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일서 5방 16절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한 서신서의 목적
우리가 요한일서를 읽으면 사도 요한이 어떤 큰 문제를 의식하고 그 글을 썼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의 글은 매우 정확하고 단호하며 전혀 타협이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빛이 아니면 어두움이며, 생명이 아니면 사망이며, 참이 아니면 거짓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면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중간이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요한의 서신서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매우 필요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당시 경계하며 개탄해 하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참 성도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와서 믿는 자로 자처하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부인하는, 미혹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2장 26절에서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 18절에서도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4장 1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이서 1장 7절에도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많은 거짓과 미혹이 역사하는 때에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참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미혹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는 그 거짓된 사람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주 당연한 이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겨 순종하기를 즐겨하고, 죄짓기를 계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장 6절에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2장 4절에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2장 9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들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고 하셨으며, 3장 14,15절에서도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2장 22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4장6절에 이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께 속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이것은 1장 3절에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진리 안에서 누리는 영적 사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진리 안에서 교제가 되고 안됨에 따라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귐은 곧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므로 매우 순결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미워하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이나 불의한 것이나 거역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뿐인 것입니다(롬 14:17).
우리는 이러한 사귐의 모범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도행전 2장 41-4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그 거울"에 자신들을 비추어 봄이 유익할 줄로 압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영생을 소유한 사람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자신에게 영생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질문으로 자신의 믿음을 검토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첫째로 나는 거듭난 성도들과 사귐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기름과 물처럼 마음으로부터 어울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당신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일 것입니다.
둘째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즐겨 순종하고 있는가?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중생한 성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셋째로 나는 죄를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싫어하고 있는가?
거듭난 신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죄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나는 거듭난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이것은 교인을 사랑한다는 말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그러면 이제부터 난해구절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여기에 말씀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사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이 죄는 누가 범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이 사망이 육체의 사망을 가리키는지 그렇지 않으며 영혼의 멸망을 가리키는지 하는 것도 규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 요한의 논법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마귀의 자녀들을 가려내어 그들을 경계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 두 부류의 다른 점을 자주 자주 동시에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2장 4,5절에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 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 을 아노라"고 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또 2장 9,10절에서도,"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하여 "형제를 미워하는 자"와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3장 10절에서도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여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요일 3:9참조), 또는 의를 행치 아니하며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는 3장 13-15절, 4장 4-6절, 4장 7,8절, 4장 20,21절, 5장 12절 등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5장 16절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는 자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자가 서로 다른 류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도 요한은 이 서신서에서 사망이란 낱말을 멸망의 의미로서는 사용하고 있어도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의미로서는 단 한번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사망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문맥상으로 볼 때에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형제"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사망에 이른 죄를 말할 때에는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넷째로 사도 요한은 본 서신서에서 참 성도들과 거짓 형제들을 구약의 아벨과 가인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한쪽은 참이고 다른 쪽은 거짓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
그러면 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이며 누가 범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분명코 참 거듭난 신자가 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죄는 지금 본 서신서에서 경계하고 있는 "미혹하는 자", 즉 "적 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아 육체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그 죄입니다(요일 2:22,23).
그 당시에는 소위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하는 이단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임하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 무슨 뛰어난 지식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들의 말대로 무슨 뛰어난 영적 지식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사망에 이른 죄요, 또한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 서신서 맨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 죄를 경계하여,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위해서
여러분,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영적 분별력이 명확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빛되신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못했거나, 또는 들어왔다 하더라도 진리를 순종하여 살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의 참 모습을 선명하게 볼 때까지 이 서신서를 몇 번이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극동방송에서 방송되었던 박준형 형제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