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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진가로 도전한 조셉슨의 개념사진
개념사진이 미술가에 의해서 추구되어 온 것은 지금까지의 서술에 의해서 명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켄 조셉슨(Kenneth Josephson)만은 사진의 문맥 속에서 작업을 계속하면서 개념사진에 접근한 오직 한 사람의 사진가로서 필자는 주목하고 있다. 또한 조셉슨만큼 지적으로 사진을 탐구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대표작 <그림엽서/여행>은 현실세계와 사진으로 표현된 세계가 어떻게 다른가하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림엽서/여행>은 그림엽서에 표현된 관광 이미지, 즉 덴마크의 성(城)과 그림엽서와는 전혀 틀린 한산한 겨울의 성을 손에 든 그림엽서와 함께 같은 화면에 넣은 것으로 허상과 실상을 제시하고 있다.
New York State,1970 Stockholm,1967 즉 코주드가 종래의 미술의 경계선을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작품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그만두고 있는 데 대해서, 조셉슨은 사진이라는 장르 속에서 완성한 수준 높은 영상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아티스트 포토그래퍼(artist photographer)는 사진매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사진의 문맥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셉슨은 자신의 문맥 속에서 그것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 냉철한 그의 자세에 마음으로 공감하면서 그의 독특함은 바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진은 객관적이고 고정적인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사진가의 관점이라는 상관적(相觀的)인 이미지인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사진은 현실과 상상의 사이를 진폭하는 매체라고 말하였듯이 사진은 이 양자의 진폭 운동의 결과에서 생긴 사진가의 개인적인 시점인 것이다. ‘사진에 의한 사진론’이라는 주제는 그의 작품 속에서 집요하게 추구되고 있다. 어느 사진에도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명제가 탐구되고 있다. <산>이란 작품에서는 산과 그 도해(diagram)와 자, 그리고 자의 그림자를 같은 화면에 짜맞추어 넣고 있다. 또 어떤 작품에서는 바다와 하늘에 기선의 그림엽서를 배치해서 허상과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들은 개념미술의 문맥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켄 조셉슨은 1932년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독특한 중견사진가인 그는 로체스터 공과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1957년부터 58년까지 크라이슬러 사에서 사진관계 일에 종사했다. 1958년부터 프리랜서로 활약하면서 아트 인스티튜트(School of The Art Institute)의 교수로 있다.
Matthew, 1965 Nude in Water
패션사진가는 무엇보다도 시대의 감성에 예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수한 패션사진가는 항상 예술과 사진의 첨단 동향에도 관심을 기울여 자신의 감수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 리차드 아베든과 어빙 펜은 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서 패션사진계를 양분할 정도의 대가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70년대에 들어와 개념미술의 스타일을 구사하여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리차드 아베든은 패션 이외에 1959년에 간행된 『관찰(Observation)』과 1964년에 간행된 『낫싱 퍼스널(Nothing Personal)』이란 두 권의 사진집의 업적으로 순수사진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또한 아베든의 개인전 「제이콥 이스라엘 아베든(Jacob Israel Avedon)」이 1974년 현대미술관 1층에 개최되었다. 한 사람의 노인을 6년간 촬영한 일백점의 사진중에서 여덟 점을 선택해서 전시한 것이다. 맨처음 두 장은 노인이 79세 였을 때의 사진이다. 전시장에 게재된 설명문에 의하면 막 재혼해서 머리를 검게 물들여, 현역에서 물러난지 얼마 안되는 비즈니스맨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은 안쪽에 천을 댄 인화지 상태로 표구하지 않은 채 약 1m×1.5m의 커다란 크기로 벽면에 달아 매어져 있다. 8×10“의 대형카메라로 찍혀져 있기 때문에 노인의 주름 하나 하나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서는 은퇴해서 살고 있는 플로리다의 강렬한 태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여덟 점의 작품은 촬영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서 처음의 한 장부터 마지막 여덟 번째의 사진을 보면 6년동안의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급격히 노인의 체력이 쇠퇴해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암에 걸려 있는 것이다. 피부는 윤기를 잃어버리고 반점이 피부를 덮고 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사진에서는 눈은 허공을 응시한 채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이 사진은 죽기 일개월 전의 것이다. 아베든은 노인을 흰 배경 앞에 놓고 집도의가 메스를 쥐듯이 촬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피사체를 향한 작가의 감정의 움직임은 없다. 사실 이 노인은 아베든의 아버지인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사진가인 아들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 전쯤 내가 4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76세의 고령이었고, 은퇴해서 플로리다에 있었다. 나는 그때 문득 아버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빠졌다. 오랜만에 찾은 아버지는 생각보다 훨씬 연로해져 있어서 굉장히 놀랐다. 아베든은 제작 동기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부자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작 이전이 피사체와 작가의 관계일 뿐이다. 아베든은 작품 속에서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주제는 죽음을 향해 가는 한 노인에 대한 6년간의 시간인 것이다. 6년간의 시간이 한 점에 응집되어 있는 여덟 점의 작품은 강인한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베든의 이들 사진에 대한 계획이 최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각각 견해가 틀릴 것이다. 진 손톤은 『뉴욕 타임즈』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우연히도 사진가의 부친이다. 전시장의 설명문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서 보통 일반적인 관객은 도대체 어떤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찍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이 의문은 사진의 본질을 왜곡되게 만드는 것이다. 필자는 윤리적인 문제를 끌어내서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찍은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사진에서 어떤 위화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확실히 이 작품은 1964년의 『낫싱 퍼스널』의 고발적이고 자기의 결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스타일에서 벗어난 개인의 일상으로의 멋진 전환이다. 하지만 아베든의 ‘제이콥 이스라엘 아베든’의 사진에는 『낫싱 퍼스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자기 결점을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는 몸짓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낫싱 퍼스널』은 뉴욕 시청의 결혼등록국의 스냅에서 시작하여 상류사회의 속물, 인종차별주의자, 동성연애자, 그리고 정신병원의 내부 등 미국의 부패한 장면이 차례차례 펼쳐지고 있다. 마지막은 임산부, 어린이 등 몇 장의 인간적인 스냅사진으로 끝나고 있다. 필자가 이 사진집을 처음 접했을 때 훌륭한 솜씨에 매료되어 흥분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무언가 공식적인 작가의 자세를 느껴 그 인상이 퇴색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이번 개인전도 『낫싱 퍼스널』에 가까운 작가의 연출력을 느끼게 된다. 아베든은 아마도 79세의 아버지를 주제로 선택했을 때 그 죽음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짜맞춰 넣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려고 계산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정석적으로 그물을 던지고 있다. 아마도 개념사진가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면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간을 추출함으로써 극적인 노인의 죽음으로 사진을 완성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베든은 개념적인 문맥의 작가가 아닌 어디까지나 개념적 형식을 구사한 사진가인 것이다. 하지만 패션사진도 순수사진도 교묘하게 소화하는 다재다능한 아베든에게는 질투를 느낀다. 또한 1976년에 일련의 아버지의 사진을 최종 페이지에 수록한 사진집 『포트레이트(Portraits)』를 간행하고 있다.
1984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어빙 펜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 200점, 패션사진도 전시되어 있지만 주로 순수사진가로서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도록 계획되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작품은 잘 알려져 있는 포트레이트로 피카소, 뒤샹, 스트라빈스키, 장 콕토, 코레트 등이 찍혀져 있다. 이 인물들은 예술가의 특징을 확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트라빈스키는 날카로운 콘크리트벽 모서리에 끼워져, 큰 귀에 손을 대고 귀를 세우고 있는 모습이 찍혀져 있다. 이상하게 발달한 귀와 얼굴 표정은 기인(奇人)을 보는 듯한 기분 나쁜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또 같은 연대에 촬영된 것으로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페루의 어린이 등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들도 모두가 자연광 아래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라 그가 즐겨 사용하는 조절된 조명 아래에서 촬영되었다. 이것은 그의 사진전을 특징짓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강조해두는 것이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 제품으로 만들어진 인화지를 사용하지 않고 플래티늄 솔루션(platinum solution)이라는 백금이 함유된 감광제를 바른 수제(手製) 인화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화조가 흑백의 석판화같은 상태로 완성되어 개성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1972년에 촬영한 일련의 <담배꽁초(Cigarette)>시리즈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주운 담배꽁초를 흰 배경 위에 놓고 극도로 클로즈업시켜 촬영하고 있다. 포트레이트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조명으로 조절되어 격조있는 장중한 물체로 승화시킨 담배꽁초들은 자코메티의 초기 조각처럼 명상적으로도 보이고, 불난 곳에서 주워온 타다 남은 목재같기도 하다. 교묘한 조명에 의해서 특별한 질감이 강조되어 있어 일종의 요기(妖氣)마저 감돌고 있다. 그 때문에 제작 당시 미국의 어떤 사진평론가는 이것들을 일종의 개념사진으로 논하고 있다. 그러나 어빙 펜의 목적은 마술사와 같이 담배꽁초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결국 시각을 넓히고 있는 것이지 개념사진 그 자체는 아니다. 『뉴스위크』지의 마크 스티븐스는 이 추한 것을 아름답게 변모시키는 방법을 동화의 “미운 오리새끼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시도는 무엇이나 양식화한 사진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증거로서,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변주곡으로서 휴지통에서 주워 온 듯한 반쯤 썩은 빈 담배값, 종이컵 등을 찍은 작품도 있다. 1977년부터 80년대에 걸쳐서 발표한 작품은 상자에서 꺼낸 냉동식품을 쌓아올린 사진으로, 현대 미국 조각가를 대표하는 도널드 주드(Donald Judd)의 상자 모양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이제 60세를 바라보는 대가 어빙 펜이 아직도 생생한 감각으로 현대미술과 호응하고 있는 태도를 대할 때 나는 그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미국 사진이 갖고 있는 사고의 깊이를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현대사진의 이해 - 고쿠보 아키라 지음, 김남진 옮김, 눈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