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화제] 한국 최대 수련門派 고수들의 난상토론
100만 수련자, 氣상업주의와 맹목적 과신에서 벗어나라 이 글은 국내 최초로 창간되는 뉴에이지(New Age) 전문잡지 ‘월간 정신세계’가 창간준비 기념으로 마련한 ‘한국 수련문화의 현실과 전망’이란 토론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이 토론회에는 국내 최초로 국선도·연정원·단학선원등 한국 최대 기(氣) 수련 문파가 모두 참여했으며, 이들은 기수련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임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신동아’는 한국 수련문화의 허와 실을 진솔하게 토로하고 있는 이 토론 내용이 기공 수련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월간 정신세계’의 협조를 구해 소개한다.
‘월간 정신세계’는 지난 15년간 명상·수련 관련 책들을 전문으로 출판해온 정신세계사가 발행하는 잡지로 2000년 1월에 정식 창간되며, 올해 말까지는 3권의 특집호가 무크지 형태로 발간된다. 2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이 행사(전체 3부로 진행됨)의 전반적인 내용은 ‘월간 정신세계’ 창간준비 특집 1호인 ‘새 밀레니엄을 여는 수련문화’에 실릴 예정이다.<편집자>
● 토론자 박병운(한국정신과학연구소 소장·물리학 박사·연정원 수련) 안동준(경상대 국어교육과 교수·선무(禪武)와 도교 수련) 이규행(삼진선원 본원회 회장·현묘학회 회장·전 문화일보 회장) 임경택(목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국선도 수련) 장휘용(인하대 경영학부 교수·단학선원 수련) ● 사회자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한국도교문화학회 부회장) ● 토론 일시 1999년 9월 5일 ● 토론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 ● 정리 안영배(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정 재서 한국에서 기 수련 인구는 이미 100만명을 돌파했고, 이제 수련문화는 개인의 심신(心身) 수련 차원을 넘어 하나의 중요한 시민문화, 사회문화로 정착될 단계에 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다가오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는 환경, 생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수련은 개인과 자연, 개인과 우주와의 조화와 합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문화적 대안(代案)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그 어느때보다도 높습니다.
이렇게 수련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점에 한국 수련문화의 허실을 짚어보고, 현재의 수련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는 일은 건강한 수련문화 정립을 위해서 꼭 선행돼야 할 작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한국 수련문화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토론에 참가하신 분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수련 체험과 이론에 있어서 일가견을 이룬 분이며, 비교적 객관적인 견지에서 수련문화의 현실과 방향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주시리라 기대됩니다.
오랫동안 수련을 해오신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과거의 수련과 요즘의 수련 사이에는 격세지감 (隔世之感)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과거에는 수련이 드러내놓고 하기 어려운, 비과학적이고 이상한 취미 같은 것이 아닌가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수련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고 긍정적인 인식이 증대돼, 오히려 수련에 대한 과신(過信)에서 나오는 부작용을 걱정해야 할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해서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수련열기가 드높은지, 그리고 하나의 문화로까지 얘기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됐는지, 그 원인과 배경에 대해 먼저 토론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수련은 정신의 자유로움을 추구
안동준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수련문화가 붐을 이루는 최근의 현상은 실제적으로 많은 수련 법문(法門)이 공개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20년 전, 제가 수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만 해도 이 분야에 관한 책조차 찾기 힘들었어요. 지금은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될 정도로 수련 법문이 널리 공개돼 있습니다. 그것이 첫째 원인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둘째는 일반론적인 이야기인데요. 인류는 그동안 많은 사건과 사연을 겪어 오면서 21세기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만 하더라도 근 100년간 일본의 식민 치하, 6·25전쟁 등 고난을 겪으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였지요. 아마 인류역사 이래로 근 100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건을 체험하며 자란 세대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한 과정에 인간은 몸의 바깥세계(우주)로, 과학으로 관심을 집중시켜왔고 이제는 인간집단의 모순을 풀기 위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까지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숱하게 방황도 하고 모색도 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기존 가치관이 뚜렷한 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인간을 놓고, 인간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해보자는 뜻이 자연스럽게 모여서 오늘날의 수련문화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쩌면 수련문화는 인간에게 최후의, 궁극적인 관심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병운 수련문화의 급속한 성장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먼저 해외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인도, 중국, 러시아, 영국, 미국 같은 나라에서 20세기 중엽 이후에 정신적인 갈망이 크게 고조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뉴 에이지’ 혹은 ‘신시대 운동’으로 나타났는데, 신시대 정신은 한마디로 인간 정신의 자유를 부르짖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정신의 자유가 20세기 중엽에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현대 과학문명의 한계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해온 과학이 오히려 인간과 자연 본연의 모습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서구 지식인들이 관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에서 일탈한 과학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것이 바로 신과학운동인데, 70년대 들어 여러 과학자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면서 본격화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70년대 하면 현대 과학기술이 가장 정점에 오른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극점(極點)에서 과학기술이 인간 본성에 대해 구명해나가고, 정신 회복 차원에서 신시대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전세계적으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확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상당히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국내의 수련문화를 간단히 살펴보면 청산선생(일명 청산거사, 국선도 창시자)이 국선도를 최초로 만들었고, 1984년에 봉우 권태훈선생(연정원 창시자, 독립운동가)이 ‘단(丹)’이라는 책을 낸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민족정신이 일깨워지고, 전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국내 수련문화가 싹텄다는 것이지요. 이후로 전통 수련법들이 부활되고, 대중적인 수련법들이 개발되면서 수련문화가 확산됐지요.
한편 사회주의체제인 중국이 개방되면서 각종 기공법이 국내로 유입되고, 각종 수련 문파(門派)들이 부활되면서 동양권의 수련문화가 전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현상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일어나고 있는 것은 물질과학의 한계성을 극복해 인간 본연의 자세를 되찾자, 또는 정신의 자유로움을 높이자고 하는 인류 보편의 욕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재서 안교수와 박소장께서는 근원적인 인간본성의 차원에서 짚어주셨습니다. 저 역시 국내에서 수련문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은, 우선 생각나는 것으로 ‘단’(정신세계사 간행)이라는 소설 때문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러한 극적인 사건이나 계기를 통해서 수련문화가 크게 일어났다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요.
그 배경에는 사회·문화적 원인과 함께, 어쩌면 개개인의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서 수련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건강문제가 수련에 대한 관심 일으켜
장휘용 수련문화가 이렇게 융성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가 이 자리에 나와 토론까지 하게 되었느냐 하는 점을 살펴보면 우리 수련문화 형성의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 2년째 단학선원에서 단학(丹學)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단학 수련을 하게 된 것은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단학 수련을 하기 전에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건강 상태가 거의 바닥에 다다랐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상당히 오랜 기간 해외에 있었고 회사일 등 다양한 경험을 하는 과정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쌓였습니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심인성 질병들도 겹쳐서 생겼습니다. 제가 수련을 시작하기 1년 전쯤에는 협심증까지 와 혈압약을 매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학 수련을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수련한 지 6개월이 지나자 혈압 약을 안 먹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협심증도 치유됐고요. 지금은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수련을 접하는 가장 큰 이유가 신체적인 건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단지 신체적인 건강만 회복했다면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겁니다. 신체적인 건강에서 정신적인 건강, 정신세계까지 추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한 과정에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눈에 보이는 3차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고, 더불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상적이고 조화로운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제 자신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덧붙여 말한다면 동양적인 것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는 상황도 수련문화를 활성화하는데 한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정재서 저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일반 문화론적인 견지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박병운소장도 말씀하셨다시피 70∼80년대에 이미 서구에서는 자신들의 철학, 즉 우주와 세계를 보는 견해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서구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합리주의라든가 이성중심 사고들의 절대성이 해체되고, 우리나라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었습니다. 서구인들 스스로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이성주의·합리주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생기면서 반사적으로, 어떻게 보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작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수련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요.
또 하나 이성주의에서 중시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고, 신체성 같은 것은 하위적인 개념으로 깔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면서 신체성에 대해서도 상당히 중시하게 되는 문화적인 변화가 일어나지요. 이것이 수련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수련하면 몸이 변해
지금까지 여러 선생님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또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측면에서 수련문화가 흥기하게 된 배경을 짚어주셨습니다. 다음으로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수련문화의 긍정적인 의의를 진솔하고 자유롭게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임경택교수께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임교수는 지난 삼풍백화점 대재난 때 매몰자 위치를 기 흐름으로 파악해서, 정말 수련의 높은 계제(階梯)를 보여주셨습니다. 수련이란 오늘의 시대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임경택 일반인들은 기나 호흡법에 관해서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가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아하다는 생각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얘기하듯이, 사회 구조가 앞으로 수련문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일단 사람의 원초적인 욕구는 먹는 것입니다. 배가 불러야 색욕(色慾)도 생기고 명예욕도 생깁니다. 하지만 그것이 충족되고 나면 사람은 좀 허무해집니다. 성취감은 있는데, 행복감과 만족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인간은 예술이나 종교로 갑니다. 즉 수양적인 차원, 정신적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를 밟는 것은 서양이 우리보다 빨랐습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는 것, 그 다음에 고급스럽게 먹는 것, 그 다음에는 레저로 들어갔는데 그것을 즐겨도 한계가 있거든요. 그래서 수련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지금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중상류층은 주말이면 동호인끼리 모여서 명상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이제 한창 레저 붐이 이는 단계지요. 이게 더 진행되면 곧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수련문화로 이어질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시대적 상황이나 자연환경이 건강의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우리 시대는 갈수록 가치관이 깨지고, 질서가 없어지고, 종교도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무질서와 무가치에서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갈등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되면 심인성 스트레스가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도 많이 하지요.
이걸 해결하는 방법이 뭐냐,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은 그때 잠시 효과가 있을 뿐 다시 재발해요. 그래서 지금 미국 하버드대에서도 혈압이나 심근경색 증세를 약이 아닌 명상과 호흡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 개발하고 있는 것이죠.
또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서 인간의 체질이 극도로 나빠지고 있습니다.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엘니뇨와 라니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기온의 급변으로 인해 체질이 약해지고들 있어요. 단적인 예로 요즘은 감기에 걸리면 보통 한 두달 고생합니다. 물론 여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연의 영향이에요.
그래서 이런 허약한 체질을 강화시키는 여러 방법 중에서 수련과 호흡이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말이죠. 갈수록 사람들은 자연적인, 현실적인, 사회적인 이유로 수련을 찾게 되고, 한국최초로 이런 토론의 장까지도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까?
다음으로는 개인적인 체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수련을 시작한 것이 73년부터인데요. 그때는 이렇게 수련을 얘기하면, 살짝 맛이 간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제가 수련하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한 두달 안에 방귀가 그렇게 많이 나왔어요. 사실 몸 약한 사람들은 방귀도 잘 못 뀌어요. 뱃심이 있어야 소리도 요란하지요. 사람은 방귀를 잘 뀌어야 뱃속에서 가스가 빠져나가고 혈색이 누렇게 뜨는 일이 없어지지요.
그리고 등산이나 운동을 하고 나면 보통 근육이 경직되는데, 수련하고 나면 기혈(氣血)이 유통되면서 근육이 툭툭 튀는 게 보여요. 그러면 그 자리에서 바로 풀려버려요. 그 다음에 시간이 좀더 지나니까 기운을 모을 수 있게 되고, 기운을 유통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행공법(行功法)들과 기운, 마음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들을 생각하게 됐고 동양사상의 핵심인 천지인(天地人)을 이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원리까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 아닌 ‘저 세계’의 존재
정재서 이규행선생은 어떠십니까? 여기서 가장 연장이십니다만, 수련 체험을 통해 느끼신 점을 말씀해 주시지요.
이규행 사실 저는 혼자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국선도라든가 단학선원이라든가 연정원이라든가 하는 어느 특정 단체에 가서 수련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저를 부른 것은 언론계에 있고 나이도 있고 해서 부른 것 같습니다.
지금 3개 단체에 관계가 있으신 분들이 나오셔서 수련문화에 대한 말씀을 나누시고 있는데, 저도 같이 공부하는 입장에서 거들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수련을 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좀 특이합니다. 몸이 아파서 한 것도 아니고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가 시작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는 동안에 죽 맡았던 분야는 정치, 경제였습니다만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우리 정신이 무엇이냐를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고사(上古史)에 이르렀고, 우리 뿌리가 어디냐, 그분들은 어떻게 살았느냐, 그분들의 정신 세계는 어땠는가, 또 그분들은 어떤 수련을 했느냐 하는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직접 수련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수련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 붐, 수련 붐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 몇 분이 말씀하셨는데, 저도 한마디 보충한다면 첫째 물질적인 풍요에 의해 상대적으로 야기되는 정신적인 공허감을 메우기 위한 것, 둘째 중국의 개방 이후 기공법이 우리나라에 대거 보급된 점, 셋째 민족 주체성의 자각이 그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셋째인 민족주체성의 경우 우리가 뭐냐, 우리 역사가 뭐냐, 우리 민족이 뭐냐, 우리 전통이 뭐냐 하는 것을 찾기 위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남북한 통일문제와도 관련이 있으며, 수련문화와도 연관이 깊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안동준 저의 경우는 고명한 선생님을 모시고 수련을 잘 따라서 했다면 수련 체험에 대해 자신있게 말씀 을 드릴 수 있겠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산발적인 이야기밖에는 안 될 것 같습니다만 나름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저 역시 몸이 허약해서 수련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실 세계와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어나 저 나름대로 수련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사실 수련은 남자와 여자, 나이든 사람과 어린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제가 소년 시절이었는데, 어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험과 현상은 기존 수련법 책에 전혀 언급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레서 너무 불안했습니다. 처음으로 찾아오는 현상은 양물(陽物)이 축소되는 것을 느꼈고, 어린 마음이 상당한 공포감에 떨었습니다. 이러다가 장가 한번 못가보고 딴 세계로 넘어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런 현상들을 종합해보면 어떤 ‘다른 세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인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전의 이야기나 성인들이 남기신 말씀은 철학적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그분들이 체험한 경험 세계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는 그런 수련 체험을 적절히 이끌어줄 분이 계시지 않았고, 저 역시 깊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만난 스승들도 그 문제는 잠깐 유보하는 선에서 그만두자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우리 주변에는 아직 저 세계로 넘어갔다가 다시 나타난 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디다. 저 세상에 완전히 넘어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이야기는 현재까지는 아무도 답변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성인의 말씀은 이렇다 하고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해줄 뿐이지, 직접적으로 내가 그렇게 보고 왔다 하고 책임있게 얘기해주지 못합니다.
수련은 신과의 직거래 행위
그런데 저에게 이런 세계는 일종의 화두(話頭)처럼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종교의 역사에서 보면 인간과 신(저쪽 세계)의 직거래는 종교라는 조직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간접적인 거래로 바뀌게 됩니다. 성직자가 중간층에 있음으로 해서 일반 신도와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직접적인 만남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것을 이른바 ‘수련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은 큰 화두이자 과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수련을 하다보면 실제로 저쪽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다른 데서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그것을 믿느냐, 혹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봐야겠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습니다만- 그것은 이성이 명징(明澄)한, 아주 깨끗한 상태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병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저쪽 너머 세계로 가버리는 하나의 단계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대한 또다른 해석으로 보느냐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거쳐야 하는 것이겠지요.
한편으로 수련문화는 기존 종교문화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존 종교에 안주하면 그만이지,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수련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수련은 신과 인간의 직거래 현장을 스스로 갖추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과 인간의 직거래 문제는 또다시 어떤 문제를 낳게 됩니다. 무언고 하니 저 세상과의 만남이 천지인(天地人)할 때의 천신(天神)과의 만남을 도모하는 것인지, 혹은 우리가 미신으로 몰아붙이는 지신(地神)이나 잡신(雜神)과의 만남을 도모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 내면의 참된 자기와의 만남을 도모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수련의 의미가 정확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수련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동물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의 전환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둘다 인간중심주의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인간의 모습이 인간을 신으로부터 결별시키기 위해 근대 과학의 힘으로 나왔다고 한다면, 영적인 인간은 그 결별된 단계를 동물적 차원이 아닌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어떤 무한한 신비의 현장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를 하자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바로 고대나 중세의 천신, 이른바 인간 밖의 새로운 존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에 내재된 자기를 만나는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의 세계
장휘용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가장 합리적인 사고를 배우기 위해서 미국유학도 갔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련체험을 통해 미신이나 비과학적이라고 치부돼 온 것들의 상당수가 실제로 일리가 있고, 우주의 원리와 법에 관계가 있는 것들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기감(氣感, 기를 느끼는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오감(五感)의 세계에서 육감 (六感)의 세계로 넘어간 것이지요. 기감을 갖게 되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이며 우리가 지향할 바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사상 자체가 단지 머리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수련문화가 한국과 세계를 이끌 수 있는 문화의 본류로 자리잡으려면, 결국 기에 대한 감각을 깨우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병운 저는 수련에 있어서 아직 경험이 일천하지만 나름대로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70년대 말에 저는 봉우 선생을 처음 만나뵙고 그분의 가르침을 사사하면서 나름대로 수련을 했습니다. 사실 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수련문화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장(道場)이라고 해봐야 당시 국선도 수련도장밖에 없었고, 작은 도장들이 전국에 몇 개 정도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수련하면 불교의 참선을 먼저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선도(仙道) 수련’이라는 용어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쉽게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이야기하는데, 그때는 그런 문헌을 찾기조차 힘들었어요. 어쨌든 저는 그때 수련 방법을 추구하느라 방황을 많이 했었죠. 그러던 중에 79년에 서울대학교에 요가명상서클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최초의 수련 동아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가 달랐지만 인연이 닿아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때 서클 멤버들은 힘을 합쳐 다양한 수련문화를 찾았고, 실제 몸으로도 체험하면서 장단점들을 비교해보고, 세계 각국에 나와 있는 수련 문헌들을 번역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몸을 다쳐버렸어요. 수련으로 인해 다친 몸을 치유하는 과정에 봉우 선생을 만나게 됐고, 그분의 소위 ‘조식법(調息法)’이라는 호흡법을 배워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수련 경험을 통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수련은 육체적인 체험만을 바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효과가 있다, 어떤 느낌이 있다는 것에 빠져버릴 때 수련의 본질에서 멀어져버릴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 수련을 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설정해야 합니다. 확실한 건강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방향과 목표가 분명히 그쪽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고,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면 그 방향에 맞게끔 수련법을 선택하고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수련을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 세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고, 더 나아간다면 사회 일원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목표 설정도 같이 해나가면 좋겠지요.
정재서 수련 목적이 단순히 육체적인 단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사회적인 의미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것은 수련문화가 정치·사회·시민운동과도 연관될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과연 수련문화가 개인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면서 바람직하고 건강한 사회운동으로 정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은 앞으로 중요한 화두가 될 것입니다만, 이 논의는 잠시 후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여러 선생께서 수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와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련문화가 붐을 이루게 된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터놓고 얘기하지 않았던 부정적인 면, 수련으로 야기될 수 있는 폐해를 여기서 짚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고단자” 라는 사람은 경계해야
중국의 경우 수련이 국민운동으로 정착돼 있는 반면에 상당히 많은 부작용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부정적인 측면이 개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건강한 수련문화를 세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제 생각으로는 수련문화가 상업주의화하는 면도 있지 않나, 다시말해 본래의 의미를 떠나서 본질을 호도하는 경향도 다분히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당부 드리고 싶은 점은 앞서의 주제는 여러 선생님이 각기 속해 있는 문파와 관련지어서 자신의 수련 경험을 말씀해주셨는데, 앞으로의 주제는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견지에서 논의해주셨으면 합니다.
박병운 정교수께서 정곡을 찌르셨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가 자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어쨌든 조직이 갖춰지고 수련단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업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련하는 데 있어서 수련단체가 상업적인 목적을 띠느냐, 아니면 사회봉사단체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인간개혁운동이라 할까 인간복지운동 차원으로 자리잡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단체를 리드하는 사람과 보좌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만큼 수련단체의 리더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수련자들의 자기 과신(過信)이 하나의 병폐를 불러오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수련을 하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어떤 경험을 하면 수련이 끝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끝났다” “나는 고단자다” 하고 자기 과신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의 근본적인 목표 설정이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하게 합니다. 또 그 수련 단체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고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 공부는 평생을 해도 끝나지 않는 것이라는 자세를 갖고, 어떤 경험이나 체험 같은 것도 수련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라는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규행 저는 우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 부정적인 요소를 찾기 위해서 주요 수련단체들의 문패와 번지수가 무엇인가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문헌적으로 접근해봤습니다. 흔히 얘기하듯 도맥(道脈)이 어떻게 되는가, 즉 도맥이 제대로 된 곳이면 부작용이 없을 것이고 도맥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곳이라면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봤지요.
제가 1950년대 이후의 문헌을 뒤졌더니, 결국 큰 줄기로서 수련단체의 첫 출발점은 아마도 1967년도의 청산거사 하산(下山)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연정원 봉우 선생의 도맥은 본인 스스로의 말씀과 저서에도 있습니다만,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호흡수련을 배웠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문헌을 뒤지다보니까 1970년대에 국선도를 수련한 사람의 기록에는 봉우선생과 청산거사의 인연에 대해 씌어 있어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선도수련에서 국선도와 연정원의 맥이 무관하지는 않다고 봐도 무리는 없겠지요.
그 다음은 이승헌 선사의 단학선원 도맥은 어떻게 되는지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국선도에서 수련한 적이 있어요. 이승헌 선사와 이분 일대기를 쓴 차장량이란 사람이 국선도에서 수련한 사진도 있더라구요. 즉 국선도와 단학선원 역시 도맥에서 이어지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선도수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요. 67년부터 청산거사가 나와 여러 가지 힘을 보이면서 수련문화가 국내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80년대 들어와 청산거사는 사회적인 문제로 좌절 상태에 빠집니다. 그 이후 새로 수련단체들이 생겨서 수련문화를 확장시키는 기폭제가 된 거죠. 제가 개인적으로 자료만 가지고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도맥을 제대로 이해해야 우리의 선도(仙道)수련 문화가 바로잡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재서 이선생께서는 현재 우리 수련단체의 문파에 대한 고찰을 잠깐 해주셨습니다. 이능화의 ‘조선도 교사’를 보면 한국 선도의 연원은 이미 고구려, 백제, 신라 때부터 시작돼 하나의 계보로 조선시대까지 내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선 후기에 오면서 문헌적으로 도맥이 어떻게 전파돼 나갔는지 불분명한 상태가 돼버렸고, 광복 이후 여러 문파들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선생께서 파악하신 국선도와 연정원의 도맥관계는 착오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국선도와 연정원은 수련법과 계통이 본래부터 다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연정원의 연원은 조선중기의 ‘용호비결(龍虎秘訣)’과 상관된다는 문헌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국선도와는 처음부터 맥이 다른 것이죠. 어쨌든 우리나라의 수련문파 계보 문제는 앞으로 더 논의를 해야 할 사항이며, 더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안교수께서는 우리 수련문화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것도 믿지 말라”
안동준 더 보탤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이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수련문화가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그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련을 하다보면 마치 달려가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 같아서, 계속 다른 경지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 순간 조그만 욕심이라도 부리게 되면 기름에 불붙은 듯 점점 치닫게 됩니다.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수련문화 자체를 일반 대중화하는 것이 어쩌면 모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에 이런 문제가 쉽게 극복된다면, 수련계 선지자들이 법문을 공개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아무 목적 의식도 없이, 막연히 믿고 수련을 하는 현상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수련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믿고 따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이미 그런 얘기를 많이 해놨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처럼요. 수련을 하다보면 온갖 환각 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에 믿을 것은 전혀 없습니다. 명철한 이성, 깨끗한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수련 세계를 접하다 보면 실제로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수련을 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냉철히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휘용 우리가 수련을 할 때 건강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서 정신적 차원까지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건강차원으로만 국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이 있었는데, 저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제 경험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건강 차원에서 수련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건강 차원에서만 수련을 한다면 정신적인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게 돼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되는 것이죠. 또 그럴 경우 수련 문화가 사회 전체적인 흐름에서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고 21세기를 끌어나가는 데 있어서 역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기공병이 생기는 이유
임경택 저는 수련문화가 잘못돼가는 것은 한마디로 상업주의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상업주의의 밑바탕에는 기에 대한 신비감이 깔려 있습니다. 신비주의가 있어야 사람들의 호기심이 유발되거든요. 또 신비주의에는 반드시 상업주의가 결탁됩니다.
예를 들어 기치료는 일시적으로 생체리듬이 깨져 있을 때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자기 생활 패턴이 왜곡돼 생긴 병, 깊은 병은 기 치료가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특히 남의 힘(기)에 의해서 병을 치료하는 것은 절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수련문화에서는 기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믿음이 너무 팽배해 있습니다.
둘째는 부작용 문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공병(氣功病)인데, 예전에는 주화입마(走火入魔)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조급한 성취 욕구 때문입니다. 마음이 조급하면 반드시 들뜨게 되어 있습니다. 기운은 마음 가는 데로 따라가거든요. 단전호흡은 배꼽 밑으로 하는 건데, 마음이 들뜨면 기운이 배꼽 위로 올라가서 가슴으로 가고, 심하면 두통까지 오고 더 심하면 실명과 정신분열도 일어납니다.
동양 수련의 핵심은 조신(調身)·조심(調心)·조식(調息), 다시 말해서 정(精)과 기(氣)와 신(神)의 통일입니다. 정신과 마음과 육체가 조화적인 통일을 이룰 때 기공병이 안 생겨요. 그러니까 동작에 너무 치우쳤을 때는 무리가 따르고, 정신 위주로 갈 때는 정신을 뒷받침해주는 몸이 약해져 탈기(脫氣) 현상이나 환상 현상이 와요. 특히 그것과 기 체험이 오도된 형태로 나타나죠. 앞으로 이것은 여러 연구 단체에서 실질적인 연구와 검증 과정을 통해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련을 할 때 많은 개별 동작과 연속 동작을 하는데, 기운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머리와 심장에서 먼 손끝과 발끝부터 풀어줘야 하는데, 그것이 역순(逆順)이 되면 기혈이 역류됩니다. 그래서 부작용이 생깁니다. 이런 근본 원리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제가 여기서 잠깐 하나의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해보겠습니다. 정신적인 수련이든 육체적인 수련이든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은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이 가라앉아야 하거든요. 이것은 기도나 참선이나 명상에도 다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뭐냐, 그것은 ‘단 침’입니다. 어린애들 흘리는 침 있잖아요. 조급증이 있고 마음이 급하면 입 안이 탑니다. 그건 잘못된 거예요. 마음이 욕심을 부리면 화기(火氣)를 입어서 탑니다. 반면에 제대로 수련을 하면 침이 달아지고 기공병은 생기지 않습니다.
수련과 종교성 문제
정재서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이것은 선생님들이 수련과 인연을 맺은 계기를 밝히는 대목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이기도 한데,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탐색, 그리고 애정을 회복한다는 취지와 수련문화가 깊게 상관돼 있다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그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예를 들어 상업주의와 결합했을 때는 상당히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수련단체가 민족주의를 자신의 문파 색깔로, 혹은 특별히 돋보이기 위해 남용할 경우에는 수련문화의 본질을 호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련을 염원하는 사람들을 다른 길로 왜곡할 수도 있다는 거죠.
임경택 민족주의 문제를 얘기함에 있어서 먼저 짚어야 할 점은 개인에게 대중적인 측면과 개성이 함께 발달해야 하듯이 국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국가가 개성에 해당하는 자기 민족문화를 잃어버리면 흔적이 없어지고 반면에 민족만 주장하면 배타성이 생깁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민족의 방향성은 세계와의 조화라고 봅니다.
특히 민족문제가 수련과 결부돼 배타적이 될 경우 종교화와 우상화로 가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 얘기를 할 때 단군과 화랑도를 거론하는데, 단군의 정신과 화랑도의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단군을 내세우는 종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 분별하지 못하면 수련문화가 형식화, 즉 종교화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장휘용 임교수께서 수련문화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띠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건강과 정신세계 추구가 별도로 구분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수련의 종교화 역시 모호한 개념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수련을 하다 보면 정신적인 부분까지 들어가게 되고, 수련자의 정신적인 영역이 굉장히 모호해집니다. 따라서 외부인들이 종교라는 시각으로 본다고 해서 나름대로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일을 중단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고려해봐야 할 사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재서 수련문화의 종교성, 사상성을 너무 억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계십니까?
임경택 그 문제를 얘기하자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간단히 말해본다면 일반적으로 수련에서 종교성을 지양(止揚)하자는 것은, 사이비성을 지양하자는 것이죠. 어느 누구를 내 세우고, 특히 거기에 금전을 요구하거나 갈취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이비성은 금전과 관련되고, 사람을 들뜨게 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많은 사이비 단체가 있습니다. 그 정도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규행 민족문제와 관련해 저는 한 수련단체가 건립한 단군상 훼손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일부 종교 단체 광신도들이 행한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 광신도를 비판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지만 그 수련단체가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단군상을 세우는 뜻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먼저 지적할 점은 일차적으로 사회적인 합의가 없었다는 것입다. 적어도 민족주의를 생각하는 사람들과 최소한의 합의가 선행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둘째로 단군 동상 모습에 관한 것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단군 영정은 솔거가 그린 것입니다. 그 그림을 바탕으로 대종교에서도 단군 영정을 쓰고 있고, 국정 교과서에도 단군 그림이 실려 있는 겁니다. 따라서 단군 동상을 세울 때도 역사적인 고증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었어야 하는데, 이번에 만들어진 단군상은 그것과 전혀 다른 이미지라는 것이죠.
셋째로 제가 놀란 것은 단군상을 플라스틱제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플라스틱은 공해 물질 아닙니까? 어쩌자고 그런 재료로 단군상을 만들어 세워놓습니까? 아무튼 우리 민족 전통의 수련을 하는 분들이라면 제대로 알고, 제대로 이끌어야 한다고 봅니다.
수양파와 재래파
정재서 수련과 민족주의 얘기가 나온 김에 한국 수련문화의 지리성 내지 고유성도 생각해봐야 할텐데요. 우선 지리적 풍토와 종족적 체질에 따라서 적합한 수련법이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수련법이 중국, 일본 등의 수련법과 궁극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또 민족의 각 문파에 독특한 수련법이 있을 텐데, 그 차이점이나 변별성을 얘기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임경택 우리 민족 고유의 수련문화에 대해 먼저 말해 보지요. 고래로 우리 선조들이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양대 수련 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수양파’이고, 하나는 ‘재래파’입니다. 옛 서적을 보면 명산대천에서 수도(修道)를 한다는 얘기가 있죠. 또 화랑도나 국선(國仙)에도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수양파입니다. 그 수련의 핵심은 내재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정신과 마음과 육체의 조화적인 통일을 꾀하면서 외적으로는 대자연, 우주와의 통합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지인 삼합(三合)이론이란 게 나오지요.
또 하나는 재래파적 전통이 있겠는데, 무당이나 샤머니즘 계통입니다. 이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접신(接神)을 통한 무당들의 수련법이 재래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수양파가 특히 발달돼 있었습니다. 더불어 한국 수련의 핵은 내재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 수련문화의 핵심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안동준 우리 전통의 수련법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련이 인간의 정신적 세계,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방식이라고 할 때 종교마다 저마다의 수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또 사람마다도 그러한 수련법을 받아들일 자리가 다 있는 줄로 압니다. 수련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기능 가운데 하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수련법을 이렇게 넓게 포괄적으로 얘기할 때, 어떤 문파에 속해 있다고 해서 타 수련단체의 수련법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하기야 자기 문파의 수련법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타 문파의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요.
중요한 것은 인간은 각자에게 적합한 수련법을 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수련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자유로워지려는 본능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수련법조차도 자유롭게 개방돼 있어야지,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으로 구분짓는 것은 또다른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좋지 않은 태도로 보입니다. 아무리 좋은 수련법도 매너리즘에 빠지면 결국 살아 있지 못한 수련법이 되는 것이고, 아픈 사람이나 상처받은 사람이 찾아와도 그 대응책을 마련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봅니다.
북방도교와 남방도교의 차이
실제로 저는 중국 도교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 도교는 크게 남방도교와 북방도교로 나뉘는데 각각의 수련법이 다 다릅니다. 북방도교가 우리와 친근한 ‘내단(內丹)’수련계열이라고 하면, 남방도교는 부적을 사용하는 도법(道法)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즉 내면 세계에서는 이쪽 저쪽으로 구분될 성질이 아니라고 봅니다.
한편 도교 수련법은 흔히들 도장에 수록돼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수련법은 전통 자체가 구전으로, 비밀리에 전수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수련법은 궁극적으로 수련하는 사람의 특성에 맞춰 선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지요. 우리의 전통 수련법이 뭐냐고 묻는다면 학자적 입장에서 솔직히 주춤하게 됩니다. 심증은 가지고 있지만 객관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에 수련법문으로 최초로 공개된 것은 정염(鄭콨)선생(1506~1549년, 조선 명종 때의 학자, 호는 북창)의 ‘용호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이 초보자를 위한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그건 오해인 것 같습니다. 북창의 ‘폐기(閉氣)수련’은 지금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몸 만들기’ 수련법으로 볼 수 있고, 그 전통을 계승한 것이 바로 차력법(借力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해왔던 수련방법 중의 하나가 백일기도입니다. 그것은 기복신앙이지 수련과 다른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백일기도’를 하다보면 내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수련법 근간에 작용하는 깊은 원리가 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갈구하게 되면 대안이 나타납니다. 그 대안을 제시하는 자가 누구냐고 할 때 우리는 신이라고도 하고, ‘참다운 나라’고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일기도 방법도 전통적인 수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규행 안선생이 백일기도가 우리의 전통적인 수련법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보면 ‘성기원도(聲氣願道)’라는 문구가 씌어 있습니다. 성기원도라는 것은 목소리와 기를 모아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티벳의 라마승처럼 단전의 기를 모아서 기도하는 것이겠지요.
한마디 더 한다면 민족전통수련법과 관련해 우리의 전통 좌법(坐法)은 과연 무엇일까요. 보통 수련할 때 결가부좌(結跏趺坐), 반가부좌(半跏趺坐) 하지만 그것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좌법입니다. ‘삼일신고’에는 ‘궤좌(か坐)’라고 씌어 있어요. 무릎을 꿇고 수련하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좌법을 갖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운명과도 관계가 있지만 민족의 운명과도 관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수련 법을 하시는 분들이 제대로 연구해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용어에 대해서도 말해봅시다. 보통 홍익인간 하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이병도박사의 말입니다. 원래 홍(弘)은 이념의 크기, 큰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익(益)이라는 글자는 이익이 아니라 돕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홍익인간이란 ‘크게 이타 행위를 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수련인이 다다라야 할 최고의 인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련문화와 시민운동
정재서 이제 마지막으로 토의해야 할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수련문화는 근본적으로 자기 완성을 바탕으로 해서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성을 넘어서서 어떻게 사회적인 의미를 획득할 것인가, 즉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있어서 시민운동과 사회운동 내지는 바람직한 대중문화로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대한 모색이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이것이 질적인, 제도적인 차원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지 논의했으면 합니다. 아까 안동준선생께서는 수련의 대중화가 어떤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먼저 얘기를 꺼내 주시지요.
안동준 수련문화가 시민운동으로 확산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수련이 어떤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든지 혹은 그 목적보다는 조직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된다든지 하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제도적인 검증을 거치다보면 수련 문화가 획일화될 개연성도 높습니다. 한 문파(門派)의 수련법이 주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제도적인 검증은 최소한으로 해야 하고, 시민운동적 차원에서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또 염려스러운 것은 특정 수련 단체가 강력한 조직체로서 정치화된다거나, 혹은 어떤 견제나 통제력이 없이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기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
박병운 개인의 완성이 사회적 완성을 이루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완성이라는 것이 어떤 축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사회에 악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 완성이 사회적 완성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민족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봅니다. 또 민족정신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은 한국인이라는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한국인이 세계 문화 속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즉 한국인의 의식 완성이 세계인의 의식 완성과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교육문화에서 이것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정책을 보면 수련문화를 교과과정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개인적 완성이 사회적인 완성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교육에서 수련문화와 민족정신의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재서 제도적인 차원에서 수련문화를 고양시키고 정착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수련문화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대중문화로 정착할 수 있는 표어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기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 하는 말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의 깨달음이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죠. 여기에다 생태주의, 즉 자연과 함께 조화된 세상 만들기를 위해 수련문화가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회적인 차원으로 발전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고 봅니다.
장휘용 저는 수련문화가 결국 다가올 21세기의 사회적인 조류로 미래 사상을 주도할 것이라고 감히 내다봅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아직은 진흙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으며, 누군가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새로운 문화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는 것이죠. 그 시작을 누구한테 부탁하겠는가, 결국 우리 수련하는 분들이 시작해야 한다 이겁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기를 느끼는 시점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제대로 된 수련문화를 통해서 주도적으로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정재서 수련문화의 대중화, 사회적 의미 문제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히 유념해야 할 과제라는 말씀이 셨습니다. 오늘의 논의는 최초로 수련을 문화적인 차원에서 조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앞으로 한결 고양된 수련문화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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