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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의 사진 약사
10. 거울 속의 세계 - 패션사진
'진실을 찍을 필요가 없는 패션사진은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사진 표현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허구의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항상 뒤섞인 환상이 표현된다.'
패션사진은 사진의 여러가지 응용분야 중에서도 대단히 특수한 분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인공적인 허구의 세계인 것이 특징이다. 스튜디오 속에서(혹은 밖의 공간을 스튜디오로 바꾸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어지는 패션사진의 세계는 다른 분야처럼 '진실'일 필요는 없다. 진짜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이 점에서 '진실'에 구속되지 않는 만큼 자유자재로 상상력을 동우너해 시대의 꿈과 욕망을 마음껏 반영한 매력적인 환영을 만들 수 있다. 사진가들에게 있어서 패션사진은 자신들의 기술과 감각을 극한까지 추구할 수 있다는 실험장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거울로 된 방에 갇힌 환상의 소우주같은 패션사진 스타일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은 아돌프 드 메이어(Adolf de Meyer 1868~1946)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혼혈로 작센공국의 남작이라 자칭하던 드 메이어는 제1차대전 후인 1918년 경 '보그'지에 패션사진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의 사진은 세기말의 예술사진(Art Photograph) 시대에 유행한, 소프트 포커스의 초상사진의 스타일을 교묘히 가미한 작품이었다. 또한 패션이 상류계급의 독점물이었던 벨 에폭, 그 낭만적인 기분이 우아하고 섬세한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감각의 패션사진
그러나 1920년대에 와서 똑바른 직선을 살린 아르 데코의 디자인이 등장하게 된다. 드 메이어의 설탕과자같은 세상 대신에 더욱 현대적인 스타일이 요구되었다.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이나 세실 비튼(Cecil Beaton 1904~1973)과 같은 보다 근대적인 감각을 갖춘 사진가들이 패션 세계에 등장한다. E. 스타이켄은 사진 분리파(Photo Secession)에 있어서는 A. 스티글리츠의 친구이며 291화랑의 설립자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전형적인 예술 사진가였던 그는 1923년에 '보그'나 '베니티 페어'(Vanifity Fair)를 간행하고 있던 콩테나스트사의 칩 카메라맨이 된다. 그때까지 '보그'에서 활약하고 있던 드 메이어는 경쟁지인 '하퍼스 바자'로 옮긴다. 회화적인 드 메이어의 스타일에 대신해서 인공광선에 의한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살린 E.스타이켄 스타일이 그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해로우 스쿨(Harrow School), 캠브리지 대학 등 명문 엘리트 출신인 세실 비튼은 상류계급의 고도로 세련된 취미와 적당히 걸맞는 장식성을 갖춘 화면 구성의 감각을 연결시킬 수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무대장치가로서 성공을 거둔 그는 1920년 후반부터 '보그'나 '하퍼스 바자'에 패션사진을 발표하면서 세트와 연출에 의해 갑자기 인기 사진가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폭격으로 파괴된 벽돌 등을 배경으로 한 패션사진은 그의 댄디이즘을 잘 나타내고 있다.
토니 프릿셀 세실 비튼 어윈 블루멘펠드
마틴 문카치 호스트 P.호스트 조지 호이닝겐-휘네
마틴 문카치(Martin Munkacsi 1896~1963), 토니 프릿셀(Toni Frissell 1907~) 등은 당시 사진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많이 시도되었던 소형 카메라에 의한 스냅숏을 패션사진에 응용하려 했다. 모델들은 스튜디오의 인공 공간에서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 움직임의 순간들이 소형 카메라에 의해 재빨리 정착되었다. 옷을 바꿔 입는 인형과 같은 포즈만을 취하는 모델 대신 생생한 육체를 가지고 생동감있는 표정으로 움직이는 모델이 출현하였다. 이들 사진갇르의 활약으로 패션사진은 30년대에 최초로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고전적 품격을 갖춘 어빙 펜
전후의 패션사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은 사람은 어빙 펜(Irving Penn 1917~)과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 1923~)이다. 그들은 패션이나 광고와 같은 상업사진 이외에 순수한 자기 자신의 작품으로 제작된 소위 순수사진(Serious Photography)의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어빙 펜은 '하퍼스 바자'의 저명한 아트 디렉터인 알렉세이 브로도비치(Alexey Brodovitch)의 가르침을 받아 그 잡지에 드로잉을 발표하고 있었다. 1943년 부터는 '보그'의 표지사진을 자신이 촬영하게 되면서 고전적인 품격을 지닌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갔다. 어빙 펜 사진의 특징은 포트레이트든 패션사진이든 마치 정물화를 그리는 것같이 빈틈없이 화면을 구성해가는 점이다. 동시에 그는 컬러 필름의 효과를 살린 패션, 광고사진의 선구자로서 선명한 색채를 구사하여 사람들의 시각을 즐겁게 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스타일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1974년에 발간된 사진집 '작은 방 속의 세계(World in a Small Room)'일 것이다.
어빙 펜 어빙 펜, 작은 방 속의 세계
어빙 펜의 틴트식 이동 스튜디오를 세계의 여러 장소에 설치하고 그 지역의 사람들을 일상적 의상으로 스튜디오 안으로 끌어들여 촬영했다. 단순한 천 배경에 자연광으로 촬영된 페루의 인디오나 모로코의 유목민의 사진은 19세기의 스튜디오 포트레이트와 흡사하다. 이 고전적인 양식은 과도한 연출사진에 눈익은 우리에게는 역으로 매우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빙 펜은 최근 다시 사진의 원점을 찾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19세기 말에 유행한 플래티넘-팔라디움인화(플래티나 사진)를 연구하여 풍부한 계조를 지닌 이 기법으로 자신의 작품을 프린트하고 있다.
한 순간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정착시킨 리차드 아베돈
아베돈,도뷔미와 코끼리,1955 아베돈, in the American West
리차드 아베돈 역시 A.브로도비치의 추천으로 21세기의 뛰어난 사진가로서 '하퍼스 바자'지에 데뷔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어빙 펜의 '정(靜)'에 대해 '동(動)'이라 할 수 있다. 스튜디오의 공간에서 모델에게 자유롭게 포즈를 취하게하고 한 순간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다이너믹한 이미지로 정착시킨다. 또는 유명한 '도뷔마와 코끼리'와 같이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미녀와 다리를 쇠사슬에 묶인 진짜 코끼리라고 하는 의표를 찌른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의 사진은 패션사진 특유의 허구의 세계를 철저하게 추구한 것이면서 세련된 것이었다. 한편 그는 패션사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순수사진의 촬영을 계속했다. '낫씽 퍼스널(Nothing Personal, 1964)', '포트레이트(Portraits, 1976)', '미국 서부에서(In The American West, 1985)' 등이 대표적인 사진집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과도한 연출은 피하고 오히려 일체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최대한으로 단순화시킨 표현이 보인다. 또 '낫씽 퍼스널'의 정신병자나 '포트레이트'의 암으로 죽어 가는 그의 부친의 사진과 같이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과 공통되는 생의 어두운 면에도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근작인 '미국 서부에서 '에서는 단순한 흰색 배경 앞에 모델을 세워 두고 '기념사진'같은 수법으로 일반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로테스크한 괴물성을 나타내고 있다. 어빙 펜이나 리차드 아베돈이 리드한 전후의 패션사진은 히로(Hiro 1930-), 프랭크 호뱃트(Frank Horvat 1928-),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등이 등장하는 1960년대에 이르러 보다 화려하게 전개되어간다. 아베돈의 조수로서 패션, 광고사진의 어법을 배운 히로는 다중노광의 복잡한 라이팅의 효과를 살린 작품의 기법을 발휘하였다. 호뱃트나 클라인은 스냅샷의 기술을 도입해서 노상 위의 현실과 패션의 꿈의 세계를 충돌시키는 것 같은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컬러 필름이나 사진기재의 기슬적인 발달도 있고 해서 안정된 수준의 작품들이 차례차례로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표현의 충격력은 거꾸로 잃어가고 있었다. 패션사진은 모드의 정보를 전달한다고 하는 부분과 사진의 자기 표현의 부분이 서로 맞물려 기능하고 있는 것이며, 어느 한쪽의 수준이 저하되면 단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떨어지고 만다.
윌리엄 클라인 프랭크 호뱃트 히로
로버트 메플소프 헬뮤트 뉴턴
사라 문 데보라 터버빌 쉴라 메츠너
한편 70-80년대에는 사라 문(Sarah Moon 1940-), 데보라 터버빌(Deborah Turbeville 1937-), 쉴라 메츠너 (Sheila Metzner, 1939- )와 같은 여성작가들의 활약도 눈에 띄었다. 그녀들의 사진은 전세기 말의 회화적 사진(Pictorial Photography)를 생각케 하는 소프트 포커스의 화면에 가냘픈 이미지를 새긴 것이다. 부드러운 묘사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피의 냄새를 느끼게 하는 그녀들의 사진에는 마음 속을 흔들어 놓는 기묘한 매력이 충만했다. '거울의 나라'에서 이쪽으로 돌아온 앨리스는 새끼 고양이에게 말을 건넨다. "키티야 ! 꿈을 꾼 것은 내가 아니면 붉은 왕일 것이 틀림없다. 물론 붉은 왕은 나의 꿈의 일부였지. 그렇지만 나도 붉은 왕의 꿈의 일부였을 걸. 꿈을 꾼 것은 왕쪽이 아니었을까, 키티?" 패션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 루이스 캐롤의 '거울의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불가사의한 기분이 든다. 현실의 세계에서 보면 확실히 거울 속은 꿈의 세계이지만 거울 속에서 보면 현실이야말로 꿈일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을 의식적으로 혼돈하는 것, 그것 자체가 패션 사진가들의 최대의 욕망인 것이다. 김남진 옮김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오타가 몇개 있지만... 그래도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