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년 새해를 맞이하여 안녕하신지요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십시오. 요즈음 시사거리가 되고 있는 역사이야기를 한편을 올리오니 참고삼아 보아주길 바랍니다.
요즈음 방송3사에서는 역사 사극을 경쟁적으로 방송하고 있다. 연속극 ‘대왕 세종(kbs). 이산(정조 mbc), 왕과나 (성종 sbs)’가 바로 그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몽(mbs), 연개소문(sbs), 대조영(kbs)'를 방영하더니만 작년 말 대선을 앞두고서 부터서는 조선의 3대 성군 대왕을 연속극으로 내놓으면서 시청자를 경쟁적으로 끌어드리고 있다.
고구려를 창업한 ‘주몽’, 고구려를 마지막 지키기 몸부림첬던 ‘연개소문’, 당나라에 멸망한 고구려를 되찾기 위해 당과의 전쟁에 뛰어들어 ‘발해’를 세웠던 ‘대조영’. 이는 우리시대의 잃어버린 주권을 찾기위한 몸부림으로 대변했던, 시청자의 대리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대극 일 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 금년에는 성군(聖君)만을 주제로 한 연속극을 방영하는 이유는 무엇 이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새로이 등장하는 통치자에게 바램의 모델이 될 수도 있고, 시청자가 통치자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성군의 업적들을 다시 보여주는 역할도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다시 조선 3대 성군인 세종대왕, 성종대왕, 정조대왕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세종대왕은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창업하였고, 개국 초기 혼란스런 정국을 평정하고 나라의 완전한 기틀을 만들어 준 선왕 태종의 덕택으로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었으며 집현전에 우수한 학자들을 등용하여 그 위대한 ‘한글’을 창조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시다. 특히 세종은 총 6명의 부인에게서 22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초기 왕실에 기틀을 다지는데도 커다란 공헌을 한바 있다. 재위 31년에 54세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성종대왕은 일찍이 나이어린 조카 단종(당시12세)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쿠테타 성공으로 왕권을 거머쥐었을 뿐만아니라 , 왕권을 강화한 후 둘째아들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예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2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장손(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의 아들)이 대를 이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시다. 성종은 나이 13세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 인수대비의 정치수완으로 일찍이 왕권의 안정을 가져왔고,
학문을 좋아해 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등 도학정치의 사림세력을 형성 국가 기강을 튼튼히 쌓았다. 그러나 여색을 좋아해 12명의 부인 하에 16남 12녀를 두었다. 야사에 어우동과 유흥을 즐겼다는 정도로 여색에 깊어 정현왕후 윤씨의 질투를 사 결국 폐비 윤씨사건을 낳게 되었고, 훗날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조선역사의 최대 폭군이 되는 사건들을 초래케 한다. 성종은 재위 25년 38세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아마 여색에 깊이 빠져 제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한 것 같다.
정조대왕(이산)은 할아버지 영조가 당파에 휩쓸려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 가두어 죽게하는 조선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속에서 어럽게 어럽게 왕위에 올라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규장각을 세워 젊인 인재를 모아 개혁정치를 도모하나 결국 왕의 독살설 의문을 안고
재임 24년 49세에 생을 마감한다.
나는 3대 대왕중에서도 정조 자신이 남인이 되어 노론에 대처하면서 개혁정치를 도모하는 의지를 높이 사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통치자로 표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조 대왕을 존경하는 바이다. 그러면 여기서 정조대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정조대왕의 죽음과 독살설
숙종에게는 장희빈과의 아들 경종과 무수리와의 아들 영조가 있었다. 먼저 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조선의 당쟁이 극도로 달해 있었다. 임금은 신하들 사이의 당파분쟁에서 최종판결자였다. 그러나 경종 때부터 신하들은 임금에게 당적을 붙이고 당이 다를 경우 적으로 몰았다. 경종이 소른의 군주였다면 영조는 노론의 군주였다. 그런 영조 밑에서 노론에 반기를 들었던 사도세자는 부왕인 영조와 노론에 의해 비참하게 뒤주 안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의 유일한 외아들이란 점에서 극도로 문제가 되었다. 영조 다음으로 대를 이를 사람은 사도세자가 낳은 네 아들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네 아들 중 세손인 ‘산(후에 정조가 됨)’만이 사도세자의 정비인 혜경궁 홍씨 소생 이였고 나머지 모두 후궁에서 얻은 아들 이였다. 영조는 원래 두 명의 왕후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를 두었으나 10세 나이에 병으로 일찍 죽었고 결국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얻은 아들 사도세자 한 사람 뿐이였는데 이도 결국 당쟁에 휘말려 마지막 아들까지도 잃은 셈이다.
그래서 영조는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세손 ‘산’을 입적시켰다. 법적으로는 세손 ‘산’이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명세자의 아들로 만든 것은 세손의 지위를 보장해 주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강경파들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세손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했던 악몽과 같았던 어린 시절 기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세손이 장차 왕위에 오르면 보복이 있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론 강경파에서는 세손 ‘산’보다는 사도세자의 후궁 박씨의 아들인 은전군이 왕위에 올라야 뒤탈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 하에 노론 강경파에서는 세손 제거 나선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할 시 세손의 나의 겨우 11세 이였다. 10년 이상 대리청정을 한 28세 청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행적을 너무나도 세손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노론에 속해있었던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환이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장인 홍봉환이 죽음으로 몰았으니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러니 세손이 왕위에 오르면 외할아버지인 홍봉환과 그의 동생 홍인환이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뻔한 사실로 홍봉환 형제까지도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정비 혜경궁 홍씨는 세자였던 남편까지 잃은 마당에 자신의 아들인 세손 만큼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이렇게 되자 홍봉환은 딸인 혜경궁 홍씨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게되었다. 그래서 결국 홍씨네 가문을 분열로 치닫게 되는데, 홍봉환은 표면상 침묵했으나 홍인환은 세손 즉위에 계속 적극 반대한다. 영조는 당시 나이 82세 고령으로 조선왕으로서는 최고 장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생각으로 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세손의 대리청정 중 만일 영조가 급서하면 조선국법에 따라 노론으로써는 세손 즉위를 막을 수 없었다. 만일 대리청정 상황이 아니라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하교로 세손을 폐위시키고 은전군을 즉위 시킬수 있는 상황이였다.
여기서 정순왕후를 살펴보면 노론 김한구의 딸로 당시 15세 나이로 66세의 영조와 혼인하여 명색이 중전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세손의 즉위에 반대했다. 그래서 홍인환이 ‘세손은 세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 즉 ‘세손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하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공사도 알 필요가 없다’ 고 영조에 알현한다. 한마디로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 때 세손 나이 24세 청년 이였다. 그러니까 홍인환은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노골적인 표현 이였다. 세손은 현명하였다. 결코 영조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았고 영조는 이런 세손에게 안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넘기로 결심하고 홍인환등 노론에게 절충안을 제시한다 즉 ‘급하지 않는 공사는 세손에게 들여보내고, 상소에 대한 비답이나 시급한 공사는 내가 세손과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앞으로 세손의 일처리가 익숙해지면 마땅히 추가 하교가 있을 것이다‘라고 명한다. 대리청정에 ‘추가하교’는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홍인환으로는 그냥 묵과 할 수 없는 일이였다. 홍인환은 승지를 가로막고 영조의 하교를 적지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대전에서 세손은 홍인환에게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달라는 타협책을 제시 한다. 그러나 홍인환은 세손의 말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 때 영조는 세손에게 힘을 실어주는 조치를 취했다. 세손에게 순감군(巡監軍)을 갖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손에게 세손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를 갖도록 인정해 주는 것이다. 노론 대신들의 반대 속에서도 강력히 밀어 붙였다. 세손은 이제 독자적으로 민정을 살피고 노론 대신들의 부정비리를 캘 수도 있다. 어차피 세손은 노론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었다.
세손에게는 홍국영, 정민시 등 젊은 인재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이 때 강직한 인물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편들고 나섬으로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27세 젊은 행 부사직 서명선이라는 인물이다. 상소 내용은 ‘세손에게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매우 무엄하고 방자하다는 것이다. ‘신이 듣건대 누구는 무슨 당이고 어떤 사람은 무슨 관직에 맞는가를 마땅히 세손에 알려 조정의 일에 익숙히 알게 하야 한다‘고 임금이 하교하는데 홍인환이라는 신하는 ’이런 일들을 세손에게 알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했는데 이는 어찌 신하가 임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되겠습니까 ’ 하자 영조가 ‘맞다. 내가 들을 때도 의아했다’ 고 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영조가 분노하게 되었고 홍인환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지우도록 명하였다. 이런 조치가 내린지 3개월만인 재위52년만에 영조는 세상을 떴는데 나이 83세였다.
정조가 그토록 죽음의 모함 속에서 살아남아 나이 25세로 조선 22대 왕에 오른다. 그가 바로 조선 후기 마지막 개혁 군주 정조대왕 이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첫 일성은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얼마나 원한이 맺힌 말이겠는가. 재임 첫 번째 하는 일이 영조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정조가 즉위 당일 그 사실을 부인하고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 또 곧 바로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호를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으로 높이는 숭모사업을 단행한다. 이어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있는 인물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개시하게 된다. 먼저 홍인환과 결탁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양보내고, 화완옹주 역시
서녀로 강등시킨다. 홍인환 역시 여산으로 귀양보낸다. 홍봉환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단식까지 하면서 반대하여 처벌을 면하게 된다. 정조보다 7세위인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법적으로는 명색이 할머니였으니 별 조치를 강구 할 수가 없었고 김씨의 오라버니 인 김귀주는 흑산도로 유배시켜 죽음을 맞도록 한다.
정조가 즉위 후에도 암살시도 사건은 계속된다.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의 한 명인 홍계희가 영조 때 죽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손자인 홍상범 이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 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개국 이래 국왕 살해 시도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이다. 홍상범은 천민출신인 장사 전홍문을 돈과 여자로 유혹하여 행동 책으로 삼고 호위군관을 매수 20명을 동업자를 동원하여
정조 즉위 원년에 칼과 철판을 들고 대궐 담을 넘어 정조가 머무는 경회궁 존현각 지붕까지 올라가 정조의 목슴을 노렸으나 한 호위무사에게 발각되 거사가 실패되나 죄인들의 조사 중에도 홍계희의 조카 홍술해가 이번에는 정조와 홍국영을 살해하려는 2차 사건이 일어난다.
세 번째 사건은 정조를 쫒아내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을 왕에 추대하려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홍계희의 8촌 홍계능과 홍상범의 4촌 홍상길이 주도하고 혜경궁 홍씨 오빠인 홍낙임도 참여했으나 사전 발견되 실패로 끝난다. 정조는 외가댁 홍씨 집안으로부터 살해위협을 많이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즉위 초반의 위험을 넘기고 나서 정권의 안정을 찾게 되자 이제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정조는 노론의 구세대를 제거하고 새로운 세력을 육성해 이들을 대체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 일환으로 정조 원년 9월에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한다. 설립당시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당론에 물들지 않은 문신들을 양성해 개혁정치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목적 이였다. 규장각에 등용한 인재는 100명에 달했고 왕실의 도서관 기능과 각종 서적의 수집 편찬 등을 기본 업무로 하고 그 외에도 관료들의 재교육과 원자의 강학도 담당케 했다.
재위 9년에는 장용영(일종의 왕의 호위군대)을 만들어 국왕을 호위케 했는데 정조 22년에는 2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재위 13년에는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현륭원(현 융건릉)이라 불렀다. 정조는 재임기간 중 현륭현을 12차례나 찾았는데 능행은 단순히 참배에만 그치지 않고 왕권의 권위를 극대화 시키는 행사이자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로 삼았다. 정조의 능행에는 6000여 명이 넘었고 동원된 말만 1400필에 달했으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감히 짐작할 만하다.
정조는 노론도 등용시키는 탕평책을 썼으나 노론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남인을 많이 등용하게 되는데 조선후기에
차별을 받았던 영남지역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순조이후에는 안동 김씨가 권세를 부리는 터전을 마련해 준 셈이기도 한다.
정조 12년에는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게 되는데 80년 만에 남인이 정승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정조 16년에는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실시하는 이례적인 조치도 취한다. 정조는 남인의 후예들의 인재양성에 노력한다. 재상후보로 이가환, 정약용 등을 점지해 두고 있었으나 그 후 얼마 안되
정조가 급서하게 되 남인의 꿈도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정조가 죽은 후 순조 원년에 ‘신유사옥(기독교박해사건)’으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되 온갖 고초를
이겨내며 그 유명한 ‘목민심서’를 집필케 된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홍국영이라는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세손에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위험을 제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홍국영은 정조가 왕이 된 뒤에는 승지까지 벼슬에 올라 정조와 많은 개혁정치에 동참한다. 더욱이 그의 누이동생을 훗날 정조의 후궁에 오르게 하는 등 정조의 신임을 많이 받다 보니 권력의 맛을 보게 되고 결국 지나친 권력남용으로 개혁정치도 제대로 못하고 노론의 모함에 걸려 사사되고 만다. 오늘날 정치인들에게도 많은 교훈이 되는 부문이다.
이렇게 정조가 개혁정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뜻하지 않는 복병이 찾아왔다. 갑자기 몸에 종기가 생기고 신열이 생겨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노련 벽파 이식수가 경옥고를 권유하였는데 경옥고를 든 후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계속 되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날까지도 정조는 계속 정신상태가 혼미하자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의관을 불러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대로 고치는 의원이 없느냐, 빨리 불러드려라’하며 좌부승지 김조순 등을 접견하였으나 이미 정조는 위독한 상태였다.
정조의 병세 진행상황으로 볼 때 독살설과 관련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론 강경파 이시수 가 여러차례 권한 경옥고와 정순왕후 김씨다. 사도세자죽음에 가담했고 세손 때 정조를 제거하기 위해 많은 음모를 꾸몄던 대비 정순왕후가 정조의 곁을 마지막까지도
지키는 인물이 되었으니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도 아니러니칼하게도 죽음에 관한 한 연관되어 지는 부분이다. 결국 정조는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한다.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였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김씨는 정조의 병세가 심각하다 해서 목 놓아 통곡할 인물도 아니였다.
이리하여 정조는 재임 24년 향년 49세 젊은 나이로 개혁정치를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정조는 정비 효의왕후와 사이에는 자식이 없고 후궁인 의빈 성씨(‘이산’드라에서 여주인공 성송연)사이에서 아들을 얻었으나 일찍 죽고, 두 번째 후궁 박씨 사이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이 순조가 된다.
정조가 죽자 세자 나이 11세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순조이며 왕실의 최고 어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된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다시 노론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고 정조 때 귀양가 죽은 김귀주는 이조판서로 추증된다. 정순왕후는 노론 강경파와 합세 순조 원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킨다. 명목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금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남인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안동 김씨 일당전제를 여는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역사에서 보듯이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수구 훈구파에의해 오히려 퇴보되고 오히려 그들의 권력이 강력해지는 덜미가 되고 만다 왕이 되는 것도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양위자리를 놓고 세력 간 다툼이 그것이다. 또 왕이 된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다 항상 다른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다지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해야 한다. 역사를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역사 당시 상황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함수로 얼켜져 있는 것인지를 감히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요즈음 세상 정치 돌아가는 것을 보면 옛날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역사공부가 중요하다. 좀 더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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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공부 많이 했습니다. 내용중 현륭원은 현 융릉이며 건릉은 정조의 능으로 두 능간의 직선 거리가 1 [kM]이내로 "융,건릉"이라 부름. 나의 모교 화산초등학교가 융,건릉 근처여서 매년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하던 장소임.
좋은곳에서 살며 소풍도 좋은곳으로만 다녔군...난 장항 백사장으로 봄,가을 소풍때 다녔는데...
허구헌날 백사장으로 소풍을?...그래서 까매졌나보구나..ㅋㅋㅋ
까메진건 아니고 익어서 빨개진거여...
우리역사의 지식에 시야가 넓어진것 같네요 고가나 현재나 권력의 암투는 치열한것 같군요 ,~~~ 한줌의 재밖에 남지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