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여태천(시인)
여기 초록색 연필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당신은 어떤 색깔의 연필을 상상하는가.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
사실 그것이 연필이기만 하다면 색깔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지금 연필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연필을 깎을 것인가.
조심스럽게 칼을 움직이기만 한다면 연필을 깎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처음 연필을 깎는다면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갈 수 있다.
오른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은 당신의 마음과는 따로 놀 때가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연필을 깎을 때는 오른손이건 왼손이건 적당히 힘을 분배할 줄 알아야 한다.
먼저 왼손으로 가볍게 연필을 그러쥐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을 것.
그다음 칼을 연필 위에 살짝 올려놓을 것.
마지막으로 왼손 엄지를 칼등에 대고 가볍게 밀면서 칼을 움직일 것.
칼날이 지나갈 때마다 동그랗게 제 몸을 말면서 꽃잎처럼 떨어지는 나무 조각을 당신은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당신의 마음이 아주 조금 설렐지도 모르겠다.
그 미세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신은 도무지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것 같은 아주 작은 소리를 듣게 된다.
사그락사그락.
귀를 조금 더 기울이고 들어보라.
그 소리는 마치 그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지 않으냐는 듯 은밀하게 당신을 유혹할 것이다.
조용하던 마음이 잠시 흔들릴 수도 있다.
이때 칼날이 너무 깊게 나무를 파고들게 해서는 안 된다.
칼날이 길을 잃고 헤매다 연필을 뭉툭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나무가 감싸고 있던 까만 연필심이 부러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얇게 나무를 깎다 보면 연필심만 길어져 보기 흉하니 조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눈앞에 있는 까만 연필심이다.
유혹의 소리 끝에서 까맣게 빛을 내고 있는, 뭔가를 찌를 것 같이 불안해 보이는, 날카롭기도 하고 뭉툭하기도 한 저 암흑의 세계가 문제다.
그것은 그저 흑연 가루와 점토를 섞은 물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연필심에 대해 다 말했다고 할 수 없다.
저 끝에는 당신이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저 흑심(黑心)의 끝을 본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그것은 사라지기 전까지 깜깜하게 빛난다.
뭔가를 써야 하는, 그래서 연필을 깎고 있는 이의 간절한 마음처럼 연필의 세계란 저렇게 깜깜한 것이다.
천근만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연필의 흑심.
연필을 깎는 일은 그 흑심을 아주 조금 알게 되는 과정이다.
연필을 오래 깎다 보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보인다.
운이 좋다면 당신은 어떤 예기치 않은 감(感)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연필을 깎고 있는 당신은 늘 그 어디쯤인가에서 방황할 것이다.
말쑥하고, 점잖고, 그러나 쓸쓸한 연필.
그 연필심에서부터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연필을 깎는 것은 아직 쓰이지 않은 깜깜한 흑심을 읽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여태천(시인·동덕여대 교수)
2013년 11월 26일. 겨울의 초입이었지만 다행히 날씨는 쌀쌀하지 않았다. 마지막 ‘작가와 함께 하는 장애인 독서 문학기행’에 초청 작가의 신분으로 참여하게 된 나는 아침 일찍 신경주행 KTX를 탔다. 실로 오랜만에 가게 되는 <동리목월문학관>이 그 장소라는 중요한 사실도 있었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번 문학기행은 내게 특별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2011년 국립중앙도서관 장애인도서관지원센터가 주관했던 ‘작가와 함께 하는 독서 문학기행’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참여했을 때, 경남지역 시각장애인연합회 회원들과 경남 하동의 <평사리문학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주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동리목월문학관>에 도착하자, 이미 참가자들은 김성춘 시인의 안내에 따라 문학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경남점자정보도서관 관계자 분들의 낯익은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님의 모습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안타까움이 없지 않았다. 그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생각과 그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나의 생각이 아마 이유였을 것이다. 장애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라고 말하곤 했지만, 다시 만나게 된 회원들의 상태가 조금 더 나아졌기를 바랐던 나의 모습은 그 마음먹기가 얼마나 힘겨운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의 삶이든 상처가 없을 수 없다. 특히 장애인들의 삶이라면 더 할 것이다. 참가자들에게 이 느낌을 어떻게든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강연의 내용을 그분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랑으로 정했다. 사랑은 사람이 지니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연애라는 사건이 되어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시인들이 사랑을 어떻게 시에서 그려내고 있는가를 몇 편의 시를 소개하면서 이야기했다. 사랑을 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를, 사랑이 처음 찾아왔을 때의 느낌과 떨림을, 사랑은 그 대상이 원하는 것을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사랑은 쉽게 번역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분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이야기했다. 내 진심이 얼마나 전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둘씩 내 말에 대꾸하듯 건네는 그분들의 말에서 나는 안도와 희망의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평탄하지 않은 길을 따라 석굴암을 올랐고, 불국사 여기저기를 함께 걸었다.
흔히 인생은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어떤 누구든 인생을 마음먹은 대로 살 수는 없다. 그것은 평범한 진리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이 순탄치 않아 늘 불평불만이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이라는 이 말은 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누군가는 평생 앞을 볼 수 없는 채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으로라도 최소한 부끄러워해야만 한다.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의 곤경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가 만든 비유라고 하더라도, 이 말에 담긴 차별적인 판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분들의 손끝이 눈동자처럼 빛나는 까닭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작은 깨달음에 속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깨달음이 작건 크건 매일 뭔가를 깨달으며 살아간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지식에 가깝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사람을 이해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와 지금의 처지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대가 장애인이라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기란 정말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과연 내가 장애인과 인간적인 만남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의 깨달음이, 가슴의 이해로, 다시 실천하는 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데 뷔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수 상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
2008년 김수영 문학상
작 품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 <스윙>, <국외자들>
비평서 <김수영의 시와 언어>
<미적 근대와 언어의 형식> 외 다수
경 력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여 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