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봉우리 위 호랑이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호암산(虎巖山)이라고 했다.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솟아난 호암산은 금천구의 든든한 주산(主山)이다.
호암산은 삼성산과 함께 관악산에서 나눠지는 지산이다.
크게 보면 삼성산이요, 더 크게 보면 관악산이 된다.
호암산에 오르면 능선을 따라 삼성산에도 관악산 정상에도 이어진다.
서울을 지켜주는 명산 관악산 지산 호암산에는 호랑이와 관계되는 재미있는 다양한 전설과 유적이 많다.

호암산 절로 가는 '호암산문(虎巖山門)'이다.
호암산 속으로 얼마 안 가면 호압사(虎壓寺)가 나온다.
절 이름이 날 뛰는 호랑이를 짓누른다는 호압(虎壓)이다.

호암산 자락에 있는 절이 '호랑이 기운을 받는' 호암사가 아니다.
'호랑이를 누른다'는 의미의 호압사다.
조선 태조가 경복궁을 건설할 때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궁궐 건설을 방해하였다.
태조 이성계에게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한강 남쪽 관악산의 한 줄기를 가리켜서 바라보니,
바로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산봉우리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태조가 그 호랑이 꼬리 부분에 절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 절이 바로 오늘날 호압사다.
옛날에는 화재 다음으로 두려운 것은 호환(虎患)이었다고 한다.
바로 호암산의 ‘호기(虎氣)’를 누르기 위해 그 심장(꼬리라는 얘기도 있다)에
해당하는 위치에 세운 사찰이 호압사라는 전설도 전한다.

호암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호압사의 전경이다.
호압사는 1394년(태조 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의 얘기는 선명하게 전해지지만 그 후의 변천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호랑이 기운을 다스려 반대세력을 무력화시켰는지 몰라도, 정작 호랑이는 내부에 있었다.
왕자의 난이란 왕실반란이 있었고, 이성계는 자식에 의해 유폐되는 운명을 맞아야했다.
태조와 무학 대사가 사라지자 자연 호압사도 잊혀졌을 것이다.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이 돼서야 기록에 나온다.
그해 두 사람의 상궁이 시주하여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잊혀졌다.
그러나 민초들은 끊임없이 호압사를 찾았다. 왕가 대신 백성들이 절을 지켰다.
거대한 바위산은 ‘정치’를 벗어나 서울 외곽 가난한 사람들의 소원을 품었다.
서울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바위산 밑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고향을 떠나왔거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산 뒤라서 도시의 불빛도 찾아들지 않았다. 몸은 비록 판잣집에 뉘었지만 그들에게는 내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