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공항에서 수속을 밟기 위해 서 있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테지만 모두가 싱글벙글이다.
공항에는 현지 안내원과 유학중인 은미 씨 동생이 나와 있었다. 여행 인원이 17명으로 늘어났다. 공항에 내리면서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이 날씨였다. 북경에 간다고 하니까, 여러 사람들이 추워서 구경하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행여 여행지를 잘못 잡아 추워서 고생했다고 일행들에게 원망이나 듣지 않을까 무척이나 걱정도 했었다. 기우였다. 약간 날카로운 맛은 있으나 장갑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눈이 온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으나 쌓인 것은 없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하늘이 회색이다. 동생의 말을 들으니 북경의 날씨가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거의 없다고 한다.
잿빛 하늘, 이것이 북경의 전형적인 날씨란다.
몇 분을 걸어가니, 며칠을 같이 할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보는 순간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버스가 참으로 깨끗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보지 못했던 차들이다. 중국에 온 것은 이번 세 번째다. 두 번 모두 낡은 차만 타고 다녔다.
우리의 여행은 중국의 음식을 맛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점심 식사 짠 것만 빼면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가져간 고추장 없이 먹었으니까.
점심을 먹은 후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여기가 천안문 광장 멀리 보이는 것이 천안문이다.
천안문 광장은 중국 북경의 도시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의 남북길이가 880M, 동서의 넓이가 500M,면적이 44만 평방미터이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광장 안에는 100만명이 들어가 행사를 할 수 있고, 도심 가운데 있는 광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곳은 중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1919년 5.4운동, 문화대혁명이 , 1966년 100만명이 넘는 홍위병의 운집, 1976년 4인방과 주은래 양편의 지지 세력 사이에 충돌, 1989년 6월 천안문사태가 발발한 곳이다. 광장 북쪽에 천안문이 우뚝 솟아 있고 중앙은 인민영웅기념비,기념비 남쪽은 모택동 주석 기념당과 정양문, 동서 양측은 중국역사 박물관과 인민대회 당사가 자리하고 있다
인민영웅기념비, 뒤에 보이는 것은 인민대회 당사
중국역사 박물관
조따거가 광장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 원 짜리 팔로군 모자를 2000원에 샀다. 에누리도 잘 한다. 따거에게 참으로 잘 어울린다.
따거의 모자를 써보는 해표님, 우리 서방님에게도 잘 어울리는지 보아야지(초록뫼) 은미 동생이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부러운 듯이 보고 있다. 시집가서 나도 이렇게 해야지.......
천안문 구경을 마치고 자금성으로 향했다.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수십 개의 건물과 크고 작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이 모두 9천여 개이며 10m 높이의 성벽을 쌓고 50m 너비의 호성하(護城河)라는 해자(垓字)를 팠는데 호성하의 물은 방위상의 목적은 물론이고 자금성 안을 감돌아 흐르며 방화용 기능도 한다. 그리고 성벽 네 모퉁이에 십자형으로 들어간 모서리에다가 돌출부를 낸 독특하고 복잡한 모양의 각루(角樓)를 세웠다. 땅 밑으로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40여장 두께의 벽돌을 깔았다.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현재도 계속해서 보수를 하고 있는데, 특히 2008년 베이징에서 치르는 올림픽을 대비해서 대대적인 보수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보수로 인해 닫혀진 곳들이 많아 아쉬움이 많았다.
천안문을 지나자
단문이 보였다.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위치한 단문은 진시황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진시황제는 성의 대문 앞에 또 다른 문을 건설하여 궁을 출입하는 이들이 예를 갖추는 곳으로 삼았다. 자금성도 이를 따라 단문을 건설하였다. 단문에는 5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중앙의 것은 황제 전용문이었으며 그 좌우의 것은 종실의 왕공(王公)과 3품 이상의 관원이, 그 밖의 것은 4품 이하의 사람들이 사용하였다.
이것이 오문, 여기에 매표소가 있다.
자금성은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
오문을 들어가면서 따거가 이것을 만지고 있는 깊은 뜻은?
오문과 태화문을 지나면 태화전이 보인다. 태화전은 공사를 하느라 가려져 있어 안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태화전은 남북 약 33m, 동서 60m의 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되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는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보화전 옆에 있던 금 항아리.
청 건륭제 때 주조한 것으로 고궁 전역에 배치되어 있다. 궁전 모두가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한번 불이 나면 화재는 겉잡을 수 없다.그래서 이 큰 항아리에 방화수를 저장했으며,태화전, 보화전, 건청문의 무게 2톤의 도금된 항아리 이외에는주요 건물 외에는 동제나 철제의 항아리가 놓여 있다. 1900년 8국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하였을 때 금을 칼로 벗겨갔으며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총 308개의 항아리 중, 66개는 일본군이 약탈해 갔다고 한다.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 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이곳들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 건청궁,교태전,곤녕궁은 황제,황후 침소나 궁녀들의 침소로서 황제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남자들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다.
이 내정은 1925년 이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중국 문화재의 전당이 되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내정을 지나면 천일문(天一門)이 보인다. .
천일 문으로 들어가면 황제의 화원인 어화원이 나온다.
이 곳에는 각지로부터 모아온 자연이 만들어 낸 진기한 형태의 돌들이 가득하고 어화원 문안에 있는 향나무는, 뿌리는 두 나무이지만 윗 부분에서 붙어 한 나무가 된 것으로 부부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라 하는데, 정읍 신정동 샘바다의 부부나무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기념촬영을 한 부부들은 금슬이 좋아 백년해로 할 것이다.
어화원은 오래된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길 바닥까지 장식을 하였는데, 이 바닥은 화석자로(花石字路)라고 한다.
어화원를 지나 신무문을 나왔다. 신무문은 부쪽에 있는 문으로 마지막 문이다. 말로만 듣던 자금성이다. 참으로 크기는 크다. 자금성의 방이 9999개라 한다. 한 왕자가 태어나서 매일 방을 바꾸어가며 잠을잔다고 해도 한 바퀴 돌아 태어난 방에 이르면 27세가 되고, 두 바퀴를 돌고 나면 54세로 죽음을 준비할 때에 이른다고 한다. 천천히 구경하면 일주일 , 대충보아도 3일은 잡아야 한다는데, 1시간만에 보고 나왔으니 이런 것을 두고 주마간산격이라 하나보다. 특이한 것은, 어화원을 제외하고는 자금성 내에 나무 한 구루 볼 수가 없다. 이것은 궁내에 자객들이 침입할까 두려워 심지 않았다고 한다. 성벽으로 겹겹이 둘러싸고도 두려워서 나무조차 심지 않아다니..... 그런 왕 노릇은 왜?
자금성을 나와 경산공원으로 향했다. 경산 공원은 경산공원은 이미 수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179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명 영락 (永樂) 18년(1420년)에 석탄과 자금성 통자하(筒子河)의 진흙들을 가져다가 원나라 건축물인 영춘각(迎春閣)의 옛 터에 쌓아 두었는데, 이것이 하나의 흙산을 이루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만수산(萬壽山)"이라고 불렸다. 명 숭정(崇禎) 17년(1644년)에는 이자성이 북경성을 공격했을 때로, 당시 황제였던 숭정은 궁궐을 빠져나온 후 이 곳 경산에 올라와 스스로 나무에 목을 걸고 죽었다고 한다.
경산공원을 내려 오면서 김제 벼골제 앞에 있는 신털미산을 생각했다. 신털미산은 벽골제를 만들 때 일을 하던 사람들이 신에 묻은 흙을 떨어 생긴 산이라 한다. 한 왕조의 영화를 위해 만든 자금성의 부산물인 경산공원과 만 백성들에게 풍부한 물을 공급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만든 벽골제를 쌓다가 만들어진 신털미산, 같은 산이라도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다르다.
첫댓글 자세한 안내 말씀과 더불어 북경 구경 잘하였습니다.
한편의 체험드라마를 보는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