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도행전4:5~22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창1:1).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된 세상을 다스리라 명령하셨습니다(창1:28).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전3:11). 세상의 권력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권력을 양도받은 왕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권력 역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상의 일부입니다. 권력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중 하나여서 우리는 권력을 다스려야 합니다.
권력을 다스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권력은 칼을 지닌 채,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권세들에게 복종하라’하신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권력에 한정된 것입니다(롬13:1~3). 또한 바울이 언급한 복종은 구체적으로는 권력 기관이 책정한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하는 것이었습니다(롬13:7). 선한 일을 행하는 권력 기관에 조세를 납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요청하신 ‘권세들’을 향한 순종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종교권력입니다. 다른 권세들에게 순종하듯, 선한 일을 행하는 대제사장에게 ‘성전세’를 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청하신 순종입니다(마17:27). 오늘날에도 우리는 세금을 납부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납부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은 대단히 소극적인 순종입니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권력을 다스려야 합니다. 권력을 다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때로는 권력에 순종해야 하고, 때로는 저항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서는 황제에게 순종하라 하셨고, 요한을 통해서는 저항하라 하셨습니다(계13:18;14:11). 권력을 다스리려면, 때로는 순종해야 하고, 때로는 저항해야 하는 칼 날 위의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분명 두려운 존재이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대제사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행4:2).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한다면, 당연히 대제사장에게 불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에게 한낱 대제사장은 먼지일 뿐입니다.
대제사장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대제사장이 금지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부인하는 대제사장은 삯꾼에 지나지 않습니다(행4:18;요10:12). 대제사장이라도 부활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불복종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 겨자씨가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 말씀하셨습니다(마13:31~32). ‘공중의 새들’은 에스겔에 의하면 ‘큰 독수리(들)’인데 바벨론 왕과 애굽 왕을 상징합니다(겔17장). 동쪽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쪽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입니다(엡1:21). 오직 ‘겨자씨’처럼 작고 ‘연한 가지’ 같으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큰 독수리가 ‘연한 가지’에 깃들고, 공중의 새들이 겨자 나무에 깃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겔17:22~24).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큰 독수리’와 ‘공중의 새들’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세상을 다스리라 명령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두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이는 평생 걷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면, 나면서부터 사십여 년 동안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고 뛰며 찬송합니다(행4:8,22). 사십 세를 불혹(不惑)이라 하지요. 불혹은 어떤 변화에도 ‘혹’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뜻 불혹은 평안한 듯하지만, 평안하지 않는 세상에서 ‘혹’하는 것이 없는 것은 대단히 위태한 것입니다. 사십 년 동안 걷지 못한 이에게 ‘혹’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불혹이라는 위태한 우상에 기대지 말아야겠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져야겠습니다. 지상을 다스리라는 천상의 쿠데타 유혹에 넘어져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혹’하여 넘어지면, 사십 년 동안 못 걷던 사람이 일어나 걸을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아무 일도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사십여 세’ 불혹의 때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표적이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