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심사정 어부도 종이에 수묵담채 | 20×25.5㎝ |
심사정의 다양한 방면에서의 회화적 기량을 잘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선하게 생긴 어부는 버드나무가 있는 물가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낚싯대를 응시하고 있다. 전체적인 화면은 부드럽고 정적인 분위기이나 나무 등결과 의습선에는 강약을 주어 표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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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회화사에 등장하는 많은 화가들이 저마다 기구한 인생을 자랑하고 있지만, 심사정 만큼 힘들게 생을 살아야 했던 이도 드뭅니다. 어쩌면 그 인생의 한을 품은 채 뻗었던 손길과 내면의 기운이 한층 고고한 작품을 만들어 내었는 지도 모르죠. 영의정까지 지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노비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심사정. 그가 그렸던 그림에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울분과 회한이 담겨 있습니다.
심사정이 태어나기도 전, 심사정의 할아버지였던 심익창은 관직에 있다가 부정을 저질러 삭탈관직과 유배를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가 왕세자 음모사건에 가담한 것이었습니다. 영조가 세자로 있을 당시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는 데요, 한마디로 심사정의 조부가 줄을 잘못 선 것이죠.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그 사건에 대한 보복을 시작했고, 심익창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갖은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심사정의 할아버지는 후손들에게 역적의 자손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멍에를 씌우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역적의 자손은 노비나 백정과 같은 천민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거든요. 그렇게 심사정의 집안은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관직에 오를 수도 없었을 뿐더러 어디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심사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정서와 풍류를 위한 양반가의 그림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그는 붓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욕이나 천대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그렸던 꽃과 나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뛰어난 실력은 궁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그가 마흔 두 살이 되던 해에 영정모사도감이라는 왕의 인물화를 그려내는 관청의 감독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역적의 자손이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반대파의 상소가 올려졌고, 그 때문에 심사정은 단 나흘 만에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힘들게 지내왔던 심사정과 그의 가족들에게 주어진 관직의 기회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던져진 지푸라기처럼 생명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그 기회를 빼앗기게 된 후, 심사정은 모든 욕심을 버리고 그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인생의 모든 욕심을 버린 채 그림에만 자신을 담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사정은 어렸을 때부터 정선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또한 스승처럼 풍경화를 많이 그리고 잘 그렸습니다. 하지만 풍경화 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 동물, 곤충 등 여러 소재를 이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인물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도 많이 그렸구요.
풍경화에서도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는 스승 정선의 화풍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답니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여러 화첩들을 보면서 그림 공부를 하였던 심사정은 중국 원나라 화법을 근간으로 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수립하였습니다. 중국화 보다 세련되지만 경박하지 않은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의 그림들을 보게 되면 억울한 그의 인생 속에 이런 정서가 숨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죠.
인생의 고난과 맞서 싸우다 좌절하지 않고, 절망을 품어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내면 세계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승리가 무엇인가를 보게 합니다. 부질없는 출세와 세상의 부에 마음을 두기 보다는 그림을 통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준 심사정. 그는 우리에게 그림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강상야박도(1747) ]
비단에 그려진 이 그림은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서부터 먼 거리의 산까지, 꽤 큰 화면을 담은 작품입니다. 실제 크기는 1.5미터가 넘는 대작이죠. 그래서인지 모니터로 보아야 한다는 게 좀 아쉽네요. 멀리 있는 산들을 점으로 찍어서 표현하고, 산 아래 강을 따라 시야가 흘러가다 보면 가까이 있는 바위와 나무까지 은근하면서도 풍부한 공간감과 색채감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 괴석초충도 (1747) ]
바위 같지 않게 생긴 괴상한 모양의 바위 위에 메뚜기가 있고, 그 곁에 피어 있는 들꽃을 비단 위에 채색화로 그려내었습니다. 푸른 풀잎과 메뚜기, 그리고 검으스름한 바위의 농담이 자연스럽고 화려하지 않은 붉은 꽃잎의 색감이 담백합니다. 화면 한가운데에 그림의 소재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여백의 미 또한 충분하게 느껴지네요.
[ 딱따구리 (1747) ]
그는 풍경화 뿐만 아니라 작은 동물이나 곤충의 그림도 많이 그렸는 데요. 이 그림도 높이가 3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작은 그림이지만 먹의 농담과 색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큰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격조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거침없이 힘있게 펼쳐지는 붓의 필치와 딱따구리의 붉은 깃털과 매화의 색감이 화면 속에 작가의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죠.
[ 방심석전산수도 (1758) ]
웅장한 산과 절벽을 그려내는 중국화가의 화법을 모방하였다고 하지만 심사정은 이 작품을 그리면서 배운 데에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더 발전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첩첩산중 속의 작은 초가집에서 물소리를 벗삼아 글을 읽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그리면서 심사정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아마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키지 않았을까요.
[ 명경대 (1750) ]
금강산 여행 후 심사정이 그린 여러 금강산도 중 하나인 위의 작품을 그의 스승, 정선의 금강산 그림과 비교해서 보세요. 높은 명경대 봉우리와 그 곁을 힘차게 흐르고 있는 만폭동을 아래의 선비들이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 광경입니다. 안내자가 금강산 유람을 온 세 명의 선비들에게 신이 나서 설명을 하고, 뒤에 있는 다섯 승려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있네요.웅장한 풍경화 속에 작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 하마선인도(蝦磨仙人圖) (1765) ]
“하마”란 두꺼비의 한자어이며, “하마선인”은 두꺼비를 가진 신선이라는 뜻으로, 이 그림은 신선도의 일종입니다. 우리가 아는 신선과는 모습이 좀 다르지만요. 전설에 의하면 유해(劉海)라는 신선은 세 발 달린 두꺼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꺼비는 그를 세상 어디든지 데려다 주었다고 하네요. 이 그림은 붓이 아닌 손으로 그려낸 지두화라고 합니다.
[ 파교심매도 (1766) ]
이 그림은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파교를 건너 설산에 들어가 매화를 찾아 다녔다는 고사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전체적 구도나 인물의 묘사가 중국화풍을 따르고 있다고 하는 데요, 둥글둥글한 산의 모양과 흐르는 듯한 필치가 겨울 바람을 느끼게 하네요. 서양화처럼 많은 색을 쓰지 않아도 깊이 있는 공간감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이 놀랍지 않으세요?
[ 연지유압 (1768) ]
화려한 연꽃과 한 쌍의 원앙을 그린 이 작품은 중국화의 화려한 장식성을 많이 모방한 것 같네요.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대담한 구도가 여느 한국화 같지 않게 독특합니다. 큰 꽃과 넓은 잎에 사용되는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한 색감도 그렇구요. 물 위에 있는 한 쌍의 원앙의 모습에도 생동감이 넘치네요.
[ 경구팔경첩 (1768) ]
왼쪽의 그림은 작가가 키 큰 소나무 아래에서 한양도성을 바라보며 그린 작품인데요, 멀리 보이는 푸른 색의 산이 삼각산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오른쪽의 그림은 바위와 파도를 그린 것으로 굽이치는 물살과 물보라를 자세히 바라보며 그린 것 같네요. 경구팔경첩은 그가 그린 여러 작품들을 화첩으로 묶어낸 것으로서 특별히 가까운 일상생활 속 풍경을 그린 작품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