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잠실도의 사진이다.
신천진은 잠실도(蠶室島)의 북안에 위치한 나루이다.
새내와 잠실, 부리도 사이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새내벌에 펼쳐진 모래사장은 그 모래가 매우 고와서 서울시민의 피서지로 사랑받았다.
애초에는 새내를 따라 마을이 있었지만 장마로 물이 들 때마다 주민들이 섬 가운데로 옮겨와
새내 주위에는 넓고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이 모래사장에서는 1960년대까지 '징기스칸' '달기' 등 많은 영화들이 촬영되었다.
덕분에 주민들은 신영균, 문정숙 등 당대의 배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한다.
또한 모래사장은 공수부대의 낙하훈련 장소로 이용되는가 하면 보이스카웃, 걸스카웃의 캠핑장소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잠실섬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양잠업을 많이 하여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다고 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제가 뽕나무를 모두 뽑아버려 채소를 심었다.
오이, 참외 등이 많이 재배되어 왕십리와 동대문 등지에 공급되었다.
이곳은 1960년대까지 외지인도 없고 도둑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그 당시 잠실도의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조개 잡고 새알 주워 먹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이어온다.
남안에는 잠실이 있었고, 여기서 다시 한강을 건너면 송파진에 닿았다.
지금은 신천진 자리에 잠실대교가 놓였다.
총연장 1,280m, 교폭 35m인 8차선 도로교이다.
1970년 10월에 착공해 1972년 7월에 처음 완공되었을 때는 교폭이 25m이고 6차선이었다.
교량의 상부는 3경간 연속 강판형교이고 하부는 구주식(軀柱式) 교각 31기와 중력식 교대 2기로 구성되어 있다.
교각은 우물통기초공법으로, 교대는 파일 기초공법으로 시공했다.
부속시설인 수중보를 설치하여 한강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수위저하에 따른 취수장의 취수곤란,
바닷물의 역류에 의한 생태계 변동, 하천 구조물의 노출로 인한 미관상의 문제,
주운(舟運) 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이후 잠실대교의 노후도가 심각해 기존 교량을 보강하고, 교통 체증을 덜기 위해
1997년 1월 교량 폭을 확장하는 공사에 착공하여 2003년 12월 10일 왕복 8차선 도로로 개통했다.
개통과 아울러 다리의 안정성 및 물류이동성 등급도 2등교에서 1등교로 향상되었다.
잠실대교 남·북단의 진출입 램프인 올림픽대로에서 잠실대교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잠실대교에서 강변북로 천호대교 방향 진출램프도 동시에 개통되었다.
교량 상류 3곳과 하류 2곳에는 한강전망대가 설치되었다.
공사비는 1,209억 7,900만 원이었다.
이 교량은 올림픽대로와 송파대로에 직접 연계되어 의정부·춘천 방면과 도봉구·태릉·워커힐 등
서울 동부 방면의 교통량을 도심을 거치지 않고 경부고속도로 및 인천·수원·성남·김포 등지로 연결해주고 있으며,
서울의 강남개발계획에 따라 잠실지역에 대단위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을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송파진은 송파대로로 연결되었다.
이 잠실도는 조선초기까지 뚝섬에 이어진 반도였다.
한강은 지금과는 달리 광나루 쪽에서 직선으로 흘러가는 지금의 흐름과는 달리
잠실대교 동쪽에서 석촌호수로 흘러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쪽으로 흐르는, 반타원형을 이루며 흘렀다.
중종 15년(1520)에 큰 홍수가 나고 난 뒤 지금의 광나루 아래에서 뚝섬 방향으로 샛강이 생기면서 섬이 되어버렸다.
이 샛강을 사람들이 '새로 생긴 내'라 하여 '새내'라 부르고 한자로 신천이라 한 것이다.
현재의 신천동 동명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후 장마가 지면 샛강 인근 마을에 피해가 컸으므로 8년 후인 중종 23년에 군인들을 동원하여 물길을 막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후 1960년대에 이르도록 잠실은 한강 본류와 샛강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그리하여 새내를 건너기 위해 잠실대교 부근에 신천나루가,
한강 본류를 건너기 위해 현재 석촌호수 동호 남쪽에 송파나루가 있어 행인들을 건네주었다.
새내와 한강 본류 사이에 생긴 섬에는 새내와 부리도, 잠실 세 마을이 있었다.
새내는 새로 생긴 강에 형성된 마을로서 현재의 잠실 1, 2동 지역이다.
부리도는 잠실섬 서남쪽 한강 본류에 있던 섬으로 잠실본동 지역의 우성아파트와 정신여자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잠실은 그 외 지역이다.
1960년대 말까지 새내에는 120여 가구가 살았으며 부리도에 40여 가구, 잠실에 50여 가구가 살았다.
그 정겨운 풍경은 1970년대 초 잠실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 사라졌다.
그 시초는 잠실한강공유수면 매립공사였다. 이 공사는 샛강인 새내를 파서 한강의 본류로 만들었다.
여기서 파낸 모래를 원래의 한강 본류에 메워 개발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 1970년 기초공사를 하고 이듬해 2월 물막이공사, 곧 잠실대교 동쪽 한강 본류의 물길을 막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곳은 강폭이 350m, 깊이 4m로서 500여대의 중장비로 매일 13만 입방미터의 흙을 메웠다.
물길을 막을 흙이 부족하자 송파 인근의 야산을 밀어 강에 넣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연탄재 등 쓰레기도 넣었다 한다.
그리고 2개월 만인 1971년 4월 15일 한강의 본류를 막는 물막이공사가 성공하였다.
그동안 밤낮없이 작업했던 트럭, 불도저 기사들은 서로 부등켜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폭 350~400m, 길이 7km의 강줄기가 물이 막혀 흐르지 않게 되자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만 마리의 물고기를 잡느라 며칠동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이렇게 물막이공사가 끝난 후에는 잠실도 북쪽과 자양동 사이 새내의 너비 750m를 1,200m로 넓히고
여기서 파낸 모래를 날라 원래의 한강 본류 76만여 평에 메우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조성된 매립지 105만 평에는 잠실종합운동장과 주공, 시영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들이 건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강 물막이공사 후 유일하게 남은 한강 본류가 곧 석촌호수이다.
옛 한강 본류는 메워져 육지로 변했지만 이곳만은 남겨 옛 한강을 기억하게 하고,
산책로와 쉼터 등을 설치, 송파나루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