑천에 연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중화동, 묵동, 신내동 과 접경해 있습니다.
또한 동의 지형이 망우로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상가가 형성되어 있으 며,특히 동북부 서울의 관문인 상봉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설화1(봉황동지세)
상봉동의 옛지명 가운데 하나인 봉황동(鳳凰洞)은 중앙선 철로 남쪽에서 상봉2동에 해당되는데 102번지와 103번지 일대입니다. 이곳의 지형은 낮지만 날으는 봉황의 모습(飛鳳形)이어서 알을 까기 위해 봉황이 막 날아와 앉는 모습이라해서 붙여진 동명입니다. 새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이 봉황새이고 이런 봉황새가 알을 까기 위해 내려왔다는 것은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을 예견해주는 것은 물론 무한한 발전이 있을 것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곧 이 일대가 앞으로 발전을 거듭해서 상봉동 중에서 가장 번창한 지역이 될 것이라는 것인데 다만 비봉의 북쪽이 되는 지점, 곧 봉황의 벼슬에 해당되는 부분을 살려두어야 새 가운데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인데 이를 없앨 경우 닭벼슬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이므로 관청과 같은 건물보다는 상업성이 짙은 건물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인지 이 일대는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일찍부터 주막거리로 통했습니다.
설화2(장사바위이야기)
옛날 서울에서 전국 장사모임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경상도 장사가 허겁지겁 짐을 꾸려 서울로 오던 도중 집으로 돌아가는 강원도 장사 를 만났습니다. 강원도 장사는 "서울의 도성문을 닫을 시간이 다되었고, 오느라고 기운이 다 빠졌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며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장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상봉동까지 왔을 때 갈증이 나서 중랑천의 물을 마시기위해 엎드리자, 이때 짚었던 바위 에 손과 무릎의 자국이 깊게 패이게 되었습니다.
물을 마시고 일어나는데 포졸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이 냇물을 모두 마셔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은 물론 식수마저도 없어져 버렸으니 이는 요물임이 틀림없다"며 에워쌓는 것이었습니다.
장사는 "나는 요물이 아니고 사람이며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먼저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는데 그것도 죄가 되느냐"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음을 진전에 둔 그는 "내 한이 물을 말려 사람이 살 수 없는 검은 땅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며 저 중랑천은 해마다 홍수로 넘쳐흘러 농사를 망치게 될 것이다' 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해마다 중랑천은 범람하였고 엎드려 자국이 생긴 바위가 있던 마을 일대는 검은 가루(석탄)가 날리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으므로 이곳에 삼표 연탄이 들어서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화동
유 래
중화동(中和洞)의 동명은 옛부터 봉화산 아래 자연부락인 가운데 마을(중리)과 아랫 마을(하리)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로 칭하였는데 1963년에 서울 특별시로 편입될 당시 동민들의 의견이 [하]자 대신 화목을 도모하는 의미 로 [화]자를 넣어 중화동으로 개칭할 것을 서울특별시에 건의하였기 때문에 중화동으로 되었습니다. 이곳의 공식적인 지명은 일제침략초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중리, 하리 일부지역이였으나, 1914년 4월 1일 일제의 면,리, 동 통폐합시 양주군 구리면 중하리로 칭하였으며, 해방후에도 이 지명은 변함이 없었으나, 1963년 1월 1일(법률 제1172호)서울특별시의 확장으로 동대문구에 편입하고 동명도 중화동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중화동은 봉화산 산기슭에 중랑천을 끼고 있으며 동1로가 중심부를 남북 으로 관통하고 중앙선과 망우로가 동서로 달리고 있습니다. 또한 봉화산 능선을 끼고 상봉동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망우로를 경계로 상봉동과 나누어지며 북쪽으로는 묵동과 접하고 있습니다.
설화(성덕사이야기)
중화동 303-10번지에 있는 성덕사는 1957년 대지 800평 위에 신설된 사찰로 이곳은 터가 세서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던 곳이었습니다. 구한말 노부부가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갔는데 아이 키만큼 자란 나무가 빽빽 하게 모여있는 곳을 발견하고 부지런히 도끼질을 하여 "이제 마지막 나무구나!" 하고 힘껏 도끼질하여 드디어 마지막 나무가 쿵하고 쓰러지자 지금껏 해놓은 나무를 보기 위해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끔껏 쓰러뜨린 나무는 한그루도 누어 있지 않고 원래대로 빽빽히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꾼은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돌아와 이 사실을 동네사 람에게 알렸습니다.
이때 지나가던 승려가 "그곳은 호열자가 나돌 때 채 죽지 않은 아이들까지도 한꺼번에 내다 버려 어린이들의 원한이 서린곳이니 매년 정월 보름에 짚으로 만든 인형에 이름을 써서 나무에 걸어놓고 애동지가 들었을 때 절대 팥죽을 쑤어 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한 숫자의 아이들이 죽을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고 한 과부만이 이를 지켰는데 다음해 봄 질병이 크게 유행해 아이들이 많이 죽게 되었으나 과부의 아이들은 무사하였다고 합니다.
광복이 되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곳에도 집을 지으려고 했으나 공사도중 서까래가 무너지거나 기둥이 내려앉아 인부가 다치는 일이 많아 집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1957년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 성덕사라는 절을 지을 때에도 건축목재를 실어 나르던 황소가 죽고 인부 여러사람이 다쳤으나 절이 건립된 다음부터는 마을에 액이 떠 다니는 경우도 없고 사람이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어졌으니 성덕사가 치성을 대신 들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묵동
유 래
묵동(墨洞)이라는 이름은 [먹골]이라는 지명으로 더 잘 알려 져 있습니다. 묵동은 옛날 이곳에서 먹을 제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 에는 이곳에 국립여관인 송계원이 있었기 때문에 송계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조선말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에 속해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 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으나, 1963년1월1일(법률 제1172호) 상봉 리, 중하리, 망우리, 신내리와 함께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습니다.
묵동은 봉화산을 끼고 있는 동중의 하나로써 서쪽으로는 중랑천에 연해 그 건너편에는 성북구 석관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묵동천을 경계로 노원구 공릉동과 인접해 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는 봉화산 능선을 따라 신내동과 구분되고 남쪽으로는 중화동이 있습니다.
설화(먹골배이야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항하여 단종복위 운동을 꾀한 사육신은 처형 당하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호송을 책임졌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목적지까지 가슴 졸이며 호송한 후 서울로 돌아와 관직을 그만두고 봉화산 아래 중랑천가에 자리를 잡아 필묵과 벗하며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배나무였습니다. 유배지를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그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나무에서 수확한 배를 가득 바구니 담아 영월을 향해 절 을 했다고 합니다.
왕방연의 무덤은 후손에 의해 이장되었으며 그가 손수 심었다던 배나무 만 자라 사방으로 번식하여 이 일대가 배밭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는데 먹골배는 왕방연의 눈물과 정성이 그가 가꾼 배에 스며들어 단듯하면서 혀 끝에 여운이 남고 씹을 수록 단맛이 납니다.
망우동
유 래
망우동(忘憂洞)의 동명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되는 곳에 망우고개가 있기때문에 붙여졌습니다. 망우고개라는 명칭은 조선초부터 불리워져 왔으며, 조선시대 이래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으로 있다가 일제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로 개칭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습니다.편입된 후에도 동대문구 망우출장소에서 1968년 1월 1일(조례 제491호)까지 행정을 담당?臼늄윱求?.
망우동은 경기도 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망우리 고개와 공동묘지가 있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옛부터 수도방어의 요충지였 습니다.
공동묘지와 고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도로확장 및 구획정리사업후 교통 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흥주택가와 교육지구로 변모하였습니다.
망우동의 동쪽으로는 망우산(281M)의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 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면목동에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봉동과 경계를 짓고 북서쪽으로는 신내동과 접해 있습니다.
설화(신장사이야기)
망우동 359번지 일대는 강원도,충청도,경상도 방면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 역할을 하던 곳으로 망우리고개를 기점으로 길손이 쉬어가는 주막거리였 습니다. 주막거리 부근에는 세 살때 돌절구를 번쩍 들고 다섯살에 아름드리 서낭 목을 뽑아올릴 정도의 힘이 장사인 신(申)씨가 살았습니다.
신장사가 스물한살이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관직을 받기 위해 대기상태이던 어느날, 주막거리에 나갔는데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이 나타나고 곧 호위군사들의 길을 비키라는 호령이 있었습니다.
호위군사들은 모든 사람들을 엎드리게 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였으 나 신장사는 말을 듣지 않아 대여섯 군졸이 몰려나와 서로 당기고 밀던중 신장사에게 잡힌 호위대장이 근처 개울로 쳐박히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본 임금은 비록 불손하다하나 용력이 있고 힘이 장사인데다 담대한 성격도 지닌 것 같아 호위대장의 밑으로 오게 하여 왕의 행차때마다 호위 담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왕의 행차중 갑자기 강풍이 일어 모든 것을 날려 버렸는데 왕의 어가가 날리려하자 군사 여럿이 잡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고 신장사가 달려 와 어가를 잡아 나무에 고정시킴으로써 왕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신장사는 임금의 신임을 받아 빠른 출세길로 접어들어 재상의 지위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내동
유 래
신내동(新內洞)의 동명은 일제때 봉화산 동쪽아래 여러개의 자연부락중에서 신현마을의 [신]자와 내곡마을의 [내]자를 각각 따서 신내리라고 정하 게 된데서 기원됩니다. 신내리는 해방후에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신내리로 있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372호)서울특별시 동대문구로 편입되면서 동명도 신내리에서 신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신내동의 동쪽은 구룡산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되고 남쪽 으로는 망우동과 경계로 합니다. 또한 서쪽으로는 봉화산 능선을 따라 상봉동, 묵동이 연접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노원구 공릉동과 맞닿아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신내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많은 아파트 신축공사로 신흥주 택단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설화1(유어형지세)
신내동 가운데서 신내동 동사무소를 중심으로 용마산길과 이어지는 중앙선 철길 부근까지의 지형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양인 유어형(遊魚形)입니다. 물고기가 움직일 때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데 가만히 있으면 잠을 자거나 죽었을 때 입니다. 그런데 움직인다는 것은 먹이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거나 아니면 알을 낳을 장소를 물색할 때에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물고기는 한꺼번에 수만마리의 알을 낳고 또 움직일 때도 수만마리가 떼지어 다닙니다. 이러한 유형은 자손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곳인데 특히 뛰어난 인물이 나오는 것을 예시해 줍니다. 물고기는 떼지어 다니지만 그 가운데 우두머리 한마리에 의해 전체 무리가 이동되는 것이므로 바로 이 우두머리를 우수한 인물로 보는 것입니다.
이곳의 지형은 물고기의 입이 묵동천을 향하고 있는데 물고기는 입부분보다 양쪽 지느러미와 꼬리쪽에 힘이 더욱 많이 모여있습니다. 방향을 잡아 속력을 조절하는 곳이 꼬리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물고기에서 힘이 모이는 꼬리쪽이 세찬 기운을 더 받으므로 이곳의 지형은 묵동천 반대 방향, 곧 용마산길과 동사무소쪽이 더 많은 기운이 발복되는곳이라고 합니다.
설화2(박수고개이야기)
능마을에서 구릉산으로 넘어가려면 박수고개를 넘아가야 하는데 그곳에는 서낭당이 있어 고개를 넘은 사람들이 무사하길비는 제사를 반드시 지내야 했는데 그 까닭은 옛날 해질녁 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 한 나무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종일 비가 내려 땅이 질퍽거리고 물안개로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데 게다가 구릉산에서 숱하게 많은 나무를 하면서도 한 번도 산신께 제사를 드린적이 없었던 나무꾼은 산신의 미움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막 고개를 넘으려는데 "네가 넘어뜨린 소나무에 살던 귀신이다.오갈데가 없으니 네몸을 내집으로 대신 삼겠다"며 커다란 물체가 따라오는 것이었습 니다.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박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수없이 많은 사람 이 한꺼번에 치는 우뢰와 같은 소리로, 이바람에 소나무 귀신은 물러나고 정신을 차린 나무꾼이 박수소리를 다시 들으니 그동안 나무꾼이 밥을 먹을 때마다 한알 두알 밥알을 얻어먹던 짐승들이 일부러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후 이 고개를 넘을 때는 일부러 박수를 치며 여럿이 산을 넘은 것과 같은 소리를 하였고 다 넘은 후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용 출처 : http://www.chungnang.seoul.kr/introduce/main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