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在位)한 왕(태조왕 94년)과 우보(右輔)
1. 태조왕(太祖王)과 차대왕(次大王)
가. 태조왕(太祖王, 47~165, 재위 53~146)
고구려의 제6대왕으로 기록상 94년간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태조왕은 국조왕(國朝王)·태조대왕(太祖大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 아버지는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이다. 53년 모본왕(慕本王)이 살해된 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55년 요서(遼西)에 10성(城)을 쌓아 후한(後漢)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듬해 동옥저를 정벌하여 동으로는 동해까지, 남으로는 살수(薩水, 淸川江)까지 국경을 확장했다. 72년 달고(達賈)를 파견하여 조나(藻那)를 정벌했으며 74년에는 설유(薛儒)로 하여금 주나(朱那)를 공격하게 하여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105년 후한의 요동(遼東) 6현(縣)을 공략했으나 요동태수 경기(耿夔)에게 패했다. 118년에는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玄菟)를 침입해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 121년 한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았으나 아우 수성(遂成:뒤의 차대왕)이 이를 잘 방어했으며, 4월에는 선비(鮮卑)와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해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했다.
146년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이 아우 수성을 제거할 것을 건의했으나, 12월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했다.
태조왕대의 영토확장 및 중앙 통제력 강화로 고구려 국가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이때부터 계루부에 의한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남조(南朝)의 송나라 범엽(范曄, 398~446)이 지은 후한서(後漢書)에는 121년에 죽어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고 1285년 충렬왕 때의 명승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태조왕과 차대왕 모두 신대왕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다.
나. 차대왕(次大王, 71~165, 재위 146~165) 고구려 제7대왕
고구려 6대왕 태조왕(太祖王)은 7세에 왕위에 올라 94년동안 다스렸다. 차대왕(次大王)은 태조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수성(遂成)이었다.
수성은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씩씩한 장수로서 위엄이 있었으나 성격은 인자하지 않고 잔인하다고 전해진다.
태조왕 69년 121년 후한(後漢)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이 침략해오자 이를 대파했고 이후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았다. 야심이 만만치 않아 태조왕에게 양위를 요구하자 나이가 100세인 태조왕은 우보 고복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왕이 선양하여 수성이 76세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다음해 왕 2년 147년 측근세력인 관나패자(貫那沛者) 미유(彌儒)와 환나우태(桓那于台) 어지류(菸支留)를 좌보(左輔)에, 비류나조의(沸流那皂衣) 양신(陽神)을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해 세력을 강화하고 왕위계승을 반대한 태조왕의 측근인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때려 죽이고 태조왕의 아들인 막근(莫勤)을 죽이자 막근의 아우 막덕(莫德)은 자살하였다.
왕 20년 165년 연나조의(椽那皂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되었다. 명림답부는 고구려 제9대왕 신대왕(新大王, 이름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 2년 고구려 최초 국상(國相)이 되었다.
삼국유사 왕력표(王歷表) 고구려 차대왕조에는 태조왕과 차대왕이 모두 신대왕(新大王)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다.
2. 우보(右輔)와 좌보(左輔)
가. 좌보(左輔)
고구려 초기의 최고 관직.
27년(대무신왕 10) 1월 우보 을두지(乙豆智)를 좌보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좌보가 우보보다 높은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우보는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고, 좌보는 군사를 제외한 나라의 일을 총괄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좌보와 우보 모두 최고의 관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 우보(右輔)
고구려시대의 관직.
우상(右相)이라고도 한다. 고려 17대 인종 23년 1145년 인종의 명으로 지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3대 대무신왕 8년 25년 을두지(乙豆智)를 우보로 삼아 군사에 관한 정사를 맡겼다는 기록과 27년 을두지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8대 신대왕 2년 166년 좌보와 우보를 합쳐 명림답부(明臨答夫 67~179)를 국상(國相)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나라의 군정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생각되며, 그전에 있던 대보(大輔)의 기능 중에서 군사적 기능만 따로 떼어내서 새로 우보직을 제정한 듯하다. 우보 다음에 좌보를 제수한 것으로 보아 우보가 좌보보다 서열상 낮은 관직인 것 같다. 중국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구려 고기(古記)의 기록을 인용해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