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 분)’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버지(존 리스고 분)를 치료하고자 인간의 손상된 뇌기능을 회복시켜주는 ‘큐어’를 개발한다.
이 약의 전 임상시험(동물을 대상으로 한 약효실험)으로 유인원들이 이용되고, '윌'은 그 중 한 유인원에게서 태어난 어린 ‘시저(앤디 서키스 분)’를 데려가 자신의 집에서 키운다.
가족처럼 살고 있던 윌과 시저, 시간이 지날수록 ‘시저’의 지능은 인간을 능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시저’는 이웃집 남자와 시비가 붙은 ‘윌’의 아버지를 본능적으로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인간을 공격하고, 결국 유인원들을 보호하는 시설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자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자각하고 인간이 유인원을 어떻게 대하는지 본 ‘시저’는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생존을 걸고 인간들과의 대 전쟁을 결심하는데...
이번 <혹성탈출> 프리퀄은 역대 시리즈들 가운데 단연 최고다. 팀 버튼의 리메이크는 부끄러운 수준으로 만들어버리고, 찰턴 헤스턴의 오리지널과 경쟁해도 좋을 정도로 출중하다. 라스트의 충격적인 엔딩이 선사하는 묵직함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번 영화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혹성탈출> 팬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원숭이는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나?’이다. 시리즈 영화를 새롭게 만들 때는 위험부담이 크다. 하지만 <혹성탈출>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다. 이번 프리퀄의 시작은 영리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치매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약이 테스트 과정에서 지능을 높이는 작용을 하면서다. 많은 원숭이가 실험 재료로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지적 능력이 우월한 원숭이가 태어난다. 시저라는 이름의 원숭이는 인간 가까이서 생활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생각한다. 결국 시저는 인간에게 사육당하고 실험 재료로 이용되는 동족을 위해 분노하며 일어선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원숭이의 다크나이트’ 버전이라고 하면 적절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심금을 울리는 탄탄한 드라마도 놀랍지만 CG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원숭이의 특수효과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특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자각하며, 눈시울이 젖어드는 시저의 모습에선 전율이 느껴진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인간과 원숭이의 대결 구도라는 단편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원숭이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은, 지적 우월이 아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대가였다. 그래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올해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영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찰톤 헤스톤이 주연을 맡았던 SF영화 ‘오리지널’ <혹성탈출>은 1968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우리나라 극장에서도 개봉되었고 TV에서도 몇 차례 방송되었다. TV에 처음 방송될 시절(1970년대 흑백시절)을 되돌아보면 참 신기한 면이 있다. 그 당시엔 비디오도 없었고, 시네마테크도 없었던 시절이다. 물론 유튜브도, 블로그도 없었다. 그런데 <혹성탈출>이 방영된 다음날 학교에서는 어린애들이 왁자지껄 그 영화를 두고 하루 종일 떠들어댔다. 줄거리와 장면을 세밀하게 떠올리고 즐거워하고 신나게 ‘감상을 공유’했던 것이다. 물론 <혹성탈출>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전날 방송된 만화영화 <서부소년 차돌이>의 명장면을 리플레이하고, <전설의 고향>의 무서운 장면(내 다리 내놔 등...)을 더욱 무섭도록 재연했다. 문득 나는 그 시절의 인간의 기억력은 2011년 지금의 인간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무리 PC사양이, 메모리 집적도가 높아져도 기계에만 의존하는 인간자체의 뇌 능력은 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은 젠시스 제약회사의 신약개발 과학자이다. 그가 지금 연구하는 것은 알츠하이머병을 고칠 수 있는 신약. 레이건 대통령도 이 병에 걸렸었고 우리나라 TV 가족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질병인 ‘알츠하이머’(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한다면 아마도 노벨의학상 몇 개는 한꺼번에 줘도 될 만큼 대단한 성취일 것이다. 윌은 자신이 개발 중인 신약을 우선 침팬지에게 주사하고 진행사항을 꾸준히 체크한다. 확실히 효과가 있을 뿐더러 침팬지의 지능이 계속 향상된다는 뜻밖의 부작용(?)까지 확인한다.
이제 사람에 대한 임상실험 계획이 제약회사 이사회만 통과되면 질병과 싸우는 인류에게 커다란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사회가 열리던 날, 임상실험 중이던 침팬지가 광포해지더니 실험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임상약의 부작용. 실험은 중단되고 모든 침팬지는 폐기처분(안락사)된다. 단 한 마리. 임상실험 중인 암놈 침팬지가 막 낳은 새끼침팬지만이 윌에 의해 몰래 빼돌려진다. 윌이 알츠하이머 치료제에 매달리는 데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아버지(존 리스고)가 알츠하이머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 새끼 침팬지는 ‘시저’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윌의 집에서 자란다. 시저는 갈수록 똑똑해진다. 윌이 연구하던 ALZ-112가 분명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윌은 아버지에게도 임상실험을 한다. 시저는 똑똑해지고 아버지는 활기를 되찾는다. 그런데 어느 날 치매의 아버지를 도우려다 이웃을 해치는 일로 윌의 가족들과 시저는 이별의 순간을 맞는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수 년, 수십 년 동안 수억 달러를 투자해가며 ‘신약제조’에 열을 올리는 것은 당연히 인류문명의 진화란 측면과 함께 돈 보따리라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알츠하이머를 정복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약제의 발명보다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흘러나온 시제품’의 부작용이 영화적 재미를 더한다. 과학자 윌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패권주의에 매몰된 인간도, 인간을 괴물로 만들려는 복수심에 불타는 악당도 아니다. 치매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낫게 만들고 싶은 효심과 인간적 감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실험실에서 최선을 다해 약제를 만들지만 그런 약제의 효능을 단기간에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로운 약품의 부작용이 등장하는 괴물영화는 많다.
<엘리케이터>에서의 거대악어도, <배트맨>의 펭귄맨도, 우리영화 <괴물>도 그러하다. 좋은 의도로 만든 ALZ-112는 원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다.실제로 리더 하나가 월등히 똑똑하다고 무리를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혹성탈출>시리즈는 잔혹한 정벌전쟁과 공고한 지배체제의 형성과정을 보여준다. 시저도 무리를 이끌고 숲으로 돌아간다. 아마도 수십 년이 경과하면 그 숲에서는 새롭게 ‘진화한’ 침팬지가 완벽한 정치적 사회를 이루고 인간세계에 대항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갑자기 소형화된 태블릿PC를 들고 지구를 침략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ALZ-113의 부작용으로 갑자기 급 노화 현상으로 멸종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 영화의 자막이 오르자마자 객석을 빠져나간 사람은 놓쳤을 장면이 이다. 윌의 이웃(비행기 기장)이 전 세계에 퍼 나르는 전염으로 인간의 멸종을 앞당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결국 <혹성탈출>은 인류 질병극복의 투쟁과정에서 삐져나온 SF이다. 당사자나 시저 입장에선 아쉬운 가족의 이별이지만 지구역사나 생물진화사에 보자면 치명적 바이러스와 돌연변이식 신종의 등장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 영화에선 <반지의 제왕>이나 <아바타>가 이룬 휘황찬란한 CG의 진화는 없다. 단지 아날로그적 연기에 CG분장이 빛을 발한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피터 잭슨 아니다. 루퍼트 와이어트라는 신예감독이다. 이번 여름 많은 블록버스터가 영화팬들 앞에 출몰했지만 이 영화가 그런대로 최고의 영화적 재미와 인류적 판타지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1968년 <혹성탈출>은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란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스토리도 아이디어도. 단지 지금의 특수효과 CG가 부족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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