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g gag, 笑傲江湖
존 파울즈의 소설 콜렉터에 보면 유난히 눈에 자주 띄는 단어가 있다: gag; gagged. 명사 하무 동사 하무 물리다 이다. 서스펜스다 보니 의도적으로 이 같이 유쾌하지 않은 용어가 자주 반복돼 쓰인 모양이다. 콜렉터는 1963년에 작가로서는 처음 출간한 작품이라고 한다. (파울즈는 1926년 생이니까 응 서른일곱 살이 되는구나.) 그 즈음 영국, 복권이 당첨되어 액면 칠만삼천구십일 파운드짜리 수표를 손에 쥐게 된 틴 에이지 페르디난드는 또래의 이웃 금발의 미란다를 납치해 지하 저장소에 가둔다. 아침 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납치된 그녀를 보살핀다. 그는 미란다를 사랑하기 때문에 납치한 것이다.
지난 8월 11일자 한 중앙일간지 발 인터넷 뉴스에, 경질된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의 이메일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나팔 부는 게 도덕인 언론이니, 보도내용이야, 유 전 차관이 깔깔거리든 고매하든 그렇다 치고, 보인 건 그가 메일에서 인용한 중국소설제목이다: 소오강호(笑傲江湖). 아무래도 참여정부는 덕이 부족한지 인사권 하나 행사에도 세간의 ‘씹을 거리’로 시비가 붙는 판국이라서, 또 평소 생각하기를, 도대체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국권을 떼어 나눌 수 있다는 것인지 늘 알다가도 결국엔 해롱거리게 되니, 작금의 나라 시세란 딱, 그래 딱 ‘강호(江湖)’가 맞다.
다시 콜렉터. 총명한 미란다가 어딘가 어긋한 페르디난드에게 납치를 당했다. 사랑하는 미란다이기에 그로 인한 어떤 아픔도 ‘정성껏’ 감수하는 페르디난드이다. 눈엣가시 같아도 그의 순정성은 보기에 그에게 연민을 품게 되는 착한 미란다이다. 그렇긴 해도, 둘 사이의 모든 사안은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염(念), 두 사람이 가슴에 품고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의 핵심을 따른다. 페르디난드에게는 완전한 감금이 우선되고, 미란다에게는 탈출보다 더 다급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곧, 그녀의 입에 하무가 물리고 양손이 코드로 묶인다. 그의 머리가 피칠갑이 되어도, 쓰러져야 빠져나간다.
정무직 공무원이었던 유 전 차관은 인민의 공복이다. 나라사람의 심부름을 잘 하는 게 곧 제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처신이 된다. 인사권자의 지시에 대한 판단은 위로는 장관의, 나른해지는 오후 차 한 잔을 나누는 친지들의 조언을 구해 (좀 많겠나!) 경청을 또는 상의를 하고 난 후에 내렸어도 정녕 되었을 것만 같다. 그 누가 그에게 그리 해버리라고 말하겠는가. 그는 인사 청탁하는 지붕 파란 집의 센 전화에 노했다. 직분과 자존이 엉망으로 설켰을 것이다. 살이 트면서 부들부들 떨렸을 것 같다. 아아, 화를 입었다. 세간에는 그를 두고 강단과 지조 있는 충복이라 ‘소(笑)문’ 나는 모양이다.
개그. 개그. 영어로 개그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사전에는 1. 2. 하는 식으로 나눠서 한 단어에 두 가지 뜻이 설명돼있지 않고 따로 각 말로 돼있다. 완전한 동음이의어이다. 하무이고, 농담 또는 익살맞은 말이다. 하나는 분간할 수 없는 ‘소리’ 이고, 다른 하나는 재주 좋게 말 잘 하는 말이다. 소리이거나 말이거나 결국 언어였다. 어떤 땐 말 없는 ‘소리’가 더 말 잘 한다. 두 주쯤 전, 막 잠이 들려는 즈음, 이런 말 누에 유충이 뇌리를 갉는 입성이 보여서 한밤 몸을 뒤채가며 깔깔거렸다. 그러고 지난 11일, 소오강호 라는 말을 보았던 것이다. 중국소설제목이라고 읽었는데 자꾸 무협지로 기억난다. 그래서 다시 깔깔.
첫댓글 전 왜 '깔깔, 웃음이 나오지는 않는군요...깔깔 웃음만은 별개지만, 토마토님의 화요논평, 잘 읽었습니다.제가 지난주 글 올리면서 8월 8일이라는데서, 팔팔함을 생각했는데, 토마토님의 경우는 광복을 미리 생각하게 할 것 같습니다.어젯밤 늦은 시간 글을 읽었습니다. 하루 일찍 올리셨구나, 생각했지요.몇가지 우연과 조우하게 되더군요. 존 파울즈의 <콜렉터>는 언젠가 카페 다른 글에서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연극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한 선생님이 생각나는 작품입니다.아마추어 연극무대에서 (이미 이름도 잊었지만)페르디난드역을 섬뜩하게 연기했던 분이지요. 지금도 머리속에서 오버랩되는 걸 보면 꽤 인상적이었나봅니다
이젠 토마토님 덕분에 그때 본 연극과 별개로 새로이 작품을 읽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오늘 아침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어쩌면 어제 읽은 토마토님의 gag(ged)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아님 단순히 소리라는 단어 때문인지도...)뭔가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소리의 출처를 알 수 없다는 데서 저는 순간 이명과 환청인가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귀를 막고서 밖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걸 확인했지요. 그때 공기로 전파되는 출처모를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홀리게 할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siren이 퍼뜩 떠오르더군요.아,하무라는 말, 전 재갈만이 익숙한데, 하무라는 말이 있었구나, 덕분에 알았답니다.^^
깔깔 웃을 이유가 없는 '논평'이죠?^^ 폭주기관차님 댓글을 읽으면서, 제가 요즘 지어놓고는 계속 곱씹어 생각하는 말, '모든 시간은 사물에 스민다.'가 미소 짓습니다. 시간과 사물 중 '하나만'이라면 전 사물 편이에요. 시간은 '관계'가 소멸되면 무(nothingness)라고 보는 편인 거죠. 기억을 하는 한 시간은 무한할 겁니다.폭주기관차님의 '사물'은 콜렉터였군요? 언어로서 말이 아닌 '소리'를 말씀하시는가 봅니다. 맞아요. '소리'는 사이렌처럼 위험한 '사물'일 수 있어요. 관념화 될 수 있거든요. 휴가는 꼭 가야 하는 거고, 돌연한 차례에, 혹 펑크낼까 봐, 게다가 폭주기관차님의 댓글 '우려'까지 읽은 터, 식은 땀! ('휴가'였죠).^^
잠들기전 또렷하게 마주쳤을 '깔깔'과 별개로 시사정황이 영 웃게 되지 않는다로 읽어주심...위 댓글에도 몇가지 얘길 했지만, 여러갈래로 뻗어가며 글 잘 읽었습니다. ^^ 아무얘기가 또 나오려고 하는데, 시간과 사물과 소리에 대해서는 언제 다른 자리를 만들어야할 것 같습니다...(그나저나 제 댓글이 토마토님에게 부담감을 줬군요. 이를 어쩌나요...^^)
하하..일단 토마토님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 올라왔네요. 게다가 제게 쓸 꺼리까지 던져주시다니! 김용의 <소오강호>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거든요. 서극의 <소오강호><동방불패>의 원작이기도 하구요. 불과 일주일 전에 유지청이 그린 만화 <소오강호>를 다시 읽었었는데 여전히 좋았었습니다! 시사성은 떨어지겠지만 무협에 대해 한 마디 해야겠군요...^^
관련 기사들을 읽었는데 좀 어이가 없군요. <소오강호>를 패권싸움에서 표표히 등을 돌린...어쩌구, 이메일에도 심심풀이로 읽은 대중무협소설 운운... 기자도 소오강호가 뭔지 모르고, 그 차관님도 말 그대로 심심풀이로 인용한 것이로군요....-_- 유차관이 인용은 제대로 했네요. <소오강호>에서 정파인 형산파의 유정풍과 사파인 일월신교의 곡장로가 정사를 초월해서 음악으로 친교를 맺는 장면이 그 소설의 핵심인데요..거기서 유정풍이 강호에서 손을 씻으며 하는 말이 유 차관의 말과 비슷하거든요...결국 강호에서 떠나지 못하고 죽고 말지만..^^
니브리티님, 잘 다녀오셨군요? 좋았겠다! 정말. 기회가 된다면 여행기라도. 사진이나. <동방불패>가? 오, '정사를 초월해서 음악으로 친교를 맺는'다는 결정적인 메시지를 캡쳐하지 못했군요, 그 분. 그렇다니까. '존 파울즈의 (좌파적) 서스펜스'와 '(우파적) 무협소설'이라는 각기 상충하는 소재를, 재밋다는 측면에서 같지만, 시사에 붙여보았는데 어찌나 난감했는지.^^
순서가 좀 헷갈렸는데 다음 주에는 니브리티님이 화요논평의 글을 올리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요즘은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글을 쓰기가 부담이 되어서...
잘 지내셨어요, 한살림님? 바쁘신가 봅니다. 요즘 그곳도 한 더위 하는가요? (건강 유의하시고요) 한살림님은 어떤 논평을 선보이실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