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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이공!! 그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사이공 취재를 명 받았다. 총각때인 27세의 나이로 맹호사단 기갑연대 소속으로 해놓고 한국군이 파월하여 부대내에 키워오던 열대식물을 수거하여 고국철수(LST 815호)하는 일을 맡았던 나, 그리고 한국군 철수 6개월전에는 국내 유명한 식물학자 이화여자대학교 이영노 교수와 박봉규 교수를 안내하며 월남의 식물들의 분포를 채집했던 내가 지금 33년 만에 베트남을 가게 된 것이다. (필자는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 졸업한 이유로 인해서 열대관엽식물 수송작전에 관여했음을 밝혀둔다. 학군5기로 임관하여 육군대위로 전역하고 국방대학교 부설 국군정신전력학교 교수와 국방대학교 부설 국방정신교육원 교수로서 그리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공군사관학교 부설 공군보라매수련원 교수로서 35년의 군교수직을 마감하고 2003년부터는 동학 천도교 교령 보좌역을 하면서 전국 동학 유적지를 순회하면서 일그러진 조국의 현실을 발견하면서 ‘동학상군(東學商軍)’을 조직하면서 ‘진보-보수신문 함께 보기운동’의 제3의 두눈뜨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
사진(양택식 서울시장에게 파월장병이 기증하는 기증식, #1
캄란항에서 배 LST에 파월기간동안 한국군들이 부대내에서 키워오던 열대식물 하적준비를 하는 장면 #2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베트남전은 무엇인가?
1859년 - 1954년간에 프랑스지배를 받았던 베트남, 그들은 다시 1965년 184,300명의 미군의 상륙과 더불어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첫 상륙해에 636명의 사망자를 냈던 미군은 다시 1년후 6,644명의 사망자를 다시 1967년 말에는 16,021명의 사망자를 냈다가 1969년에는 475,200명의 주월미군파병에 40,024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사이공 정부 휘하군대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한국, 타이 필리핀의 자유세계연합군을 포함하여 130만명으로 이는 당시 베트남 인구 15명당 1명꼴의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참고로 한국전시 미군 사망자는 33,629명, 한국군 사망자는 58,800명이며 유엔군으로 참전한 영국 766명, 캐나다 309명, 오스트레일리아 304명, 그리스 196명, 터키 721명, 프랑스 262명, 콜롬비아 163명, 에디오피아 121명, 네델라드 120명, 필리핀 112명, 벨기에 103명, 타이 125명, 뉴질랜드 23명, 남아프카공화국 34명, 룩셈부르크 3명 계 95,800명이 사망했으며 남한 민간인 사망자는 244,663명, 학살자 128,936명이며 한국군 및 유엔군측이 항공기 1,992대, 전차 777대, 공산군측이 항공기 2,186대, 전차 1,178대을 잃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베트남의 작전은 대체적으로 각 마을별로 교사, 의료인, 공무원으로 구성된 친 정부성향의 민간인을 조직하여 베트콩의 접근을 방지하는 1단계의 진압단계에서 헬기를 포함한 이송수색의 섬멸부대로 베트콩 게릴라를 공격하는 2단계를 거쳐 주민들을 마을에서 소개하고 무차별 포격지대를 선언한 뒤 네이펌, 포, 폭탄, 탱크로 무차별 포격하는 3단계로 베트남전은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낮은 미군이 장악하였고 밤은 베트콩이 장악하는 기이한 현상을 유지했고, 주민들에게 사이공정부와 하노이정부중에서 어느쪽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지금 이대로가 좋다’가 그 대답이다. 왜냐면 자녀들 중에서 반은 베트콩에 다른 반은 사이공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 봄 드디어 북부 베트남은 우리 한반도의 38도선에 버금가는 17도선을 넘어 공격을 감행하여 통일하였다. 이리하여 총 314만명의 미군(여군 7200명)의 주월미군은 58,183명(여자군인 8명 포함)의 사망자를 내면서 미국은 지리한 월남의 쟝글전의 수렁에서 끝을 낼 수 있었다. 3,689대의 항공기와 4857대의 헬기를 잃고 말이다. 1500만 톤의 탄약을 사용했던 월남전은 공식적 전비로 1650억 달라로 집계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이고 실제는 그 2배로 본다. 남부 베트남군의 사망자는 223,748명의 전사로 집계한다. 당시 우리 한국군은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와 함께 미군이 요청한 자유세계연합군으로 미군다음에 가장 많은 파견군을 보냈으며 이는 미군의 전쟁 정당성에 힘을 실어주는 효과도 컸음을 군사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약 5만명을 파견한 한국과 타이, 필리핀은 미국의 강력한 원조를 받았음을 익히 아는 사실이다.
주월한국군의 첫 파월은 1964년 9월 11일부터 22일까지 LST로 붕타우에 도착하였는데 그 부대는 제1이동외과 병원으로서 장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이 그 시발점이었다. 1965년 7월 2일 청룡의 해병2여단이 나짱에 그리고 같은 해 10월 22일 수도사단 맹호가 퀴논에 도착하였고 다음해 1966년 8월 15일 백마부대가 전투부대로 참전하면서 미군 다음으로 많은 4만 8천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1973년 3월 23일 철수를 완료할때까지 8년동안 34만명이 참전하는 결과를 체험하였다.
지금 550만 인구의 호지민시(전 사이공)의 중심에는 옛날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궁이 지금은 통일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베트남의 인민들의 휴식처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앙에는 최초로 입성한 탱크가 베트남깃발을 단체 자리를 잡고 있다. 1975년 4월 30일 43시간 전에 티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인수받아 국가원수가 된 즈엉 반 민 장군은 “나는 당신에게 권력을 이양코자 아침 일찍부터 기다렸소”하는 무혈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그 대통령궁 현관에 베트콩깃발을 올린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맹호, 백마, 청룡의 전투부대와 그 지원부대로 십자성과 비들기 부대 등이 참전하여 명을 사상자를 내면서 치른 월남전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베트남을 사회주의로 통일하게 하였다.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로 통일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통일이 된 것인가? 아닌가? 지금 우리는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지적처럼 남이 북으로 올라가도 통일이지만 북이 내려와도 통일이라고 했다가 국가보안법에 재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은 통일이 안 된 것인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오늘 2006년 5월 28일 나는 베트남항공사 소속의 VN937호는 파월했던 맹호, 백마, 청룡 그리고 그 지원부대인 비둘기 등의 부대에서 근무했던 동지와 탈렌트 임선택(52세) 씨 내외를 비롯한 34명을 태운 베트남항공은 인천 국제공항의 하늘을 날아가고 있다. 임씨는 지금 KBS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의 농촌 드라마에서 터주대감으로 그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인기 탈렌트이다. 이 드라마는 17년째 방영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8월 달에 방영될 사극 “대조영”에서 대조영의 정신적 사부로 출연한다면서 촬영의 짬을 내어 월남을 꼭 보고 싶어서 이번 기회에 함께 합세하게 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을 말했다. 같은 대추나무 사랑갈렸네에서 함께 출연하는 심양홍 탈렌트도 파월하여 백마사단 30연대 출신으로 지난해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임씨는 우리의 5박 6일간의 베트남 방문 중 버스로 이동시 구수한 재담으로 더욱 월남여행을 즐겁게 했음을 밝혀둔다. “친구야, 내 사랑하는 친구야, 고향은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만 객지 벗 십년이면 친구야 아니더냐?”로 시작되는 그의 노래를 불러 우리 일행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그가 부르는 친구의 노래를 들으면서 과거 우리가 총칼로 베트남 당신들을 괴롭혔던 즉 그 나라의 애국자를 죽여야만 했던 우리를 용서하고 친구로서 잘 지내보자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상상일까? 한국과 베트남, 이제 친구가 되어 좋게 지내자는 제언의 절규로 들으면서 나는 베트남을 향해 마음은 내달리고 있었다.
2006년 5월 28일 오전 10시 40분 드디어 베트남항공기는 350여명이 탈 수 있는 항공기였지만 90명만이 자리를 채운 체 대한민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항공사 직원근무요원은 13명이었는데 한국 스튜디어디스가 3명이고 한국고객들에게 특히 파월 40년만에 찾는 그들의 궁금증을 설명해주는 것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궁금했던 베트남인가? 사이공 국민 아니 인민들은 과연 제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도 그 항공사 직원들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한국 국적의 베트남 항공사 스튜어디스 이혜림(28세)과 임주선(29세)은 찐한 자주색의 아오자이옷을 입고 있었다. 특별히 우리 일행들이 총각 때 참전했던 장병들이었지만 지금 이들은 하얀 머리의 할아버지가 되어 월남 땅을 밝게 되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듯한 눈치다.
사진(한국 스튜어디스와 월남 사무장) #3 #4 우리 일행이 탄 베트남 항공기
왜 진작 방문하지 이렇게 늦게 방문하느냐면서 그렇게도 바쁜 사연이 있었느냐는 한국 스튜어디스의 의아함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내가 만났던 하얀 아오자이를 위아래로 하얀 색깔의 중고등 여학생들의 옷은 너무나 당시의 젊은 한국 장병들을 설레이게 했던 그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심성이 우리와 같아서일까? 긴옷의 상징으로 아오자이는 이들의 평상복이다. 20여 곳의 몸크기를 재어 맞춘 아오자이는 처녀시절에는 흰백색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찐한 색으로 입게 된다는 아오자이는 그들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양옆으로 살갗이 드러나는 옷은 더욱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던 베트남 꽁까이 - 처녀들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너무 형이하학적 이어서일까?
한국 인천 국제공항에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까지는 약 4시간 10분이 걸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올 때는 그 시간보다 적은 3시간 40분이 걸린다고 하였다. 바람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월남인들의 한국인들의 참전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를 알고 싶었다. 한국 스튜어디가 통역을 맡고 월남 스튜어디스와 사무장인 Hoang Ngoc Bictt(33세)는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것은 과거일이다. 각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당시의 정권을 가진 자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왔을 뿐입니다. 그 당시의 정부가 하는 일에 여러분들은 묵묵히 그저 아무 저항하지 못하고 참전했을 뿐입니다.”고. 그 사무장은 묻지도 않는 말에 “지금 우리는 한국보다 물질적으로 못살지만 정신적으로 행복합니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입니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묻지도 않는 그의 긴 설명에서 물질에 노예가 되어 삶의 여유를 잃고 불행해진 즉 품질의 삶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그저 앞만 보고 바쁘게 빠르게 달리기만 하는 소위 선진국 특히 한국인들의 일그러진 내가 부끄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를 생각해본다. 마루쿠제 사회학자는 말한다. ‘풍요는 아편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손님들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비행기의 오디오에서는 베트남 특유의 동양적 느린 노래 즉 우리나라의 한오백년 비슷한 민속음악들이 옛날 그대로의 노래들이 나오는가하면 TV 화면에서는 ‘마타도어’라는 영화가 한국말로 번역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손님의 90%가 한국인임을 감안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베트남항공사의 중요한 고객이었다. 한국인의 남편을 둔 여성들이 몇 명이 있었는데 자녀를 데리고 금의환향?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자본주의적 인식인지도 모르겠다. 40년 전에는 총칼로서 파월을 했던 우리였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결혼을 못하는 우리의 총각들이 국제결혼으로 한-베간의 우의를 다지는 것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한-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세기전은 총칼로, 그리고 지금은 인간적인 따뜻한 만남의 결혼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유대가 꽃피워지기를 바라면서 나는 벌써부터 창밖의 베트남을 내다보는 성급함이다.
지금 비행기는 시속 900km, 높이 2230km를 유지하면서 월남의 수도 하노이를 향해 나가고 있었다. 밖의 온도는 50도씨를 가리키고 있다.
이번 행사는 사회복지법인 월남참전전우회가 주체가 되고 국가보훈처와 전우21뉴스와 내가 일하고 있는 향군전우신문이 후원하는 ‘월남참전 희생자 합동 추모제’로 월남에서 전사한 전사들의 천도제를 올리고 고엽제 환자들에게 휠체어를 기증하는 행사를 취재할 기획으로 월남을 방문하게 되면서 행운의 영광을 갖게 된 것이다.
6월의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국가재건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다가 전사한 우리 전우들의 영혼을 달래는 천도제는 파월이래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행사임을 밝혀둔다.
드디어 우리가 탄 여객기는 곧 하노이에 착륙한다는 방송을 한다. 나는 부지런히 안전벨트를 하고 창밖으로 카메라로 샤터를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첫 사진 월남을 담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지만 500장짜리 필림 2개를 다 찍었으니 1000장의 베트남 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셈이다. 이 사진들은 정선하여 앞으로 우리 향군전우신문의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될 것이다.
#5 창밖으로 본 베트남 수도 하노이
우리 시간으로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 하노이 시간은 4시 50분이다. 이곳에서 다시 하노이발 5시 10분 항공기로 약 1시간 반에 걸쳐 사이공으로 향하였다. 누가 말했던가? 베트남은 양쪽에 쌀 광주리를 매달고 있는 대다무 장대라고.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과거 티우정권 시절의 수도였던 사이공(현 호지명시)까지 기차로 달리면 총3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우리는 다시 그 북쪽의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남쪽의 다른 한 쪽으로 지금 여객기는 달리고 있다. 창밖을 보니 온통 베트남은 푸르다 못해 거의 검은 숲의 상하(常夏)의 나라 - 베트남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베트남 벌판의 한쪽에서는 논을 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모를 내고 그리고 그 옆에서는 추수를 하는 우리나라 1년 모내기가 그대로 한 장의 화면으로 연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70년 당시만 해도 온 국토가 시뻘건 산이어서 치산녹화의 새마을노래를 부르면서 온 국민이 동원되던 그 때가 떠오른다. 그 대한민국이 지금 이곳에서 5천여명의 전사자와 1만여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한 값비싼 대가를 치루었던 베트남전으로 결국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내면서 세계만방에 국위를 선양하고 국가경제 발전에 초석이 되어 반만년 가난을 털고 세계 경제 11위의 경제대국을 만들어준 베트남을 방문하고 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 얼마나 전투기간 중 많이 귀에 익숙한 월맹의 수도 하노이가 아니었던가? 우리 파월했던 장병들이 당시 월맹의 수도 하노이 - 지금 바로 이곳에 내린 것이다. 참으로 36년의 시공을 넘어 지금 나는 당시 생각하기조차 섬찍했던 하노이를 방문하는 어쩌구니 없는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우리는 다시 과거 티우 정권의 수도 사이공 - 지금의 호지민으로 자리를 옮기는 항공기로 다시 갈아타고 있었다. 비행장 주변에는 새로 건축되는 공사장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물었다. 왜 건물이 부도라도 나서 건축이 중지된 것인지? 그 이유를 물으니 답은 엉뚱하게도 이러했다. 선생님은 오늘이 일요일인지 모르십니까 하는 것이다. 우리와 너무 차이가 많았다. 우리의 경우 일요일은 공사가 그대로 진행되는 현실이... 우리의 경우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점에서는 우리는 노동자들을 제대로 예우를 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동학(東學)에서는 말한다.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이라고 하면서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사이공 중심지내에 위치한 에콰토리알(eqatorial) 호텔 604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5월 29일 월요일 5천여 전우들의 넋을 달래고 천도제를
오늘 우리의 첫 일정은 천도제를 올리고 고엽제병원을 방문하는 날이다. 사이공의 아침은 우리의 6월의 후덥지근한 더운 날씨중에서 ‘후덥지근한’만 빼면 영락없는 우리의 여름날이다.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사이공 시내에 있는 현지 영암사 사찰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월남전에 참전하여 유명을 달리한 5천여 사망자 동료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불러 안심시키는 천도제를 올리고 위로하는 행사이다. 우리나라 어느 사찰 못지않은 큰 절이었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서구에서 온 기독교의 십자가들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기독교 교회를 찾을 수가 없다. 서울 시내를 달리다보면 집과 하늘사이가 기독교의 십자가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우리의 경우는 한 빌딩내에도 기독교 십자가가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헌데 이곳은 기독교가 아닌 불교가 국민들의 마음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천도제를 하는 사찰에도 많은 남녀노소 특히 아낙네와 젊은 여성들이 무슨 사연을 갖고 와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모습은 우리와 별다르지 않다. 샤타를 누르기 앞서 양해를 구하고자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통 대화가 안 통한다. 우리는 웬만한 초보영어이면 대화가 통할 수 있건만 이들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의 한국어를 제쳐놓고 영어로 대화하려는 나를 저들의 눈에는 주체가 없는 가련한 모습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들은 분명히 건강하다. 개인집에도 돌아가신 어른의 영정을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는 모습에서 동양의 전통적인 조상숭배의 효를 실천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가족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그들을 보면서 개인만 있지 전체를 부정하는 작아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 절에 도착하여 조그마한 강당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녹차를 마시면서 주지스님의 천도제에 대한 인사말을 들었다.
급기야 우리는 본당으로 안내되어 사회복지법인 월남참전전우회 중앙회 이사장인 김충환 스님의 집전하에 시-도 회장단 이중규 등과 조남진 전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과 본지 향군전우신문 발행인 최충 등 32명이 천도제를 올렸는데 그 모습은 한마디로 스님의 절규에 가까운 주문과 함께 징을 울리면서 진행되었다. 절의 앞과 뒤에서 일부와 이부로 나누어 실시했다. 해병 청룡부대로 참전했던 이 는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하여 이국땅 베트남전에서 용전분투하다가 꽃다운 젋음을 불태운 동료가 자꾸 다가와 고맙다고 하는 메아리의 대화를 나누면서 한없이 나오는 눈물이 너무 가릴 수 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했다. 그 전사한 친구는 형이 사이공의 주월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형은 동생이 근무하는 다낭까지 와서 여단본부에서 헬기를 타고 다시 이곳 자신의 동생이 근무하는 동생을 위로하고 간 다음날 작전을 나가서 베트콩에게 사살되었다면서 그 친구와 영의 세계에서 대화를 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약 3시간동안에 걸쳐 진행된 천도제에서 “오늘 천도제를 통해 헤매던 전사자 용사들과 영문도 모른체 억울하게 운명을 달리한 베트남민 희행자 및 전쟁으로 인해 병마와 시달리는 유가족들과 아픔을 가슴으로 나누었다면서 특히 늦게나마 전쟁으로 희생된 5천여 전우들에게 위훈을 기리었다는 보람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국가를 위해 무엇보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국가발전을 위해 경부고속도를 만들었고 오늘의 대한민국의 국부의 근간과 한국의 경쟁력의 토대를 만든 주역들이었다면서 지금 한국을 세계 11위로 올려놓은 당신들이었다고 하니까 다들 스님 주변에서 무섭게 달려들듯 하던 그 영혼들이 안심한다면서 바람처럼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었다면서 잊을 수 없는 천도제를 올렸다면서 희한의 눈물을 적시었다. 자리를 함께한 이곳 영엄사 주지 스님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베트남을 찾아주신 참전용사 및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면서 천도제를 우리 사찰에서 갖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전쟁이 종전된지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며 어려운 환경속에 살고 잇는 실정이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세계적 불교종파를 초월해 평화를 기도하자며 양국간 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스님은 과거 우리는 총칼의 20세기의 상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21세기는 상생의 시대가 되었다면서 무엇보다 베트남 당국의 협조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2000년 6월 15일 남과 북 두 지도자가 우리 민족끼리 통일한다는 615선언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남과 북이 통일될 때 사회주의의 분배와 성장의 자본주의가 합칠 때 엄청난 시너지를 통해 아시아에서 아니 세계에서 으뜸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면서 ‘사세휘’가 말하는 왜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고 통일한국에게 지게 되는 이유’라면서 우리도 이제는 미국과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남북이 손을 잡고 그동안 같은 동족을 향해 겨누었던 총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여 다음 장소인 고엽제 병원을 향해가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숙연하게 하였다.
고엽제병원 휠체어 기증식
천도제에 이어 우리는 휠체어 기증식을 갖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보훈병원에 해당하는 평화마을 고엽제병원을 둘렀다. 병원이라기보다는 피난민 수용소같은 곳으로 일반인들이 할 일없이 소일하고 있는 시장같은 시끌버끌한 허름한 건물이 바로 병원이란다. 우리의 휠체어기증식은 그곳 사이공 HTV(호지민 TV)에서도 취재하는 행사로서 안내하는 분의 설명에 의하면 휠체어기증식은 사뭇 그들의 관심을 끈다는 대목으로서 우리의 휠체어기증은 의미있고 귀중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곳 병원장은 베트남당시 월맹군에 속하여 그들이 말하는 해방전쟁에 온 몸을 던졌던 예비역 준장이라고 했다. 그는 말한다. ‘먼저 고엽제 환자병원 방문에 감사한다. 베트남과 한국은 불친했으나 지금은 좋아지고 있다. 오랜 전쟁속에 환자 특히 수십만의 고엽제 환자가 한번 주어진 소중한 그들의 인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마무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있다. 우리는 이를 극복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고엽제협회를 만들어 이들을 치료하고 있으나 많은 한계에서 봉착하고 있다. 중앙정부에서 지방단체장으로 이전되고 있다. 치료에 미치지 못하고 그저 환자의 심적 도움을 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음이 안타깝다. 작년도에 미국에 소송을 냈으나 우리는 패배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계속해서 소송하여 이기고 말 것이다. 한국도 우리처럼 피해를 받고 있으면서도 지원을 해주고 있으니 정말로 고맙다. 오늘 그 참전 용사들이 특히 몇 분은 고엽제 환자들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휠체어 100대와 후원품을 기증해 주시니 정말 고맙다. 장기적으로 정기적으로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우리가 만든 협회는 1년 되었으나 미흡하다. 그전에 한국의 도움을 받고 싶다. 진심으로 여러분의 방문과 선물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휠체어 기증식의 현수막과 회의 모양 사진 #1)
호치민 고엽제 부협회장인 여성 인민위원회장은 말한다. 1992년 외교수립이후 민간 차원에서 많은 도움을 한국으로부터 받아 지금 베트남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 우리병원은 모든 장비와 시설이 턱없이 모자라다고 호소하며 이념을 초월해 첨단 장비가 아니더라도 많은 구호품을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수교 15년이 되는데 세계적인 시민의 날로 만들 기획을 준비 중이다. 아시겠지만 우리 호지민시와 부산시는 자매결연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당신들의 오늘 선물 기증을 높이 평가한다. 여기 오시지 않은 분들께 특히 한국의 고엽제 환자분들에게 휠체어 기증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우리 이사장 스님 김충환은 보훈의 달을 맞아 방금 오전 천도제를 지내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월남에서 유명을 달리한 한국군의 원혼들이 안심하고 하늘나라에 있으면서 월남의 발전을 기원하는 힘을 실어주는 그들이 될 것임을 확인하였다. 특히 고엽제 2세들에게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조남진 전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은 지속적인 후원사업을 펼쳐 나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한 백승기씨는 오늘 TV에 소개되어 한국의 큰 마음이 전 월남인들의 시청각 속에 우리의 이미지는 더욱 그들의 마음속에 좋게 각인될 것이라면서 어린이처럼 좋아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이들 월남인들을 돌아보는 데에 인색하였음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어떤 전우는 휠체어말고 다른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가 이런 이야기는 우리끼리 모인 자리에서 해야하는 의견으로 조율을 해야 한다고 하여 하던 말을 멈추는 해프닝도 연출되기도 하였다.
#2. 고엽제 환자들 2.4.5.6
필자가 우리나라 고엽제 환자들을 둘러보았지만 이곳 고엽제 환자들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아닌 너무 보기조차 힘들었다면 이해할지 모르겠다. 어느 동지는 고엽제 환자들을 둘러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머리와 머리가 붙은 환자, 다리나 팔이 없는 환자, 다리가 하나인 환자, 해외 토픽에서나 있음직한 두 눈이 돌출되어 튀어나온 환자 등 너무 잔인한 미국의 비인간적인 고엽제의 살포는 반드시 보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들의 고엽제 환자들의 처절한 많은 사진은 지면관계로 일부만 소개함이 아쉽다. 다음 고엽제를 별도로 심층 취재시에는 과거 미군이 저지른 월남전의 엄청난 잘 못된 전쟁의 참상 - 고엽제 환자들은 소개할 것이다.)
그곳 병원을 나와서는 우리 일행은 사이공 시내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였다. 가면서 한국군 주월사가 있던 주월사령부를 둘렀다. 지금은 일본의 다국적기업 가 사용하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구경을 하는 데에 그쳤다. 옛날 건물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당시 주월사를 드나들면서 십자성 부대 통신업무병으로서 주월사를 일주일에 한번씩 드나들었던 최 충(55세)씨는 충격적인 감격을 받은 듯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드디어 우리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연상하면서 찾은 베트남 전쟁기념관은 규모면에서 우리보다 작았지만 직접 관광객들이 얼마든지 만질 수 도 있고 바로 가까이 다가가 사진도 찍도록 한 것이 인상 깊다. 밖의 온도는 약 4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지만 먹구름이 들이닥치면서 장대비가 내리더니 언제 더웠느냐는 듯이 시원한 베트남 특유의 시원함과 무더위가 교차되는 이들에게는 일상의 삶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불란서의 이곳 베트남인들의 애국자를 사형하였던 단두대가 너무 무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내자는 이 단두대에서 흥분하여 설명하면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전쟁기념관 중앙에는 마지막 사이공이 함락(그들의 설명은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우리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표기임을 이해 바란다) 될 당시 마지막 미국 대사관에서 베트남을 빠져나가지 못했던 미군 헬기와 그 중앙에 표기된 “USA"표시가 아직도 그대로 도색되어 있지 않아 이들 베트남인들에게 승전의 강인한 정신력을 상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소감이었을까? 지금 그 헬기는 고철덩어리가 되어 관람하는 베트남인들에게 무한한 힘의 정신력을 일구는 정신교육 교보자료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내자에게 물어봤다. 당시 소위 보트 피플이라고 하는 티우정권의 앞잡이들이 동지나해, 남지나해로 탈출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단연코 말한다. 다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5월 30일 구찌(cuchi)터널
사이공의 북서쪽에 위치한 약 4시간에 걸쳐서 달려온 그 유명한 구찌현의 인민위원회 구찌터널을 방문하는 날이다. 구찌터널은 사이공 함락(이들은 ‘해방’용어를 사용함)시 결정적 티우정권의 목을 누르는 역할을 한 그들이다. 군사물자 수송의 통로인 이 일번 도로를 장악하여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고 나아가 저들의 사이공 함락의 접근로로 성공한 것이었다. 이들의 쟝글전 일화는 먼 신화처럼 들어온 바는 있지만 실제로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터널은 1960년대에 만들어져 1975년 월남이 해방될 때까지 베트남인들의 정신력의 진수를 보여준 기적의 터널이었다.
#사진첩1. 2. 3. 4
어제의 고엽제 병원에 휠체어 30대 기증식과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터널을 직첩 체험하는 행사이다.
# 휠체어와 금일봉(봉투의 사진)
먼저 구찌터널을 갔으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너무 비좁아서 우리를 앉게 하고 설명을 할 수 없어서 다시 이동하는 수고를 통하여 좀 더 넓은 곳으로 이동하였으나 역시 그곳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옛날 우리 시골학교의 교실만큼이나 허술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베트남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우리의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을 달려고 하였지만 이곳에서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현수막의 내용이 사회주의 베트남을 자극하는 문구가 없어서 그들은 결국 우리의 의도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행사를 하면서 베트남 통역사는 그곳까지 달려와 통역을 하였는데 그는 연세대학교 한국어과정을 공부하였다면서 우리들의 궁금증을 설명해주는 데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능란한 실력을 발휘해주었다. 그는 33세로서 4살짜리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우리를 안내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는 말한다. 한국이 베트남처럼 사회주의로 통일될 수 도 있겠고 독일처럼 자본주의로 통일될 수 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민의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잘 사는 길은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한국이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집단주의의 장점을 모아 제3의 중립화방안으로 통일된다면 양 제도의 합이 아니라 양 제도의 장점의 곱하기가 되는데 이것이 시너지라면서 머지않아 한국은 아시의 등불 아니 세계를 이끄는 모범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한국 펜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못사는 제도라는 편견에 가까운 지식을 갖고 온 나에게는 그의 말이 현지에서 이해하는 좋은 학습의 것이었다. 베트남인들은 누구나 즐겨쓰는 곳깔모자 - 과거 우리 한국군이 참전했을때는 베트콩모자로 명명하였던 베트남인들의 모자는 야자잎으로 만들어져 시원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밀짚모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벗겨지면 오토바이를 세우지 않고 그대로 달려간다고 했다. 왜냐면 그들의 화폐단위로 낮은 가격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눈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들은 과거 티우정권에서는 걷거나 자전거를 탔던 그들이다. 허지만 지금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들어오고 있는 오토바이(가격 50만원선)를 타고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처럼 그 수만큼 자가용의 공간을 선택했다면 엄청난 교통난으로 신음하는 사이공이 되었을 터이지만 지금 사이공은 우리처럼 교통난이 심하지 않다. 이 엄청난 오토바이와 자전거로 길건너가기가 만만치 않다. 그 풍경속에 외국 관광객들이 인력거에 해당하는 ‘씨클로’를 타는데에 기본가격이 우리돈으로 160원으로 베트남문화를 만끽하고 있다. 필자가 디카 사진기의 밧테리를 구입하기위하여 한 핸드폰 가게를 둘렀지만 약 10분도 안되어 오토바이가 그곳 핸드폰 가게에 들이닥쳐 전해주었다. 가격도 2만원이었다. 국내가격보다 싼 가격으로 이곳 물가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싸다. 이곳 사람들은 여유롭게 살고 있다. 낮은 더운 시간에는 일하지 않는다. 한잠을 잔다. 그러니까 점심 식사를 하지 않는다. 오후 일과를 마친 후 저녁식사를 하게 된다. 얼마나 우리의 삶의 방식과 비교가 되는 그들인가? 느리게 사는 저들의 행복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망상일까?
사진(오토바이 물결의 사이공)
사이공을 벗어나 드디어 우리는 그 구찌터널에 도착한 것이다. 고엽제에 의하여 800? 명을 포함하여 베트남에서 만여명?이 사망하였으며 특히 구찌터널 작전을 통하여 월남해방의 영웅 여전사 500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아쉽게도 우리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준하는 해방열사능이 그곳에 있었는데 그곳의 방문계획이 없었던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지금 이곳은 베트남의 해방의 성지로 그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으며 학생들이 주로 방문하고 있다. 그 베트남의 혁명가 호지민은 ‘호아저씨’로 불리워지고 있었으며 그는 정작 혁명이 성공하기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차에서 내려 구찌터널까지 가는데에는 약 10분정도 들어가니 간이 강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전면에 구찌터널작전의 이미지를 그대로 모형으로 만들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져 있었으며 그들의 비디오를 통해서 그 구찌터널의 역할이 결국 월남 티우정권을 넘어뜨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설명하였다. 용어마다 “해방”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사수라는 입장에서 참전했던 우리들의 월남참전 용사들의 귀에는 용어의 혼란속에 그들의 설명을 들어야 했다. 한마디로 그들의 정신력의 대나무로 만든 죽창 등 원시적인 무기와 미군의 물질의 풍요에서의 극치인 현대무기가 부딪혔을 때 그 승자는 정신력임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장이었다. 누가 말했던가? 칼집이 물질이라면 칼 손잡이는 정신력이라고 ... 결국 하루 5톤의 폭탄을 퍼부었지만 결국 3곳곳에 만든 저들의 은밀하게 교묘하게 만든 4km의 땅굴까지는 영향이 닿을 수 없었다. 작은 지하 입구를 열면 어김없이 터널로 이어진다. 들어가는가 싶더니 약 10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삐금히 흙이 헤쳐지면서 총구가 나온다. 수많은 미군이 이곳에서 소리없이 죽어갔다는 설명이 너무나 쉽게 공감이 갔다. 너무 좁아서 설혹 그 땅굴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좁았다.
# 5. 미군의 불발탄을 수거하여 그들은 부비츄랩을 만들어 미군을 진퇴양난으로 만들어 많은 피해를 주었다.
#6,7
8 구찌터널 홈페이지 초기화면(www.cuchitunnel.org.vn)
곳곳에 미군의 전투기에 의한 폭격자국들이 선명하게 곳곳에 널려있었지만 그들의 엄청난 밀림속의 터널속까지 접근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많은 시간이 흘러가면 그 미군의 폭탄 자죽들은 가끔 쏟아지는 소나기속에 그 흔적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 파월 참전용사들이 다녀 갈려면 더 세월이 흐르기 전에 머지않아 다녀가야 자신이 참전했던 월남전의 개념을 이해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아지트의 터널은 너무 좁았지만 그 속은 넓고 건조했으며 시원했다. 식당과 의무시설이 있었던 곳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벌써 월남전이 끝난지 40여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그 곳을 베트남국민들의 정신력을 집대성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정신전력의 산 정신교육장이 되고 있었다. 지하 식당에서 주는 감자를 먹으면서도 그 감자가 호텔에서 먹는 어느 값비싼 요리보다 의미있는 시식을 하면서 먹게 되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오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봤다.
당시 미군이 광범위하게 살포한 고엽제 영향으로 이곳에 만에서도 600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랑스럽게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자금을 주어 사업을 해서 성공을 하면 다시 그 사람은 그 돈을 반납하는데 바로 그 돈은 다른 고엽제 환자에게 전하여 그 돈은 돌고 돌면서 고엽제 환자들의 사기를 불지르는 데에 엄청난 힘이 되고 있다는 설명에서 필자는 개성상인들의 궁즉통정신을 떠올려봤다. 즉 窮卽通 즉 궁하면 길이 열린다는 개성상인들의 궁즉통정신 즉 그들의 헝그리 파워를 통일이 되어 개성에를 가기전까지는 우리는 이들 구찌터널을 벤치마킹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한국에서 실시되는 극기훈련은 이곳을 방문함으로써 그 진수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러한 저들의 설명에서 결국 미군은 죽어가야 했고, 사이공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부터 사이공까지 수로가 있었는데 바로 이 밀림지대에서 양성된 베트콩들이 대나무를 물속에 내밀어 숨을 쉬면서 사이공까지 이어지는 접근 작전으로 결국 사이공은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군은 베트남 양민들의 과수원, 소, 닭 등의 가축은 물론 민족 정체성을 지켜주는 사찰은 초토화시키는 폭격을 감행하였다. 미군은 보이는 것은 불사르고 당시 베트남에서 큰 사찰 영통사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 유격대원들이 일부 전사했는데 이들은 소총과 무성무기 칼만을 소지한 투지의 전사로서 당시 118명이 전사했다. 이들은 소총으로 전투기를 공격하여 추락시켰는가하면 미군진지 깊숙이 공격해 들어가 ‘미군사살용사’로서 영웅이 되는 역할을 서로 맡기도 하였다. 때로는 순진한 농민을 가장하고 미군의 위치를 발견한 다음 미군의 전술의도를 파악한 다음 그에 맞는 공격방법을 가했는데 한꺼번에 미군 16명을 전사하는 전과 등으로 베튼남 영웅이 되어 지금 베트남은 혁명되어 통일되었고 그들은 지금 혁명열사능에 조국구국전사로서 고이 잠들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미군이 마구 퍼부은 폭탄 중에서 불발탄과 파편을 모아 화살처럼 한꺼번에 터지면서 폭팔하는 소위 그들의 독특한 무기 - 부비츄랩으로 미군의 공격을 저지했는데 이러한 이들의 무기는 한국군도 사실은 많이 피해를 받은 무기임을 밝혀둔다. 미군이 버리고 간 M16, M79 유탄발사기 등은 결국 미군이 죽임을 당하도록 되돌아오는 무기로 결국 죽어가야 했다. 부비츄랲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미군은 결국 숨어서 정조준하는 베트콩의 조준사격에 그대로 죽어가야만 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 부비츄랩 무기 조작 장면 # 부서진 미국탱크 앞에서
그곳의 애국청년들은 고향을 지키는 베트콩들로서 한손에 총, 다른 한 손으로 모내기를 하면서 조국해방을 도왔다고 하면서 필자는 우리의 참전 월남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들이 만든 구찌터널은 우리 한국인은 들어가지 못 할 정도이니 미군은 아예 들어가기는 커녕 발견하기가 예사롭지 않게 교묘히 위장되어 있었다. 결국 전투장의 주도권은 이들 베트남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작은 인원과 무성무기로, 장기간 적군 미군을 침략, 공격하고 괴롭히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들은 미군의 선두부대를 공격하여 본대를 당황시켜놓고 곧 후미를 공격함으로서 본대가 우왕좌왕하도록 하여 결국 그 본대를 그 베트남인들의 의도 데로 죽어가는 미군을 즐기는 것이었다. 해서 당시 미군은 말했다고 한다. ‘베트콩은 어디에나 안 보이는데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고 미군은 고백했다고 통역자는 말했다. 아지트 구찌 터널은 정말로 우수하였으며 서방 군사전문가들은 둘러보고의 첫 고백은 감탄 그 자체라고 했다.
이진일(대구 광역시 지부장, 011-513-1948, 청룡부대 근무)씨는 만약 이 지역을 한국군에 넘겼더라면 이렇게 무참하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청룡이 맡았다면 먼저 청룡이 공격을 먼저 하고 난 다음 상륙점령을 하고 미군이 불도저로 땅속까지 파 해치는 작전을 했더라면 되는 것인데 ‘미군은 겁쟁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군의 정신력도 베트남과 대등한 선에서 더욱 치열한 전투로 더 많은 양군의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그렇다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더 많은 묘비를 갖게 되었을 것이며 지금 그들 묘비는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그는 기자에게 말했다. 사이공 주월사에 근무하는 형을 면회한 동생인 자신의 동료가 다음날 작전 나가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형을 본 동생이 의기양양하여 전투에 임했다면서 차라리 형이 오지 않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희안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해서 천도제를 올리면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음을 고백했다.
붕타우 해변가의 꽁까이는 어디에...
주월 한국군 제1이동외과 병원 병력과 태권도 교관이 최초로 도착한 붕타우, 붕타우는 천해의 해수욕장이기도 하다. 파월 한국군이 무공수운을 받는 경우 이곳에서 며칠간의 휴식을 즐겼던 붕타우에 온 것이다. 우리는 이틀간의 일정을 마감하고 오늘은 모처럼 파월용사들이 일부이기는 하지만 며칠간의 월남추억을 간직한 붕타우 해변가를 찾은 것이다. 사이공을 벗어나 1번도로를 따라 약 3시간을 달려오면 엄청난 긴 깨끗한 모래사장의 해변가가 한눈에 전개되는 것이 장관이었다. 부산의 해운대 약 10여개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과거의 붕타우해변에 더욱 연장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전우들은 과거 옛날의 붕타우 해변을 연상하면 안 됨을 미리 알려준다. 오면서 과거 어디에선가 베트콩이 숨어서 우리 따이한을 향해 총을 겨눔직 했던 쟝글과 숲 그리고 대나무의 숨통을 하고 우리 맹호, 백마와 청룡들에게 접근하여 많은 피해를 준 저들의 특공대 세이퍼들이 시커먼 몸으로 입게 칼을 물고 총을 앞에 총하고 접근할 때 보통의 장병들이면 보초서면서 그대로 꼼짝못하고 당하기도 했다던 그 개울가들이 지금도 섬직한 것은 나만의 학습된 무기력일까?
정말 깨끗한 도로상에서 잠시 주유를 하면서 그리고 한번은 타이어 펑크로 잠시 쉬는 시간을 내서 필자는 부지런히 마음 놓고 쟝글을 향해 샤터를 누르면서도 과거의 숲속의 베트콩을 의식하면서 그리고 빙그레 웃으면서 샤터를 누르는 나는 정말이지 구제불능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소를 끌면서 논을 가는 곳깔모자를 쓴 농민과 베트남뜰은 너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저 벌판에서 그 유명한 쌀이 세계 수출 2위국이며 커피가 세계 3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베트남의 쌀국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알랑미처럼 느끼하지 않으면서 간결한 맛이 그지 없이 좋다.
# 1번도로와 주유소에서 #2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우리 일행의 용사는 말했다. 이곳 붕타우를 수없이 왕래하는 통신병으로서 근무하다가 사라진 동료가 전역 후 우연히 들은 방송에서 북한에 가서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월북을 하라는 권유의 말을 들었을 때의 당황을 들려주었다.
해변가에는 총각때 만났던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처녀들은 안보이고 관광객들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왜일까? con gai 즉 딸이라는 단어이면서 처녀의 의미를 갖고 있는 베트남 여인, 야자수 아래 곡선미를 뽐내며 긴머리를 휘날리는 베트남 아가씨들은 무뚝뚝한 한국 남자들에게는 이국적인 환타지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베트남 1인당 연 국민소득 440달라(2002년말)이다. 호지민의 월급여 주준이 40~90달라라는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의 부귀영화는 지금 이들 청년, 처녀들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상으로 전쟁을 했던 우리의 전과로서 얻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이들에게 뭔가를 베풀고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호텔에 머물면서 1불씩의 팁을 이불속의 베게밑에 놓아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쩜 우리 일행은 모두 실천하는 모범적인 선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모처럼 월남 청년들과 처녀들이 어울려 해변가를 거니는 것을 보고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손짓 발짓하면서 겨우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정말이지 중 고등학교 학생과정을 마쳤을 그들인데 기본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정말 안타깝다. 그들은 정말이지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나에게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치다. 왜 월남에 왔으면 월남어로 말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듯한 투가 나를 작게 만들었다면 나의 지나친 그들의 지나친 점수주기일까?
옛날 이동외과 병원의 수송대에서 근무한 한 참전용사는 과거 내가 근무하던 부대공터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좋아라고 한다. 총각 때 왔다가 이제 40년이 지나서 할아버지가 되어 방문하였으니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해변의 중앙에 위치한 Vungtau Intourco Resort(호텔)은 3층으로서 바로 해변가와 접하고 있어서 더욱 그 붕타우 해변을 몸으로 체험하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놀랍게도 해변가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일시에 4시부터 밀려들기 시작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낮시간의 취침시간 때문에 한낮의 시간대에 바로 해변에 안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
우리가 머무르는 호텔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서 지하 1층에는 가라오케라는 우리 한글로 노래방의 한국의 노래방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었으며 물론 노래책이나 화면에는 우리 노래가 그대로 올라오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대~한민국’임을 실감하게 한다. 다른 방에는 맛사지를 해주는데 약 1시간에 10불 즉 우리돈 만원이면 전신맛사지를 시원하게 받을 수 있게 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1층에는 기본 서비스의 식당 겸 찻방과 근무요원들이 있고 2층에는 우리가 머무는 방들이 나란히 놓여 해변가를 감상하면서 느러지게 저멀리 수평선 넘어로 동지나해를 지나 한국향수를 달래면서 잠자는 동지들도 있다. 함께 간 미혼의 행정서비스를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소감을 물으니 ‘빨리 고국에 갔으면 좋겠어요’한다. 역시 이들에게는 이곳의 뜨거운 상하의 날씨들이 힘겹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놀라운 것은 이 호텔 2층에는 토속신앙의 중국전통의 한 할아버지가 배꼽을 내놓은 채 파안대소하는 모습과 어린 소년 소녀들의 환대 속에 있는 상징물들은 우리의 잃어버린 민족정체성을 그들은 지키고 있구나 하는 것으로 보여져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서구화한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들이 부럽다. 이 상징물들은 낮에도 밤에도 야광을 비추면서 그들의 가슴속에 내면화하는 놀라운 민족 정체성을 내면화하는 놀라운 정신교육자료로서 작용하며 베트남을 서구적인 요동으로부터 부동의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필자는 생각을 했다.
3층에를 올라가니 베느남인들의 큰바위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호지민의 흉상과 베트남깃발을 나란히 장치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 숙연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하였다. 나는 샤터를 누르면서 한 동료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드릴냐고 물었더니 머리를 설레인다. 자본주의의 인물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인물이어서인지는 묻지는 않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것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주인공들이 자유가 아닌 반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이렇게 작아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밤시간 대에 시내에 나가면 기독교의 십자가들이 시뻘겋게 밤하늘을 물들이건만 월남의 시골마을과 사이공 시내에는 기독교의 십자가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베트남인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그 무엇이 궁금했다. 물론 천주교의 성당이 더러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아보였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의 천주교 인구는 프랑스의 베트남 점령의 시발점이었지만 역시 베트남인구의 대부분은 동양정서가 묻어나오는 불교인 것이 저들을 오늘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봤다.
오! 사이공은 ‘비’에 젖는다
떠나기 전 날의 아쉬움을 사이공 강가의 선상식사를 하면서 늦게까지 시간을 갖는 시간이었다. 사이공강은 열대식물들이 무더기를 이루어 혼탁한 강물과 함께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강가라 역시 더운 열기는 없고 강바람의 시원한이 더해주었으며 우리는 어김없이 있는 우리노래방의 노래들을 불러가면서 흥청망청의 노래속에 사이공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강 건너에는 한류문화의 중심에 있는 대장금의 이영애의 대형사진과 함께 광고간판이 그리고 호치민시에서 6월 8일 갖는 콘서트의 ‘비’의 광고간판이 버티고 서있다. 베트남 거리는 지금 한국상품들이 열풍을 일으기고 있다. 백화점, 삼성전자, 엘지전자의 가전제품을 비롯해 드봉, 미샤와 같은 낯익은 화장품들이 층별로 잘 진열돼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 시장을 파고들던 한국 기업들이 한류바람을 타고 진출 10년만에 투자성과를 내기 시작한것이다. 엘지전자는 에어콘과 텔레비전, 디브이디, 시디롬 등 4개 제춤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베트남 휴대전화 시장에서 노카아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벌써 1천개를 넘어섰다. 이 가운데 60%가 2000년 이후 진출했다. 해마다 200여개씩 한국기업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투자 규모는 5억5천만달라로 5년전에 비해 8배가 늘었다면서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의 법과 제도, 문화를 이해하고 세밀한 사업전략을 세워야만 ’코리아 프리미엄‘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김영이 하노이 한국무역관장은 말한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다음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베트남의 최근 5년간의 연평균 성장률은 7.4%에 이른다. 지난해 성장률은 8.4%였다. 베트남은 위험요소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부정부패가 가장 골칫거리다. 지난달 폐막된 전당대회에서 베트남 공산당이 경제성장과 함께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울만큼 뒷돈 거래 관행이 횡행하고 있다고 가이드는 귀뜸해준다.
우리가 탄 식당의 배를 타기전 필자는 한국인 남자와 베트남여인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lai daihan)을 잊을 수 없다. 한국인 혼혈아인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과거 열대식물들을 수거하면서 식물채집보다는 부대방문할 때 마다 미군이 주는 씨레이션을 집차에 가득 싣고 부대앞에 나가서는 우리 한국군의 제2세인 영희와 철수의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이 씨레이션을 주면서 머리를 쓰다듬던 그 이화여대 교수들의 말이 잊을 수 없다. 우리 따이한은 곧 철수하지만 우리 장병들의 2세인 라이따이한이 있으니 월남은 영원히 한국과 돈독한 관계가 유지될 것입니다고 하던 교수들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있는 이곳 사이공이 한국인지 베트남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안내자의 말을 빌리면 지금 메이드 인코리아는 좋은 품질의 보장으로 인정되는 이미지의 상호로 한국 글자나 한글은 그대로 표기하는 자랑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 이들이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등의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상가에는 필립스나 소니를 제치고 삼성, LG의 한국 브랜드의 제품들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호평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소지섭과 김현주가 주연한 ‘유리구두’는 베트남인들에게 좋은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해서 화장품광고에는 김남주의 모델은 사이공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이 기사를 쓰는 시간에 잡힌 인터넷 보도에 의하면 이번 가수 비의 공연은 SKT가 호치민시내에 있는 각 대리점을 통해 배부한 2만장의 입장권이 이틀만에 동이 났다는 보도이다. 호지민의 ‘탱니엔 신문’은 ‘한국의 비는 드라마 ’풀하우스‘ 등을 통해 베트남에도 팬이 많다’며 미국 타임지 선정 ‘세계 100인’으로 뽑힌 비의 베트남 공연소식을 소개했다. 한편 베트남 TV 등은 비의 공연을 녹화 방송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군사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사흘 일정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국방장관이 6월 5일 하노이 국방부 청사에서 팜 반 트라 베트남 국방장관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한다는 보도도 눈에 띈다. 베트남인들의 마음의 고향에는 어설픈 남의 것을 좋아하는 드라큘라보다는 고운 베트남의 것을 좋아하는 도깨비를 갖는 합리적인 소비생활의 동도서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한국과는 차별화가 있다는 생각은 나의 지나친 베트남의 평가절상인가?
사진# 한국일보 6월 6일자(사진)
우리가 탄 배는 고정되어 있는가 싶더니 약 5km정도를 오르내리면서 사이공 강바람을 만끽하며 노래의 가락속에 우리는 아쉬운 사이공의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했다. 어느 누구는 말한다. 한강도 사이공 강의 유흥을 벤치마킹한다면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면서 예리한 관찰을 하며 그 청사진을 만드는 파월 동료도 있었다. 그는 한강의 유람선을 타보기도 했지만 이곳 사이공의 유람선과는 선상공연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우리 일행들이 지적했다. 바닷고기 모양의 선상저녁식사는 저녁 10시경 하선하여 사이공 비행장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마냥 사이공의 석별을 아쉬운 듯 창밖을 내다보는 파월 동지들의 눈에는 어느듯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우리는 내일 새벽 6시경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오! 사이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