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재미가 뭐요? 산다는 게 오직 당신 따라 다니는 일밖에 더 있수?"
아내의 푸념이다. 따는 그랬다. 내가 임지를 옮길 때마다 아내는 늘 따라 다녔다. 따라 다니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거라고, 나의 일은 내 혼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는 우리들의 일이라고 아내를 설득하곤 했다. 그렇게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아내의 처지에서 보면 자기의 삶과는 관계없는, 이 오직 나만을 위해 낯설고 물설은 타관 객지살이를 마다 않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정해진 임무가 있으니 그 일 따라 어떤 곳, 어느 곳이든 찾아가서 삶을 꾸려야 하지만, 아내에게는 나를 위한 일 말고는 자기 생애를 위한 일이 따로 있지 않은 것이다.
마성으로 오던 첫 길, 아내에게는 희비가 엇갈렸다. 남편이 승진하여 함께 임지로 가는 일은 기쁨이지만, 평생을 살면서 전혀 발길을 둔 적이 없는 낯선 땅으로 가는 길은 마음을 편하게 할 리가 없었다. 학교의 구내에 있는 사택에 짐을 풀 때 아내는 또 한 번 희비를 겪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낡고 협소한 것이 아내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널따란 마당은 아내의 가슴을 트이게 했다. 아내의 꿈 중에 하나가 마당 넓은 집을 구해 텃밭을 일구어 일용할 채소를 손수 가꾸는 일이다. 그 목표의 실현을 나의 정년 퇴직 때쯤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다. 꿈의 마당 넓은 집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내는 그것을 기뻐했다.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 많은 사택 생활에서 겪어야 할 불편은 그 기쁨 속으로 모두 녹여 넣어버렸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땅, 이 집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임 중에만 나와 아내가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삿짐 정리도 채 끝내기 전에 마당 가꾸기에 먼저 나섰다. 우선 겨우내 마당을 덮고 있었던 낙엽을 쓸어 냈다. 마당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밤나무 들의 낙엽이 온 마당을 덮고 있었다. 낙엽을 쓸어내니 드러난 땅은 푸석푸석한 검은흙과 자갈이 대부분이었다. 너무나 척박한 토양이다.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흙을 새로 넣어야겠다고 했다. 온갖 곳에 수소문하여 황갈색의 흙을 한 차 들였다. 마당 한 쪽에 흙을 펴서 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내는 바빠졌다. 거의 종일을 마당에서 살았다. 저녁답에 집에 들어가 보면 아내의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조각조각 만든 텃밭엔 파란 것들이 몇 점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봄이 일러 여러 가지 모종들은 나기 전이라며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돌나물이며, 밭미나리, 산부추 같은 것을 구해 심었다.
"이리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너무 힘들이는 것 아니우?"
"두 달쯤 힘들여 열 달쯤 즐거울 수 있다면 힘 들일만 하잖아요."
아내의 대답은 명료했다. 힘은 들어도 즐겁다는 것이다.
포도나무며 무화과나무를 구해왔다. 포도나무는 장에 가서 산 것이고, 무화과나무는 길을 가다가 그 나무가 있는 집을 보고는 주인에게 사정하여 약간의 대가를 쳐주고 가져 온 것이라고 했다. 대가를 조금 주긴 했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 달라고 한 용기는 어디서 난 것일까.
"천상 내년엔 이 사택을 못 떠나겠군. 이 열매를 보려고 하면 한 해로 되겠소?"
"언제 떠나더라도 있을 땐 열심히 가꾸어야지요. 누구라도 따먹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아내의 일은 밭을 가꾸는 것만이 아니었다. 부엌 뒷문을 열면 그대로 바깥이다. 눈비 오는 날이면 문을 열 수 없다. 쌀, 콩, 채소 등의 양식거리를 보관해 둘만한 곳이 없었다. 방이나 부엌에 그런 것들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부엌문 앞에 테라스를 겸한 창고를 짓기로 했다. 부엌문 앞에 각목을 세워 서까래를 걸치고 슬레이트를 얹어 지붕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당에 하고많은 돌들을 캐어 모아 쌓고 시멘트를 부어 벽 쌓을 기초를 다졌다. 시멘트가 굳자 양 옆면과 앞 부분에 블록으로 벽을 쌓았다. 몇 날 며칠을 두고 한 일이었다. 아내는 이런 일들을 해 본 적이 없는 터라, 일이 쉽지도 않으려니와 제대로 된 모양으로 지어지지도 않았다. 문을 짜서 달기도 했는데, 톱질도 제대로 못해 끊어 붙인 나무 조각이 이가 맞지 않아 보기도 곱지가 않았다. 왜 이렇게 했느냐고, 이리 이리 하면 더 나았지 않았겠느냐고 하면,
"따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요. 나중에 우리가 집을 지을 때는 참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애써 이루어 놓은 것이 재미로와 날이 새기 바쁘게 뒤뜰로 달려가 본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아내의 일을 보고만 있기가 딱해 좀 도와 주겠다고 하면,
"남의 재미를 왜 뺐으려 해요? 내 재미로 하는 것이니 신경 끊어요."
"다음에 사택 주인 될 사람이 보면 좋아할까? 그리고 이건 우리 집이 아니라 학교 시설물이라는 걸 알아야지."
"알아요. 하지만 살 동안엔 내가 편리해야지요. 다음 주인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가 뜯어 줄 수도 있어요."
막무가내다. 아내의 재미 가꾸기 욕심에는 브레이크가 없는 것 같았다. 흙을 한 차 더 들였다. 마당 또 한 쪽에 텃밭을 하나 더 만들겠다는 것이다.
"너무 하는 것 아니오? 이미 만들어 놓은 것만 해도 충분할 텐데……."
"있는 땅 놀리면 뭣해요? 뭐라도 더 심는 게 낫지. 채소가 나면 선생님들도 뜯어 가시게 하고, 언니네도 좀 주고……." 마치 농사를 다 지어 놓기라도 한 것 같은 환상에 젖으며 부지런히 삽질을 한다. 평탄하게 흙을 펴서 골을 지어 씨 뿌리고 모종 심을 이랑을 만든다. 그리고 2일은 문경장, 3일은 점촌장이라며 장날을 손꼽아 달려간다. 모종을 사러 가보지만 아직 때가 좀 이른 탓인지 적절한 모종이 나지 않았다며 다음 장날을 기다린다. 고추 모종 몇 포기와 가지 모종 몇 포기를 사다 심었다. 상추씨도 뿌리고, 옥수수씨, 강낭콩씨도 넣고, 이웃 할머니가 준 토란 뿌리도 심었다. 텃밭 한켠은 제법 파래지고 있다. 일찌감치 심어 놓은 구기자나무와 당귀에서도 잎이 나고, 딸기는 꽃이 피고 있다.
4월초에 사다 심은 포도나무는 아직 싹이 트지 않는다. 살아나기나 할까?
"이것 봐요. 여기 도톰한 눈이 나오고 있잖아요. 곧 싹이 터질 거예요."
내가 보니 심을 때 그대로다. 껍질은 점점 말라만 가는 것 같다. 그래도 아내는 새 싹이 꼭 돋을 것이라 믿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물을 주고 북을 돋우어 주기도 한다.
지금 아내는 생애의 어느 때보다도 활기에 차 있다. 오직 나를 바라지하는 일에 자신의 온 생애를 다 걸다가 이제는 자신의 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나는 모양이다. 어느 날 대구 집을 함께 다녀오다가 마성 들머리에서 아내가 말했다.
"이 깊은 골짝에 처음 들어서는 날 눈물이 나려고 하대요."
"지금은……?"
"그 빨간 밭에 무엇이 더 나 있을까, 자라는 모습이 제 각각인 것들이 어떻게들 변해 있을까 궁금해요. 어서 가보고 싶네요."
"힘이 많이 들잖아……?"
"염려 말아요. 내 사는 재미니까. 당신 일이나 열심히 해서 아이들 잘 가르치세요."
아내는 자기 하는 일에 나는 손도 못 대게 했다. 학교 안에 살면서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에 매달리는 것은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과 자기의 재미를 빼앗지 말라는 이유에서다.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익어 가는 봄 따라 아내의 땀방울도 굵어져 가고 있다. 그 땀방울 따라 아내의 '사는 재미'도 깊어 갈 것이다.
막을 방도도 없는 아내의 '사는 재미' 행진, 차라리 끝 모르게 깊어 가기만 바랄까?
아내의 '사는 재미'를 따라 나의 '사는 재미'도 깊어 갈 수 있을까?
마당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며 느티나무가 제법 짙은 그늘을 지우고 있는 봄날―.♣ |
첫댓글 널따란 마당에서 찾은 '사는 재미'는 사모님이 더 즐겁고 활기 차네요!
이 이야기도 20년이 다 되어 가는 옛날 이야기지요'
저도 잊어버리고 잊었던 이야기를 찾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일배 제가 겪지 못하는 삶을 읽어 내려가는 즐거움이 있어요.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