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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오종선(五種禪)
선(禪)의 방법(方法)
사선근(四善根)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는 오랜 기다림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단박에 무엇이 이루어지고 무슨 공덕이 나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서 몇 년이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공(功)이 성숙되고 마치 씨앗을 뿌리면 그 종자가 땅 속에서 싹이 나고 꽃이 핀 다음에 비로소 열매를 맺듯이 우리 참선 공부도 그렇게 공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자를 뿌리고 싹이 트고 자라고 익어지고 그래서 여물어진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승려가 되어서 줄곧 참선만 했고, 참선에 가히 미쳤다고 하는 사람인데도 역시 한 사십이 넘어서니까 비로소 조금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무슨 견성오도(見性悟道) 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인후개통 획감로미(咽喉開通 獲甘露味)라, 목구멍이 툭 틔어서 감로 맛을 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항시 목구멍이 칼칼하고 머리가 근질거리고 몸이 무겁고 그럽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애쓰고 하다보면 미련한 사람도 차근차근 맑아져 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가서는 이 몸뚱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가볍고, 걸을 때도 공중으로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가옵니다. 오랫동안 참는 것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따라서 참선은 오랫동안 참는 것입니다. 참고 하다보면 어느 때에 가서 문득 별보고 깨닫고, 바람소리에 깨닫고, 깨닫는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참지 못하고 중간에 그르쳐 버립니다. 그래버리면 그저 참선했다는 것뿐이지, 그 동안의 공은 다 허물어지겠지요. 그러고서 다시 새판을 잡으려면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상시에 차근차근 책을 보거나,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항시 진여불성의 본체를 안 여의면 손해가 없습니다.
오종선이라, 참선이라는 것이 순수한 선 하나뿐인 것이지만 중생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일하는 쪽에다 관심을 두고 조사 스님들이 풀이한 것이 있으니까 소개를 해드립니다.
오종선, 이것은 도서(都序)에 있는 종밀선사(宗密禪師)의 풀이를 옮긴 것입니다. 오종선이라, 다섯 종류의 선이란 말입니다.
외도(外道)가 하는 외도선(外道禪), 또는 범부 중생이 하는 범부선(凡夫禪), 또 소승이 하는 소승선(小乘禪), 최상승선(最上升禪), 이것을 오종선이라 합니다.
오종선(五種禪)
1. 외도선(外道禪):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2. 범부선(凡夫禪):인과(因果)를 신(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3. 소승선(小乘禪):아공(我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4. 대승선(大乘禪):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
여 닦음.
5. 최상승선(最上升禪):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을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
(信解)하고 닦는 선(禪).
외도선은 불도가 아닌 외도들이 호흡법이나 마인드 컨트롤 등 요새 별스러운 것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외도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因果)도 믿지 않고 그냥 참선을 하면 몸도 가볍고 건강도 도모하고 스테미너를 증진시키는 따위의 공덕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텔레파시로 사람들의 생각도 알아맞히고 하는 그런 유위공덕(有爲功德), 인과를 믿지 않는 단계에서 하는 선을 외도선(外道禪)이라 합니다. 유루공덕(有漏功德), 이것은 때 묻은 공덕입니다. 말하자면 상(相)을 떠나지 못한, 자기라는 관념(觀念)을 떠나지 못한 공덕은 다 때 묻은 공덕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떠나버린 공덕이 되어야 무루공덕(無漏功德)이라, 때 묻지 않은 공덕입니다. 그러나 외도인들은 무아(無我)라는 관념이 없으니까 항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때 묻은 공덕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선 이것은 비록 상(相)을 떠나버리지는 못했더라도 외도꾼 같이 때 묻은 공덕은 아닙니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이라,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일반중생의 공덕을 위해서 하는 선이 범부선(凡夫禪)입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선(善)을 행하면 반드시 안락(安樂)의 과보(果報)가 있고 악(惡)을 행하면 또 그 원인으로 인해서 고통의 보(報)가 따른다는 게 인과의 법칙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정도로 소박하게 인과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외도꾼들은 인과를 믿지 않으니까 함부로 사기도 치고 뇌물도 먹고 하겠지요. 그러나 인과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가 사기를 치고 뇌물을 먹고 나쁜 짓을 하면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업보를 받으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이 혹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은 인과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인과를 믿으면 부도덕한 행동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악보(惡報)를 받아 인생의 고과(苦果)가 따르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소승선 이것은 범부선보다는 좀 더 높아서 아공(我空)이라, 본래 나(我)라는 것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四大)가 잠시간 모인 것에 불과하고 우리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 감수하고 분별하고 느끼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간 모여 있을 뿐이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잠시간 모여서 무상(無常)한 것이 우리 범부인 아(我)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我)라는 것은 본래 비었다고(空) 생각하고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여기서의 아공(我空)은 오온개공(五蘊皆空) 까지는 미처 못 간 것입니다.
그냥 나타나는 이 몸뚱이라는 것은 원소가 모여서 잠시간 된 것이고 내 마음도 역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 분별하고 느끼고 감수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 모여서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공(我空)을 믿고 해탈을 위해서 닦는 선, 이것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따라서 자기 몸뚱이에 대한 관념을 무상으로 분명히 느껴야 이른바 소승선도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질긴 것이 자기(自己)라는 관념(觀念)입니다. 자기 몸뚱이, 또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 말입니다.
넷째로 대승선(大乘禪)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 자기도 비어 있지만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념이나 개념도 그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개념이나 자기라는 존재가 다 비었다고 믿고서 해탈(解脫)의 법을 닦는 것이 대승선(大乘禪)입니다. 여기까지 되면 그야말로 상당히 온 것이지요.
우리가 앉아서 망상도 하고 분별시비도 하는 것은 아공, 법공을 믿지 못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남에게 좀 섭섭한 일을 당하면 그걸 가지고 마음고생을 하고, 배고프면 고프다고 생각하고, 추우면 춥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만 망상이 생기고 진여불성 자리로 우리가 굳게 못 나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본래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법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움직여 가는 것이지 실지로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육조단경의 혜능스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 아무 자취가 없는 것이니 어느 곳에 가서 티끌인들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마음을 다 열어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다만 존재하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인 이 순수 생명자리 이것만 결국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空)에만 치우쳐 버려도 이것은 허무가 됩니다. 우리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그냥 말로만 느끼면 허무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실지로 닦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공(空)해지고 모두 텅 비어지면 그와 더불어서 진여불성의 광명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을 느껴도 닦아서 느끼는 사람은 공(空)에 떨어지지 않지만 말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느끼면 공에 떨어지고 맙니다.
다섯 번째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우리가 지금 문제시 하는 것은 최상승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양의 대승권에서 하는 참선이 최상승선이지요.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이 그것입니다. 여래선과 조사선의 싸움도 아주 치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통불교(會通佛敎)를 지향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의 도원선사 같은 분도 이런 문제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여래선, 조사선이란 말도 없었던 것이고 달마에서 육조까지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후대 중생들의 근기가 약해지니까 괜히 분별시비가 나와 가지고 여래선, 조사선을 서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싸우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공부가 조사선이고 여래선이고 그런 것이지, 그것은 바로 일체방편을 떠나서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는 무루지성품(無漏知性品)이 구족(具足)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는 일체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닦아야 참다운 여래선이고 조사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最上乘禪) 즉, 외도선이나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등을 훌쩍 뛰어 넘어서 최고의 정상인 최상승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내 마음 가운데는 모든 무량공덕이 다 들어있으며,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참구하는 선이 되어야 이른바 가장 고도한 참선인 최상승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꼭 그렇게 하셔야 부처님 뜻을 따르는 것이고 또, 달마에서 육조까지의 순수한 순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른바 안심 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이 항시 편안합니다.
내가 지금 못 나고 못 배웠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인은 무식해도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마음자리만 바로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문적으로 팔만대장경을 다 독파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성자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하나의 마음인 것이고, 불성 가운데는 때 묻지 않은 일체공덕이 다 갖춰져 있고, 때 묻지 않은 무루공덕이 본래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오로지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요,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화두를 들어도 좋고 들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다.
참선공부는 여러분들께서 평생을 해야 할 공부입니다. 평생 동안 해야 할 가장 절실한 공부가 바로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인 참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됩니다. 허튼 짓을 하면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해도, 너무 욕심을 부려도 참선에 장애가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어느 존재나 다 진여 연기법으로 해서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고, 좋아하고, 욕심내고, 집단 이기심이나 개인 이기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진여불성 자리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모양은 참선 모양을 내면서 마음은 탐욕과 어리석은 그대로 있으면 참선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나타내는 행동과 입으로 하는 말과 생각하는 뜻이 모두 다 진리에 맞게 나아가야 참다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되풀이 합니다. 최상승선이라, 이것은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을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禪)을 최상승선이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처럼 고도한 최상승선의 참선법은 먼저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이치를 모르고 덮어놓고 하면은 최고의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달마스님께서도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치로(理入과 行入)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마선이란 이치로 먼저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라,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본래 부처라는 이 말을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처음부터서 부처란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나한테는 잘나나 못나나, 늙으나, 젊으나 누구나가 다 법신부처님의 무량공덕이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나, 자비나, 원력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믿어야 본래 부처라는 의미가 됩니다. 믿어도 그냥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해(信解)라, 믿어 의심치 않고 이치적 체계를 세워야 신해(信解)가 됩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해(解)는 못되고 가까스로 신(信)만 되겠지요.
부처님 법문은 조금도 빠뜨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소중한 것입니다. 더러는 ‘경(經)은 필요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경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필요 없는 말씀을 하셨을 리가 만무할 것이고 필요 없는 것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천 오백년 동안을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해 왔겠습니까? 다 우리 마음의 때를 없애고 우리를 부처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최상승선,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자기 비하를 말으십시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천상천하에 누구에게도 꿀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석가모니만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아니라 사실로 들어가면 어느 누구나가 다 천상천하에서 자기가 제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버려야 매사에 자신이 생깁니다. 사업을 하나, 시험공부를 하나, 그런 자신을 가지고 하면 훨씬 더 사업도, 공부도 빠르게 됩니다. 제가 항시 비판을 듣는 문제는 어려운 법문을 하고 생활 법문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활이란 것이 무엇을 따로 두고 생활이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생활이란, 바로 우주의 법도를 따르는 생활이 가장 좋은 생활입니다. 아무렇게나 먹고 마시고, 돈 벌고 하는 것이 좋은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좀 어렵더라도 부처님 법에 따르는 생활이 참다운 생활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세속화 시켜 일반 대중들을 안일하게 만들고 종교를 재미로 하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들은 고도한 법문을 대중 누구나가 다 알아듣게 이해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불자님들이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십이인연법문(十二因緣法門)을 보면 다 기가 막힌 법문들입니다.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되는 진리들입니다. 공덕뿐만이 아니라, 당장 금생에 바로 행복이 오는 그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따르면 남편과 싸울 수도 없고 아내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도 없으며, 자식에게 불신 받는 부모가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스승에게 불손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학에서나 사회에서나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불신하는 것은 모두 부모가 부모답지 않고, 스승이 스승답지 않다는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바르고 진리를 바르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가사, 기독교나 불교에 대해서 질문할 때 그것에 대해서 다른 점과 좋은 점들을 갖추어서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냥 다 승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는 것은 좋고 다른 종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말해버리면 젊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겠습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다 높은 교육들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총명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득을 시켜야지 덮어놓고 주장하고 강요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불교를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으십시오. 원리 몇 가지만 알아버리면 참 쉬운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불성, 이것은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분명히 우주에 영생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에너지가 흐르듯이…. 에너지 불멸 법칙이라, 다만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니까 좋게 보이는 것은 긍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정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근본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겉에 좋은 것도 나쁠 수가 있고 겉에 나쁜 것도 좋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나 성자의 가르침은 모두를 다 근본도리에서 봅니다. 하나님이나 아멘(Amen)이나 그것도 역시 근본 도리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는 말했습니다. ‘참다운 주제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에 의해서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을 우리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불심을 떠나지 않고 우리 본 성품을 떠나지 않으면 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제 선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공안선(公案禪)ː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며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參究) 하는 선(禪).
2. 묵조선(黙照禪)ː 화두(話頭)없이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묵조(黙照)하며 닦는 선(禪).
3. 염불선(念佛禪)ː 자심(自心)을 비롯한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본래로 부처요, 우주실상 (實相)이 바로 정토(淨土)임을 관념(觀念)하며 닦는 선(禪).
선(禪)의 방법(方法)
선의 방법은 먼저, 화두를 참구하는 화두선(話頭禪) 즉, 공안선(公案禪)이 있고 또는 잠자코 참선하는 묵조선(黙照禪)이 있고 또 부처님 생각을 여의지 않고 닦는 염불선(念佛禪),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르게 말할 수도 있으나 편의적으로 이렇게 나누어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안선, 이것은 간화선(看話禪)이라, 화두를 드는 선입니다.
공안(公案) 이것은 보통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즉, 관청에서 나오는 공문서는 하나의 법규니까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공안은 도인 즉, 성인들이 우리 중생에게 공부하게 하는 하나의 문구 즉, 상대를 떠나버린 절대적인 훌륭한 문구를 공안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성인들이 우리에게 분별시비를 없애고 우리를 성불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상식을 떠나버린 짤막한 문제를 내주면 그것을 우리가 문제시 해 가지고 우리 마음을 불심(佛心)으로 접근시킨다는 말입니다. 공안이나 화두는 같은 뜻입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 이것은 의심을 참구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냥 보통으로 하는 의심은 화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면목자리, 본래 근본자리,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 생명은 무엇인가? 또는 진여불성은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우리 중생의 미정(迷情)을 헤치고서 참다운 깨달음을 증(證)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화두는 천 칠백 공안 모두가 본래 면목을 말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면목을 분명히 들어야만 이 화두가 됩니다. 그걸 들지 않고 의심만 하게 되면 기가 올라와서(上氣) 참선이 어렵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대중 안거를 하다보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언제 한번은 법랍도 많은 어떤 스님이 태안사에서 삼년결사 땐데 정진을 하면서 항시 머리를 만지며 안절부절 하다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곧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일 년 반 정도를 가까스로 견디더니 나중에는 도저히 못 버티고 포기해 버리는 것을 봤습니다. 그 외에도 참선 중에 상기(上氣)되어 주저앉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내 마음자리는 무한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하고 자기 마음에 들어있는 무량공덕을 분명히 믿지 못하니까 생기는 병통입니다. 사실 의심이란 것은 괴로운 작업입니다. 사람끼리도 못 믿고 의심하면 괴롭지 않습니까. 따라서 상대적인 의심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자(無字) 화두나 이뭣꼬(是甚麽) 화두나 다 진여불성 자리를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또 화두를 빨리 타파하라는 것이지 언제까지 화두를 붙들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나 깨나 의심을 위한 의심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몇 년 동안 잘못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참선하는 분들은 누구나가 겪는 일입니다.
따라서 화두를 들 때는 이른바 그 시심마(是甚麽), 중국말로는 시삼마라 하고 우리식으로 하면 시심마가 됩니다. 그 뜻은 ‘이뭣꼬’인데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한 물건 자리, 이른바 자기 불성자리를 뜻합니다. 그 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화두라 할 수 있습니다. 공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은 묵조선(黙照禪)이라, 지금 한국에는 묵조선이 별로 없으나 일본 선방에서는 화두를 드는 임제종과 또는 화두 없이 잠자코 명상식으로 비추어 보는 묵조선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양쪽을 대등하게 하고 있으며 또 황벽종은 주로 염불(念佛)을 화두(話頭)로 합니다. 일본은 지금 선이 세 종파가 있습니다. 묵조선은 화두 없이 자성불성(自性佛性)을 묵조(黙照)하며 닦는 선입니다. 중국 동산 양개스님 같은 분도 말하길, 분명히 자성불성을 비춰 보라고 했는데 지금 일본사람들이 하는 묵조는 묵묵부답하니 무념무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침도 많이 나오고 자기가 어디까지 간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일본에서 나오는 책들을 참고로 보는데 너무나 따분하고 생기가 빠져있단 말입니다. 그걸 보면 그들은 자기들이 본래 묵조선의 조사(祖師)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제스님이 화두 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대혜(大慧)스님 때 가서 화두가 정착됩니다. 따라서 그런 조사스님들은 어디에도 집착이 없습니다.
후대인들이 괜히 정형화 시켜가지고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 이렇게 분별시비를 일으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그에 속한 사람들은 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그 당시 중국 선을 좋다고 다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보조 국사는 위대한 스님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스님이지만 중국에 들어가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준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세계가 그야말로 하나로 뭉쳐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 불교가 하나가 되어 다른 민족과 대화를 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치우치게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도 아랍계들 싸우는 것 보십시오.
근본주의나 교조주의 같은 것은 결국 법집(法執)에 불과합니다. 법집이 되면 불교가 아닙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참다운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근본주의나 교조주의 그런 것들은 우리가 배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자기 식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두 하는 사람은 화두가 아니면 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석가모니나 달마스님이 그러셨겠습니까?
여기 계신 스님들이나 여러분들은 모두 엘리트들입니다. 대부분이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밟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실 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세계종교를 우리 품안에 안을 수 있는 그런 포용력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묵조선도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본래면목을 비춰봐야 참된 참선이 되겠지요. 자기 면목을 떠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진여불성을 즉, 본체를 여의지 않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의 본체를 여의지 않으면 아미타불을 부르나, 하느님을 부르나 상관없이 다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선(禪)이 됩니다.
염불선(念佛禪), 이것은 자심(自心)을 비롯한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본래부처(本來佛)요, 또 우주의 실상이 바로 정토 극락세계임을 관념하며 닦는 선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이 오염되면 바로 지옥이 되고 악이 됩니다. 지옥이라 할 때는 두 차원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마음만 따지는 사람들은 마음이 어두우면 지옥이지, 별도로 지옥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존적인 지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의 가상계(假相界)가 있고, 개나 소나 돼지들의 축생계가 있듯이 지옥도 역시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보여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의 영적세계로 해서 고통 받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삼천대천 세계가 화장세계라, 사실 우리 중생이 몰라서 그렇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요, 화장세계인 것입니다. 중생의 어두운 삼독심(三毒心)으로 보니까 안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면 극락은 어디 따로 있는 것인가? 극락이란 지역적으로 따로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들 사는 경계가 있습니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천(色界天)에 있는 정거천(淨居天)이 바로 성자들이 사는 하늘입니다. 우주란 것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기 때문에 이 법계(法界)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무량무변한 세계에 있어서 성자는 어디에 있으나 극락을 수용합니다. 그런 성자만 사는 정거천(淨居天)이 이른바 극락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락은 우리 마음의 번뇌를 떠나버리고 마음의 때를 다 벗어버려야 비로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에 계시고 내 몸 밖에 따로 어디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자성불(自性佛)이라, 부처님은 어디 안 계시는 곳이 없다(無所不在). 이렇게 생각하면서 부처를 찾아야 진정한 염불선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선(禪)이란 개념 자체가 본래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성품을 떠나버리면 화두를 드나 무엇을 하나 그것은 참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공부하시는 젊은 분들은 몇 마디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문제인데 우리 같은 한문 세대들은 사고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하니까 꼭 자기가 하는 것만 옳다고 고집해 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종단의 종헌을 보면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다만 도일(道一) 스님이나 태고(太古) 스님 정도로 밖에 언급이 없단 말입니다. 원효대사가 도(道)가 더 높은지 도의스님이 더 높은지 누가 알겠습니까? 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다 참선을 통했다고 봐야지요. 우리는 지금 그러한 형식 논리에 취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결국은 자기 마음도 좁아지고 우리 종단도 자꾸 풍파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종파가 생기고 하겠지요. 부처님 한 분을 우리 종주로 모시고 원효나 의상이나 도일 스님 등을 우리 선배로 모시면 되는 것이지 무슨 이유로 꼭 종파를 갈라서 따로 종교를 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그렇게들 싸운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안선, 화두를 의심하는 선이나, 또는 화두 없이 그냥 명상적으로 잠자코 부처님을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비춰보는 묵조선(黙照禪)이나, 또는 화두(話頭) 대신에 부처님을 확신하는 염불선(念佛禪)은, 일체가 부처임을 확신하고 믿는 선입니다. 내 마음이나 우주만유의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 부처님의 대명사가 바로 아미타불이요, 관세음보살입니다. 저는 항시 드리는 말씀이지만 부처님 이름에 대해서도 우리는 회통을 시켜야 됩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은 대개 부처님 명호에 대해서 관점이 산만합니다.
지장보살을 부르는 분들은 지장보살의 공덕이 더 높다, 어느 선방에서는 지장보살을 만 불로 모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아마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이 다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부처님자리가 따로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자리, 그 공덕이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론(慈悲論)적으로 봐서는 관세음보살,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우리 중생의 영혼을 인도하는 쪽으로는 지장보살, 그러고 총대명사로는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만일, 부처님이 각기 따로 있다면 불교는 별로 좋은 종교가 못됩니다. 우리는 부처님 이름부터 회통을 시켜야 됩니다.
부처님은 무량공덕이기 때문에 보살이나 부처님 이름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결국은 부처님 공덕 가운데서 그 공덕 따라 붙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에서는 약사여래, 하늘에 있는 별을 떠올리면 칠성광여래(七星光如來)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이 산에 있으면 산신(山神)이고 물에 있으면 용왕(龍王)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원주의라,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안심법문입니다. 달마에서 육조까지 다 그런 법문입니다. 공안선이나 묵조선, 염불선 등은 모두 다 최상승선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다 좋습니다.
이행문(易行門)이라, 용수보살의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에 보면 난행문(難行門), 이행문(易行門)이 나옵니다. ‘나는 부처니까 내 힘만 믿고 가면 부처가 된다.’ 자기 힘만 믿고 가는 것이 난행문이라, 어려울 난(難), 아주 힘들게 가는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믿고 ‘나도 본래 부처다.’ 하고 그 공덕에 의지해서 가는 것을 쉬울 이(易)자, 이행문(易行門)이라, 이렇게 두 문을 나누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감성이란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감성은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우리가 객지에 나가서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보십시오.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그리는 그 향수는 얼마나 맑고 순수합니까. 그렇듯이 우리 마음의 고향이 부처님인데 부처님은 하나의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라 내 생명의 고향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를 간절히 흠모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법화경에서도 심회연모갈앙어불(心懷戀慕渴仰於佛)이라, 마음으로 부처님을 심회연모(心懷戀慕)라. 간절하게 갈앙하고 연모하는 그 마음이 우리 선근을 증장을 시키고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고 또 아미타경에 보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그 한 생각이 극락왕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는 한 생각으로 해서 무엇이 이루어지기가 어렵겠지만, 새도 죽을 때는 가장 아름답고 슬픈 소리로 운다고 합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도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선해집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본래가 선량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죽을 때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 가르침 따라 부처님은 분명히 계시고 극락세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서 일심(一心)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면 그 마음으로 극락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경전에 나와 있는 말이니까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렇게 우리 감성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성을 소외시키고 내가 부처니까 내 힘으로만 성불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팍팍하고 힘이 듭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이 그런 데에 있습니다. 지금 세계 인구의 17억이나 믿는 만큼 그 마음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강렬한 신앙이 나오겠지요. 너무 맹목적인 점들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이치를 알고 믿으면 참 좋은 것입니다.
사선근(四善根)
다음에 사선근(四善根)이라,
사선근(四善根):난법(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 세제일법(世第一法)
1. 난법(煖法):명득정(明得定)
2. 정법(頂法):명증정(明增定)
3. 인법(忍法):인순정(印順定)
4. 세제일법(世第一法):구사론(俱舍論), 유식론(唯識論)
※사선근(四善根)은 견도전(見道前)의 가행정진(加行精進)이므로 사가행(四加行)이라고도 함,
이 사선근 법문도 역시 능엄경과 구사론, 유식론 등에 있는 법문입니다. 일반 조사론에는 그냥 단박에(頓悟頓修) 되어 버린다는 쪽으로 주로 하기 때문에 이런 전문성 있는 법문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재가 불자님들이 알아두시면 자기 점검을 하실 때에 필요합니다.
사선근, 이것은 우리가 견성오도 하기 전에 우리 선근을 더욱 증가시켜야 하는 네 가지를 말합니다. 난법, 정법, 인법, 세제일법상, 이것은 우리가 견성오도 하기 전에 즉 견도직전(見道直前)의 수행계위(修行階位)를 말합니다. 견성오도를 해야 참다운 자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견성오도 하기 전에는 가짜 자유입니다. 따라서 미처 성자가 못 된다 하더라도 그 과정은 좀 알아야지 그걸 모르고 가다보면 여려 경계가 많이 있는 법인데 자기 공부가 얼마만치 되어 있는지 짐작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선근 법문, 특히 능엄경 같은 경에는 우리가 점차로 올라가는데 대해서 아주 세밀하게 말씀해 놓았습니다. 또 구사론 같은데도 역시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이 사선근 가운데 난법(煖法) 이것은 명득정(明得定)이라, 불교는 주로 한문 문화권을 거쳐 온 지라 한문을 알면은 참 쉽습니다. 밝을 명(明)자 얻을 득(得)자, 우리 마음이 항시 어둡고 무겁다가 훤하게 밝아온다는 것입니다. 광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시원해 오는 경계를 말합니다.
맨 처음에 들어앉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참선을 꾸준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치 구름이 개이듯이 마음이 개운해 옵니다. 그래서 몸이 마치 전류에 감전 된 것처럼 찌릿찌릿해지기도 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주 시원스럽게 개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난법(煖法)상, 이른바 명득정(明得定) 밝음을 얻었다는 경계입니다. 그만치 우리 인간이 선량해졌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 명득정, 맑음을 얻었어도 말 많이 하고 남하고 싸우고 함부로 행동하면 그것이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를 해서 명득정이라는 밝음을 얻었으면 그 자리를 행여 놓칠세라 소중하게 아끼면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해 들어가야 더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 이는 정법(頂法)이라, 정법은 명증정(明增定)이라 밝은 기운이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밝을 명(明)자, 더할 증(增)자, 밝은 기운이 더 증가해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밝은 기운이 희미했다가 공부를 더 하면 그때는 그 밝은 기운이 온 전신을 엄습한단 말입니다. 이런 때 기분 좋은 것은 다른 즐거움에 비교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세속적인 재미도 이것에 비할 바는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우리 건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비교급이 없습니다. 가사, 우리가 공부해서 몸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해지면 잔병치레 같은 것은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신비의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신수양으로 해서 병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들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마음도 정화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명증정은 우리 마음이 그만치 시원스럽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시원스러우면 자연히 혈액 순환이 왕성해지고 머리도 눈도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참선을 경험하신 분들은 다 아시지만 몇 시간을 눈을 뜨고 있어도 조금도 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런 상태로 독서도 하고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따라서 명증정이라 밝은 기운이 우리 몸과 마음 전체로 들어와서 머리도, 눈도, 가슴도 훤히 트여 시원하고 다리도, 허리도 저리고 아프던 것이 다 풀려 개운하고 그러다가 제 삼에 인법(忍法)이라, 인법은 인순정(印順定)이라. 인법은 밝은 기운이 이제 후퇴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 기운이 몸에 완전히 관성으로 배어서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나쁜 짓을 못하게 되고, 욕심도 미운 생각도 사라지게 되며, 그것들이 다 허망한 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더욱더 공부를 정진해서 그 다음이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세제일법은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이란 뜻입니다. 견성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성자의 법은 못 되어도 세간적인 범부에서는 제일가는 법이 세제일법입니다.
이때에는 우리 마음이 맑아져서 그 가운데 훤한 광명이 비추는 이른바 심월(心月)이라, 마음 달이 비춰 온다는 것입니다. 심월이 비춰오면 그때는 공부가 후퇴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심월까지 비처와도 도인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해버리면 또 간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경망한 사람들은 그 명득정, 몸이 좀 시원하고 알음알이도 좀 생기고 판단이 좀 잘되면 그만 공부가 다 되었다고 뛰어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평생 거짓말쟁이가 되고 남도 어두운 길로 빠뜨리고 말겠지요. 따라서 이 사선근, 즉 명득정, 명증정, 인순정, 세제일법, 이런 경계에서 가짜 도인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참으로 경계를 해야 됩니다. 이 사선근 법에 관해서 깊이 음미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사선근 법은 일본 사람이 쓴 불교 책에도 잘 안 나온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 한국 선에서는 그저 단박에 되어버린다 하는(頓悟頓修) 화두 일변도로 나가기 때문에 이런 법문 체계가 나올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능엄경이나 구사론 또는 유식론 등에는 이렇게 점차로 공부하는 법을 아주 착실하게 밝혀 놓았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실 공부할 때는 이런 경계를 꼭 거치는 것입니다. 다만 좀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차근차근 공부를 하시다 보면 다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더러는 이런 경계를 한 번에 다 초월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점차로 닦아서 서서히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개인의 품성이나 용맹정진의 힘 따라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이것은 우리 범부가 거치는 선근이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과정인지라 참고로 하시면 그때그때 우리 공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位)를 몰라버리면 조금 기분이 좋고 밝아진 것 같으면 견성오도 한 것으로 알고 함부로 행동하고 묘각(妙覺)이라는 것도 함부로 생각해 버리는 우(遇)를 범하게 됩니다. 묘각(妙覺)이란 초지보살의 환희지(歡喜地)를 성취한 뒤에도 십지(十地)까지 올라가서 부처(佛界)를 성취해야 묘각인데 그걸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는 조사어록이나 불경을 보면서 한없이 겸허해야 됩니다. 겸손하게 조그만 자기 알음알이를 배제해야 교만심과 증상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증상만(增上慢) 이것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못 깨닫고 깨달았다 하고 못 증하고 증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이래 버리면 우리 수행자로서는 가장 큰 병입니다. 우리 승려는 그러면은 결국 승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도인 아니면서 도인인 척 하는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병 아니겠습니까?
내 공부가 지금 어느 정도 이르렀는가? 이것을 훌륭한 스승이 곁에 있어서 점검을 해주면 좋지만 그런 스승이 없으면 자기 나름대로 한계를 몰라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공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 사선근을 돌아가셔서 잘 보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난법(煖法), 이것은 밝음을 얻는 때고 정법은 더욱더 정화가 되고 맑음이 증가되어서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고 피가 맑아져서 순환도 잘 되고 그래서 자연히 건강도 좋아집니다. 선방 가서 보면 모두 약봉지들을 다 갖고 있어요. 그러면 공부를 잘 못했구나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공부를 바로 하고 청정하게 생활할 때는 웬만한 병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명증정이라, 우리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다 생각할 때는 병균도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맑은 피가 흐르고 있는데 어떻게 에이즈나 암 따위가 침범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셔서 금생에 재가 불자님들도 도통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세간에서 제일가는 이 법을 애쓰고 닦아 가노라면 언젠가는 견성오도 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모두 부지런히 닦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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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주의 법도를 따르는 생활이 가장 좋은 생활입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