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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홍산지역 아니 부여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몽학 반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자랐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이몽학 얘기를 선생님이나, 어른들 한테서 영웅담처럼 들으면서 컸습니다. 친구중에서는 이몽학 얘기를 실감나게 잘하는 친구도 있어서 많은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몽학은 홍산지역에 많은 민폐를 끼친 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되었답니다. 그러나 현재 이몽학반란에 대해 민중봉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민중봉기 또는 단순반란 사건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는것 같습니다.
저는 이글을 쓰기전에 이몽학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아보려고 노력했고,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하려고 했으나 최종 판단은 읽어보신 일가분들께서 하시리라 믿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몽학 반란은 1596년에 홍산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417여년전에 일어난 조선시대 많은 반란사건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정황에 비춰보면 당시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민심은 조정에서 많이 멀어진 것은 사실이고, 이몽학이 이것에 편승하여 썩은 조정을 갈아 치우자는 기치를 내건것일 뿐이지 구체적으로 민중을 어떻게 구제하겠다는 방안은 없는 실정여서 이 반란 사건을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민중봉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울것 같다는 것이 지금의 솔직한 내 입장입니다.
우선 이몽학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면 그는 왕실의 서얼로 성격이 포악하여 아버지에게 쫒겨나 여기저기를 떠돌다 홍산현에 정착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조련장군으로 종군한것으로 나옵니다. 현재 그가 살았던 홍산의 토정리, 구룡면 구봉리, 청양 청남면 아신리 등과, 반란을 처음 일으킨 정산의 쌍방축에는 군데군데 연못이 많이 있는데 반란이 진압된 후 반란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집을 허물고 연못을 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병신년 7.24의 선조실록에는 홍산현은 혁파하여 부여현에 예속시키고, 이몽학과 한현이 살던 집은 파가저택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전설은 많이 내려오고 있으나, 내용은 반란으로 끝나버린 이몽학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미된 내용이 주입니다. 이는 아마도 그 당시의 민중의 민심이 나약한 조정에 대해 많이 이반되었기 때문이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많은 전설중에 두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누이와 대결한 이야기인데 이몽학보다는 누이가 재주가 많았고, 힘도 셌다고 합니다. 이몽학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것을 누이가 알고 이를 말리자 이몽학이 누이와 목숨을 담보로 내기를 제안하는데, 누이는 성을 쌓고(탑을 쌓기로 했다는 얘기도 있음) 이몽학은 쇠로 된 신을 신고 한양까지 갔다오기로 내기를 하고,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을 죽이기로 하는 것입니다.
내기를 시작하고,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서 누이는 성을 다 쌓고 대문만 달면 되는데, 이몽학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가 누이에게 뜨거운 팥죽을 끓어놓고 먹으라고 권하자, 누이는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겠다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서 기꺼이 팥죽을 먹기로 하고 뜨거운 팥죽울 식히고 있다가 때마침 도착한 이몽학이 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류의 전설은 우리나라 많은 곳에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그가 남면(내곡리)에 있는 서당에 다닌 이야긴데, 지금의 홍산 삿다리(구룡에서 건넜다는 이야기도 있음)에서 금천(금강의 지류로 일제때 제방을 쌓기전에는 홍산까지 배가 들어 왔다고 함)을 건너 남면의 광산김씨 선생에게 글을 배우러 다닐때 하루는 비가 많이 와서 몽학이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선생은 그가 서당에 들어오자 깜짝 놀라서 서둘러 보내고서 어떻게 범람한 금천을 건너서 집으로 가는가 봤더니, 풀단(메밀대) 두개를 가지고 가볍게 건너는 것을 보고는 예삿놈이 아니란 것을 알고 다른 선생을 소개하여 주었는데, 그 선생이 바로 홍산 윗새티(조현리)에 사는 홍산순씨라는 것입니다.
전설에는 이몽학은 글읽는 것보다 서당 뒷산에서 병정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홍산순씨는 한때 홍산지역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는 실정인데 홍산순씨 집안 사람들이 이몽학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많이하여 처벌을 받는 바람에 집안이 거의 멸족되다 싶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한 얘기인것 같습니다.
이몽학은 반란을 계획하면서, 당시 호서지역에서 유행하던 동갑계를 조직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도천사(무량사)에서 군사를 훈련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하중에는 사대부 자제, 의병출신, 건달, 승려도 있었고, 승속장군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의병출신들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고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임진왜란당시 의병중에는 범법자나, 요새 말로 건달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이몽학은 반란을 일으키기전 충청도 순시어사 이시발의 휘하에 있던 역시 서얼 출신 모속관 한현 밑에서 부장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불만을 누구보다 잘 알고 반역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현은 이몽학 반란과정에서 실질적인 주모자 역할을 한 사람으로 민심을 얻기위해 왕족출신인 이몽학을 끌어들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1594년에 겸사복이 되었으며, 기효신서에 의한 속오군을 훈련시키면서 모속관 역할을 한 인물로서 서울 출신이나 당진 면천에서 임시로 거처했고,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기전 부친상을 당하여 먼저 면천으로 내려가면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1596년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곧 왜적이 다시 처들어 올거라는 소문이 자자하여 조정에서는 청야대변지책이라하여 읍성을 버리고 산성에 식량과 백성을 이주시키도록 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한현과 이몽학은 백성들의 원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임진왜란때는 이순신장군과 의병장 조헌, 의병장 김덕령장군의 덕분에 전라도와 충청우도 즉 충남은 전쟁의 피해가 적었지만, 반대로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조정의 수탈이 많아지는 아이러니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몽학은 1596.7.6 새벽에 정산의 쌍방축에서 군사를 집결시킨후 홍산현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을 사로잡아 앞세우고, 곧바로 임천으로 가서 군수 박진국도 생포합니다. 7.7에는 정산현을 습격하니 현감 정찬경은 도주하고, 7.8에 청양현을 함락시키니 현감 윤승저가 달아나고, 7.9에는 대흥현을 접수하니 수령 이질수가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7.10에는 홍주성까지 처들어 갔으나 홍주성은 그야말로 읍성이지요. 성이 없는 일반 군,현하고는 달라서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홍주목사 홍가신 및 장수들의 계략으로 전략이 노출되고 급기야 7.11에 덕산으로 후퇴하였다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지금도 홍성군 금마면에 도막사거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서 이몽학의 목이 도막났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합니다. 지명치고는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 혼자 만의 생각일까요? 그리고 홍주성에서 구금되어 있던 한현이 서울로 압송되여 7.17에 선조가 친국후 참수되니 반란은 채 열흘도 못되어 그렇게 진압되고 맙니다.
7.22에 의금부가 죽은 이몽학의 머리와 수족을 효수하고 3일후에 사방에 돌려 보일것을 선조에게 품하여 선조가 이를 시행하게 하고, 이몽학과 한현의 친인척들이 7.27에 서울에서 행형되었으며, 8.1에 보령인 모천지와 홍산인 유경룡을 청양에서 도원수 권율이 행형하여 굵직한 적당들이 거의 모두 잡혀서 마무리가 된 것으로 선조실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거의 한달만에 이몽학 반란이 표면적으로 마무리된 셈이죠. 그리고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어집니다. 역시 역사는 산자 아니 승리자의 몫이라고 볼 수 있죠.
여기서 우리 집안과 연결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홍산현이 혁파되고 지역사람들에게 과거응시가 제한되었으며, 반란군을 색출한다고 마을의 장정들을 무단으로 끌고가고서 처형하고, 역적의 장물이라고 하여 집안의 물건을 마구 약탈하고 있다는 지역주민의 말에 동부승지 유희서가 역적의 수색과 인부, 쇄마의 폐단 등이 줄어들도록 조치할 것을 아뢴 7.26의 선조실록 기록이 보입니다. 반란진압후 그 당시의 홍산현의 상황은 시쳇말로 안봐도 비디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25세이신 휘 진웅공은 난을 피하여 서천으로 세거하였다는 족보의 기록도 있습니다.
기록은 없으나 25세 할아버지들의 세거가 다수 이루어진것도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선동파의 파조이신 계유 할아버지가 서천의 시초면으로 세거하시고, 기장파의 파조이신 윤예 할아버지가 부산 기장으로 세거하신것이 이 사건의 영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이순신과 김덕령이 없어 전라도와 충청 우도가 피해가 컸습니다. 왜적이 금강을 타고와서 은산, 무량사까지 처들어 왔다는 선조실록의 기록도 보입니다. 또한, 난리중에 우리집안의 증거할 만한 기록이 없어졌다는 26세 순일 할아버지의 기록도 있습니다.
21세 휘 귀손,만손,천손공의 족보기록이 부실하고, 22세 할아버지들의 기록도 역시 부실하고, 오옹공의 행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지 않고, 오옹공 자손들이 벼슬길이 막혀 그저그런 집안으로 전락하였으며, 그래서 많은 자손들이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이다.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이몽학,,,, 그는 참으로 우리집안에, 아니 홍산지역에 좋지않는 영향을 많이도 끼친 대표적인 인물중 하나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족보기록과 비석에 새겨진 내용에 보면 26세 휘 순일공이 이몽학 반란군과 대적하여 홍산성을 지킨 공로로 부호군을 제수받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菁莪錄과 홍산고읍지에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살펴보지 못했지만, 순일공의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상당히 어린나이에 큰일을 했다고 하는데 약간 기록상 오류가 있는것 같습니다. 이몽학난이 일어난 해가 1596년이고, 순일공이 태어난 해가 1586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공께서 11세에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되는데 혹시 순일공의 태어난 해가 오류가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역시 이부분은 앞으로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병장 광김 김덕령이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옥사를 당하는데 그분의 나이 29살였습니다. 이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은 신경행의 작품인것으로 보여집니다. 신경행은 제찰사의 종사관으로 마침 면천에 왔다가, 이몽학의 군사를 보고 주위의 수령들에게 원군을 요청한 공로로 청난공신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몽학난 전에 임진왜란때는 김덕령밑에서 실권없이 종군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때에 원칙론자인 김덕령에 대한 감정이 좋지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당시 상황을 잘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숙종때 대제학인 이민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 제장과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곽재우는 드디어 군직을 떠나 생식을 하며 당화를 피하였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때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였다." 이것이 그 당시의 목숨을 받처 나라를 구한 의병들이나 신망이 있는 장수들에 대한 조정의 아니 중앙권력자들의 대접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몇가지 짚고 넘어갈것이 있습니다.
우선 주모자중 하나였던 한현에 대한 내용인데,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몽학이 군사를 통솔할 능력이 없어서 홍주로 한현을 찾아가려 했으나, 한현이 면천군수 이원에게 이미 체포되어 홍주성을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연려실기술에서는 갑진만록을 인용하여 이몽학이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도망치다 잡힌 부하들이 한현이 주모자라 하여 한현을 체포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내 판단으로는 전자가 맞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몽학이 서울로 진격하지 않고 홍주성을 친 이유는 한현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이몽학이 비록 서얼이지만 왕족의 피가 흐르는데 이에 대한 내용이 어디에도 보이지않습니다.
고대일록에는 이주의 첩자식이며, 이량의 아우라고만 나옵니다. 이주가 어떤 인물인지는 파악이 되지않지만 아마도 왕족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워서 감춰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께서는 이몽학에 대해 더 많이 계실것입니다. 제가 기술한 내용중에 사실과 다르거나 설명이 부족하여 보완할 내용이 있으면 언급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댓글 이몽학 반란은 호서지역 민중들에 대한 탄압, 서자인 선조의 정치에 대한 자신감 상실, 김덕령등 의병장들에 대한 불신, 이순신에 대한 경계등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어려서 부친에게는 서천에서 남면->내산면으로 이동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글을 읽고 다시금 그래도 상세히 알게 되어서 고맙소이다 서천 어산 기억합니다 사회친구가 있는데 그동네 출신이구 광김이 많고 잘 알고 있더군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