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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교회들
루터교와 개혁교회 전통들을 흔히 종교개혁 교회들이라 한다. 하나는 루터와 다른 하나는 츠빙글리와 칼빈 등의 주요한 대륙 개혁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생겨난 두 전통의 제도적 발전과 확장,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와 견해를 다룬다.
1.루터파의 발전
루터교의 운동은 초기부터 제국과 영주들과의 관계, 그리고 자체 내에 일어나는 종교적 긴급한 문제들로 루터교라는 ‘이단’을 해결할 여유가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인정받고 번성하게 되었다. 1524년 뉴렘베르크회의는 보름스 국회의 결정을 ‘가능한 한’ 실행하도록하는 완화는 루터교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표징 자체였으며 1529년 제1차 스파이에르 회의와 마지막 회의의 결정에 루터교도들은 반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공공연히 항거하며 증명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1530년 아우스부르크 회의와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를 거쳐 1555년 아우스부르크 평화 조약으로 루터교는 로마 카톨릭과 더불어 인정을 받으며 독일을 중심으로 북유럽과 미국으로 급속히 확장되어 갔다. 여기에 루터교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이 있다.
필립 멜랑히톤의 초기 편저 『신학 요론』은 믿음에 의한 의인화의 본질과 그 의미를 체계적으로 논의한 책이며, 아우그스부르크 고백문에서 믿음에 의한 의인은 긍정하고 화체설은 거부하였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에 관한 1)첫째 논쟁은 성찬물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성격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루터와 칼빈, 멜랑히톤은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재연시키는 하나의 기념이나 표징이라고 하는 츠빙글리의 개념을 거부하고, 성찬물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임재를 주장하였다. 2)둘째 논쟁은 인간 이해르 위해서 성령의 활동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의 신앙이 하나님에 의해 시작도고 유지된다는 의견의 일치이다. 여기서 인간은 성령이 자기를 붙잡고 인도할 때, 능동적인가 또는 수동적인가?라는 질문에, 첫째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의 대표자인 플라시우스는 진흙덩어리 개념을 사용하여 전적인 타락을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능력도 포함하여 인간을 참된 인격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전적인 타락에 대한 루터의 진술은 체험에서 나온 종교적 고백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무능력성,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까지도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을 강조하였다. 둘째로, 의지의 속박에 관한 루터의 주요점은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데, 멜랑히톤도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진술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주도적이며 지속적인 활동과 인간의 적극적인 활동을 강조하여 신학적으로 신인협력설(synergism)로 알려져 있다. 3)셋째 논쟁은 신앙과 관계해서 율법과 행위의 소재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의 믿음에 의한 의인이라는 근거 위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에 관하여 열정적으로 말하였다. 존 아그리콜라(J. Agricola)는 율법이나 계명의 요구를 일체 반대하며, 성령 안에서의 생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런 입장을 신앙지상주의(antinomian)이라 부른다. 이것을 반대한 메이저(G. Major)는 선행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논쟁의 중재인으로서 구원을 위하여 선행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가 없고, 다만 선행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암시한 멜랑히톤은 행위를 신앙과의 진정한 관계에서 분리시켜 생각함으로 루터의 의도를 왜곡시켰다. 4)넷째 논쟁은 그리스도인의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사도 바울과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오시안데르(A.Osiander)는 신앙 가운데서 사람은 참으로 의로워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견해는 믿는 사람도 아직도 의롭지 못하며, 하나님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전가되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것이다.
위의 문제들은 1577년 콘코드 신조(The Formula of Concord)에서 해결되었으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콘코드 신조, 그리고 루터의 교리문답서를 한데 모은 ‘콘코드 서집’(The Book of Concord)은 17,8세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진정한 교과서가 되었다. 이런 발전에서 성서를 존재케 하며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원동력으로서 성령을 강조하는루터의 주장은 주관적이라 생각되었다. 이런 종류의 신앙은 이후의 경건파 운동에 의하여 교회 내부에서 도전을 받았다.
2.개혁파의 전통
1)개혁파의 운동의 확장
츠빙글리가 지도자였던 초기 개혁파 그룹들은 취리히와 북부 스위스 지역에서 확고한 터전을 세워 놓는 지역주의(territorialism)의 원칙이 통용되는 형편에서 루터파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인의 생활 개념에 있어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며 발전하였다. 루터교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개인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으나 개혁파 교회에서는 공동체의 전체 생활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회로 재정리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껴 모든 공동체의 삶의 영역은 하나도 제외됨이 없이 하나님의 활동 영역이며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집단적 의무를 준행하기 위한 영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개신교사에 이 원칙을 전반적으로 통용시킨 가장 유명한 시도의 한 실례가 제네바 공동사회(1541년부터 1564까지 칼빈의 지도아래 있었음)이다. 그리스도교 사회로서 제네바는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에 의하여 통합되었다. 제네바는 계획과 의도에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민주적이었다. 이것은 국가가 교회를 지배할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칼빈의 사상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후대인들에게 제네바의 실험은 용이하게 평가되지 않은 예가 유명한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처형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봉헌될 도시를 꿈꾸는 제네바의 집산주의(collectivism)를 초래하였다. 제네바의 모형은 개혁파 전통이 일어나서 융성하던 타 지역에서는 당국의 반대로 적용될 수가 없었으며 개혁 운동 유형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개혁교회의 발전이 가장 어려운 곳은 프랑스였다. ‘한 나라에 한 임금, 하나의 신앙’(one faith, one king, one land)라는 원칙으로 위그노 공동체(Huguenot communities)가 성장해가면서 박해를 당하였으나 1562년 정월 칙령으로 제한적인 신교의 자유를 얻었으나 1572년 성 바돌로메(St. Bartholomew) 탄일 대학살로 만 명 이상이 희생되는 행동에 대한 반감의 결과로서 군주 교체로 말미암아, 1598년 ‘자유령’(The Edit of Toleration, 낭트칙령)으로 칼빈주의의 완전 자유를 허용하였다.
신성로마 제국에서의 개혁파 신앙의 전파는 루터교 단체들의 노력으로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마쟈르파 가운데서 생겨났으며, 라인강 계곡, 특히 파라틴 선제후령(The Palatinate)에서 일어났으며, 주의 성만찬에 관한 논쟁의 결과로 피터 우르시누스와 카스파 올레비아누스에 의하여 쓰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reg Catechism) 문서로 교육의 목적에 적합한 저술로 모든 개혁하에 의하여 인정받았다.
베네룩스 지역에서 개혁교회는 1560년까지 아무런 세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재세례파와 루터파 단체의 중심지였다.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가 국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제네바 다음으로 개혁 신앙의 특징이 결합되었다. 여기에는 존 녹스(John Knox)의 종교개혁으로 국민적 동정이 응집되어 카톨릭 여왕인 매리 스튜어트(Mary Stuart)에게 성공적인 도전을 감행하여 그 나라를 지배하는 하나의 종교적 사회를 이루었다.
2)정통 칼빈주의의 발전
전 스위스 지역에 영향을 끼친 교리 진술이었던 1566년 볼링거(Bullinger)가 작성한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스위스 신앙고백서), 예정에 대한 강한 고조를 반영한 프랑스의 갈리칸 신앙고백서(The Gallican Confession) 제네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가진 베네룩스 지역의 1561년 벨기에 신앙고백서, 스코틀랜드인들은 녹스가 쓴 1560년의 신앙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완성될 때까지 신앙의 표준으로 존속되었다. 이같은 신앙고백서는 모든 사상의 배후에 놓인 체험 대신에 표면적 사고로 대치시킨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의 시작이었다. 정통주의로의 발전은 보수주의적 집단이 언제나 승리가 되었던 신학적 논쟁을 통하여 추진되었다. 1600년 초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쿠른헤르트(Koornheert)라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 인간들을 영원부터 저주했다’는 말에 논박을 요청받은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전통적인 견해가 거부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아르미니안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논쟁에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은 아르미니우스의 한 제자였으며, 또 한 사람의 지지자는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가 있었다. 아르미니안파의 교의는 항의(Remonstrance)로 알려진 일종의 조문들 가운데 표현되었으며, 보수주의자인 고마르(Gomar)의 영향을 받은 『반항의 서』(Counter-Remonstrance)가 쓰였다. 이 논쟁은 1618년 네덜란드 도로트 종교회의에서 해결되었다지만, 그 논제들을 살펴보면, 당시의 신학적 사상의 면모를 보게 된다.
1)첫째 논제는 예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아르미니안파의 예정관은 하나님은 어느 사람은 구원받고 어느 사람은 멸망 받는 것으로 정한다는 견해를 부정하였으며, 고마르가 주장한 타락 이전 예정론자(supralapsarisn)와 타락 이후 예정론자(infralapsarian)의 예정관을 적용하였다. 타락이후의 예정론의 사상가들에 대하여 구별하면, ‘이중’(Double) 예정론자들은 택함을 받은 개개인들의 구원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멸망을 모두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뜻하셨다고 주장한다. ‘단일’(single) 예정사상은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은 결정하였으나, 그 예정에 속하지 않은 자들에 관해서는 결정을 하지않으셨다고 주장한다. 아르마니안파는 예정의 개념을 신앙과 체험에 고정시켰으나 신앙의 결단을 단순히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가능성으로 전락시켰다. 다른 타락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건과 발생사들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하나님의 역사의 우위성을 지키려 했다. 칼빈도 예정과 관계죈 하나님의 활동에 대하여 결정론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도르트 종교회의는 결정적으로 단일 예정론의 개념을 찬동하였으나, 타락이전과 타락이후 예정론도 아닌 견해를 채택하였다.
2)둘째 논제는 위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계된 것은 그리스도가 택함 받은 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는가, 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는가 하는 문제였다. 아르미니안파는 죄의 용서는 그르스도를 용납한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으며, 모든 사람을위하여 죽으셨고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주장하지만 정통파는 그리스도는 택함받는 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주장하였다. 도르트 종교회의는 정통파의 편을 들었다.
3)셋째 논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신앙의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신앙이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의모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아르마니안파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동의하는 것이라는 정통파 모두 신앙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데 일치하였고, 신앙을 하나의 결단으로서 정의하였다. 그러나 보수파는 하나님의 의지를 모든 것 위에 놓으려 하는데 있었다. 도르트 종교회의는 “신앙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은 믿음의 의지와 믿음의 행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같은 보수파의 편에 가담한 선언은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서 조종당하는 하나의 대상물로 만드는 것이다.
4)넷째 논제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과연 그 은총을 상실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르마니안파는 ‘긍정’의 대답을 하였고 보수파는 사람이 은총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도르트 종교회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뜻하신 바와 일어난 일들은 동일시된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정의하였다.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루터, 칼빈파는 원칙상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Bible)를 구별하였으며 정통파는 말씀과 성서(Scripture)를 무조건 동일시함으로써 성서는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포기하였다. 1566년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 “정전(正典)으로 인정된 성서는 하나님의 현실적인 참 말씀이다.”라는 명제가 선언 되었다. 이같은 성서 이해는 성서의 내용이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문자 그대로 용납한다는 것을 포함하였으며, 기적에 대한 이같은 견해는 19세기 초에 슐라이에르마허의 저작을 통해서 기적의 전체적인 개념이 개조되는 시대까지 보수적인 단체들 사이에 지배적인 견해가 되고 있었다.
3.정통파의 정신
‘정통’(orthodox)이라는 말은 ‘올바른 신앙’(correct belief)을 의미하며, 개개인이나 단체에 적용될 때에는 일반적으로 용인된 표준에 대한 준봉을 의미한다. 예정에 관한 이해의 발전에서 루터와 칼빈의 정신과는 엄청나게 다른 진술을 하게 하였다. 따라서 신학적인 공식 진술(formulations)은 성서를 통한 하나님 체험의 진술을 포함하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규범이 되었다. 정통주의신학이 성서 진리의 보관자가 되는 경향이 있게 되었고, 신학은 성서를 해석하는 열쇠보다 성서보다 앞서게 된다는 접근의 정신은 ‘개신교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ticism)라는 용어로 반영되었다. ‘스콜라적’이라는 용어는 중세 스콜라철학과 결정적인 유사 때문에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스콜라주의와 중세 스콜라주의 사이에는 전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조가 있다. 고전적인 중세기에는 하나님에 관한 합리적인 진술(이성)과 계시에 관한 합리적인 논의가 그 시대 견해의 분위기와 일치하고 있었다.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성서적인 구조와는 대조가 되는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의 형성과 배타적으로 합리주의적이었던 철학적 경향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합리주의의 정신 자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철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불만은 경건주의와 정통파에 대한 일종의 일반적인 반동에서 저절로 표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정통파에서 스스로 모든 점을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엄력한 훈련을 준비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침해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을 살려내는 과제는 적극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던 사고 유형은 신학적 과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정통 신학은 바로크 미술과 같이 인식된 진리에 대한 완전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바로크 신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견해들이 서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한 시대 안에서 정통신학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 경직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운동의 창조성은 화석화된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고, 이는 세계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지식들의 출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문제제기
1.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시대마다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적인 진리를 결정해왔다. 예를들어, 칼빈의 예정론을 반박하는 네덜란드의 쿠른헤르트에 대하여 논박을 요청받은 아르미니우스는 쿠른헤르트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후에 아르미니우스는 도르트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역사를 통해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차이에서 오는 신학 연구와 판단은 매우 중요하다 생각한다. 오늘날도 한국교회 안에 무수한 이단들로 인한 폐해와 신앙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 기장의 신학은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는가?
퓨리터니즘과 관련된 운동들
1.퓨리터니즘의 기본 입장
‘청교도’라는 용어는 16세기 말엽과 17세기 영국과 뉴일글랜드에서 나타난 독특한 개신교적 견해와 관련을 갖고 있다. 교파적으로는 장로교, 회중교, 침례교 단체들로 형성되었고, 종교적 관점에서는 칼빈주의 전통을 표현하며, 그들의 특징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체험이었으며, 오로지 성서에 의해서만 양육되어 사상과 행위에서 표현되는 것이었다.
1)성서적 근거
청교도들은 성서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오직 성서만을 신앙과 생활의 지침으로 받을 수 있었다. 성서의 권위는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인간이 그의 생활의 모든 상황에 하나님의 지식을 획득하며 체험하는 것은 오직 성서를 통하여서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이해성(indomprehensibility)이 불가지성(unknowability)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성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조직을 반영시키는 문서라는 것이다. 교회의 참된 질서가 성서적인 신앙공동체에서 주어졌다는 데 일치하였다. 교회질서가 신앙을 나타낸다고 보아 이성이나 전통과 같은 보충적인 표준들이 사용될 수 없었다.
2)예정과 신앙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질서있게 해주셨다고 믿는 철저한 예정론자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삶과 사회를 변화시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하는 능동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 역설적인 결합이 청교도적인 정신(ethos)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칼빈주의자들과 같이 청교도들은 자연과 역사, 세계와 인간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다. 예정에서 신앙으로라는 도식을 가졌던 정통 칼빈주의와는 달리 청교도들은 예정의 근거를 더욱 더 절대적으로 믿는 자의 체험에 두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만물의 통치자라고 하는 신관도 이들의 체험에 속한 것이고 성서 이해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정 개념이 근거하는 하나님의 활동은 신실한 신자들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운 할동이라는 차원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선택의 신비를 강조하였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을 선택하든 불공정은 없다고 말할 때 종종 하나님의 정의를 합리화시켰고 하나님이 모든 사건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하셨다는 것을 전 존재를 다하여 믿는 청교도들은 의인이란 성화,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삶이 뒤따르는 첫 단계일 뿐이라는 주장에서 알 듯, 신앙의 유효성과 확실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에 헌신하는 새로운 삶의 실천은 “그들의 열매로써 그들을 알리라.”는 그들이 적용한 금언에서도 나타난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특성과 신앙의 컨텍스트와와의 긴장에서 일어나는 실제 문제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신앙이 생겨나는 것이 하나니의 심판과 은총의 결과로 생긴 것으로 믿었던 반면, 다른 이들은 신앙이 어떤 과정의 결과로 생겨난다고 보았지만, 두 견해 모두 하나님의 사역이 신앙의 근원임을 믿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열망의 과정으로 설교와 명상, 내적인 성찰을 활용하여 검열하는 훈련은 신앙의 상황 이전과 그 상황 속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신학적 측면에서 청교도들에게 친숙한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의 주도와 인간의 의무 둘 다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삼고자 했다. 청교도의 언약 개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예정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특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개인들의 의지와 의무에 큰 강조점을 두면서도 그 개념은 양쪽의 관계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3)하나님 아래에 있는 만물의 질서
계약의 개념은 청교도의 관심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계약은 하나님 밑에 있는 공동체 안에서 살기로 계획한 백성을 포함하였다.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사회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배열되는 청교도들의 지배적인 관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엄격한 절제와 소박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며 세상 일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무관심’(sitting loose)하는 것이었다. 인간 실존 자체의 권리로 존재의 의미를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 아래에서 그 의미를 계속하여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고전적이고 세속적인 문학 작품도 읽고, 춤추는 일을 포함하여 즐거운 인간 공동생활은 그 자체를 이용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이 세상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안녕과 행복에 도움이 된다면 용납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청교도들의 경제생활은 극도의 검약과 근면의 생활이었으며, 이같은 노력과 검약을 통하여 자본주의는 발전되어 갔으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 모든 활동을 책임적으로 수행하려고 하는 강한 의식은 구현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제도의 가장 나쁜 페해를 저지하는 많은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 발전에서 훨씬 중요한 것은 청교도 신앙이 국가나 교회의 폭정과 권력 남용에 대하여 도전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대해서만 책임적이어야 한다는 이 의식을 가지고 청교도들은 민주적 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민주주의 제도는 청교도 전통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2. 주요 퓨리턴 집단들
청교도들은 교회 질서의 고유한 모형에 대해 의견의 일치가 안되는 차이는 성서의 모형을 엄격히 고수하는 것과 성서에 기초하면서도 성서와 병행하는 역사적 신학적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의 성육신의 진행적 성격의 일부로서 교회를 더 세련되고 주의 깊게 보는 교회관의 차이에 있었다. 청교도들은 교회 질서를 성서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공통 의지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의 발전은 다양하였다. 첫째로, 이해와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고 둘째로,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그 역사적 발전이 달랐으며, 그 상이한 역사적 발전이 실제적으로 각이한 모형을 결정지었다.
영국에선는 케이브리지 대학의 교수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가 주도한 장로제주의단체로 신약성서의 교회 개념을 나타낸다고 믿었으며, 영국국교회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로마교회의 부패를 정화하려는 것이었다. 장로교파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을 위해 엘리자베스 안정책을 변경하도록 의회에 요청하였으나 여왕은 종교 안정책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주장하여 장로제파들은 다른 방법을 택하였다. 신앙을 가진 교직자들이 감독의 자리에 임명하였으며, 스스로를 사제(priest)라고 하지보다는 목사(pastor)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설교와 교육과 성례전집례, 신자들을 훈계하고 바르게 인도할 정규적인 교직자를 강조하였다.
장로교파와 가장 가까운 단체는 회중교파였는데 이들은 정규적인 교직다들을 교회와는 분리됨이 없이 교회를 순화시키려 했다. 이들의 교회권은 장로제나 감독제도에 속하지 않는 신자들의 독립된 조직체 단체로 지역교회를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와 유사한 교회권을 가지면서도 영국교회 안에 머물러 있다하여 좋을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가진 분리파는 “지체없는 개혁에 속하여”라는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의 팸플릿에 표현되었다. 이들의 계획은 교회와 국가를 똑 같이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교회는 지방이나 국가의 것이 아니며, 교회는 참으로 신앙고백을 근거로 계약관계에 들어간 신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는 것이다. 회중교회파와 분리파는 교회 개혁을 내부로부터 시작해 갈 것이냐 또는 분리시킴으로써 할 것이냐 하는 개혁방식에는 달리하였으나 교회의 본질에 관해서는 일치하였다. 신앙공동체의 정해진 장소에서 효과를 나타내는 교회는 지역 교회(local church)이다. 여기서 ‘회중’교파라는 용어가 나온 것으로 교회는 지역적 기능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중교회는 정치(교회질서)는 모든 신도들이 평등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선출된 몇몇 사람들에게 특수한 책임을 부여하는 기구와 설립 기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회중교회 이외에 침레교회들도 분리파 전통에서 출현하였다. 최초의 침례교회는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추방된 존 스미스(John Smith)에 의해 조직되었을 것이며, 그의 추종자인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에 의해 영국으로 돌아와 침례파 운동은 영국 무대에서 분리파 전통을 받아 성장하였다. 침례파는 회중교파에 반하여 비 칼빈주의적 청교도들로 그들의 관심은 집합공동체로서의 교회와 믿는 자들의 선례의 자연적 결과, 그리고 교회와 국가와의 분리에 있었다. 회중교회와 같이 교회는 사람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서로 봉사하며, 각각 남의 짐을 져 주는 하나의 계약된 공동체라고 믿었다. 네덜란드의 재세례파와 같이 침례파는 믿는 자들의 세례가 본질적이라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은총의 성례전적인 수단이 아니라 거듭남을 상징하는 한 ‘의식’이었다. 침례파와 재세례파는 성공회와 장로제도파 다같이 국교가 반드시 있어야한다는 결정을 내린 데 대하여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나 침례에게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깊은 종교적 확신의 문제였다. 침례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개인적 결단의 원리는 인간 각자에게 주어지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개개인에게 기도는 한 사람의 신앙의 표현이며, 마땅히 즉흥적인 것이지만 개인들은 하나님과 그리고 상호 간에 서로 권면한다는 언약을 했기 때문에 기도를 함께 나누었다.
3. 17세기 영국에서의 발전
영국에서 장로교인들의 개혁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은 스코틀랜드의 메리영와이 처형됨과 동시에 제임스가 장로제도파의 본거지인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엘리자베스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에 고도에 달하였다. 왕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교회 갱신을 요청하면서 국가 교회를 해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였지만, 왕은 영국 국교(성공회)에 유리하도록 결정함으로 장로제도파의 꿈은 깨어졌고, 분리파의 한 단체는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미주로 건너가 필리머드 식민지(Plyniouth Colony)를 건설하였다. 찰스1세의 계승과 열렬한 영국 국교도의 한 사람이었던 윌리엄 로드(William Laud)은 영국 국교의 예배의식을 철저히 준봉하도록 강요하면서 국교반대에 대한 압박정책이 더해갔다. 이로 무수한 청교도 설교자들이 면직되고 고소당하여 회중교파의 성향인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메사추세츠 주의 살렘(Salem)에 청교도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1629년 ‘장기 국회’가 열릴 때 장로제도파가 대다수로 로드는 투옥되었고 감독제독 폐지되었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eayer)가 금지되었으며 의회는 새롭고 적절한 교회 질서를 목적으로 장로파 신학자들 주도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소집되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존밀턴(John Milton)은 “새로운 장로는 더 심한 옛 사제”이며 웨스트민스터로부터의 관용을 기대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ll)의 섭정하에서 장로제도파는 기대한 만큼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없었고, 크롬웰은 분리의 원칙을 완전히 용납하지않았으며, 장로제도파와 영국 국교의 지배를 모두 배척하고 교회질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와 국가에 의한 교직자 보수 급여를 주장하였다. 크롬웰 이후 1660년과 1688년에 국왕의 소집없이 모인 장기 국회에서 장로제도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여 장로제도차와 영국 국교파를 포함한 제도를 형성하고 하였으나 정치적 안정은 영국 국교의 지지를 받아 왕당파와 영국 국교파로 구성된 새로운 기사 의회(Cavalier Parliamaent)가 영국 국교를 더 안전하게 재확립하였다. 이때부터 장로제도파를 영국 국립교회에 종속시키려한 희망은 완전히 무너져 청교도들은 결정적으로 영국 구교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 되어 ‘반항적인’ 국교 반대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1689년 종교 자유령(The Act of Toleration)은 “영국 국교를 반대하는 개신교 국민들에게 어떤 법적인 형벌을 면제시키는 법령”이었으나 개신교도들은 삼위일체설을 신봉하는 자가 되어야 했으며 1779년까지는 39개 신조가 성서의 권위를 대신하지 않았으며 비삼위일체 신자들은 1813년까지 신교의 자류를 얻지 못하였다.
4.뉴일글랜드에서의 퓨리터니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가 형성된 것은 하나님의 지배 밑에서 모든 것을 질서있게 하려는 청교도의 이상이 회중교파의 교회관과 결합된 살렘에 의한 것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의 역사 전개 과정은 다양성과 동시에 여러 문제들을 드러냈다. 첫 번째 세대는 영국에서의 사건들로 인해 뉴잉글랜드에 정착하여 철저한 경건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참된 교회를 세웠으나 두 번째 세대에서는 종교적 차원들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세대가 실험으로 여겼던 임시적인 사회구조와 더 영속적으로 미래를 맞이해야만 하는 세대들이 준비하는 사회구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두 번째 이후의 세대들은 정교 일치적인 사회라는 콘텍스트에서 뉴잉글랜드를 이스라엘이라는 사회 모델로 구약의 종교를 보강하는 하나님이 마지막 때를 위해 남겨 놓은 장소로 생각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세대의 후손들중 어떤 이들은 선조들이 갖고 있었던 역동적인 신앙이 결여된 이러한 변화는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기독교적인 사회는 투표와 정치적 권리들이 정결한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되었을 경우에만 오직 안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정결한 그리스도인이란 신앙이 검증되고 올바른 것으로 판명된 사람들로 성례전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정결한 자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례전들이 언약의 증표로 혹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표현한대로 은총에 대한 언약의 거룩한 표지와 증표들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타협한 언약(the Halfway Covenant)의 조항에 따르면 완전한 구성원이 되지 않았음에도 신자들의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고자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교회생활에 대한 결정적 타격은 성례전 자체를 회심의 도구들로 보았던 노스햄턴의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의 활동을 통해 시도되었고 그의 손자인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를 비롯하여 많은 저항을 겪어야했지만 교회 회원제의 엄격함과 더불어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지방 단체가 유일한 참 ‘교회’로 존속하고 있었으나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의 분리파 견해나 안나 허친슨(Anne Hutdhinson)의 의견, 그리고 후기 퀘이커의 출현은 교회 문제를 지방적 차원에서 취급할 수 없게 되었고, 성직자 연합회들이 생겨나서 교육과 교 회 내부 분열의 논전과 같은 모든 교회생활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을 취급하였다. 1648년 케임부리지 강령은 회중교파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한편 부분적으로는 그 원칙을 어기는 교회 세력의 산물이 되었다.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는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역교회만이 교회라고 하는 개념을 버리지않았지만 훨씬 더 포괄적인 단체들에 의해 이루진다는 장로파의 교회 질서 개념에 행정상으로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한 강조는 그리스도의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hrist)에서 오늘날까지 이러지고 있다.
5. 퀘이커 교도
퀘어커 교도는 청교도와 관계된 운동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집단으로 크롬웰(Oliver Cromwell) 통치 기간에 종교적으로 불안할 때 발생하여 개신교와 영국 국교 그리고 로마 교회의 모형과 매우 대조가 되는 그리스도교계 안에서의 근본적인 개혁을 대표하였다. 그들 스스로도 그리스도교계의 제3 노선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친구들’이라는 적은 무리들이 영국 호수 지방에서 조지 폭스(George Fox)를 중심으로 모여 도처에 퍼졌다. 그는 영국 전역을 왕래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개론하고, 설교를 공격하고, 뾰족한 건물이라고 하는 교회로부터 사람들을 진리에로 모아들이기 위하여 자기가 하나님에게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로 인하여 박해를 받음에도 그 운동은 확산되어 퀘이커파의 본질적인 내용과 관심은 많은 사람들이 존중하였고 크롬웰 치하에서는 자유를 얻기까지 했다. 미주에서는 청교도의 손에 수난을 당하였으나 펜실베니아는 퀘이커 교도인 윌리엄 펜(Williaw Penn)이 관용의 원칙을 머릿돌 중의 하나로 시작한 식민지였다.
퀘이커 교도의 근본적인 교리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자기 안에서 체험할 수 있으며, 내적 인 빛 또는 그리스도, 심지어는 내적인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진심으로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즉시 임재하시며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길은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교도는 인간 안에서 내적인 하나님보다 죄를 발견하지만 퀘이커 교도는 인간의 본질적 선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신비주의 전통을 따르며, 타당한 진리의 표준을 갖지 않았다고 의심하였다. 바클레이(Barclay)는 그의 『변증론』에서 “교황주의자, 개신교도, 그리고 소시니인파(Socinians)가 각각 그들의 신앙의 규범으로 삼았던 전통도, 성서도, 이성도 결코 더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는 그들이 추구해서 찾아진 결정적이며 일관된 것이라 생각하였다.
퀘이커 교도들은 성서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적 현시에 속한 진술이며 인간에게 귀중한 진리를 많이 내포하고 있으나,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도 진리도 결코 아니며, 인간 안에서 식별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고 또 재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 밖의 어떤 진리에도 미혹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퀘이커 교도들은 내적 진리에 대한 엄격한 강조로 삶을 훈련하고 질서 세워 자기가 체득한 진리에 따라서 철저히 살아야한다는 청교도적인 기품이 있었다. 내적으로 직접 발견하기 때문에, 진리를 발견하고 고백하는 것은 각자의 의무가 된다는 점에서 퀘이커 교도들의 모임은 특별한 교회 건물이나 예배 의식뿐만 아니라, 조직화된 교직을 배제하지만 모임과 기록의 보관, 공동적인 활동을 처리하기 위해서 조직하였다. 모든 결정은 서기 모임에서 완전한 합의가 확인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세계에서 퀘이커 교도의 관심은 수난의 완화와 박애 사업으로 나타났고 무저항을신봉하였고, 각 국가 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공평한 위치를 취하였으며 세상의 안정을 파괴한 갈라진 틈을 넘어선 구제와 화해의 사도가 되게 하였다.
문제제기
청교도의 운동은 개혁주의의 운동이다. 사제복을 거부한 청교도는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랐다는 점에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가야 할 한국교회가 강단을 성역화하고 목사와 장로의 장립 때 가운을 입혀주는 모습은 카톨릭적이거나 구약의 제사장제도를 재현하는 교권주의는 아닌가 생각한다. 청교도의 경건한 생활의 신앙적 자세와 함께 사회적으로 압제하는 세력에 대한 능동적인 실천 강령은 우리 기장이 전자보다는 후자에 힘을 싣고 있지만 전자의 경건한 신앙의 전통은 본받아야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